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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熙 會長이 한손을 묶고 하루를 산 理由[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⑧]|新東亞

李健熙 會長이 한손을 묶고 하루를 산 理由[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⑧]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1-03-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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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집 짓는 게 헌집 고치는 것보다 쉬워

    • 아웃사이더를 新經營 祕書室長으로 拔擢

    • 頭腦産業으로 모든 걸 바꿔라

    • 社長보다 몸값이 비싼 사람을 데려오라

    2002년 6월 이건희 당시 삼선전자 회장은 ‘S급 핵심인력 확보·양성 사장단 회의’를 긴급 소집해 “사장단 인사평가 점수가 100점 만점이라면, 그 가운데 30점을 ‘핵심 인력’을 얼마나 확보했느냐에 두겠다”고 선포했다.  
[삼성전자 제공]

    2002年 6月 李健熙 當時 三선전자 會長은 ‘S級 核心人力 確保·陽性 社長團 會議’를 緊急 召集해 “社長團 人事評價 點數가 100點 滿點이라면, 그 가운데 30點을 ‘核心 人力’을 얼마나 確保했느냐에 두겠다”고 宣布했다. [三星電子 提供]

    元老 三星맨들 사이에서 李健熙 會長에 對한 公開的인 抗命으로 傳說처럼 내려오는 ‘스푼 事件’은 新經營 메시지를 疑心했던 社長團은 勿論 全 任職員들에게 ‘過去로는 絶對 돌아가지 않겠다’는 會長의 意志를 萬邦에 알린 事件으로 記憶되고 있었다. 

    현명관 前 祕書室長 말이다. 

    “會長은 海外 會議에서 重役들을 對象으로 밤새 講義하고, 說得하고, 分任討議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못마땅해 하는 氣色이 歷歷했습니다. ‘任職員들이 내 마음의 50%만이라도 理解하고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밑에서 안 움직여주고 있다’고 不滿을 吐露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스푼 事件’을 起點으로 雰圍氣가 完全히 바뀌었습니다. 會長은 正말 執拗했습니다. 그러다보니 社長들도 徐徐히 會長의 ‘賭博’을 받아들이며 하나 둘 改革의 江물로 뛰어들기 始作했습니다.” 

    그는 “結果的으로 會長의 判斷은 全的으로 옳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事實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몇 年 뒤 IMF (外換危機)를 當하고서야 利益中心, 品質中心, 技術과 革新이 重要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새집 짓는 게 헌집 고치는 것보다 쉬워

    현명관의 말처럼 이 會長의 新經營 宣言은 그로부터 꼭 5年 뒤인 1998年 大韓民國이 IMF 라는 未曾有의 强펀치를 맞았을 때 빛을 發한다. 

    勿論 初期에는 三星도 다른 企業들과 마찬가지로 허둥대긴 했지만 빠른 回復力을 보이며 오히려 危機를 발板으로 삼아 跳躍할 수 있었다. 그 背景에는 李 會長의 超一流 企業, 卽 ‘글로벌 스탠더드’를 目標로 했던 質(質) 重視 改革 德分이었다는 데에 異見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新經營 宣言 當時 狀況室長이나 다름없었던 李鶴洙 前 三星戰略企劃室長도 IMF 때 三星의 構造調整이 成功할 수 있었던 背景에 對해 같은 脈絡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월간조선’ 2000年 7月號 인터뷰). 

    “率直히 1993年, 1994年에는 會社 任職員들이 切迫하게 느끼질 않은 겁니다. 會社가 實質的으로 어려움이 없는데 事業體를 處分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줄이고 海外支店을 閉鎖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社會에 이런 與件이 造成되지도 않았지요. 從業員의 意識이 따라오지 못하고 一般 企業은 모두 賣出 競爭을 하고 몸집 불리기를 하는데 우리만 판다, 줄인다 하는 것이 먹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會長은 그 問題를 繼續 强調했고 애를 썼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解雇된 사람도 있었지요. 結局 理論的으로 工夫는 됐는데, 實行이 늦추어진 거죠. 그러다 IMF 事態가 닥치니까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構造調整이 急流를 탄 겁니다.” 

    當時 월간조선은 IMF를 成功的으로 이겨낸 三星에 對한 深層 企劃 記事를 내보냈는데, 이 會長은 아주대 經營大學 조영호 敎授와의 인터뷰에서 新經營 核心은 世界 一流 企業이 되기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向한 文化 革命이었다‘는 趣旨로 이렇게 말한다. 

    “新經營은 한마디로 좋은 物件 만들어서 우리도 한番 21世紀에 世界 超一流 企業이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妻子息 빼고 다 바꾸자고 할 程度로 過去의 慣行과 習慣, 制度, 일하는 方法 等 모든 것을 根本부터 徹底히 바꿔보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變化는 무척 어렵습니다. 저는 變化의 어려움을 오른손을 묶어 놓고 왼손으로만 活動하는 것과 같다고 比喩합니다만 大部分의 사람들이 變化를 귀찮아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變化의 方法으로 ‘나부터, 쉬운 것부터, 윗사람부터’라고 얘기했습니다.” 

    實際로 이 會長은 1993年 7月 日本 오사카 會議에서 “오른 손을 묶고 24時間 生活해보기도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손을 묶고 24時間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해봤다. 이것이 習慣이 되면 快感을 느끼고 勝利感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變化’라는 것을 知識이나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體驗하기 위해 直接 한손을 묶어 보고 살아보는 實驗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면 會長의 切迫感과 執拗함이 傳해져 소름이 돋는다. 

    李 會長이 當時 인터뷰를 한 때는 新經營 宣言을 한 지 滿 7年 만이었다. 그는 “新經營 推進 時 가장 큰 걸림돌이 뭐였느냐”는 質問에 이렇게 回顧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50年 以上 國內 頂上의 位置를 누려오면서 굳어진 大企業病(病)과 變化를 避해가려는 無事안일주의를 없애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改革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內部 問題라고 얘기합니다만, 神經影島 마찬가지였습니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이제까지 自身의 經驗과 知識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새로운 變化를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新經營 初期에는 이러한 固定觀念을 깨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걸림돌이었습니다. 헌집을 고치기보다 새집을 짓는 게 훨씬 쉽다는 것을 實感했다고나 할까요. 그 다음으로는 變化에 對해 總論은 좋다고 해놓고 各論에 들어가서는 反對를 일삼는 組織 利己主義를 克服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社會 全體 인프라나 시스템이 過去 開發時代 殘滓가 많이 남아 質 中心의 變化를 積極 受容할 만큼 成熟되지 않았던 點도 어려웠던 點으로 들 수 있습니다.” 

    -(會長께서는) IMF 危機가 닥치기 前부터 危機論을 提起했습니다. 

    “IMF 危機가 있기 前부터 우리 經濟에는 여러 赤信號들이 있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警告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問題는 行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事實 이 危機는 1995年부터 本格化 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그 當時 우리 經濟는 엔高 好況의 반짝 景氣 때문에 그 實相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數年 前부터 深刻한 構造的인 問題를 안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 時期에 構造調整을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몸집을 불리고 거품을 걷어내지 못해 結局 經濟難局을 招來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995年 中國 베이징에서 ‘企業은 2流, 行政은 3流, 政治는 4流’라고 말했던 것도 未久에 닥칠 이러한 危機에 미리 準備하자는 뜻이었는데,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3低(低달러·低油價·低金利)와 엔高의 好機를 모두 놓친 것이 只今 생각해도 아쉽기만 합니다.

    李 會長은 生前에 經營에 關한 나름대로의 正義를 밝힌 적이 있는데 그中에 하나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모두들 다 好況이라고 흥청망청할 때 그는 그것이 거품이라는 것을 보고 있었고, 그리하여 IMF라는 代 患亂이 일어나기 몇 年 前부터 危機意識을 强調하며 自己 손까지 묶고 生活해보는 ‘奇行(?)’까지 해보면서 變化의 DNA를 몸에 刻印시키려 했다. 30餘 年 前 그의 言語들이 只今도 새록새록 살아서 들리는 것은 그런 故人의 悽絶한 몸부림이 주는 眞情性과 果然 只今 우리는 얼마나 現在의 問題를 銳敏하게 보고 있으며 問題들을 解決하기 위한 行動을 하고 있는가에 對한 묵직한 質問 앞에 서게 하기 때문이리라.


    아웃사이더를 祕書室長으로

    어느 組織이나 그렇지만 月給쟁이들에게 가장 强力한 채찍과 당근은 人士다. 李 會長은 ‘스푼 事件’ 直後 最側近이었던 이수빈 祕書室長을 更迭하고 後任者로 깜짝 놀랄만한 사람을 앉히는데 바로 현명관 當時 三星建設 社長이었다. 

    三星맨들은 驚愕했다. 현명관은 監査院 公務員 出身으로 全州製紙(現 한솔製紙) 管理部長으로 三星에 合流한 人物로, 電子나 生命 같은 主力 系列社 社長을 맡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룹의 司令塔을 指揮할만한 社內 基盤이 全無한, 한마디로 ‘아싸(아웃사이더) 中에 아싸’였던 것이다. 新經營이라는 前無後無한 發想으로 孤獨한 ‘마이 웨이’를 宣言한 이 會長은 새로운 時代 그의 손발이 돼 現場을 指揮할 사람으로 왜 非主流 人物을 選擇했을까. 여기에도 李會長의 破格的인 想像力이 녹아있다. 현명관의 回顧다. 

    “會長과의 처음 獨對는 LA 會議 때였습니다. 三星의 問題가 뭐라고 보냐는 質問에 ‘監査院보다 더 官僚的’이라고 했더니 거침없이 나에 對한 여러 質問을 하시더군요. 석 달 뒤인가 갑자기 漢南洞 宅으로 오라는 呼出을 받았습니다. ‘三星그룹 運營에 고칠 것이 없느냐’고 물으시기에 ‘業種別로 特性이 있는데 劃一的으로 經營 方向이나 方針이 定해져 있어 副作用이 發生하고 있다. 電子業이면 電子, 金融業이면 金融, 서비스業은 서비스業으로 나눠 小그룹別로 經營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저더러 ‘現 社長, 祕書室長 하세요’ 이러는 거 아닙니까. 너무 놀랐지요. 하지만 저는 鄭重하게 拒絶했습니다. 公採 出身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三星의 2因子나 다름없는 높은 자리를 맡기에는 資格이 안 된다면서 말이지요. 그랬더니 會長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른 걸 다 주물러 본 사람은 그것이 오히려 障礙가 될 수 있다. 當身은 三星의 過去부터 몸을 담지 않았으니 變化를 追求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소리 말고 그룹의 命令으로 알고 해 달라.’” 

    現 前 室長은 “以後 나도 여러 機關에서 機關長을 맡아 改革을 主導해본 적이 있지만 當時 李會長의 果斷性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며 “果然 나 같으면 그런 人事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程度로 破格的인 人事였다”고 말했다.


    頭腦産業으로 모든 걸 바꿔라

     2011년 7월 29일 경기 수원시 매탄동 수원디지털시티에서 열린 선진제품비교전시회에 참관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 이 회장은 이날 사장단에게 소프트기술과 최우수 인재 확보, 특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금 당장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전자 제공]

    2011年 7月 29日 京畿 수원시 매탄동 水原디지털시티에서 열린 先進製品比較展示會에 參觀한 李健熙 當時 三星前者 會長. 李 會長은 이날 社長團에게 소프트技術과 最優秀 人材 確保, 特許의 重要性을 强調하고 “只今 當場 確保하라”고 指示했다. [三星電子 提供]

    新經營을 現場指揮 할 司令官으로 現 前 室長을 指目한 데에는 그의 생각이 會長이 갖고 있던 選擇과 集中 戰略에 들어맞았기 때문으로도 보여 진다. 周知하다시피 故人이 三星 經營을 陣頭指揮하는 會長職에 오른 해는 1987年 11月이다. ‘신동아’는 그로부터 6個月만인 1988年 5月號에서 國內 言論 最初로 이 會長을 單獨 인터뷰하는데, 여기서 會長은 ‘第2 創業’의 意味를 묻는 記者의 質問에 이런 靑寫眞을 밝힌다. 

    “第2 創業은 各種 變化에 適應하는 方法을 찾자는 겁니다. 優先은 精神的인 變化를 찾아야 하겠고, 다음은 技術的으로 三星이 追求하는 電子 半導體 航空 遺傳工學 分野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特히 우리에게는 소프트웨어 槪念이 거의 안 돼 있어요. 千萬 달러짜리 컴퓨터로 數字 計算이나 한다면 어리석지요. 그걸 利用해 1億 달러의 效果를 낼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神經 써야 되겠지요. 單純勞動 低賃(금)만으로는 國際化 時代를 이겨나갈 수가 없어요. 頭腦産業 쪽으로 모든 槪念을 바꿔가야 하겠다는 것이 바로 第2 創業의 意味입니다. 經營이란 槪念을 細分하면 設計 開發 製造 販賣 애프터서비스 等이 있는데, 이것들이 不斷히 變하고 있어요. 10年 前과 只今은 判異하지요. 옛날의 機械는 으레 故障이 났는데, 앞으로는 故障이 거의 안날 겁니다. 그러면 애프터서비스의 槪念도 달라지지요. 그런 式으로 變化에 適應하는 體質改善이 꾸준히 이뤄져야 합니다.” 

    破格的인 祕書室長 人事에 이어 李會長의 破格 人事는 93年 末 11月27日 任員人事에도 이어진다.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엔지니어들의 急浮上이었다. 代表理事 昇進 12名 中 無慮 7名이 理工系 出身으로 채워진다. 또 任員全體 昇進者 265名 中 10%인 24名이 1, 2年 次 任員 中에서 拔擢됐고 高卒 및 女性 任員을 最初로 排出하기도 했다(‘삼성 60年史’).

    바야흐로 舊體制의 낡은 秩序를 整理하고 新經營 體制로 向하는 身體制를 構築하기 위한 人士였던 것이다.

    신필렬 前 三星라이온즈 社長은 1972年 三星物産에 入社해 祕書室 財務팀에서 일했다. 1976年부터 이병철 會長의 祕書팀長을 맡았다. 그는 “先代會長과 李健熙 會長이 企業經營을 指揮했던 時代 自體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면서 “李健熙 會長의 就任은 韓國이 國內外的으로 큰 變曲點을 맞이하던 時期에 絶妙하게 이뤄졌다”고 했다. 

    “選對 會長이 陣頭指揮 하던 時節은 만들면 팔리는 製造業의 時代였다 보니 企業에 必要한 리더십도 달랐고 人才도 달랐습니다. 管理者 出身이 아니면 社長이 안됐습니다. 製造業이라는 것은 投入한 것에 따라서 結果가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全體的으로 分析을 잘 하고 原料 投入이라든지 製品이 製造돼서 나오는 工程 管理를 잘 하면 되는 거지요. 當然히 마케팅이란 것도 重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엔지니어들의 役割이 크지 않았습니다. 三星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當時에는 大部分 工場들이 地方에 있었기 때문에 工大를 卒業하면 地方 勤務를 해야 했는데 마누라들도 싫어하고 아이들 敎育 問題도 있고 하다 보니까 엔지니어들이 就職을 해놓고도 今方 抛棄하고 文科로 方向을 틀어 經營大學院에 들어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例를 들어 서울對 經營學科 碩士 過程에 서울大 工大를 卒業하고 다시 工夫를 選擇한 ‘엔지니어’들로 붐비는 珍風景이 벌어졌으니까요.” 

    三星에서 出世하는 人材賞도 달랐다고 한다. 

    “先代會長 때는 會長이 뭘 탁 물어보면 數字가 좔좔 나오는 사람들이 빛을 봤습니다. 하지만 李健熙 會長은 製造業 中心의 三星을 엔지니어 中心, 管理 中心에서 自律과 創意力 中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社長들의 役割도 數字 잘 외는 사람이 아니라 ‘人材를 잘 찾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社長보다 몸값이 비싼 사람들을 데려오라

    實際로 이 會長은 1993年 6月 29日 런던 會議에서 이렇게 말한다. 

    “只今은 人工衛星이 到底히 안 되지만 10年 後에는 꼭 해야 된다고 假定하면 나는 最高의 人工衛星 專門家를 데리고 오겠다. 비록 그가 實務에 맞든 안 맞든 性格이 高弱하든 말든, 어쨌든 一旦 一級 人材라면 그 사람을 안 데려오는 것보다 데려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신필렬에 따르면 會長은 늘 ‘社長보다 給與가 비싼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任職員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아니, 어떻게 社長보다 月給을 더 주고 사람을 데려 오라는 말인가. 系列社 社長들 立場에선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처음에는 다들 自己들보다 報酬가 낮은 사람을 뽑아서 報告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會長은 ‘이런 사람 뽑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社長보다 月給을 3倍~5倍를 더 주더라도 더 나은 사람을 뽑아오라’고 불號令을 내렸죠. 그것 때문에 社長團들이 魂이 아주 많이 났습니다.” 

    以後 三星 그룹 社長들은 自身들 몸값보다 비싼 人材들을 찾기 爲해 海外를 돌기 始作했다고 한다. 優秀한 人材를 몇 名 데려오느냐가 考課를 評價하는 基準이 되었고, 會長의 이런 努力이 現在의 三星을 일군 動力이 되었다고 신필렬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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