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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최동원이 最高의 野球選手냐고?”|신동아

“왜 최동원이 最高의 野球選手냐고?”

홀로 빛나는 代身, 同僚와 함께 빛났던 ‘별똥별’

  • 황규인 동아일보 記者

    kini@donga.com

    入力 2021-12-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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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원 vs 선동열 事實 2勝 1無 2敗

    • 1984年, 便한 相對라며 롯데 올린 三星

    • 최동원 投打 活躍에 優勝컵은 롯데에

    • 5年 連續 200이닝 以上 마운드 지키며

    • 그래서,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선수 시절 최동원(1958~2011)이 역투하는 모습. [동아DB]

    롯데 자이언츠 選手 時節 최동원(1958~2011)李 力投하는 모습. [東亞DB]

    “선동열을 앞질러 최동원? 그렇다. 최동원이다. 왜냐하면 최동원은 그의 ‘무쇠팔, 光束區(光速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野球社에 몇 안 되는 ‘文化的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中略)

    ‘技倆과 깡다구의 만남’이 곧 最高를 뜻한다면 최동원은 그야말로 最高였다. 4大門 안에 있는 眼鏡店 主人들의 生計 維持에 一助했을 程度로 ‘金테 眼鏡’ 최동원의 出現은 ‘파란’ 그 自體였다. 방망이 좀 휘두를 줄 알고, 공 좀 던질 줄 안다던 當時의 ‘洞네 野球 스타들’李 너나 할 것 없이 金테 眼鏡을 찾았던 理由는 바로 ‘최동원’이란 이름 석 字 때문이었다.”

    그래,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1958~2011)이다. 2000年代 初盤 ‘代案 스포츠 웹진’을 標榜하던 ‘후추닷컴’에 올라온 이 글이 指摘하고 있는 것처럼 최동원은 그저 一個 野球選手가 아니라 當代의 ‘文化的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아이콘으로서의 최동원은 單純히 金테 眼鏡이라는 記標(記標) 하나만으로 說明할 수 있는 存在가 아니었다.

    冷靜하게 말해 投球 能力만 따지면 최동원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르는 선동열(58)과 比較해 보면 이 存在感 差異가 더욱 두드러진다. 認定하지 못하겠다면 全 世界에서 第一 큰 인터넷 檢索 엔진 ‘구글’에서 ‘나의 英雄 선동열’이라고 入力해 보시라. 선동열 이야기가 나오나, 최동원 이야기가 나오나. 선동열은 ‘나라의 寶物(國寶)’이고 최동원은 ‘釜山의 아들’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點에서는 天下의 선동열조차 최동원에게 ‘쨉’李 되지 않는다.

    永遠한 맞手, 최동원과 선동열

    최동원의 라이벌이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에이스 투수였던 선동열(58). [동아DB]

    최동원의 라이벌이자 해태 타이거즈(現 기아 타이거즈)의 에이스 投手였던 선동열(58). [東亞DB]

    프로野球 팬에게 두 選手 맞對決 結果가 ‘1勝 1無 1敗’라는 건 常識에 가깝다. 최동원度 살아生前에 이렇게 이야기했고 선동열도 이렇게 回想한다. ‘選拔 맞對決’만 따지면 이 結果가 맞다. 그런데 1980年代는 ‘投手 分業化’라는 말조차 生疏한 時代였다. 두 選手는 1986年 4月 19日(선동열 勝), 8月 19日(최동원 勝), 1987年 5月 16日(15回 無勝負) 以外에도 두 次例 더 맞對決을 벌인 적이 있다.



    두 選手가 처음 프로 마운드에서 맞對決을 벌인 건 1985年 7月 31日 釜山 구덕球場이었다. 이날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 先發로 나섰고 선동열은 0-0 同點이던 3回 1死 滿壘 狀況부터 강만식(64)에 이어 해태 타이거즈(現 KIA 타이거즈)의 두 番째 投手로 마운드에 올라 끝까지 競技를 책임졌다. 선동열이 承繼走者 3名에게 모두 홈 베이스를 許容하면서 롯데가 3-0으로 앞서가기 始作했고 結局 롯데가 4-2 勝利를 거뒀다. 최동원은 7回 在日僑胞 捕手 김무종(67·日本 이름 基모토 時게미)에게 2點 홈런을 내줬지만 나머지 이닝을 無失點으로 막으면서 完投勝을 記錄했다.

    1987年 4月 12日 競技는 더욱더 ‘事實上 先發 맞對決’이라고 할 만하다. 해태 先發로 나선 1962年生 投手 김대현이 1回末 1番 打者 홍문종(67)만 相對한 뒤 선동열에게 마운드를 넘겼기 때문이다. 當時에는 週末 競技 때만 先發 投手 豫告制를 施行하고 있었는데 김응용(81) 當時 해태 監督이 日曜日이었던 이날 ‘꼼수’를 쓴 것이다. 이날은 해태가 6-2 勝利를 거두면서 競技 끝까지 던진 선동열이 勝利投手, 6이닝 6失點한 최동원이 敗戰投手가 됐다.

    롯데, 選手 權益 챙기던 최동원 몰아내

    이 競技에 ‘僞裝 選拔’로 出戰한 김대현은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88年 8月 27日 서울 京畿를 앞두고 上京하던 途中 京釜高速道路에서 貨物 트럭과 衝突해 목숨을 잃고 만다. 같은 해 前半期에 7勝을 거둔 投手가 事故로 世上을 떠났지만 球團은 葬禮 過程에 거의 介入하지 않았다. 補償이랄 것도 없기는 마찬가지. 이 事件을 契機로 최동원은 물밑에서 結成 準備 中이던 ‘選手協議會’를 水面으로 끌어올리기로 마음먹는다.

    그해 9月 30日 大田 유성호텔에서 選手協議會 創立總會가 열리자 韓國野球委員會(KBO)와 球團은 최동원 選手와 그 家族에게 “選手 生活이 끝날 수 있다”며 脫退를 慫慂했다. 그리고 롯데는 “球團이 앞으로는 마음대로 못한다는 두려움으로 (選手協議會 結成을) 極烈 反對한다”던 최동원을 11月 22日 三星 라이온스로 트레이드한다. KBO는 隱退 當時 팀을 基準으로 選手 所屬팀을 區分하기 때문에 ‘釜山의 아들’ 최동원은 如前히 公式的으로 大邱 팀 三星 出身 選手로 남아 있다.

    三星은 1984年 韓國시리즈 때 롯데와 맞對決을 벌인 팀이기도 하다. 當時 前期리그 優勝을 차지한 三星이 OB 베어스(現 두산 베어스) 代身 ‘만만한’ 롯데를 韓國시리즈 파트너로 選擇하느라 ‘져주기 게임’을 벌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當時 동아일보는 “獅子 ‘野慾의 발톱’ 팬들 가슴을 찢다”는 題目으로 이 狀況을 批判했다.

    結局 롯데는 29勝 1無 20敗(勝率 0.592)를 記錄하면서 OB(28勝 1無 21敗·勝率 0.571)를 1競技 差異로 제치고 1984年 後期리그 優勝을 차지한다. 그런데 ‘4番 打者 최동원’이 없었다면 져주기 게임도 所用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해 8月 16日 구덕球場에서 열린 MBC 靑龍(現 LG트윈스)과의 競技에서 4回 1死 狀況에 救援 登板한 최동원은 6回末 4番 指名打者 김용철(64)李 負傷으로 競技에서 빠지자 4番 打順에 이름을 올린다. 以後 1-1 同點이던 8回末 1死 滿壘 狀況에 打席에 들어서 右翼手 키를 넘기는 決勝 2壘打를 때려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선동열과 選拔 맞對決을 벌여 이겼다.

    1984年 優勝, 그 모든 瞬間에 최동원

    최동원이 같은 해 韓國시리즈에서 나홀로 4勝(1敗)을 거두면서 팀을 優勝으로 이끌었다는 건 따로 說明이 必要 없는 이야기. 事實 當時 7次戰 三星 選拔이었던 在日僑胞 投手 김일융(70·日本 이름 니우라 히사오)도 6次戰까지는 최동원과 나란히 3勝(無敗)을 記錄하고 있었다. 김일융은 2011年 인터뷰를 통해 “내가 ‘나는 여기까지가 限界’라고 생각할 때 최동원은 ‘나는 어디까지든 가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差異가 勝負를 갈랐다”고 말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 그러면 1984年 韓國시리즈 最優秀選手(MVP)는 누구일까. 正答은 7次戰 8回初에 逆轉 3點 홈런을 친 當時 롯데 打者 유두열(1956~2016)이다. 최동원은 理解 韓國시리즈를 ‘최동원 시리즈’로 만들어놓고도 시리즈 MVP로 뽑히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事緣이 있다. 이날 韓國시리즈 7次戰이 열린 서울 잠실구장에서는 韓國시리즈뿐 아니라 正規시즌 MVP 記者團 投票도 함께 進行했다. 이미 최동원이 正規시즌 MVP를 받기로 한 狀況이라 韓國시리즈 MVP는 유두열에게 ‘나눠줬던’ 것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유두열(1956~ 2016)이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DB]

    1984年 韓國시리즈 MVP를 受賞한 유두열(1956~ 2016)李 副賞으로 받은 大宇自動車 ‘맵시나’ 乘用車 위에서 포즈를 取하고 있다. [東亞DB]

    酷使當하면서도 勝利 놓치지 않아

    김일융이 斟酌한 것과 달리 최동원度 限界를 느꼈다. 그는 7次戰에서 1-4로 뒤진 채 6回末 투구를 마친 뒤 道葦滄(84·日本 이름 都尉 쇼스케) 首席코치를 찾아가 “배가 너무 고프다”고 말했다. 도 코치는 “그게 이제 그만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뜻이라는 걸 競技가 끝나고야 알았다”고 回想했다.

    맞다. 최동원度 외로웠다. 野球에서 ‘에이스’를 象徵하는 등番號는 元來 1番이다. 최동원度 17이닝 노히트노런을 記錄한 경남고 時節에는 등番號 1番 選手였다. 그러나 롯데에서는 등番號 11番을 달았다. 최동원은 “1番은 외롭다”면서 “‘1字 두 個가 기둥처럼 잘 버텨달라’는 뜻에서 11番을 選擇했다”고 說明했다.

    아무도 自身을 代身할 수 없었지만 최동원은 이를 怨望하지 않았다. 팀이 必要하면 언제든 마운드에 올라 特有의 龍틀임 姿勢로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최동원이 1984年 韓國시리즈에서 如前히 歷代 最多 記錄인 40이닝을 던진 건 正規시즌 때 284와 3分의 2이닝을 消化한 다음이었다.

    ‘1980年代에는 다 그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983年 427과 3分의 1이닝을 던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장명부(1950~2005·日本 이름 後쿠시 히로아키)를 除外하면 같은 해 최동원보다 많이 던진 投手는 아무도 없다. 1980年代에 5年 連續(1983~1987)으로 200이닝 以上을 던진 投手도 최동원 한 名뿐이다.

    野球界 唯一한 ‘별똥별’ 최동원

    현대 野球는 ‘팀 臺 팀’으로 모든 力量을 結集해 맞붙는 長期 레이스다. 이제는 에이스라고 해도 投球 數 100個가 넘어가면 더그아웃에서 鋼板 時點을 苦悶하기 始作한다. 5回가 넘어 危機를 맞으면 ‘나를 좀 救援해 달라’는 듯 더그아웃을 쳐다보는 第1 先發 投手도 한둘이 아니다. 實際로 投手를 바꾸는 게 合理的인 選擇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野球팬度 없다.

    그러나 “마, 함 해보입시더”라며 끝내 마운드에서 버티는 投手는 野球팬 가슴에 불을 지핀다. 프로野球에서 ‘스타’로 불린 選手는 大部分 저 멀리서 혼자 빛나는 별에 가까웠던 게 事實. 팬 그리고 同僚가 있는 자리에 내려와 함께 꿈을 꾸게 만드는 별똥별로 남은 選手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최동원 한 名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동원은 모두가 所重히 지켜야 할 國保가 못 됐는지는 몰라도 野球팬 가슴에 누구보다 밝게 타오른 불꽃으로 남았다.

    ‘에이스’라는 表現은 元來 赤軍 飛行機를 5期 以上 擊墜한 空軍 파일럿을 일컫는 데서 由來했다. 人類 歷史上 가장 많은(352기) 敵機를 떨어뜨린 에레히 하르트만(1922~1993)은 이 擊墜 記錄보다 自身과 함께 출격한 요기(僚機·wingman)를 한 番도 잃지 않은 걸 더 자랑스러워했다. 최동원 亦是 아무리 ‘배가 고파도’ 競技場 안팎에서 ‘우리’를 抛棄한 적이 없다. 최동원과 함께 野球를 꿈꿀 수 있었다는 건 確實히 祝福이었다. 그래서,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이다.


    #최동원 #선동열 #釜山 #롯데자이언츠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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