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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木日로 본 文政府…나무 뽑는 政權? [노정태의 뷰파인더?]|新東亞

植木日로 본 文政府…나무 뽑는 政權? [노정태의 뷰파인더?]

  • 노정태 經濟社會硏究院 專門委員·哲學

    basil83@gmail.com

    入力 2021-04-0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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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이 길 가에 소나무를 심은 理由

    • 朴正熙 “山이 푸를 때까지 유럽 안 가겠다”

    • 나무에서 石炭으로…탄광촌 開發과 産業化

    • 太陽光 패널 깐다고…2018년 133萬 그루 벌目

    • 土地補償 더 받으려 나무 심는 公職者들

    • 나무 심는 政權이냐, 뽑는 政權이냐

    뷰파인더는 1983年生 筆者가 陣營 論理와 묵은 觀念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時代 診斷書’입니다.

    1993년 4월 5일 당시 농림수산부 공무원들이 경기 용인시 일대 야산에서 잣나무 묘목을 심고 있다. [동아DB]

    1993年 4月 5日 當時 農林水産部 公務員들이 競技 용인시 一帶 野山에서 잣나무 苗木을 심고 있다. [東亞DB]

    4月 5日은 植木日이다. 植木日은 1948年 처음 指定된 以後 1960年 ‘四方(砂防)의 날’로 變更됐다가 이듬해 곧장 4月 5日로 復歸, 只今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公休日은 아니지만 法定記念日이라는 것만으로도 充分한 價値가 있다. 

    植木日 이틀 뒤인 4月 7日은 再?補闕選擧가 豫定된 날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서울市長과 釜山市場을 다시 뽑는 날일 뿐 아니라, 蔚山 南區廳長과 慶南 宜寧郡수 選擧 等도 함께 進行된다. 

    이番 再補選은 '大選 前哨戰'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울은 1000萬 人口가 살고 있는 大韓民國의 首都이며, 釜山은 第2의 都市인만큼 어찌 보면 當然한 일이다.
     
    하지만 이番 再補選을 우리는 좀 더 긴 眼目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듯하다. 勿論 이것은 1年3個月짜리 市場과 區廳長, 郡守를 뽑는 選擧지만, 보다 長期的인 觀點에서 나라 全體의 向方에 影響을 미칠 수도 있다. 앞서 言及한 것처럼 植木日 直後에 치러지는 選擧라는 點을 놓고 보면 分明히 그렇다. 

    朝鮮과 日本의 國力 隔差는 언제부터 벌어졌을까. 歷史學者마다 解釋의 差異가 있지만 壬辰倭亂이 벌어질 當時에도 兩國 間 隔差는 充分히 벌어져 있었다. 丙子胡亂을 겪으며 朝鮮은 國力이 더 기울어진 反面 日本은 에도 幕府 時期를 거치며 安定的인 治世를 이루었다. 日本이 朝鮮을 植民지배한 것은 開港을 빨리 해서일 수도 있지만, 朝鮮이라는 나라의 基礎 體力 自體가 脆弱했던 탓도 있다는 뜻이다. 



    朝鮮이 沒落한 原因을 正確히 敍述하는 것은 歷史學者들의 몫이다.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同時代의 朝鮮과 比較해볼 때 日本이 지니고 있었던 獨特한 性格에 對해 論할 必要가 있다.


    도쿠가와 幕府의 森林 管理

    1972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식수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아DB]

    1972年 4月 5日 植木日을 맞아 植樹하는 朴正熙 前 大統領. [東亞DB]

    戰國時代가 끝나고 도쿠가와 幕府 時代가 열린 後, 日本은 徹底하다 못해 執拗한 森林 管理가 始作됐다. 第레드 다이아몬드의 ‘文明의 崩壞’는 그 過程을 이렇게 說明한다. 서로 오랜 戰爭을 벌이고, 壬辰倭亂으로 朝鮮을 侵略하고, 平和와 安定을 찾았지만 1657年에는 에도(오늘날의 도쿄)에 엄청난 火災가 發生해 10萬餘 名이 목숨을 잃고 都市의 折半이 불타버렸다. 

    나무를 베어내고 또 베어내야만 할 狀況이었다. 그런데 이런 式으로 마구잡이 伐木을 하다보면 山은 민둥山이 되고 흙湯물이 下流로 내려와 農業 生産性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잦은 洪水로 인해 人命 被害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도쿠가와 幕府는 徹底한 숲 管理에 들어갔다. 

    一旦 쇼군 스스로가 別途의 管理를 임명해 自身이 直接 管掌하던 日本의 森林 中 4分의 1을 統制했다. 또한 그 外의 다이묘(높은 身分의 地方 領主)들에게도 마찬가지로 林野를 統制하라고 命令했다. 小規模 群落 等에서는 마을 單位의 共同 管理를 指示했다. 

    事實 에도 大火災가 發生하기 前부터 에도時代 日本人들은 나무를 심고 숲을 管理하는 것에 相當한 愛着을 보였다. 日本의 雜草生態學者이며 著述家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植物都市 에도의 誕生’에서 그 淵源을 다음과 같이 說明한다. 

    첫째, 戰國時代의 武將들은 藥草, 毒草, 非常食糧 調達 等을 理由로 植物에 對해 잘 알아야 할 必要가 있었다. 當時 武士들에게 植物에 對한 知識과 愛情은 ‘必須敎養’을 넘어 ‘專攻必修’에 가까웠다. 둘째, 에도時代에는 各 地域 다이묘들이 子息을 에도에 人質 삼아 보내야 했다. 그렇게 各地의 貴族이 모여 있는데 땅은 좁다보니 庭園을 잘 가꾸고 誇示하는 文化가 생겨났다. 셋째, 가장 重要한 權力者로서 ‘트랜드 세터’라고 할 수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꽃과 植物을 사랑하는 性格이었다.


    日本이 길 가에 소나무를 심은 理由

    2018년 10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북 군산시 유수지 수상태양광부지에서 열린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年 10月 30日 文在寅 大統領이 全北 군산시 遊水池 水上太陽光敷地에서 열린 ‘새萬金 再生에너지 비전 宣布式’에 參席해 人事말을 하고 있다. [靑瓦臺寫眞記者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家門을 멸망시키고 全國 統一을 이루기 前이었던 1604年, 自身의 影響力이 닿는 日本 全域의 가도(街道)를 整備하면서 그 길가에 소나무를 심었다. 敵이 侵攻한다면 재빨리 나무를 베고 쓰러뜨려 障礙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길가에 심어진 街路樹는 旅行者와 馬車 等이 쉴 수 있는 그늘을 提供해준다. 아직 天下 霸權을 놓고 벌인 戰爭이 끝나기도 前에 도쿠가와 幕府는 길을 닦으며 나무를 심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時期, 或은 그 後를 놓고 보더라도, 朝鮮의 事情은 퍽 달랐다. 흔히 中央集權國家로 알려져 있는 朝鮮이지만 숲의 管理에 있어서는 封建國家인 日本보다 統制力이 不足했다. 江原道에서 나무를 너무 많이 베어낸 탓에 每年 장마철마다 흙湯물이 漢江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洪水가 發生하는 것을 알면서도 政府가 나서서 변변한 解法을 찾아내지 못했다. 1751年 刊行된 朝鮮 最初의 人文地理書人 ‘擇里志’를 보면 그러한 狀況이 안타깝고도 赤裸裸하게 記述돼 있다. 

    “江原道 嶺西地方의 山間地帶가 火田民에 依해 자꾸 伐木되다보니, 여름철에 많은 비가 내리면 土沙가 쓸려 내려가 漢江바닥에 쌓여 韓江의 汎濫 危險性이 커진다.” 

    1910年 庚戌國恥日 以前부터 朝鮮에 對한 情報를 蓄積하고 植民統治를 準備하던 日制로서는 이런 狀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도쿠가와 幕府 統治가 끝나고 메이지 維新을 통해 立憲君主制 國家로 탈바꿈했지만 숲을 徹底하게 管理하는 文化와 行政의 連續性은 持續됐기 때문이다. 朝鮮이 日本의 植民地가 된 以上 朝鮮의 山과 숲 亦是 日本과 마찬가지로 管理 對象이 될 수밖에 없었다. 

    歷史學者 최병택의 冊 ‘日帝下 조선林野調査事業과 山林 政策’에 따르면, 흔히 想像하는 것처럼 日帝가 朝鮮人에게 銃칼을 들이대며 숲의 所有權을 빼앗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代身 그 前까지 公有地로 여겨지거나 所有權을 明確히 하지 않았던 숲을 國有地 或은 私有地로 分類하고, 그 各各에 對해 나름의 法的 基盤을 마련해 伐木을 禁止하고 植木事業을 展開해 나갔다. 

    日帝는 대단히 많은 나무를 심었다. 최병택의 記錄은 이렇다. 

    “日帝는 조림貸付制度와 森林組合員에 對한 苗木 强賣를 통해 1920年代 末에 이르면 한 해에만 모두 3億餘 본(本)에 이르는 나무를 심었다. 自然히 植林 面積도 늘어나 1933年까지 117萬5602町步(1萬1659㎢)에 이르는 林野에 植栽를 完了했다. 植林이 强力히 推進될수록 美入木地(未立木地) 面積도 줄어들었다.” 

    問題는 그 方式이었다. 최병택의 批判에 따르면, 日帝의 나무심기 事業은 說得과 長期的인 啓蒙을 통해 協力을 이끌어내기보다는, 不過 몇 年 前만 해도 前近代的 王朝 時代를 살아가던 朝鮮人들에게 갑작스러운 近代的 制度를 提示하고 ‘禁伐注意’를 앞세워 處罰을 通해 强制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무에서 石炭으로…박정희의 産業化

    2018년 9월 3일 충북 청주시 청원군 성재리 태양광 발전시설이 집중 호우로 토사가 유실됐다. [동아DB]

    2018年 9月 3日 忠北 淸州市 淸原郡 성재리 太陽光 發展施設이 集中 豪雨로 土沙가 流失됐다. [東亞DB]

    그 結果 日帝의 植木事業이 果然 얼마나 效果的이었는지에 對해서는 如前히 歷史學者들 사이에 論難이 남아 있다. 여기서 引用하고 있는 최병택처럼 ‘民族的’ 觀點에 가까운 이들은 效果가 없었거나 未備했다고 보는 便이다. 反面 所謂 ‘植民地 近代化論者’라는 非難을 듣곤 하는 學者들은 日帝의 植木事業이 朝鮮의 山을 푸르게 하는데 相當한 寄與를 했다고 여긴다. 總督府 스스로도 植木事業이 投入한 만큼의 成果를 거두고 있지는 못하다고 反省하는 記錄이 남아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日帝의 나무 심기는 ‘折半의 成功’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앞서 ‘뷰파인더’에서 다룬 日帝의 痘瘡 豫防 接種 失敗와 같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日帝가 導入한 近代 文物의 效用 그 自體는 朝鮮人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李重煥은 ‘擇里志’를 썼고 池錫永은 種痘法을 배워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植木事業이나 牛痘法 普及이 强制的으로 이루어질 때 植民地 朝鮮人들은 그런 指示를 고분고분 따르고만 있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러운 人間 心理의 表出이지만, 一面 안타까우면서 또한 어느 面에서는 憤怒를 자아내는 歷史的 事實이다. 

    그나마 進行되던 日帝의 植木事業은 太平洋戰爭과 6?25戰爭을 거치며 모두 無爲로 돌아가고 말았다. 6?25戰爭 當時 남아있는 記錄 寫眞을 보면 야트막한 山은 大部分 민둥山이다. 나무나 풀을 찾아보기 어려운 흙과 돌더미였다. 온 國土가 戰亂에 휩쓸려 있는데다 如前히 주된 燃料로 나무 或은 숯을 쓰고 있었으니 當然한 일이다. 

    狀況이 달라진 것은 朴正熙 執權 以後였다. 講院 旌善에 있는 사북은 戰爭이 터졌다는 事實을 傳해 듣지 못할 程度로 외진 곳이었다. 1950年代 末 사북 度사곡에 50餘 戶, 고한에 80餘 戶 程度의 家口가 火田民 生活을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第3共和國이 出帆하고 1961年 末 ‘石炭開發에 依한 臨時 措置法’이 制定되고 炭鑛 開發이 本格化되면서, 사북 等 炭鑛村은 갑자기 活氣를 띠게 됐다. 

    旌善의 炭脈을 처음 發見한 것은 朴正熙가 아니었다. 이미 1926年 發行된 ‘三陟炭田 調査報告書’에서 그 存在가 確認된 바 있다. 日帝가 만들고 鑛區 開發權을 獨占한 三陟開發株式會社는 1944年에 이르면 約 30萬餘 名에 達하는 鑛夫를 動員해 石炭을 採掘했다. 하지만 解放과 함께 炭鑛 光球는 解體됐고, 朴正熙 政權이 들어설 때까지 韓國人들은 石炭이 아닌 나무를 主 燃料로 使用해왔던 것이다. 

    炭鑛村 開發과 나무에서 石炭으로의 에너지 轉換은 朴正熙 政權의 産業化를 特徵짓는 核心 事件 中 하나로 記憶돼야 한다. 오늘의 論議에서 더 重要한 것은 그 過程에서 解放 以後 멈춰있던 植木事業이 다시 本格化되었다는 데 있다. 

    1964年 西獨의 鬱蒼한 山林에 큰 衝擊을 받고 돌아온 朴正熙는 關係者들에게 “山이 푸르게 變할 때까지 유럽에 안 가겠다”고 宣言했다고 한다. 1965年부터 政府 次元의 大大的인 山林綠化 事業이 始作됐고, 그것으로도 未洽하다고 느꼈는지 1973~1982年 ‘第1次 治山綠化 10個年計劃’李 推進됐다. 6年間 29億4000萬 그루를 심었는데, 4年 일찍 目標를 達成한 大成功이었다. 이렇게 始作된 山林綠化 結果 우리는 2015年 現在 産地 1ha當 나무 總量에 있어서 獨逸이나 스위스보다는 뒤쳐지지만 美國보다는 앞서는 ‘푸른 나라’에 살게 됐다.


    나무를 심는 政權이냐, 뽑는 政權이냐

    3월 5일 오전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667번지 일대 농지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보상을 노리고 심은 묘목. [동아DB]

    3月 5日 午前 京畿道 시흥시 과림동 667番地 一帶 農地에 韓國土地住宅公社(LH) 職員들이 補償을 노리고 심은 苗木. [東亞DB]

    朴正熙 時代의 意義와 遺産에 對해서는 다양한 方向에서 歷史的 論議가 進行 中이다. 事實 只今도 끝나지 않은 ‘現在史’라고 보는 便이 더 妥當할 것이다. 또한 炭鑛村 開發로 인한 隣近의 環境 破壞, 急激한 石炭 産業의 成長 및 1980年代의 石炭 合理化 事業으로 인한 炭鑛村의 沒落 等에 對해서도 여러모로 檢討가 必要하다. 하지만 朴正熙가 나무에서 石炭으로 에너지 轉換을 이루어내면서, 同時에 森林錄畫를 進行해 민둥山이었던 國土를 푸르게 만들었다는 事實 自體를 否定할 수는 없을 것이다. 

    長期的인 觀點에서 實踐하지 않는다면 나무를 심고 기르는 것도, 숲이 망가지지 않도록 管理하는 것도 不可能하다. 國民과 指導者 모두에게 10年을 내다보는 眼目과 主人意識이 있어야 山林綠化는 穩全한 成功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文在寅 政府가 野心차게 推進 中인 脫原電 및 太陽光 發展 擴大에 對해 憂慮할 수밖에 없는 理由도 거기에 있다. 2015~2020年 山地 太陽光 施設을 設置하기 위해 伐木된 나무는 307萬餘 그루. 그 中 文在寅 政府 出帆 以後인 2017年부터 베어진 나무가 81.3%를 차지한다. 2016年에는 太陽光 設備 設置를 理由로 베어낸 나무가 31萬餘 그루였으나, 2017年에는 67萬餘 그루, 2018年에는 133萬餘 그루로 每年 두 倍씩 늘어났다. 보다 못한 山林廳에서 制動을 건 德分에 이 趨勢는 꺾였다. 

    나무를 심는 게 絶對善은 아니다. 때로는 나무를 베어내거나 다른 樹種을 바꿔 심어야 할 必要도 있다. 하지만 重金屬 成分을 띈 太陽光 패널을 깔기 爲해 일부러 나무를 베어내는 건 마치 사북 炭鑛을 閉鎖하고 代身 1950年代처럼 나무를 燃料로 쓰던 時節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太陽光 發展을 氣候變化 對應 名分으로 내세운다면 더욱 그렇다. 

    ‘나무를 심는다’는 行爲를 指標로 놓고 본다면 文在寅 政府는 朴正熙는 고사하고 太平洋 戰爭 以前의 日帝 總督府와 比較해도 未洽하다. 國土에 對한 長期的인 眼目 및 責任意識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나무를 심는 政權이냐, 나무를 뽑는 政權이냐, 그 하나의 基準을 놓고 보자면 이러한 否定的 評價를 避할 수 없다. 

    文在寅 政府들어 公職者들은 다른 種類의 나무를 심고 있다. 韓國土地住宅公社(LH) 事態의 千態萬象에서 赤裸裸하게 드러난 것처럼, 더 많은 土地補償金을 받기 위해 稀貴 樹種의 나무를 開發 豫定地에 빽빽하게 심고 있었던 것이다. 

    3月 29日 LH 事態에 對해 내놓은 ‘不動産 投機 根絶 對策’에서 文在寅 大統領이 덧붙인 말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事實 開發 豫定地나 受容 豫定地에 나무나 苗木을 빼곡히 심어 補償金을 늘리는 積弊는 數十 年 前부터 되풀이돼 淳朴한 農民들도 알만한 手法이 된지 오래입니다.” 

    21世紀 最惡의 ‘國土壟斷’이 벌어졌는데, 大統領 입에서 ‘그건 다들 아는 手法’이라는 말이 나오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植木日 이틀 뒤 치르는 再補選은 有權者들은 投票用紙가 아닌 씨앗이나 苗木을 投票函에 넣는다는 생각으로 未來를 向한 希望을 심어보는 건 어떨까.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밀레니얼 宣言’ ‘民主主義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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