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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서 찍혀 나간 異端 集合所 = 민주당|新東亞

NL서 찍혀 나간 異端 集合所 = 민주당

[奉達號 便宜店 칼럼] 너희가 主思派를 아느냐

  • 奉達號 便宜店主

    入力 2023-06-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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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主思派에 對한 몇 가지 誤解와 眞實

    • 大統領이 召喚한 ‘NL 主思派’

    • 이데올로기 興行作 ‘鋼鐵書信’

    • 大選 公約집 같은 김영환의 抗訴理由書

    • 株式으로 치면 ‘上場廢止’ 企業

    • 全혀 必要 없는 짓은 아니었다

    • 헛된 적에 휘둘리지 말지어다

    1985년 5월 23일 서울 지역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연대해 서울 중구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하고 사흘간 농성을 벌였다. 사진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며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 [동아DB]

    1985年 5月 23日 서울 地域 5個 大學校 學生 73名이 連帶해 서울 中區 美國文化院을 奇襲 占據하고 사흘間 籠城을 벌였다. 寫眞은 光州虐殺에 對한 美國의 責任을 물으며 口號를 외치는 學生들의 모습. [東亞DB]

    ‘신동아’ 고재석 記者가 쓴 冊 ‘世襲 資本主義 世代’를 읽다가 좀 疑訝했다. 그의 母校인 경희대학교가 2000年代 中盤까지 ‘NL運動圈의 歲가 剛한 大學’이었다는 것이다. 筆者는 고 記者보다 열두 살 많다. 告白하자면 筆者는 1974年生으로 高校 1學年 때인 1989年에 運動圈이 됐다. NL 主思派 地下組織에서 活動하다가 1997~98年頃 思想 轉向을 했다. 1999年에는 反(反)한총련 系列로 전남대 學生會長을 지냈다. 大學을 떠나던 2000年에 ‘앞으로 4~5年 程度면 大學街에서 NL이란 이름은 사라질 것’이라고 豫想했다. 그런데 2000年代 中盤까지도 NL이 膾炙되고 있었다니, 게다가 ‘NL의 歲가 剛한 大學’이 있었다니, 참으로 끈질긴 存在들이로구나 싶었다.

    不滅의 NL

    요즘에도 NL이라는 用語를 심심찮게 듣곤 한다. “586 NL 政治人들”이라느니 “NL 主思派 世代의 道德的 헤게모니”라느니 하는 表現으로 말이다. 主로 1980年代 學番 世代를 嘲弄하는 意味로 使用하는 表現이다. 甚至於 大統領마저 NL이라는 用語를 使用하지는 않았지만 “從北 酒邪派와는 협치가 不可能하다”느니 “從北 主思派들은 北韓 人權 이야기가 나오면 徹底하게 가로막는다”느니 하는 發言으로 ‘主思派’를 現實 政治의 議題 위에 올려놓는다.

    지겨운 일이다. 正말로 周圍에 NL 主思派가 남아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用語를 使用하는 것일까. 勿論 NL 主思派의 ‘殘滓’들은 있을 것이다. NL의 이념적 影響을 完全히 떨치지 못한 世代 또한 儼然히 存在한다. 하지만 現實 政治에서 NL이나 主思派를 云云하는 것은 果然 어떤 ‘現實的’ 意味가 있을까.

    이제는 그저 嫌惡의 表現밖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特히 大統領이 그런 表現을 使用한 것은 憂慮되는 대목이다. 누군가 大統領 周圍에서 무언가 深刻하게 잘못된 認識을 注入하고 있다는 徵標처럼 보인다.

    요즘 一部 20~30代 ‘論客’을 보면 NL이 뭔지도 正確히 모르면서 NL을 云云하는 傾向을 본다. 그 윗世代의 境遇에도 運動圈에 몸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或은 앞뒤 脈絡이나 內部 構造를 正確히 모르는 사람들이) 想像力에 立脚해 NL이 어떻다느니, 主思派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을 터무니없이 使用하는 境遇를 發見한다. 모르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正確히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亦是 지겨운 일이다. 大明天地 21世紀의 한복판에 如前히 ‘NL 主思派’라는 20世紀의 낡은 遺物을 說明해야 하는 課題 말이다. 게다가 簡單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쉽게 說明할 수 있는 主題가 아니다. 1980~90年代의 時代 狀況과 歷史的 脈絡, 當時 組織 內外部의 해프닝까지 立體的으로 說明해야 穩全한 理解가 可能하고, 빠짐없이 說明하는 것이 社會 發展에 그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에 對한 冊을 한 卷 써보려고 한다. 이番 칼럼은 그 豫告篇이거나 要約文 程度에 該當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從北’은 PD系列이 만든 用語

    一旦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簡單히 用語의 뜻을 說明하자. NL은 民族解放(National Liberation)의 略字다. 1980~90年代 學生運動圈에 크게 兩大 系派가 있었다. NL과 PD. NL이 主流로 70~80% 程度를 차지했고, PD는 少數 系派였다. PD는 民衆民主(People’s Democracy)의 略字다. 거칠게 區分하자면 NL은 韓國 社會를 變革하는 데 ‘未濟(米 帝國主義) 逐出’을 優先으로 보았고, PD는 勞動者 解放을 優先했다.

    ‘主思派’는 主體思想派의 略字다. 北韓의 主體思想을 따르는 勢力이라는 뜻이다. NL 酒邪派는 있어도 PD 酒邪派는 없다. 왜냐하면 主體思想은 北韓에서 胎動했는데, PD系列은 北韓 政權을 탐탁지 않게 봤기 때문이다. NL인데 主體思想을 따르지 않는 NL도 있었나? 있었다.

    NL에 對한 巷間의 誤解 가운데 하나는 NL을 ‘單一 隊伍’로 보는 見解다. NL 內部에도 여러 分派가 있었다. NL이 워낙 暴發的으로 成長해 巨大한 勢力이 되다 보니 北韓에서 地下黨을 整備하면서도 地域別로 ‘管轄權’을 줬다. 그것이 나름의 差異를 갖고 發展하기도 했고, 路線과 立場에 따라 몇 個 分派가 存在했다.

    예컨대 ‘새벽’이라는 分派가 있었다. NL이면서도 北韓의 主體思想은 따르지 않고 自身들만의 ‘사람中心思想’ 같은 것을 만들어 따랐던 組織이다. 北韓의 首領論을 認定하지 않았고, 北韓의 勞動黨이 南韓 革命을 一括的으로 ‘영도’하는 것 또한 拒否하는 系派였다. 結局 그들은 NL 內部에서 異端으로 찍혀 쫓겨나, 어디 갈 곳이 없으니 現實 政治판에 가장 먼저 進入한 系派가 됐다. 犯(汎)NL 陣營 가운데 勞動運動에도 가장 먼저 勢力을 뻗친 系派가 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追放’이 그들에게는 幸運이었던 셈이다.

    그럼 尹錫悅 大統領이 운운한 ‘從北’이라는 用語는 무엇인가. 從北(從北)은 北韓 政權을 追從하는 勢力, 或은 北韓 政權에 從屬된 勢力이라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고 흥미로운 事實이 하나 있다. 이 用語는 保守勢力이 NL運動圈을 貶毁하기 爲해 만든 用語가 아니라 PD系列이 NL系列을 蔑視하기 爲해 처음 使用한 用語다.

    運動圈 少數派였던 PD系列은 大學에서 勢力을 擴張하지 못했다. 結局 그들은 外部로 視線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勞動階級’을 重視하는 PD系列은 元來 學生運動에 그리 關心을 두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進步政黨 運動에 가장 먼저 뛰어든 系列이 PD系列이었고, 草創期 進步政黨 內部에 PD가 主流를 이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 NL이 進步政黨에 浸透해 主流가 되자 PD系列은 過去의 惡夢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學生運動 時節에도 ‘쪽數’에 밀려 서러움을 當했는데 自身들이 애써 만든 進步政黨마저 瞬息間에 NL에 接受當한 狀況이 되니 그야말로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때 PD系列이 NL을 攻擊했던 用語가 “너희들은 從北이야!”라는 表現이었다. 그 用語가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른다. (그런 진흙탕 싸움 끝에 벌어진 事件이 2012年의 統合進步黨 事態다.)

    整理하자면, NL에서도 異端으로 찍히거나 個別的으로 轉向한 人士들이 하릴없이(?) 進出한 政黨이 민주당이었다. 이젠 40~50代 나이가 된 NL 主思派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進出한 政黨이 이른바 進步政黨이다. 進步政黨으로 浸透한 NL 酒邪派는 事實 ‘主流’도 아닌 主思派다. 거기까지 說明하자면 훨씬 많은 紙面이 必要할 테니 다음 機會로 미루기로 하자. 그 ‘非主流 NL 主思派’들은 뒤늦게 勞動運動으로까지 進出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民主勞總의 ‘물’을 흐려놓게 된 結果다.

    鋼鐵 김영환의 時代的 意味

    NL 主思派에 對한 巷間의 誤解 가운데 둘째는 “1980年代 學生運動은 主思派가 主導했다”는 것이다. 크게 틀렸다. 明白히 說明하자면 NL 主思派가 學生運動을 主導한 時期는 1990年代다. “1980年代에는 NL 主思派가 없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表現이 아니다.

    NL의 核心은 ‘反美(反美) 자주’다. 우리나라 運動圈에 反美的 傾向은 1960~70年에도 一部 있었다. 1980年代 學生運動圈에 反美 性向이 暴發的으로 늘어난 理由는 다른 무엇도 아닌, 5·18光州民主化運動 때문이다. 光州 虐殺에 空輸部隊가 動員됐다. 基本 常識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軍事作戰 指揮權은 美國이 갖고 있는데 空輸部隊가 어떻게 示威 鎭壓에 投入될 수 있었을까?” 하는 疑問을 갖게 마련이다. 勿論 그것은 作戰 指揮權에 對한 誤解다. 全斗煥도 그러한 虛點을 利用해 部隊를 移動했다. 그런 誤解 自體를 凌蔑할 必要까진 없었겠다. 分明히 ‘할 수 있는’ 오해니까.

    그런 緣故로 1980年 光州 美國文化院 放火 事件, 1982年 江原大 星條旗 燒却 事件, 釜山 美國文化院 放火 事件 等이 일어났고, 美國을 糾彈하는 焚身自殺도 잇따랐다. 1985年에는 서울 地域 大學生들이 을지로에 있는 美國文化院을 사흘間 占據한 事件이 일어나 世界 言論의 注目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行爲를 “괜한 誤解로 헛된 일을 했다”고 嘲弄할 수 있을까. 이참에 말하자면 大韓民國에 反美 性向이 暴發하고 NL運動圈이 成長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全斗煥 政權의 功勞(?)다. 全斗煥이 軍隊를 投入해 光州를 銃칼로 鎭壓하는 愚鈍한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1980年代에 反美 運動圈은 그만큼 자라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0年代 中盤까지 反美 性向은 그냥 單純한 ‘美國 責任論’ 水準이었다. “美國도 責任이 있으니 謝過하라”는 口號 程度였다. 그랬던 것이 NLPDR(民族解放民衆民主主義革命론)이라는 理論으로 具體化되고, 北韓의 主體思想까지 結合해 急速度로 成長한 데는 金榮煥이라는 人物의 役割이 크다. 現在 忠北知事를 맡고 있는 김영환 氏 말고, 서울대 82學番으로 ‘主思派의 代父’ 或은 ‘鋼鐵’이라는 筆名으로 有名한 김영환 氏 말이다. (餘談으로 紹介하자면 鋼鐵 김영환이 手配됐을 때, 當時 安企部에서 이름을 混同해 忠北支社 金榮煥을 잘못 連行하기도 했다.)

    簡略하게 紹介하자면 鋼鐵 김영환이 大學 3學年이던 1984年에 서울대 ‘苦戰硏究會’라는 동아리 멤버들을 中心으로 ‘고연 언더’(別稱 ‘丹齋思想硏究會’)라는 地下 서클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NL理論을 體系化하고 主體思想까지 導入한 觸發點이 됐다. 그렇게 胎動한 金榮煥 그룹이 1985~86年 大學街와 工場 地帶에 配布한 팸플릿 題目이 ‘鋼鐵書信’이다.

    鋼鐵書信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 고려대, 연세대, 慶熙大 等으로 NL理論이 擴散됐다. 때마침 學生會가 復活하면서 그 系列이 學生會를 掌握하고, 學生會 連帶체인 전대협을 構成하면서 全國的으로 理論이 擴散됐다. 그들이 主張한 直選制 改憲論 等이 맞아떨어지면서 理論에 權威가 붙었다. ‘鋼鐵書信’李 1989年에 冊으로 묶여 나오면서 더욱 堅固해진 것이 1990年代의 NL運動圈이다.

    고작 3~4年 사이에 들불이 번지듯 擴散되고 組織이 體系化된 것이다. 大韓民國 歷史上 最高의 ‘이데올로기 興行作’이었달까. 要컨대 흔히 말하는 ‘NL 主思派’가 確立된 時期는 1980年代 中盤 以後다. 學生運動의 組織的 系派로서 NL이 全國을 支配한 時期는 1980年代가 아니라 1990年代다.

    아이러니한 것은 1990年代 學生運動이 폭삭 亡하게 된 契機 또한 NL이 主思派와 結合하면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主思派의 代父’라는 김영환 氏는 이미 1989年頃부터 社會主義 理念에 疑問을 가졌고, 1991年 즈음에는 北韓 體制에 對해서도 深刻한 懷疑感을 갖기 始作했다는 事實이다. ‘대부’는 마음이 흔들렸는데 ‘조무래기’들만 熱心히 忠誠 競爭을 했던 셈이다.

    只今은 부끄러운 理論

    NL 主思派에 對한 巷間의 誤解 가운데 셋째는 NL을 ‘許接한 理論’으로 보는 傾向이다. 1980~90年代 學番을 “그렇게 허술한 理論과 主張에 휘둘린 世代”라고 嘲弄하는 意味로 흔히 使用된다.

    勿論 그렇다. 只今 내가 1980~90年代의 NL 理論書를 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理論에 내 人生이 흔들리다니…’ 하면서 부끄러움을 갖는다. 한便으로 ‘그것이 그렇게 嘲弄받을 일인가’ 하는 얕은 反撥心을 갖는 것도 事實이다.

    話題를 돌려보자. 흔히 ‘抗訴理由書’ 하면 柳時敏 氏를 떠올리지만 내가 學生運動을 始作한 1980年代 末에 ‘抗訴理由書’ 하면 鋼鐵 金榮煥을 떠올렸다. 柳時敏의 抗訴理由書에서는 富者집 아드님의 感傷的 自我陶醉만 엿보였지만, 김영환의 抗訴理由書에서는 革命家로서의 배짱이나 理論的 精巧함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 個人的으로는 김영환의 것이 百倍 낫다고 여겼다.

    김영환의 抗訴理由書는 單行本 冊子로 100쪽 程度, 200字 原稿紙로 500~600枚에 이르는 相當한 分量이다. ‘抗訴理由書’라고 해서 “나는 이렇게 떳떳합니다”라는 歎願書 程度를 豫想했다가 內容을 보고 깜짝 놀랐던 記憶이 난다. 自己 이야기는 거의 없고, 우리나라를 改革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內容의 純全한 ‘理論書’였다. 分野도 厖大하다. ‘自主的인 政治權力의 樹立’을 우리나라의 核心 目標로 삼고, △政治制度의 民主化 △反民族 反民主 行爲者의 處罰 △ 不正蓄財 財産의 社會 還元 △小作制 廢止 △軍事的 獨立 △自主外交 實現 △聯邦統一政府 樹立, 나아가 △勞動3卷 保障과 協同組合運動 △自營業者, 小商工人 問題 解決 △男女平等權 △醫療保健 分野의 民主化 △文化 民主化 △矯導所의 敎化體系 確立 等 다루지 않은 分野가 없다. 恰似 한 卷의 大選 公約집을 보는 듯하다.

    언젠가 金榮煥을 만났을 때 왜 그런 式의 抗訴理由書를 썼는지 理由를 물은 적이 있다. 大統領選擧를 앞둔 1987年 그는 監獄에 있었는데, 바깥에 있는 同志들에게 自身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나름의 팸플릿처럼 썼다는 것이다. 法廷 陳述 또한 理論 傳播의 合法的 道具로 活用했던 셈이다. 天生 理論家이자 實踐家로구나 싶었다.

    김영환이 抗訴理由書를 쓴 나이가 스물넷이다. 金榮煥을 지나치게 英雄化할 생각은 없지만 只今 스물넷 靑年 가운데 나라의 未來와 關聯해 그 程度 分量의 綜合的인 에세이를 作成할 力量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김영환의 理論이 卓越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쨌든 ‘그 世代’는 옳았든 틀렸든 그러한 訓鍊을 거치면서 자라난 世代라는 뜻이다. 그것이 果然 嘲弄받을 對象인가 싶다. 비웃으며 凌蔑하기에 앞서 反面敎師일지언정 그들 世代에게 배워야 할 點은 없는지 되돌아볼 必要가 있다. 그저 어영부영 오늘의 成果를 쌓은 世代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李石基는 虎狼이 없는 窟의 여우

    2021년 12월 24일 내란 선동 등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성탄절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 전 의원이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동아DB]

    2021年 12月 24日 內亂 煽動 等으로 大田矯導所에 收監됐던 李石基 前 統合進步黨 議員이 聖誕節 假釋放으로 出所했다. 李 前 議員이 支持者들을 向해 손을 흔들고 있다. [東亞DB]

    NL 主思派에 對한 네 番째 誤解는 그들이 只今도 相當한 政治社會的 影響力을 갖고 있다는 誤解다. 組織 系譜를 言及하자면, 北韓 勞動黨이 ‘南韓 最高 地下黨’ 地位를 附與했던 김영환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1997年 이미 自體 解散을 決定했다. 가장 큰 理由는 ‘北韓 政權에 對한 立場 差異’ 때문이었다. 金榮煥을 爲始한 多數派는 더는 北韓 政權을 追從해서는 안 되고 甚至於 “앞으로는 北韓 政權을 打倒하는 運動에 나서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中央委員會 解體를 多數決로 議決했다. 민혁당 解體에 反對하면서 再建을 노린 少數派가 統合進步黨 李石基 前 議員을 爲始한 이른바 ‘京畿東部’라고 불리는 一派다.

    굳이 組織 序列을 따지자면 李石基 氏는 민혁당 內에서 6~7位 程度에 位置했던 人物이다. 自身보다 上級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轉向하거나 公開的 活動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虎狼이 없는 窟에 여우가 王 노릇 하는 格으로 活動하고는 있다. 特有의 보스 氣質로 主思派 殘黨들을 이끌고 있지만 스스로 理論을 만들거나 政策을 生産할 能力은 없는 人物이다. 李石基 그룹의 活動 能力을 過小評價해서도 안 되겠으나 過大評價하는 것도 지나치다.

    尹錫悅 大統領이 言及한 ‘從北 主思派’가 大體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具體的으로 따지자면 現實에 남아 있는 從北 酒邪派는 李石基 一波 程度인데, 그런 사람들을 大統領이 굳이 言及할 必要가 있을까 싶다. 或是 더 擴張된 意味에서 從北 主思派라는 用語를 使用했다면 大統領으로서 狀況 認識에 深刻한 問題가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北韓이 아직도 對南 指令을 내보내고 있고, 地下黨 構築을 繼續 試圖하고 있지 않으냐”고 反駁할 사람도 있겠지만, 굳이 大統領이 公開 席上에서 言及할 水準은 아니라는 말이다.

    斷乎하게 말하자면 NL 酒邪派는 歷史 속에 이미 사라졌다. 1980年代 後半 蘇聯과 東유럽 社會主義 國家들이 崩壞하자 PD系列은 相當히 萎縮되었지만 NL은 오히려 勢力이 커졌다. 社會主義 宗主國들이 쓰러지는데도 健在한 北韓의 ‘底力’이 相對的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1990年代 學生運動을 NL 主思派가 主導한 또 다른 理由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김대중 政府의 出帆과 함께 “南韓 政府는 美提議 꼭두각시 政府”라는 NL的 事故官은 설 자리를 잃었고, 盧武鉉 大統領이 當選되면서 現實에서 NL이 갖는 意味는 完全히 破産했다. 한총련 延世大 事件이 터지고, 1990年代 後半 北韓의 食糧難 實態가 알려지면서 學生運動圈에서도 NL은 名分을 喪失했다. 株式으로 말하면 ‘上場廢止’된 企業人 셈이다.

    홀로 짐 진 金榮煥

    此際에 紹介하자면 김영환 氏가 轉向하면서 言論에 發表한 ‘反省文’이 있다. 민혁당은 1997年에 解體됐지만 殘黨들이 자꾸 再建 活動을 벌이다가 發覺된 事件이 1999年의 민혁당 事件이다. 事實 金 氏는 여기에는 責任이 없다. 하지만 그 앞에 일어난 일들에 對한 責任을 지고 反省文을 作成한 것이다. (當時 政權이 김대중 政府라서 金榮煥을 마냥 풀어주면 保守勢力으로부터 자칫 誤解를 받을 수도 있어 일정한 合意點으로 反省文을 公開한 側面이 있다.)

    個人的으로는 그때 反省文도 꽤 感動的이었다. 自身의 責任이 아니라고 回避할 수 있는 部分까지 金 氏는 “自己 잘못”이라고 謝過한 것이다. 金 氏는 크게 3가지를 反省했다. 첫째로 “運動圈 前半에 親北的인 雰圍氣를 擴散시킨 것”을 꼽았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대목이지만 1990年代 中盤부터 金 氏는 運動圈의 北韓 追從的인 傾向에 對해 否定的 視角을 꾸준히 披瀝했다. 運動圈 上層에 ‘鋼鐵 김영환이 뭔가 異常하다’는 所聞까지 돌기도 했다.

    1980年代 中盤 우리나라 運動圈에 主體思想이 流入되는 데 決定的 役割을 한 人物이 金榮煥이지만, 本人이 저지른 일에 화들짝 놀라 가장 熱心히 불을 끄려 努力한 人物 또한 金榮煥이었다. 自身의 그런 努力에 對해서는 一切 言及하지 않고 오직 自身의 잘못에 對해서만 淡淡히 反省하는 態度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世上 모든 일엔 功過가 있게 마련이다. 1980~90年代 NL主思派에 굳이 功過를 매긴다면 공이 30%, 課가 70%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큰 過誤는 김영환의 反省文 內容대로 ‘親北的 雰圍氣’에 젖어 살았다는 點이고, 그로 인해 “北韓 住民들의 人權問題에 對한 南韓 및 國際社會의 關心이 늦어지도록 하는 데 한몫했다”는 點에 있다. (이는 特히 1990年代 運動圈의 過誤에 該當한다.) 하지만 如前히 北韓 人權 問題에 對한 關心이 低調한 것이 그 무슨 從北 主思派 때문이라고 본다면, 그 또한 相當한 錯覺이다.

    어쨌든 나는 1980~90年代의 우리나라 學生運動이 全혀 必要 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틋한 鄕愁 같은 것은 아니다. ‘當時의 時代的 條件下에서 그만큼의 學生運動마저 없었다면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닌가’하는 類型의 생각이다. 1960年代 以來로 世界 여러 나라에 다양한 學生運動이 있었는데 獨逸이나 日本에서는 極端的 테러리즘으로 흘렀다. 차라리 制度圈 안으로 吸收되고 政治的 市民運動 等으로 轉換한 것은 韓國 學生運動의 그나마 卓越한 點이 아닐까 싶다.

    나 나름대로는 1990年代 末에 轉向한 以後로 누구보다 줄기차게 NL主思派에 批判的인 글을 써왔다. 그런데 江山이 두세 番 바뀐 只今까지도 20餘 年 前에 내가 이미 썼던 類型의 글을 反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錯雜한 생각이 든다. 內容 또한 運動圈의 內幕을 正確히 알지 못하고 單純히 嫌惡하는 水準의 글들이라서 ‘그리하여 代替 얻으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疑問이 생긴다.

    이제는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

    間諜 잡는 일은 公安 當局에 맡기면 되고, 政治하는 사람들은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면 된다. 1980~90年代 우리나라 運動圈을 지나치게 偶像化하는 것도 問題지만, 지나치게 嫌惡하는 것도 적잖은 問題다. 只今 우리나라가 이 模樣 이 꼴이 된 것은 親日派나 保守勢力의 탓이 아니고 主思派의 탓도 아니며 모두의 責任일 따름이다. 主思派 殘黨은 社會를 混亂하게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不斷히 努力하겠지만 “從北 主思派 때문에 國政 運營에 蹉跌을 빚는다”는 式의 發言에는 失笑가 나올 따름이며, 大統領은 얕아 보이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體制의 根幹이 튼튼하면 自然히 사라질 存在들인데 굳이 그들에게 關心을 주고 殉敎者로 만들어줄 必要는 없는 것이다.

    反覆컨대 NL 酒邪派는 없다. 歷史 속에 사라졌다. 특정한 世帶에 일정한 傾向性으로 남아 있는 殘滓는 있지만, 그것은 批判하고 說得하면서 바꿔나갈 일이지 嘲弄하고 嫌惡한다고 풀릴 일이 아니다. 이른바 ‘從北 主思派’는 只今 現實에서는 한 줌도 되지 않는 勢力이다. 過去 NL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只今은 그들에게 가소로움이나 역겨움을 느끼지 同志愛를 느끼지는 않는다.

    北韓 政權에 對해서도 그렇다. 民主黨 支持者들이 이른바 ‘對北包容政策’을 强調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NL이거나 從北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을 理解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울까. NL이니 主思派니 하는 케케묵은 用語가 登場하는 글을 나도 이젠 그만 쓰고 싶다. 비아냥과 嫌惡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헛된 敵’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가 眞正 풀어야 일을 풀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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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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