•  


“헉! 너무 冶해” 1500年 前 新羅 土偶의 性的 欲望과 快樂[名作의 祕密?]|新東亞

“헉! 너무 冶해” 1500年 前 新羅 土偶의 性的 欲望과 快樂[名作의 祕密?]

表情과 몸짓으로 만들어낸 ‘소리 없는 아우聲’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1-04-10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當代 新羅人 모습 꾸밈없이 담아낸 土偶

    • 죽은 사람과 함께하는 副葬品으로 主로 쓰여

    • 土雨로 素朴하게 新羅人 生活相 담아내

    • 單純한 形態로 삶과 欲望 내밀히 表現

    1926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신라시대 토기와 토우가 대거 발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26年 慶北 경주시 황남동에서 新羅時代 土器와 土偶가 大擧 發掘됐다.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提供]

    國寶 第195號 土偶 裝飾 缸아리(土偶裝飾長徑壺)는 모두 2點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慶北 慶州市 鷄林路 30號墳에서 出土된 5~6世紀 新羅 토기다. 높이 34cm. 缸아리의 목 部分엔 5cm 內外의 各種 土偶가 붙어 있다. 伽倻琴을 타고 있는 배부른 妊娠婦,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男女,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 그리고 새·오리·거북 等의 土偶다.

    그 中에도 사랑을 나누는 男女 土偶가 斷然 돋보인다. 한 女人이 엉덩이를 내민 채 엎드려 있고 그 뒤로 한 男子(머리와 오른팔이 부서져 있다)가 誇張된 性器를 내밀며 다가가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도 赤裸裸할 수 있을까. 그 果敢한 表現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女人의 얼굴 表情이다.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 이 女人은 히죽 웃고 있다. 보는 이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1500年 前 新羅의 男女는 남이 보든 말든 全혀 介意치 않는 表情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欲望과 快樂을 숨기지 않는 人間的인 모습인지, 능청스러움 或은 뻔뻔함인지. 新羅人들은 왜 저렇게 大膽할 수 있을까.

    1926年 모습 드러낸 新羅 土偶

    성에 개방적인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토우. 사랑을 나누는 연인(왼쪽), 큰 성기를 내놓은 남성을 나타낸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城에 開放的인 新羅의 生活相을 엿볼 수 있는 土偶. 사랑을 나누는 戀人(왼쪽), 큰 性器를 내놓은 男性을 나타낸 土偶.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提供]

    1926年 5月 慶州 都心 皇南洞. 大型 新羅 古墳 사이에서 人夫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硬銅線(慶東線) 慶州驛 擴張工事에 必要한 흙을 採取하고 있던 것이다. 當初 計劃은 古墳 周邊의 흙을 파서 約 1km 떨어진 慶州驛 現場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땅을 파는 過程에서 小型 古墳들이 確認됐다. 古墳 內部에서 土器와 土偶들이 쏟아져 나왔다. 人夫들은 朝鮮總督府에 이를 申告했고 朝鮮總督府는 卽刻 公式的인 發掘調査를 始作했다. 土偶는 大部分 土器에 붙어 있는 狀態였다. 特히 굽다리 접시(苦杯·高杯) 뚜껑의 손잡이 周圍에 많이 붙어 있었다.

    工事 途中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낸 新羅 土偶. 그 發掘 現場은 只今의 大陵院(大陵苑) 內 皇南大塚 바로 옆이다. 土偶와 土偶 裝飾 缸아리들은 1926年 7月부터 朝鮮總督府博物館 競走分館(國立慶州博物館의 前身)에서 展示되며 사람들과 만나기 始作했다. 그 後 1970年代에 慶州 皇南洞과 용강동 地域의 古墳에서 土偶가 追加로 發掘됐다.



    新羅 土偶는 5, 6世紀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大槪 2~10cm 程度. 新羅 土偶는 土器에 裝飾物로 붙어 있는 것도 있고, 獨立的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人物을 形象化한 土偶를 보면 바지 저고리 입고 상투 튼 男子, 주름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女子, 사냥하거나 고기 잡는 사람, 춤 추는 사람, 盧 젓는 사람, 伽倻琴·枇杷·피리 等 樂器를 연주하는 사람, 曲藝를 하는 사람, 짐을 지고 運搬하는 사람, 出産 中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커다란 性器를 드러내놓고 있는 사람, 性行爲를 하는 사람 等 무척이나 다채롭다. 저 土偶들을 통해 우리는 新羅人의 日常과 內面을 엿볼 수 있다.

    土偶는 흙으로 만든 人形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意味로 보면 動物이나 집, 生活道具 等을 본떠 만든 것도 土偶의 範疇에 들어간다. 土偶의 歷史는 길고도 廣範圍하다. 中國·日本·이집트 메소포타미아 等 東西洋을 莫論하고 新石器時代 무렵부터 土偶가 登場했다. 古代人들은 茶山(多産)이나 安寧을 祈願하는 意味에서, 사람 代身 神(神)에게 祭物을 바치기 위한 目的에서 土雨를 만들었다. 또는 죽은 者의 永生을 바라며 무덤의 副葬品用으로 土雨를 만들기도 했다.

    日本에서는 新石器 時代인 조몬(繩文)時代부터 土偶가 만들어졌는데 이 무렵의 土偶는 若干 무서운 모습에 身體의 治粧이 華麗하다. 엉덩이가 큰 女人의 土偶는 多産을 祈願하기 위한 것이었고, 무서운 얼굴의 土偶는 惡鬼를 물리치기 위한 呪術用·提議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4~ 5世紀 古訓(古墳)時代에 들어서면 하니와(埴輪)라는 獨特한 그릇이 나타나는데 그 表面을 다양한 土雨로 裝飾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시황릉의 盜用(陶俑) 亦是 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기에 土偶에 包含된다. 中國의 土偶는 죽은 者의 永遠한 삶을 기리는 意味에서 무덤의 副葬品用으로 만든 것이 많다.

    新羅人들의 大膽한 性的 表現

    新羅 土偶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衝擊的으로 다가오는 것은 性的 表現이 아닐 수 없다. 國寶 第195號 土偶 裝飾 缸아리의 男女 土偶에서 잘 드러나듯 新羅 土偶의 가장 큰 特徵은 大膽한 性的 表現이다. 성기를 誇張해 表現하거나 性的 欲求를 誇示하고 男女의 性行爲를 赤裸裸하게 表現한 土偶가 相當히 많다. 힘껏 껴안고 있는 男女, 한 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男女, 性器와 가슴이 誇張된 男女 等. 節制와 감춤의 美學에 익숙한 우리에게 新羅 土偶의 이러한 面貌는 破格이자 衝擊이 아닐 수 없다.

    1500年 前 어떻게 이런 表現이 可能할 수 있었을까. 于先 土偶들이 무덤에서 發見됐다는 事實에 注目할 必要가 있다. 土偶는 무덤의 副葬品이었다. 性은 快樂이고 欲望이면서 同時에 生命의 誕生으로 連結된다. 성기를 誇張하거나 性 行爲를 드러낸 모습으로 土雨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죽은 者의 永生과 多産을 祈願하는 意味를 담고 있다.

    東西를 莫論하고 古代 文化에서 이러한 性的인 表現은 大體로 多産과 豐饒를 象徵한다. 先史時代부터 이어져온 이 같은 文化가 新羅에도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土偶를 볼 때마다 疑問이 남는다. 性的인 表現을 穩全히 ‘多産과 豐饒와 永生에 對한 渴望’으로만 解釋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高句麗 백제 伽倻에서는 이런 모습의 土偶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性的 表現의 土偶가 왜 이렇게 唯獨 新羅에서 盛行한 것일까.

    이 대목에서 新羅人들의 ‘開放的인 性’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三國遺事’의 지증왕 대목에는 이런 記錄이 나온다. “王은 陰莖(陰莖)의 길이가 한 字 다섯 値나 돼 훌륭한 配匹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獅子(使者)를 三道(三道)에 보내 配匹을 救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女子는 키가 7尺 5寸이나 된다. 이 事實을 王에게 아뢰었더니 王은 수레를 보내 그 女子를 宮中으로 들여 皇后로 봉하니….” 智證王의 陰莖이 한 字 다섯 치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크기가 40cm가 넘는다. 참 재미있는 記錄이다. 성기를 誇張해 表現한 土偶를 보면 지증왕에 關한 이 記錄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렇게 狀況이 비슷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新羅 文化의 한 斷面이 아니었을까.

    事實, 新羅의 性 文化는 大膽하고 開放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증왕 얘기도 그렇고, ‘花郞世紀’ 等에 나오는 新羅人들의 近親婚 얘기도 그렇다. 新羅 花郞들이 女子 못지않게 예쁘게 治粧하고 火葬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情況들은 新羅가 高句麗·백제에 비해 性이 開放的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新羅의 性 文化가 土偶의 大膽한 性的 表現에 影響을 준 것은 아닐까.

    日常과 浪漫 그리고 미니멀리즘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수(射手)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멧돼지를 사냥하는 死守(射手)의 모습을 빚은 土偶.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提供]

    앞서 말했듯 新羅 土偶에는 다양한 日常이 담겨 있다. 樂器를 연주하는 모습, 짐을 나르는 모습, 말 탄 모습, 盧 젓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等等. 土器 뚜껑에 붙어 있는 활 쏘는 사람 形象도 印象的이다. 그 앞에 語尾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사냥을 하고 있다. 新羅人들이 활 쏘고 사냥하는 模樣새가 單純하지만 힘 있게 表現돼 있다. 활 쏘는 사람이 메고 있는 화살筒이 엉덩이까지 내려온 모습도 흥미롭다.

    新羅 土偶에서는 母子, 바지. 치마 等 新羅人의 服色도 볼 수 있다. 人物들의 얼굴 表情도 무척이나 다채롭다. 그 모습과 表情은 單純하지만 생생하게 다가온다. 할아버지 얼굴 土偶를 보자. 쓱쓱 주무른 흙덩이에 눈과 입을 슬쩍 파놓고 鬚髥 몇 가닥 그어 老人의 얼굴을 完成했다. 單純한 形態의 土偶지만 老人의 푸근한 얼굴이 그대로 살아서 傳해온다. 노래하는 土偶, 연주하는 土偶度 흥겹고 익살맞은 感情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若干 치켜든 채 목청껏 노래 부르는 모습, 엉거주춤 서서 樂器를 연주하는 모습 等 新羅人의 日常이 그대로 묻어난다.

    新羅 土偶는 赤裸裸한 性을 表現한 것이든 日常을 表現한 것이든, 動物의 모습을 表現한 것이든 하나같이 單純하다. 新羅 사람들의 表情과 몸짓을 쓱쓱 손질 몇 番으로 完成했다. 몇 番 주무르고 손톱으로 구멍을 내어 눈과 입을 만들어 感情을 담아냈다. 金鈴塚에서 出土된 배 模樣 土器에 붙어있는 裸體 男性 土偶는 쓱 내민 혓바닥 하나로 櫓젓기의 疲困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新羅人들은 單純함 속에 그 特徵을 잘 드러냈다. 女性인지 男性인지, 어떤 行動을 하고 있는지, 表情과 內面은 어떠한지 等을 最小限의 表現으로 絶妙하게 보여준다. 얼굴만으로는 男女 區分이 잘 되지 않지만 가슴이나 엉덩이 等을 誇張하거나 强調함으로써 女性임을 나타낸다. 얼굴에 表情이 없을지라도 上體를 쪼그려 엎드린 모습이나 머리를 푹 숙인 姿勢만으로 主人公이 슬픔에 빠져 痛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新羅 土偶의 이런 特徵을 두고 미니멀리즘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5~10cm 程度로 작지만 生命力이 넘친다. 單純한 形態에도 活力이 느껴지는 表現은 삶에 對한 愛情과 觀察이 없으면 不可能한 일이다. 土偶는 結局 삶에서 나온 것이다. 삶에 기초한 미니멀리즘. 土偶의 또 다른 美學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에 關한 哲學的 思惟

    주검 앞에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왼쪽)과 출산 중인 여인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검 앞에 슬퍼하는 女人의 모습(왼쪽)과 出産 中인 女人의 모습을 빚은 土偶.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提供]

    하찮아 보이는 저 작은 人形들. 土偶는 韓半島 古代國家 가운데 新羅에서 集中的으로 發見된다. 土雨를 만들어 무덤에 집어넣는 건 新羅의 獨特한 文化였다. 新羅 土偶에는 新羅人의 日常과 風俗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中에서도 誕生과 죽음에 關한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新羅人들은 誕生의 瞬間과 죽음의 瞬間을 모두 土偶에 담아 무덤 속에 屍身과 함께 묻었다. 新羅人들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誕生이나 죽음과 關聯해 土偶에 나타난 表情과 몸짓은 무척이나 印象的이다. 뚜껑 위에 드러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배부른 女人, 出産 直前 또는 出産 中인 女人, 屍身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죽음을 슬퍼하는 女人…. 그 모습은 强烈하며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出産 中인 女人 土偶는 입과 눈을 誇張되게 表現함으로써 出産의 苦痛을 劇的으로 드러냈다. 出産은 人間 삶에서 가장 所重하고 性(聖)스러운 일이다. 同時에 苦痛의 過程이면서 內密한 瞬間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出産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露出해 表現한다는 것은 예나 只今이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新羅人들은 달랐다. 出産의 場面을 감춤 없이 드러냈다. 그 果敢하고 直說的인 表現이 新鮮한 感動을 준다.

    죽음을 슬퍼하는 女人 土偶를 보자. 事實, 이것이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지 客觀的 物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情況上 이렇게 解釋하는 것이 가장 合當하다고 본다. 어느 土偶의 境遇, 女人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앞의 작은 천 조각은 죽은 이의 얼굴을 가린 것으로 推定되고, 女人이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죽은 者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으리라.

    작은 흙 人形을 통해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니, 그것은 分明 哲學的 省察의 過程이다. 또한 單純한 흙 人形의 次元을 넘어선다. 用途로만 따져보면 무덤의 副葬品이겠지만, 哲學的 省察이라는 側面에 注目한다면 그것은 보는 이에게 깊은 感動을 준다. 그런 點에서 죽음을 슬퍼하는 女人 土偶는 單純한 副葬品을 넘어 藝術의 境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소리 없는 아우聲

    新羅 土偶를 볼 때마다 궁금症이 남는다. 性的 表現과 人間的인 日常의 모습들. 그 두 側面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全혀 다른 世界로 느껴진다. 그 둘 사이에 存在하는 間隙을 어떻게 理解해야 할 것인지. 國寶 第195號 土偶 裝飾 缸아리 속의 人物들을 다시 보자. 妊娠婦가 伽倻琴을 타고 있고, 그 옆에선 두 男女가 赤裸裸하게 性行爲를 하고 있다. 엎드려 있는 女性은 全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낯선 風景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1500年 前 그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周邊의 視線을 의식하지 않았다. 新羅人들에겐 間隙이 아니라 豐饒로운 共存이었다.

    新羅 古墳에서는 金冠, 金귀고리, 禁制 허리띠, 둥근 고리 큰칼(環頭大刀·環頭大刀), 輸入한 로마 琉璃그릇 等 華麗하고 값비싼 遺物이 大量으로 出土됐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익숙하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土偶는 작고 초라하고 볼품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新羅 土偶 앞에서 新鮮한 衝擊을 받는다. 보고나서 돌아서려 하면 다시 발길을 끌어당기는 妙한 魅力이 있다. 거기 新羅人들의 欲望과 快樂, 茶山과 永生에 對한 起源, 나아가 삶과 죽음에 對한 省察이 숨 쉬고 있다.

    新羅 土偶의 表情과 몸짓. 그것은 우리의 版에 박힌 豫想을 보기 좋게 뒤집어 놓는다. 新羅 土偶를 보면 靑馬 柳致環의 時 ‘旗발’의 한 句節이 생각난다.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聲.” 그들은 表情과 몸짓만으로 그들의 삶과 內面과 欲望을 雄辯하고 있다.

    1926年 當時 日本人 發掘者의 證言에 따르면 “大體로 缸아리와 굽다리접시 等의 어깨, 목 또는 뚜껑에 붙어 있었고, 더러 그릇 받침에도 附着돼 있던 것을 發掘 當時 뜯어낸 것”이다(‘신라토우, 永遠을 꿈꾸다’, 國立中央博物館, 2009). 土器에 붙어 있던 것을 뜯어냈다고 하니, 그건 分明 遺物 破壞 行爲였다. 土偶는 아주 많았고, 많다 보니 發掘過程에서 마구잡이로 收拾한 것이다. 植民地 時代의 서글픈 悲劇이었다. 그럼에도 土偶들은 살아남아 只今 우리 앞에 있다. 新羅 土偶가 모습을 드러낸 지 100年이 돼 간다. 그들의 表情과 몸짓을 보면, 只今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