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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年 沈默 깬 ‘全斗煥 最後인터뷰’가 어떻기에…|신동아

30年 沈默 깬 ‘全斗煥 最後인터뷰’가 어떻기에…

‘신동아’ 2016年 6月號 特種…發砲命令 全面否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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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1-11-23 1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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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누가 國民에게 銃을 쏘라고 하겠어”

    • “돌 맞아서 5·18 家族 誤解가 풀린다면…”

    • 北韓軍 浸透 情報報告…“오…그래?”

    • 1995年 12月 ‘골목聲明’ 以後 唯一한 인터뷰

    • 死亡 消息 傳해지자 記事 ‘再召喚’



    11月 23日 享年 90歲로 死亡한 전두환 前 大統領은 지난 10月 26日 逝去한 노태우 前 大統領과 함께 1979年 12·12 軍事叛亂을 일으켜 單숨에 權力의 中心에 섰다. 그는 이듬해 陸軍本部 保安司令官 身分으로 5·18 光州民主化運動을 武力 鎭壓하면서 政權 奪取의 基盤을 마련했다. 이어 같은 해 8月 27日 통일주체국민회의 構成員만이 投票權을 가진 ‘體育館 選擧’를 통해 第11代 大統領에 當選됐다. 退任 後에는 軍事叛亂 및 賂物 收受 等의 嫌疑로 處罰받았으나, 拘束 2年餘 만에 特別赦免으로 釋放됐다.

    以後 自身의 過誤에 對해 責任을 認定하지 않던 그는 ‘신동아’ 2016年 6月號 인터뷰(‘全斗煥·이순자, 30年 沈默을 깨다!’)를 통해 退任 後 처음으로 言論 取材에 應했다. 1995年 12月 2日 檢察 召喚에 反撥하며 發表한 ‘골목 聲明’ 以後 처음으로 言論에 登場한 셈인데, 結果的으로는 그의 最後인터뷰가 됐다. 이 인터뷰는 그의 死亡 消息이 傳해진 以後 다시 膾炙되고 있다.

    인터뷰는 그해 4月 27日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專 前 大統領 自宅에서 3時間餘 進行됐다. 인터뷰에는 夫人 이순자 女史, 정호용 前 議員, 고명승 前 3軍司令官, 윤덕大宗師, 김충립 牧師(前 首都警備司令部 保安班長)가 陪席했다. 二重 운덕大宗師는 天台宗 總務院長을 지낸 人物로 專 前 大統領의 赦免復權을 도운 因緣이 있다.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전두환 전 대통령. [조영철 기자]

    2016年 4月 27日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自宅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전두환 前 大統領. [조영철 記者]

    “어느 누가 國民에게 銃을 쏘라고 하겠어”

    專 前 大統領은 인터뷰에서 “事實 光州事態(光州民主化運動)하고 나하고는 아무 關係가 없다”고 말했다. 또 “어느 나라든 保安司令官이라는 權限과 任務가 있는데. 保安司令官이 中央情報部長 꺾고, 靑瓦臺를 꺾고, 이렇게는 絶對 못한다”며 責任 素材를 최규하 前 大統領 쪽으로 돌렸다. 이순자 女史 亦是 “(5·18 當時) 保安司令官은 大統領께 情報 助言은 할 수 있지만 作戰에는 參與할 수 없는데도, 光州事態의 直接 責任을 이 兩班한테 씌우려고 裁判을 만들었다”고 主張했다.



    또 前 前 大統領은 “그때 어느 누가 國民에게 銃을 쏘라고 하겠어”라며 “保安司令官은 情報 搜査 責任者다. 어떤 政治人, 어떤 大統領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그런 謀略을 그쪽(5·18 責任 轉嫁)으로 풀었는지 몰라도, 내가 光州事態를 일으킨 걸로, 主動한 걸로 나쁜 소리를 하는데 내가 以後 大統領이 됐으니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前 當時 保安司令官이 戒嚴軍에게 射擊命令을 내렸다는 ‘發砲命令說’에 對해 全面 否認한 것이다. 이어 ‘光州에 가서 謝過할 意向이 있는지’를 묻는 記者의 質問에는 “光州에 가서 내가 뭘 하라고요?”라고 反問하기도 했다. 專 前 大統領 인터뷰를 돕던 李 女史는 “閣下께서 光州에 가서 돌을 맞아서 모든 게, 5·18 家族들과 誤解가 말끔히 풀리고 正말 분이 다 풀린다면 뭘 못하겠어요”라고 거들었다.

    그는 未納 追徵金에 對한 質問에 李 女史가 抑鬱하다는 趣旨로 答하자 “왜 쓸 데 없는 소리를 해”라며 答辯을 가로막기도 했다. 專 前 大統領 一家가 내야 할 追徵金 總額은 2205億 원이다. 檢察은 2013年 서울中央地檢에 特別還收팀을 構成해 專 前 大統領의 未納 追徵金을 追徵하고 있다. 이와 關聯 서울中央地檢 犯罪收益還收부는 지난 6月 23日 專 前 大統領의 追徵金 總 2205億 원 中 1235億 원(56%)을 追徵한 狀態라고 밝힌 바 있다.

    北韓軍 浸透 情報報告…“오…그래?”

    專 前 大統領은 ‘5·18 當時 保安司令官으로서 北韓軍 浸透와 關聯된 情報報告를 받은 적이 있나’라는 質問에는 “全혀”라고 答한 뒤 陪席者 사이에서 關聯 對話가 이어지자 “오…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며 全혀 모르는 듯한 態度를 取했다. 陪席한 고명승 前 司令官 亦是 “北韓 特殊軍 600名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정작 1年餘 뒤 펴낸 回顧錄에서는 “光州事態는 北韓 特殊部隊에 依한 게릴라 作戰이었다”면서 約 15쪽에 걸쳐 5·18이 北韓에 依한 武裝 蜂起였고, 이에 不可避하게 市民들을 鎭壓했다는 趣旨로 썼다.

    이러다보니 新東亞‘ 인터뷰는 ‘北韓軍 介入說’을 主張한 지만원 氏 判決과 ‘全斗煥 回顧錄’의 出版·販賣 禁止 判決에 적잖은 影響을 미쳤다.

    2018年 10月 光州地法 民事13部는 5·18 團體 4곳과 當事者 5名이 지 氏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 訴訟에서 原告 一部 勝訴(9500萬 원 賠償) 判決을 했다. 또 2017年에는 ‘全斗煥 回顧錄’ 出版·販賣 禁止 處分을 내렸다. 當時 法院은 ‘신동아 인터뷰를 한 時點에서 1年이 채 經過하기도 前에 回顧錄을 통해 5·18을 自身에게 유리한 쪽으로 歪曲한 것은 一口二言(一口二言)의 矛盾的 主張’이라고 判斷했다.

    앞서 2017年 4月에는 5·18 民主化運動 當時 헬기 射擊을 目擊했다고 證言한 고(故) 조비오 神父를 ‘假面을 쓴 사탄’ 等으로 表現해 獅子(死者)名譽毁損 嫌疑로 裁判을 받아왔다. 이 裁判에서도 그의 인터뷰 發言은 名譽毁損의 主要 根據가 됐다.

    結局 全 前 大統領의 ‘신동아’ 인터뷰는 그의 生前 마지막 인터뷰가 돼버렸다. 이에 向後 社가(史家)들이 ‘전두환 時代의 그늘’을 敍述하는 데 있어 重要한 1次 飼料로 쓰일 展望이다. 공교롭게도 專 前 大統領은 1988年 11月 23日 아침 서울 연희동 自宅 앞에서 對國民謝過를 發表하고 百潭寺로 向한 그날 死亡했다.

    다음은 인터뷰 全文(全文)이다. 그의 育成이 실린 動映像도 公開한다.

    全斗煥 最後인터뷰
    全斗煥·이순자, 30年 沈默을 깨다!
    “光州 가서 돌 맞더라도 분 풀린다면…”


    ● “5·18 犧牲者 冥福 빌고 總體的 遺憾 表明”
    ● 光州市民, 戒嚴軍 爲한 靈駕薦度 祈禱…“業이야 業”
    ● “내가 5·18 發砲? 바보 같은 소리!”
    ● “정승화가 김재규 앞세우고 政權 잡으려 해 잡아넣었다”
    ● “退任 後 ‘포대기’ 씌워 차고 때리고…가혹했다”
    ● “노태우 大統領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같아 百潭寺行”
    ● 回顧錄은 李 女史가 準備…“5·18은 건드리지도 않아”


    熱階段을 오르니 初等學校 敎室만한 앞마당에 파릇파릇 잘 깎인 잔디가 눈에 들어온다. 눈부신 봄날, 粉紅色 보라色 철쭉꽃의 强烈함이 하얀 木蓮의 純粹함과 妙한 調和를 이룬다. ‘앉은뱅이’ 玉香나무는 동그랗게 파마를 했다.

    “여기 오셨으니 꽃구경 한番 하시죠. 많이 심었죠? 제가 大領 때 越南 聯隊長하고 오니까 할마이(이순자 女史를 指稱)가 이 집을 지었는데, 아 그때 이 洞네는 全部 논이어서 흙을 메우고 지었습니다. 저 소나무도 直接 심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 기자와 만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전두환 前 大統領과 그의 夫人 이순자 女史가 2016年 4月 27日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自宅에서 ‘신동아’ 記者와 만나고 있다. [조영철 記者]

    “꽃구경 하시죠”

    4月 27日 午後 全斗煥(85) 前 大統領과 이순자(77) 女史는 서울 연희동 自宅 뜰 앞 階段에서 ‘신동아’ 取材陣을 맞았다.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간 接見室에는 로널드 레이건 前 美國 大統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前 日本 總理, 요한 바오로 2世 敎皇과 함께 찍은 寫眞이 걸려 있다. 專 前 大統領의 ‘大統領 就任辭’를 담은 大型 額子도 異彩롭다. 直四角 形態의 소파 8個가 2個씩 붙어 있고, 소파 사이에 놓인 작은 卓子들 위엔 커피 2盞과 스낵이 놓여 있다.

    “功德이 높은 스님만 커피를 마실 수 있어요. 큰스님, 커피 드세요. 어, 令監 오슈?”

    陸士 11期 同期인 정호용 前 議員(特戰司令官, 國防部·內務部 長官 歷任)李 接見室로 들어와 一行과 人事를 했다. 專 前 大統領은 그를 ‘令監’ ‘鄭 長官’이라 稱했다. ‘큰스님’은 同席한 대한불교天台宗 운덕大宗師를 가리킨다.

    “우리 ‘鄭 長官’ 어른은 陸士 다닐 때부터 배짱은 將軍감, 行動은 매 맞을 감이었어요(웃음). 우리가 氣合 받을 때 ‘先着順’을 하면 이 親舊는 맨날 꼰빠리(꼴찌)야. 무슨 놈의 배짱인지 뛰질 않아. 남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는데 실실 걸어와. 部隊長들도 鄭 長官이 겁나서 魂을 못 내고. 머리가 아주 좋고 工夫도 잘했으니까요.”

    전두환 前 大統領 內外와 정호용 前 議員, 고명승 前 3軍司令官, 운덕大宗師, 김충립 牧師(韓半島프로세스포럼 代表)가 소파에 둘러앉았다. 金 牧師가 過去 保安司令部 將校 時節 專 前 大統領이 自身을 拔擢해 정호용 特戰司令官의 情報補佐官을 지낸 因緣을 들려주자 專 前 大統領은 記憶이 잘 안 나는 듯 “아 그랬어요?” 하며 짐짓 놀란 表情이었다.

    金 牧師가 “신동아 側과 大宗師께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 重要한 時期에 重要한 歷史 記錄이 될 것”이라며 意味를 附與하자 이순자 女史가 걱정스러운 듯 操心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가 靑瓦臺를 나온 지 30年이 돼가는데, 그동안 한 番도 記者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한 新聞社와 인터뷰 하면 다른 新聞社는 (記事를) 안 좋게 내던데…그게 좀 걱정스럽고 조심스럽긴 해요. 하긴 뭐,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더 내려갈 곳도 없지만요.”

    “사람은커녕 개미도 안 와”

    고명승 前 3軍司令官 “閣下께서 이런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것은 眞짜 數十 年 만이지요.”

    寫眞記者가 플래시를 터뜨리자 李 女史가 거듭 當付했다.

    “좋은 寫眞 골라 내실 거죠? 어떤 때는 意圖的인가 싶을 程度로 얄궂게 찍을 때도 있더라고요.”

    전두환 前 大統領 “어떻게든 찍으면 어때. 이제 나이가 다돼서, 黃泉길에 가서 大統領이나 한 番 더 할까, 늙어서 뭐(웃음).”

    記者 “운덕大宗師께서는 忠北 丹陽 救仁寺에서 먼 걸음을 하셨습니다.”

    全斗煥 “저는, 요새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개미도 잘 안 와. 사람이 힘이 좀 있으면 別別 사람이 다 찾아오는데. (요즘은) 찾아와봐야 그 사람 신발 닳지, 커피 한盞 못 얻어먹지…누가 옵니까. 그런데 오늘 이렇게 큰스님이 오신 건 積善하는 次元에서 오신 거예요(웃음).”

    운덕大宗師 “四月 初八日 行事도 다가오니 상월圓覺 大調査 스님(1911~ 1974)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天台宗을 重唱하고 1945年 救仁寺를 創建한 분입니다. 제가 1966年 ROTC 1期로 服務한 뒤 除隊하고 慶北 安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救仁寺에 들러 大調査 스님을 찾아뵌 게 因緣이었어요. 저는 佛敎 信者도 아니었지만, 當時 그분은 ‘生佛(生佛)님’으로 불릴 만큼 名聲이 藉藉해 한番 찾아뵌 겁니다. 以後 여태껏 ‘발이 붙어서’ 救仁寺에서 못 나오고 있습니다(웃음). 그분이 涅槃하시기 前에 ‘앞으로는 韓國이 世界를 主導한다’고 하셔서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全斗煥 “아니, 왜요?”

    운덕 “제가 東國大 經濟學科를 다녔는데, 經濟學科 敎授들은 ‘石油 한 방울 안 나는 韓國은 强大國, 一流國家가 될 수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大調査께선 反對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가난한 韓國이 어떻게 世界를 主導합니까’ 물었더니 ‘사람이 物質을 支配하지, 物質이 사람을 支配하는 게 아니야’ 하며 웃으셨어요. 世界 韻(運)李 韓國에 到來하면 모든 人材는 韓國으로 몰려오고, 그러면 世界 資源은 모두 韓國의 資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땅덩어리는 地球 全體로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상월圓覺 大調査의 豫言

    記者 “地球 全體를 봐야 한다?”

    운덕 “世界地圖를 보면 韓半島는 소의 머리, 日本은 소의 목줄기, 中國은 가슴팍, 유럽은 앞다리, 蘇聯은 등줄기, 美國은 뒷다리라는 겁니다. 또 濠洲는 소똥이고, 아프리카는 소 여물桶인데 ‘소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는 過程이 人類 文明의 發展 過程이다’고 하셨어요.

    잠자던 소가 깨려면 心臟의 動搖가 있어야 하는데, 일찍이 中國에서 孔孟(孔孟)과 漢字가 나오며 ‘앞가슴’이 뛰어 世界를 支配했고, 心臟이 뛰어서 소가 일어나려고 하니 그 힘이 앞다리로 가서 유럽이 主導했고, 앞다리의 힘이 뒷다리로 가면서 美國이 主導했다는 겁니다. 소는 일어서고 나서 머리를 들잖아요. 머리를 들면 몸뚱이는 따라오고요.

    그런데 韓國이 머리라는 겁니다. 1970年代 初, 그 가난한 時節에 大調査께선 ‘只今부터 世界 運은 韓國에 들어오기 始作했다’라고 아주 公開 宣言을 했어요.”

    全斗煥 “누가 그랬다고요?”

    운덕 “救仁寺를 創建하신 大調査 스님이.”

    全斗煥 “야…그 어른, 野心이 컸구먼. 제발 그리 되면 좋겠네(웃음).”

    專 前 大統領은 한 가지 主題로 對話가 오래 이어지면 集中力이 떨어지는 듯 자꾸 되묻곤 했다. 5·18 光州民主化運動과 關聯해 質問하면 “내가 그때 뭐하고 있었더라…” 하는 式이었다. 운덕大宗師는 以後 우리나라가 아시아競技大會, 올림픽, 월드컵을 開催하고 經濟富國으로 負傷했다며 南北統一도 韓國의 主導로 이뤄진다고 한 大調査의 豫言을 傳했다.

    운덕 “統一이든 世界大戰이든 큰 일이 이뤄지려면 天地(天地) 運이 도와야 하는데, 自己 政權 維持를 위해 惡政을 펴는 사람을 (하늘이) 돕지는 않는다고 해요. 北韓 主導로는 絶對 안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全斗煥 “제발 그리 되면 좋겠어요.”

    이순자 女史 “當時엔 北韓이 우리보다 經濟的으로도 나았고 韓國의 位相도 낮았는데, 그때 벌써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운덕 “그랬죠. 大調査께서는 韓國 主導로 統一이 되는데, 40年 뒤에 된다고 하셨어요.”

    全斗煥 “그럼 只今이 그 時期네요.”

    운덕 “只今부터 統一 運이 무르익어가는 거겠죠.”

    全斗煥 “아이고, 어림도 없습니다. 그건 希望事項이고….”

    이순자 “또 모르죠. 우리가 예전 歐羅巴(유럽)에 갔을 때, 누구도 東獨이 亡할 거라고 豫想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 낌새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統一이) 되더라고요.”

    “美國 얘기는 좋게 하세요”

    ‘신동아’ 인터뷰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생각을 밝히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덕대종사(왼쪽). [조영철 기자]

    ‘신동아’ 인터뷰에서 5·18 光州民主化運動에 對해 생각을 밝히고 있는 전두환 前 大統領과 운덕大宗師(왼쪽). [조영철 記者]

    운덕大宗師가 마음에 담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부처님오신날(5월 14日)과 5·18 光州民主化運動 記念日을 앞두고 마음을 열어 和解하자는 메시지였다.

    운덕 “온 國民이 하나로 뭉쳐서 和合하고 團結해야 멋있게 統一을 맞을 텐데, 只今 우리 社會나 政治權이 이렇게 葛藤을 빚고 해서야….”

    全斗煥 “스님이 이렇게 걱정해주시니 잘될 거예요.”

    운덕 “그래도 나라를 이끌어온 분들이 좀 생각을 갖고 이 問題에 關心을 가져야 東西 問題, 南北 問題도 풀리지 않겠습니까. 그냥 放置해선 안 될 일이라는 생각에 金 牧師와 여러 次例 얘기를 했어요. 新東亞 記者分도 두 次例 만났고요.”

    김충립 牧師 “大宗師 말씀은, 只今 우리나라에 南北統一 기운도 있으니 統一에 對備해 國民 大統合이 돼야 한다, 東西和合과 國民 大統合에 專 前 大統領이 參與하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운덕 “박근혜 大統領을 만나 大調査 말씀을 傳하면서 ‘任期 中에 統一이 될지 모르니 關心을 가지視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大調査께선 ‘統一이 되려면 周邊國의 參與도 重要한데, 韓國이 發展하려면 中國이 빨리 일어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韓國을 支援하는 美國은 自國의 利益을 위해 있는 것이니 (韓半島에서) 나가지 말라고 해도 언젠가는 나가게 돼 있다고….”

    이순자
    “北韓 核實驗 以後 유엔 (對北制裁) 決議案 通過 때 中國이 參與하는 걸 보고 朴 大統領이 中國에 功을 들인 結果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全斗煥 “맞아. 근데 큰스님, 내가 建議 하나 드릴게요. 只今 韓半島에서 美國이 主導權을 쥐고 있지만, 美國·蘇聯·中國이 世界를 支配하기 위해 暗暗裏에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거든요. 우리나라에도 CIA(美 中央情報局) 資金 支援 받는 사람이 많고, 蘇聯 KGB(舊 蘇聯 時節 祕密諜報 組織) 諜者들度 無知하게 들어와 있고, 中國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信徒들에게 바로 影響을 미치는 宗敎指導者인 큰스님이 (美國에 對해)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아주 큰 敵(敵)이 돼요. 그럼 없애버리려고 하지. 그렇기 때문에 外國, 特히 美國과 關聯한 말씀은 좋게 하세요(웃음). 只今은 美國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잖아요.”

    이순자 “우리가 美國 核雨傘의 保護를 받고 있어야 되는 形便이니까요.”

    全斗煥 “雨傘이 아니라 師團이 와서 지켜주고 있잖아요. 以北 놈들이 師團 겁나서 함부로 못 오는 거고.”

    “犧牲者 이름 다 적어와 祈禱”

    고명승 스님께서는 使命感을 갖고 大韓民國의 여러 가지 問題를 풀려고 하십니다. 이 問題(東西和合, 南北統一)도 國民的 次元에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운덕 “東西和合 問題는 5·18로 因해 全羅道 분들과 얽혀 있는데, 그걸 제대로 풀려면, 前 大統領께서 확 풀면 쉽게 풀리는 건데….”

    全斗煥 “그걸 내가 풀 수 있을까요?”

    專 前 大統領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을 빼면서 眞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記者들이 건넨 名銜을 담배 말듯 돌돌 말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운덕 “그럼요.”

    全斗煥· 이순자 “아, 그래요?”

    김충립 “이 問題를 풀려고 정호용, 고명승, 고(故) 이학봉 將軍 等 5共 人士들을 만나왔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大宗師께서 뜻을 같이하셨고, 5·18 團體 關係者들과도 어제 光州에서 會合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金 牧師는 5共 人士와 5·18 團體 關係者들이 人事하고 懷疑하는 寫眞을 보여주며 “전 前 大統領이 5·18에 對해 總體的으로 잘못을 是認하고 犧牲者와 家族들에게 遺憾을 표하면 5·18 團體 人士들이 5共 人士들과 和解할 수 있다는 뜻을 表明했다”고 傳했다.

    이순자 “저희 閣下께서는 光州民主化運動 때 犧牲된 市民들, 그리고 本人의 意思와는 相關없이 命令에 依해 治安을 維持하러 갔다가 犧牲된 戒嚴軍 모두 犧牲者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佛敎 信者도 아니었는데, ‘政治 바람’으로 外國에 亡命하느니 이 땅에서 죽겠다며 (1988年 11月) 百潭寺로 가서 2年 넘게 苦生했잖아요. 그래도 一國의 大統領을 지낸 사람이 百潭寺 가서 그냥 苦生한 것으로 끝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기서 2年 넘게 祈禱를 했습니다.”

    記者 “어떤 祈禱를 했습니까.”

    이순자 “光州 망월동에 사람을 보내 5·18 犧牲者 이름을 다 적어왔고, 陸軍本部에 가서 犧牲된 將兵 이름도 모두 찾아와 靈駕薦度 祈禱를 드렸어요. 그렇게 祈禱를 했는데도 아직 怨恨이 덜 풀린 거 같아요. 그때 祈禱드리던 寫眞이 여기 제 回顧錄 (原稿)에 나와 있는데…여기 있네요. 祈禱 發願文하고.”

    “繼續 報復이었지”

    李 女史는 A4 用紙 2張을 記者에게 건넸다. ‘5·18 犧牲者들을 위한 百日祈禱를 드린다’는 當時 新聞 記事와 함께 ‘1996年 8月 玉(獄) 밖에서 함께한 5·18 犧牲者를 위한 靈駕薦度祈禱’라는 題目의 寫眞이 실려 있었다.

    이순자 “부처님은 모든 게 因緣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모든 게 業이 덜 끝나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李 女史는 목이 멘 듯 暫時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盧3金(盧泰愚·김영삼·金大中·김종필)李 會同해서 ‘5共은 (百潭寺 生活) 그만하고 서울 와서 살라’고 해서 서울에 왔는데, 느닷없이, 새로 무슨 犯罪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옛날 事件을 다시 裁判해서 (前 前 大統領을) 矯導所에 보내 2年 넘게 矯導所 生活을 했거든요. 이건 따지고 보면 머리에다….”

    ‘1盧3金 會同’은 1989年 12月 15日 4黨 總裁가 모여 보름 뒤 專 前 大統領을 光州聽聞會 證言臺에 세워 特委 活動을 매듭짓기로 한 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

    全斗煥 “繼續 報復이었지, 報復”.

    이순자 “머리에 포대기 씌워놓고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면서 돌 던지고 발로 차고 때리고 하는 것보다 더한 刑罰을 받았습니다. 事實 사람을 죽였다고 쳐도 ‘苛酷한’ 刑罰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한 番도 辨明 안했어요.”

    記者 “전 前 大統領의 생각도 같습니까.”

    이순자 “저는 閣下의 代辯人이 아니고, 却下하고 百潭寺度 가고 그러다 보니 ‘閣下의 分身’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거와 閣下가 생각하는 거는 같아요.”

    記者 “왜 辨明을 안 했습니까.”

    이순자 “우리는 처음으로 權力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사람들이고, 우리가 받는 이것(苦痛)까지도 民主化로 가는 하나의 過程이라고 생각하고 默默히 받았습니다. 靑瓦臺 나오실 때 (前 前 大統領은) 58살이었어요. 隱退하기 너무 이른 나이죠. 大統領이 任期 마치면 退任하고, 國民이 (大統領을) 바꾸고 싶으면 바꾸고 해야 民主化 아닌가요? 그걸 閣下가 했잖아요. 58살에 (靑瓦臺에서) 나와 30年間 人生의 黃金期에 當했어도, 우리는 그런 役割을 했다고 自負하기에 누구도 怨望하지 않아요. 우리가 百潭寺에서 2年間 佛經을 읽으면서, 閣下가 矯導所에 계실 때도 ‘얽힌 業을 各自 있는 곳에서 풀자’고 했어요. 百潭寺 2.5坪, 獨房 3.5坪에서.”

    全斗煥 “百潭寺는 刑務所 같아서…조그만 房이 있거든요. 그만해요, 이건 業報야 業報.”

    이순자 “閣下 矯導所 계시는 동안 저는 中央僧伽大가 있는 開運寺(서울 안암동 所在)에서 500餘 名을 위한 100日 遷都氣道를 드리고 49齋를 세 番 했습니다. 앞서 金泉에 있는 수도암에서도, 中國의 地藏菩薩 모셔놓은 절에서도 犧牲者 名單을 가지고서 祈禱드렸어요.

    그래서 저는 靈駕(靈駕, 佛敎에서 말하는 靈魂)들은 遷都(薦度, 죽은 사람의 넋이 淨土나 天上에 나도록 祈願함)됐다는 마음의 確信이 오더라고요. 正말 마음을 다해 祈禱했어요.”

    운덕大宗師는 “잘하셨다”고 말한 뒤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거꾸로 쓰는 日記長

    記者 “건네주신 資料에 祈禱 寫眞과 記事가 있는데, 回顧錄의 一部인 것 같네요. 最近 全 前 大統領 回顧錄이 出刊된다는 消息이 報道됐는데요. 回顧錄에 5·18 發砲命令과 關聯된 內容도 담겼습니까.”

    이순자 “한두 番도 아니고…엉터리(보도)가 많아. (回顧錄을)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全斗煥 “내보낼 것도 없고, (5·18과 關聯해서)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건 (누군가가) 띄우는 거야.”

    이순자 “제 回顧錄은 거의 다 됐어요. (前 前 大統領이 우리 나이로) 86世인데, 이제는 두 老人네 健康 管理하면서 子孫들한테 애 안 먹이고 살다 갈 일 생각할 나이인데, 이것(回顧錄)으로 우리가 政治나 名譽回復을 할 생각은 全혀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名譽에 對한 執着도 없고요. 한때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저희 이름을 건 記錄은 남길 必要가 있다는 생각에 準備한 겁니다.”

    記者 “두 분의 回顧錄이 各各 出刊됩니까. 어떤 內容이 담겼나요.

    全斗煥 “이 兩班(이순자 女史)이 먼저 하고 있고, 난 準備도 안 하고 있어.”

    이순자 “大統領 夫人으로서, 平凡한 女子로서, 男便이 大統領 되는 바람에 겪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쓰고 있어요. (우리에 對한) 誤解가 많은 것도 理解가 不足하기 때문인 것 같아 國民과 靑瓦臺의 距離가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記者 “回顧錄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신 건가요.”

    이순자 “처음에는 스프링 노트에 쓰다가 量이 많아지니까 컴퓨터로 해야겠더라고요. 第 回顧錄은 代筆者 몇 番 만나 資料 보고 쓴 게 아니에요. ‘말 많고 頉 많은 時期’에 對한 이야기이고, 形式도 모르지만 ‘거꾸로 쓰는 日記冊’처럼 썼어요. 그러니 名譽回復 次元도 아니고요.”

    全斗煥 “(李 女史를 가리키며) 컴퓨터 잘해. 난 하나도 못하고. 이 兩班, 直接 쓰고 있어.”

    記者 “5·18이나 최규하 前 大統領의 辭任과 關聯한 內容도 있습니까.”

    이순자 “光州事態 責任이 있고 없고를 떠나, 閣下는 光州事態 나고 3個月 後에 大統領이 되셨다는 그 業報 때문에 ‘光州事態 虐殺者’라는 陋名을 쓰고 얼마나 苦生했습니까. 요즘은 (光州)民主化運動이라고…(부르죠).”

    全斗煥 “事實 光州事態하고 나하고는 아무 關係가 없어요.”

    이순자 “5·18 裁判에서 ‘光州에서 發砲 螟蛉子는 없었다’고 分明하게 結果가 나와 그나마 虐殺者라는 陋名은 벗었어요. (5·18 當時) 保安司令官은 大統領께 情報 助言은 할 수 있지만 作戰에는 參與할 수 없는데도, 光州事態의 直接 責任을 이 兩班한테 씌우려고 裁判을 만들었지만 그건 얹을 수가 없었어요. 이 兩班은 2年 동안 苦生했지만 그 德分에 陋名은 벗었습니다.”(상자기사 參照)

    “大統領 생각 全혀 없었다”

    全斗煥 “나는 元來 政治人이 아니고 軍人이란 말이야. 軍人으로서 그때 나라가 어렵고, 내가 大統領이 안 될 수가 없어서 한 건데, 내가 大統領이 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오. 大統領 하고 싶으면 뭐 하러 軍隊 들어갔겠어요. (大統領 되려는) 計劃이 全혀 요만큼도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約束한 대로 하고 딱 한 番(大統領 單任) 하고 나왔잖아. 사람들은 내가 計劃을 다 세워서 한 줄 아는데, 내가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었다면 (大統領 자리에서) 나오지도 않았겠지.”

    이순자 “저도 그래요. 1980年 1月 15日에 韓國외국어대 英語學科 編入試驗을 치렀어요. 學校에 한番 알아보세요. 이 兩班이 大統領 하려 했다면 제가 왜 編入試驗 치르려고 試驗場에 앉아 있겠습니까. 그때 이 兩班은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요.”

    한국외대에 이런 事實을 確認해달라고 要請하자 “入學한 學生들의 學的 資料는 남아 있는데, 應試生 資料는 現在 남아 있지 않아 確認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記者 “12·12 때는 執權 意志가 全혀 없었다는 겁니까.”

    이순자 “그랬으니 그 이듬해 外大 編入試驗을 치렀죠.”

    全斗煥 “12·12街 뭐더라?”

    이순자 “10·26事件 나고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새로 搜査한 거요.”

    全斗煥 “아, 그거. 정승화는 왜 잡아놨느냐. 우리가 볼 때, 젊은 將軍들이 볼 때 (정승화가) 김재규를 앞세워 政權을 잡으려 했으니까. 김재규 머리로는 안돼. 큰일 나. 그래서 잡아넣었어.”

    이순자 “그래서, 10·26 일어난 뒤에도 大統領을 殺害한 김재규의 態度가 너무 거침없어서 ‘美國의 使嗾를 받아서 (10·26 事件을) 일으켰다’는 所聞이 많았어요.”

    專 前 大統領 夫婦의 이러한 ‘現代史 認識’은 노태우 前 大統領과 허화평 前 議員 等 5共 人士들의 그것과 櫃를 같이한다. 5共 聽聞會와 12·12 및 5·18 事件 裁判 過程과 인터뷰에서 5共 人士들은 “12·12는 10·26 延長線上에서 일어난 不可避한 偶發的 衝突이지 權力掌握 意圖는 없었다”고 主張한다. 10·26은 김재규, 鄭昇和, 김계원(當時 大統領祕書室長)의 合意로 일어났기 때문에 鄭昇華 陸軍參謀總長을 調査해야 했지만, 그가 戒嚴司令官에 任命되면서 不得已 衝協會 이 빚어졌다는 것.

    5共, YS, DJ, 美國의 認識

    또한 전두환 當時 合同搜査本部長이 戒嚴司令官을 잡아가면서 一躍 ‘새로운 强者’로 浮上했다고 해도 5·18 當時 戒嚴司令部―2軍司令部―光州 地域戒嚴軍으로 이어지는 命令體系를 뛰어넘어 ‘操縱’할 수는 없었다고 主張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12·12부터 5·18까지 一連의 過程 속에 우리 醫師와 關係없이 등 떠밀려 간 거지 意圖한 건 아니다”(허화평) “重大한 時期에 ‘決斷力이 弱한’ 崔 大統領이 國政을 책임진 것은 國家的 不幸이다”(노태우)라면서 김영삼 大統領이 政權을 잡고 나서 自身들을 叛亂軍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한다(한국대통령 統治口述史料집 2 전두환 大統領 17쪽, 연세대 國家管理記錄員 便, 先人出版社, 2013/ 盧泰愚 回顧錄 上 248쪽, 朝鮮뉴스프레스, 2011).

    그러나 新軍部에 맞선 金永三(YS), 김대중(DJ) 前 大統領과 美國의 認識은 5共 人士들과는 正反對다.

    “1980年 4月 30日 中央情報部長 署理 全斗煥의 意見이, 다음 날에는 戒嚴司에서 열린 全軍 指揮官會議 決意가 新聞 1面 톱에 登場하는 等 新軍部가 前面에 나서려는 듯한 兆朕이 나타나기 始作했다.”(김영삼 回顧錄 2, 192쪽, 백산서당, 2000)

    “新軍部는 처음부터 나와 光州를 겨냥했던 게 分明하다. 나는 10·26 以後 軍部의 政治介入 可能性을 繼續 警戒해왔는데 이런 點이 新軍部를 刺戟했을 것이다. (…) 新軍部는 學院 騷擾를 助長하고 北韓 威脅을 誇張해 이를 政治 前面에 나서는 口實로 삼으려 했다. 政權 掌握을 容易하게 하기 위해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김대중 自敍傳 1, 408쪽, 三人出版社, 2010)

    “美國은 전두환 所長이 이끄는 韓國軍 將校들이 軍部를 掌握한 12·12事件에 對해 어떠한 事前 通告도 받지 않았다. 美國은 韓國軍 將軍들이 韓美聯合司令部의 作戰統制權에 屬하는 部隊를 適切한 通報 없이 使用한 것에 對해 憤怒했으며, 權力을 强奪하기 위해 武力을 使用한 것에 對하여 깊이 憂慮했다. (…) 12·12事件 以後 韓國 軍部 指導者들이 政權 掌握을 抛棄하거나, 民主化 日程을 세울 意圖가 없다는 證據가 累積됨에 따라 美國은 甚히 遺憾스럽게 생각했다.”(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揭示된 美國 政府 聲明書 一部)

    記者 “5·18 當時 앞서 두 次例 鎭壓은 且置하고, 全南道廳과 YMCA 建物 掌握을 위한 光州 再進入作戰을 할 때는 ‘사람을 殺害해도 좋다는 發砲命令이 들어 있다’고 裁判部가 判決했습니다.”(상자기사 參照)

    “保安司令官이 그렇게는 못해요”

    全斗煥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때 어느 누가 國民에게 銃을 쏘라고 하겠어. 光州事態 때 내가 保安司令官이었을걸? 保安司令官은 情報 搜査 責任者요. 어떤 政治人, 어떤 大統領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그런 謀略을 그쪽(5·18 責任 轉嫁)으로 풀었는지 몰라도, 내가 光州事態를 일으킨 걸로, 主動한 걸로 나쁜 소리를 하는데 내가 以後 大統領이 됐으니 그러는 거지.”

    정호용 “光州事態 (責任)하고 우리는 아무 相關이 없어요.”

    이순자 “當時 最高責任者는 최규하 大統領이고, 1980年 8月 16日 光州事態에 責任을 지고 辭退하셨잖아요.”

    崔 大統領은 “學生들의 騷擾와 光州事態에 對해 國政 最高指導者로서 政治道義上 責任을 痛感해 왔다”며 辭任 聲明을 發表했다.

    김충립 “勿論 崔 大統領이 社會混亂을 收拾하지 못한 責任을 지고 辭任했지만, 當時 전두환 保安司令官의 實力者로서 ‘파워’가 셌으니까 그렇게 보는 거죠.”

    이순자 “崔 大統領이 大統領 되려다가 國內가 너무 시끄러우니까 이 兩班한테 자리를 내주고 갔는지도 모르죠. 그건 스토리가 좀 맞겠지만, 자꾸 ‘實力者’라는 건 좀 그렇습니다. 死刑宣告 받고 矯導所에서 20年 살다가도 眞犯이 나타나 無罪로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矯導所에서도 自己가 犯人이 아니라고 主張해요. 우리도 우리가 아는 眞實이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는 거고요. 眞實이 永遠히 안 풀린다고 해도…. 우리가 政治的 赦免이 急하다고 해서 거짓말한다면 그건 歷史 앞에 罪를 또 짓는 거예요.”

    全斗煥 “다 지나간 얘기인데…너무 無識해서 그런 거예요. 軍隊는 아무리 天下에 없는 놈이라 해도 師團長이 軍團長을 凌駕해서 絶對 못해요. 어느 나라든 保安司令官이라는 權限과 任務가 있는데. 保安司令官이 中央情報部長 꺾고, 靑瓦臺를 꺾고, 이렇게는 絶對 못합니다.”

    고명승 “제가 整理의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全斗煥 “어, 그래요.”

    ‘瞬發力’ VS ‘決斷’

    고명승 “閣下께서 允許해주셨기에 簡單하게 整理하겠습니다. 그동안 5·18事件과 關聯해 많은 인터뷰 要請을 받았지만 한 番도 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記者분들과 스님을 모신 자리에서 한番 整理해보겠습니다.”

    高 前 司令官은 10餘 分에 걸쳐 5·18 關聯 36年史(史)를 整理하면서, 5·18 特別法 制定과 전두환·노태우 前 大統領 拘束은 김영삼 前 大統領의 ‘瞬發力의 結果’로 分析했다.

    “法院은 最初에 5·18과 關聯해 鄭昇華 戒嚴司令官은 內亂幇助4로, 金大中 前 大統領은 內亂陰謀罪로 判決했습니다. YS는 1993年 5月 ‘12·12는 쿠데타였지만 歷史의 審判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YS 選擧캠프 常任顧問이던 정승화 前 陸軍參謀總長 等 22名이 軍 刑法上 叛亂 및 內亂 目的 殺人 嫌疑로 告訴했습니다.

    이 過程에서 1995年 10月 박계동 民主黨 議員이 ‘노태우 祕資金 事件’을 暴露하자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總裁는 노태우 祕資金 20億 원을 받았다고 記者會見을 합니다. 그러자 ‘DJ에게 노태우 祕資金 20億 원이 갔다면 YS에게는 얼마나 갔겠느냐’는 國民的 疑心이 提起됐고 YS는 血壓이 오른 겁니다.

    이때 YS 特有의 瞬發力이 發揮돼 전두환·노태우 前 大統領을 拘束하기에 이릅니다. 그 後 DJ가 大統領에 當選되고 나서 5共 人士들에 對한 赦免復權이 斷行됐지만 前職 大統領에 對한 禮遇와 年金 問題 等은 解決된 게 없습니다.”

    歷史는 再構成을 통해 사람들에게 認識된다고 했던가. 歷史라는 이름으로 取捨選擇된 것엔 이미 個人的인 見解가 들어가 있다. 自己 處地에서 記錄을 남긴다. YS는 回顧錄 下 (141~142쪽, 조선일보사)에서 고명승 前 司令官이 ‘瞬發力’이라 稱한 것을 ‘一生一大의 決斷’이라고 表現했다.

    “노태우는 搜査가 進行되자 在任 中 約 5000億 원의 ‘統治資金’을 造成해 退任 때 1700億 원假量이 남았다고 對國民 謝過文을 發表했다. 憤怒를 억누르며, 이 事件은 到底히 默過할 수 없고 政經癒着 惡弊를 永遠히 追放할 機會로 삼겠다는 決意를 다졌다. (…) 김대중 氏가 盧泰愚로부터 20億 원을 받았다는 ‘實吐’는 엄청난 衝擊이었다. 1992年 大統領選擧를 앞두고 민자당을 脫黨해 나의 選擧運動을 괴롭혔던 노태우 氏가 野黨 김대중 候補에게 巨額을 줬다는 것도 놀랍지만, DJ 스스로 ‘光州 虐殺 殺人魔’라고 非難해온 노태우 氏에게 돈을 받은 것은 納得할 수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好材를 만났다고 積極 攻勢를 펼칠 DJ는 盧泰愚로부터 不正 蓄財者金을 받은 事實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盧泰愚 謝過文 發表 前) 먼저 發表한 것이다. (…) 노태우 氏의 不正蓄財 事件으로 觸發된 國民들의 엄청난 公憤은 不淨腐敗에 對한 處罰에서, 그 原因이 됐던 12·12 軍事叛亂과 5·18 光州民主化運動에 對한 虐殺者 斷罪 要求로 이어졌다. 나로서는 一生一大의 무거운 決斷이 必要한 瞬間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또한 高 前 司令官은 5·18에 對한 政治的 判斷과는 別個로 光州地域 戒嚴司令官-2軍司令官-陸軍參謀總長(戒嚴司令官)-大統領으로 이어지는 命令體系에서 保安司令官, 負袋를 配屬시킨 정호용 當時 特戰司令官의 責任은 없다고 主張했다.

    “그래서 5·18 때 최규하 大統領이 陸軍參謀總長과 關係 長官들을 帶同하고 헬기를 타고 光州에 내려가서 直接 作戰會議를 하고 指揮를 했습니다.”

    이순자 “그래도 아직 5·18 團體들이 誤解를 하니까요. 閣下께서 光州에 가서 돌을 맞아서 모든 게, 5·18 家族들과 誤解가 말끔히 풀리고 正말 분이 다 풀린다면 뭘 못하겠어요. 只今까지도 이렇게 우리가 苦生을 했는데. 그런데 5·18 當時에 閣下가 셌으니깐 모두가 ‘5·18 責任者’라고 하는데, 이걸 ‘오케이’하는 건 別個 問題인 거 같아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건데.”

    全斗煥 “아니야. 목에 칼이 들어오고 그런 거 없어. 軍隊에서는 法이 딱 있으니까.”

    記者 “비록 5·18 光州民主化運動에 對해 直接的인 責任이 없다고 해도 1970年 西獨의 빌리 브란트 總理가 歷史的 責任感으로 폴란드 유대人 慰靈塔에 獻花하고 무릎 꿇은 것처럼 謝過할 意向은 없습니까.”

    全斗煥 “光州에 가서 내가 뭘하라고요?”

    記者 “빌리 브란트 總理도 自身이 하진 않았지만 나치의 잘못을 代身 謝罪했습니다. 歷史的 事實에 對한 眞心을 보여준 그의 謝罪는 獨逸 統一과 유럽 平和를 向한 東邦政策의 象徵的 出發點으로 評價받았습니다(당시 言論은 ‘總理 한 名이 무릎 꿇었지만 獨逸 全體가 일어났다’며 큰 意味를 附與했다).”

    이순자 “2次大戰 當時 獨逸은 歐羅巴 사람들에게 너무 잘못했고, 그래서 獨逸말만 해도 歐羅巴 사람들이 돌아설 程度로 感情이 아주 나빴어요. 그 분이 獨逸人의 後裔로서 그렇게 한 건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光州事態는 兩非論이 있다고 봐요. 民主化든 世界 平和를 위해서든 暴力事態로 번졌을 때는 政府가 어떤 式으로든 鎭壓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閣下는 戒嚴軍의 行動 自體에 對한 象徵性이 있는 만큼 신중할 必要는 있어요. 勿論 閣下가 망월동 墓地에 參拜를 못 할 理由는 없지만요.”

    記者 “5·18 當時 保安司令官으로서 北韓軍 浸透와 關聯된 情報報告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이 問題를 提起한 池萬元 社會發展시스템硏究所腸은 最近 세 番째로 告訴당했다).”

    全斗煥 “全혀.”

    이순자 “閣下가 靑瓦臺를 警護하는(수도경비사령부) 30大隊長 때 北韓 特殊軍(1968年 김신조 一行의 1·21 浸透事件)李 내려온 걸 물리쳤고, 1師團長 하실 때 北韓이 땅窟을 파고 南侵한 걸 잡아냈죠. 그래서 光州事態 때 間諜을 집어넣어서 光州事態를 惡化시켰거나, 또 그걸 奇貨로 以北에서 사람을 들여보냈거나 그럴 蓋然性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證據가 없어요. 그래서 閣下는 아예 말씀을 안 하세요.

    只今 그 말(北韓軍 浸透說)을 하는 사람은 閣下가 아니고 池萬元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番도 만난 적이 없고, 獨不將軍이라 우리가 統制하기도 不可能해요. 그걸 우리와 連結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北韓 特殊軍 600名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全斗煥 “뭐라고? 600名이 뭔데?”

    정호용 “以北에서 600名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氏가 主張해요.”

    全斗煥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5·18 때 光州로. 그래서 그 北韓軍들하고 光州 사람들하고 같이 蜂起해서 잡았다는 거지.”

    全斗煥 “오…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專 前 大統領은 正말로 궁금하다는 表情을 지었다.

    “市民, 戒嚴軍 모두 犧牲者”

    이순자 “5·18度 36年이 지났고, 北韓이 核實驗을 하면서 國家的으로 宏壯히 不安한 時期이니 서로가 더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當時엔 (서로가)그 길이 國家를 위한 길이란 信念을 가지고 한 일이니 서로에 對한 미움을 풀고, 國家 發展을 위해 마음을 合했으면 좋겠어요. 말 한마디에 엇拍子가 날 수 있으니….”

    李 女史는 서랍에서 또 다른 2張의 A4 用紙를 꺼냈다.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光州事態가 난 後 3個月 만에 大統領이 되었다는 理由로 虐殺者라는 陋名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5·18 裁判 過程을 통해 그 陋名은 벗었습니다. 저는 當時 情報司令官 兼 安企部長職(‘中央情報部長 서리’의 오기)에 있으면서 大統領과 戒嚴司令官에게 指揮助言은 해줄 수 있었지만 作戰에는 關與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責任이 누구에게 있건, 나는 한때 大統領을 지낸 사람으로서 光州에서 犧牲된 사람들이 모두 王生剋(落)하기를 祈願해왔습니다. 나는 늘 光州事態 때 犧牲된 市民뿐 아니라 事態를 鎭壓하러 光州에 出動했다 犧牲된 戒嚴軍 모두가 犧牲者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디 光州事態 36周年을 맞은 이때에, 北韓에서 原子彈을 만들어 모두가 不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때에, 大宗師님의 (東西和合) 努力이 열매를 맺어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國家 發展을 위해 힘을 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追徵金? 떳떳하다 말 못해”

    全斗煥 “내가 말한 게 아니고 우리 令夫人이 하는 말입니다(웃음).”

    이순자 “閣下가 생각하시는 걸 제가 옆에서 알기 때문이죠. 牧師님이나 大宗師님께서 하시는 일(東西和合)을 도울 수 있도록 表現을 婉曲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우리가 없다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고요.”

    記者 “指揮 體系 때문에 5·18 責任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굳이 祈禱할 理由가 있었나요.”

    이순자 “回顧錄에 仔細하게 적어놨는데. 옛날에 却下 號를 지어주신 스님이 却下 在任 中에 하신 말씀이, 建國 以來 繼續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건 儒敎(士禍)를 통해서, 또 理念 때문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慰靈祭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事實 그때는 ‘불이 난 집에 불 끄러 들어간 消防手 役割’을 맡았으니 불 다 끄고 세간 整理해놓고 나오셨잖아요. 運命이 끌고 들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오셨고. 權力에 欲心이 없는 분이에요. 나와서 그 스님 생각이 났어요.”

    記者 “不便할 수 있겠지만 追徵金에 對한 質問도 드려야겠네요. 이 집도 競賣에 넘어갔다가 다시 산 건가요.”

    이순자 “李 집은 제가 샀고, 앞집(別채)은 却下 이름으로 돼 있어요. 저 앞집이 却下 이름으로 競賣價 돼 男동생이 딴 사람한테 팔릴까 싶어, 땅 판 돈으로 16億 원에 落札받았어요. 그런데 男동생도 事業을 하다가 銀行 押留가 들어와 막내며느리가 이 집을 競賣 받아 샀어요. 아무리 追徵金이라고 해도 한 집을 두 番이나 競賣에 부쳤어요.”

    記者 “珍島개와 家財道具도 競賣에 넘어갔죠?”

    이순자 “예. 追徵金에 對해서는 저희가 國民들께 떳떳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抑鬱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盧 前 大統領 回顧錄을 보면 김영삼 候補 選擧資金으로 3000億 원을 支援했다고 해요. 박계동 議員이 計座番號 대면서 暴露하니까 가지고 있던 2600億 원을 宣告한 거예요. 그러니 完納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盧 大統領 額數에 ‘발란스’를 맞추라고 ‘危’에서 指示가 와서 企業들 불러 (前 前 大統領에게) 얼마씩 냈다 하라고 했데요. 우린 計座番號度 없습니다. 우리는 宣告할 當時에 300몇 億밖에 없었는데, 追徵金 完納 못 했다고 前任 大統領 禮遇 못 한다고 하는 건….”

    全斗煥 “왜 쓸 데 없는 소리를 해.”

    專 前 大統領 一家가 내야 할 追徵金 總額은 2205億 원이다. 1995年 檢察은 專 前 大統領이 在任期間 中 7000億 원의 祕資金을 造成해 이 中 5400億 원을 민정당 創黨·運營資金으로 使用하고 退任 때 1600億 원을 갖고 나와 管理했다고 發表했다. 1997年 大法院 確定判決 直後 檢察은 預金과 無記名 債券 等 312億9000萬 원을 追徵했지만 以後 3年마다 돌아오는 追徵時效 滿了 延長에 汲汲했다. 追徵金 執行時效人 2013年 10月을 앞두고 輿論이 惡化하자 國會는 그해 6月 時效를 2020年까지 延長하는 ‘全斗煥 追徵法(公務員 犯罪에 關한 沒收 特例法 改正案)’을 통과시켰고, 檢察 搜査도 本格化했다.

    이에 따라 前 前 大統領 一家의 美術品과 不動産에 對한 押留 節次가 始作돼 600餘億 원이 追加 還收됐다. 長男 전재국 氏의 집 倉庫에서 나온 美術品들과 子女들이 내놓은 不動産 一部가 處分됐지만, 京畿道 烏山 땅(13萬 坪) 等 남은 不動産은 景氣 不況 탓에 값이 떨어지면서 賣却 作業이 遲遲不進하다. 지난해 末 現在 檢察이 專 前 大統領 一家로부터 還收한 金額은 1134億餘 원(全體 追徵額의 51.4%)이다.

    記者 “長男이 檢察 搜査에 對備해 美術品 流通에 關與한 A氏를 慫慂해 海外 出國시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순자 “그림은 다 들고 갔어요. 祕資金 調査를 한다면서 우리 親庭어머니 肖像畫도 갖다 팔고, 우리 둘째 아들이 外國에 있으면서 그린 그림도 다 가져다 競賣하고, 個人이 그린 건 왜 가져갔는지….”

    記者 “서울 江南의 땅, 美國 캘리포니아 州 뉴포트 備置의 邸宅, 서울 한남동 빌딩, 時空社 建物 敷地…이렇게 繼續 追徵되다 보니 ‘돈이 있으면서 안 낸다’는 非難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순자 “근데요. 記事들이 全部 엉터리예요.”

    記者 “무슨 말씀이신지….”

    이순자 “우리 막내 査頓宅이 美國 拿罷밸리에서 와이너리를 運營하는데, 그걸 우리 것이라고 하니까 미칠 노릇이죠.”

    “죽일 程度 아니면 물고 뜯지 마”

    專 前 大統領의 三男 재만 氏의 匠人인 이희상 會長이 運營하는 飼料·製粉企業 동아원은 2005年 美國 캘리포니아 州 拿罷밸리에 ‘다나 에스테이트’를 設立해 와인 製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동아원 專務인 재만 氏가 實所有者라는 疑惑이 끊이지 않자 2013年 檢察 搜査가 始作됐다. 동아원그룹은 지난 2月 사조그룹에 引受됐다.

    全斗煥 “우리 막내 査頓은 그 와이너리, 그런 것만 하는 분이야.”

    이순자 “그래서(査頓) 집을 ‘작살’을 내놨잖아요. 時空社 本社 建物도 大統領 되기 前부터 갖고 있던 땅이에요. 우리가 百潭寺 가기 前에 財産을 모두 公開하고 다 내놨거든요.”

    李 女史는 1988年 11月 百潭寺로 떠나기 前 狀況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百潭寺로 떠나기 얼마 前 저녁에 ○○○氏가 찾아와 ‘노태우 大統領께서 閣下를 빨리 延禧洞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財産을 모두 獻納하겠다고 하세요. 그래야 國民들에게 임팩트가 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國民들은 大統領職을 利用해서 얼마나 置簿했느냐고 하는데, 越南 갔다 와서 장만한 이 집도 내놓으라뇨. 그것도 제 名義인데. 우리 身世를 그렇게 많이 진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火를 냈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우리를 外國으로 쫓는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니고 盧 大統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도 못 찾아오는 산골로 가자’ 해서 百潭寺로 갔죠. 무서웠어요. 外國에 亡命家라고 그러더니….”

    李 女史는 그때가 생각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맻혔다.

    全斗煥 “鄭 長官도 처음 듣지?”

    정호용 “네. 처음 들어요.”

    이순자 “6·29 宣言을 自己(盧 前 大統領)가 했다고 하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아닌가 해서, 우리 夫婦는 빨리 百潭寺로 간 겁니다. 政治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거예요. 그 前에는 ‘盧 大統領이 지켜줄 텐데 왜 자꾸 이렇게 몰려가나’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無防備 狀態에서 百潭寺로 간 겁니다. 憤怒했다기보다 무서웠어요.”

    記者 “6·29 宣言에 對해선 盧 前 大統領의 主張과 엇갈립니다. 長男 재국 氏가 6·29 宣言과 關聯해 ‘메신저’ 노릇을 했습니까.”

    이순자 “그건 回顧錄 나오면 얘기하죠.”

    全斗煥 “가만있어봐. 回顧錄이고 뭐고 間에. (李 女史를 쳐다보며) 그만해.”

    專 前 大統領은 5·18 發砲 問題와 追徵金에 關해 이어지는 質問이 언짢은 듯했다.

    全 財産 29萬1000원

    “근데 자네들도 言論人이니까, 앞으로 國民들에게 敎訓的인 意味에서 (記事를) 남기는 게 좋을 거야. 어느 나라든지 國家元首를 지낸 사람에 對해서는 國民的 禮遇가 있어야 돼. 집안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고, 나라는 大統領 지낸 사람이면 조금 잘못이 있더라도 죽일 程度가 아니면 좋은 敎訓 程度만 남기되, 자꾸 물고 뜯는 게 아냐.”

    記者·김충립 “하지만 言論엔 言論의 役割이 있습니다. 남은 財産이 29萬1000원이라는데….”

    이순자 “그 얘기하면 속이 터집니다. 1997年 追徵金 宣告하면서 金融資産이 全部 押留됐는데, 百潭寺 갈 때 一部 現金은 있었어요. (押留 通帳 中) 休眠計座에서 利子가 29萬 원이 된 거예요. 그런데 盧武鉉 大統領 時節에 高額 滯納者는 裁判廷에 나가서 ‘나는 이것밖에 없다’며 宣誓하게 만들었어요. 當時 閣下는 집도 있었고, 珍島개, 피아노, 應接세트 等 財産을 다 적었어요. 그때 우리 辯護士가 잘못한 게 500萬 원 未滿은 申告를 안 해도 되는데, 그새 利子 29萬 원을 적은 거죠. 우리는 宣誓만 하는 要式行爲라고 해서 無防備로 나갔는데, 判事가 閣下한테 ‘29萬 원밖에 없는 사람이 골프를 어떻게 치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閣下가 唐慌했죠. 言論에도 報道됐고. 우리가 嘲弄거리가 돼버렸어요.”

    全斗煥 “아주 나쁜 놈들이야.”

    檢察은 2003年 2月 追徵金 未納額(當時 1872億 원)을 안 내고 있는 前 前 大統領의 財産을 公開해달라며 法院에 ‘財産明示申請’을 냈다. 專 前 大統領의 財産 目錄엔 ‘現金은 없고 預金과 債券 29萬1000원’으로 明示됐다. 이것이 押留 通帳 中 休眠計座에서 發生한 利子 總額이라는 게 李 女史의 說明이다. 專 前 大統領은 “全 財産이 29萬 원”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알려져 ‘固有名詞’가 됐다는 것.

    이순자 “김영삼 前 大統領이 우리를 ‘種크’ 먹인 거지. 이렇게 追徵金을 못 낼 줄 알았다면 矯導所에서 1000日(勞役) 하면 되는데, 나오라고 해놓고는 前職 大統領을 ‘×걸레’로 만드냔 말이에요.”

    정호용 “우린 赦免復權이 다 됐는데도 年金 안 나오지, 國立墓地 못 가지, 勳章도 다 返納하라고 해서 返納했지…. 周邊에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軍人들이 어디 돈 모아둔 게 있습니까. 年金 받고 살아야지. 支給하지 않은 年金의 50%는 우리가 낸 거요. 50%가 政府에서 도와주는 건데, 우리가 낸 돈도 안 내주니….”

    이순자 “그건 報復이죠. 勳章을 回收하더라도, 5·18 事態를 鎭壓하면서 받은 勳章은 回收해가는 건 말이 된다고 쳐요. 그런데 6·25 參戰, 越南戰 參戰한 功勞로 받은 勳章도 다 가져가고. 越南戰 枯葉劑 被害者들에게도 每달 얼마씩 주는데 5·18과 관계됐다고 다 뺏으면….”

    정호용 “나는 (枯葉劑 被害者) 申請도 안 했어요. 그것(枯葉劑) 때문에 糖尿도 생기고 했는데. 그래도 陸軍大將 出身 아닙니까. 그러니 돈 좀 얻어먹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이순자 “財産이 押留돼 있는데 財産稅는 왜 나오는지….”

    記者 “그래서 高額 常習 滯納者 名單에 包含됐습니까.”

    이순자 “네. 처음엔 現金 押留하고, 3年 있다가 집을 押留하는데 讓渡所得稅가 3億인가 나와요. 그러고는 地方稅가 10%인가 또 나와요. 근데 그때 이미 却下 金融資産은 다 押留돼서 3年이 지났기 때문에, 讓渡所得稅도 地方稅도 낼 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울市는 新聞에 高額 稅額 滯納者로 이름을 올리더라고요. 그래서 이番에 追徵할 때 거기서 稅金 빼고 追徵해달라고 했어요. 高額 滯納者 全斗煥…何如튼 망신스러운 건 말도 못해요.”

    “大統領은 사람 많이 만나야”

    專 前 大統領은 2003年부터 高額 滯納者 名單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搜査過程에서 三南 名義의 서울 한남동 建物을 專 前 大統領 名義信託 財産으로 分類해 이를 公賣處分했는데, 이때 發生한 讓渡所得稅와 加算金 等 4億1000萬 원을 未納해 高額 常習 滯納者 名單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한便 現行 國立墓地法엔 전두환, 노태우 前 大統領처럼 內亂罪를 지은 사람은 安葬할 수 없도록 規定돼 있다. 赦免·復權을 받은 境遇에 對한 別途 規定은 없어 國家報勳處 安葬對象審議委員會가 判斷한다. 萬若 事後 國家葬(葬)李 치러지면 國立墓地 安葬 資格이 주어진다. 이때는 國務會議 審議로 決定해야 한다.

    記者 “두 분이 20代 總選에서 투표하는 모습이 報道됐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많이 當選되길 바란다’고 하셨는데, 結果는 어떻게 보십니까.”

    全斗煥 “(暫時 苦悶하다가) 내가 얘기하면 額面 그대로 받아들일는지 모르겠지만, 난 只今 政治에 對해서 關心이 없어요. 政治에 對해서는 評을 들으려고 하지 마세요. 與黨이 잘됐든 野黨이 잘됐든 좋은 사람 많이 되면 되지.”

    記者 “來年 次期 大選과 關聯해서는….”

    全斗煥 “大統領 統治權에 對한 얘기니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건방지게 그럴 수 없어요. 先輩 大統領이라 해도 뭐라 할 수 없지. 相當히 어려워. 한 가지 助言해주고 싶은 것은, 大統領은 여러 分野의 사람을 많이 만나야 돼요. 自己가 平素 工夫한 걸로는 안 됩니다. 時代가 자꾸 變하고. 特히 우리나라는 南北 對峙가 深刻하고. 參謀가 알아서 모시겠지만. 可及的이면 많은 分野의 사람들을 불러서 만나주시면 좋겠어요.”

    記者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非常對策委員會 代表를 잘 아시죠?”

    全斗煥 “잘 몰라.”

    記者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10·26 以後 新軍部가 統治權을 確立하기 위해 設立한 機關) 財務分課委員으로 있다가 11, 12代 全國區 國會議員을 지내며 專 前 大統領 時節 經濟政策을 立案했는데요.”

    全斗煥 “김종인 議員을 알긴 아는데 그렇게 街깝진 않아. 國保委 들어온 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밑에서 하니까. 나는 사인만 해줬지. 잘 몰라(웃음). 貴한 손님 오셨는데, 오늘 스님이 재미없었겠어요. 오늘 異常하게 얘기하다 보니 우리 집에 ‘調査 오는 사람들’처럼 됐는데. 어떻게 됐든 間에 옛날 얘기인데. 나는 옛날 얘기이지만 하나도 記憶이 안 나. 나이도 많고.”

    “좋네, 좋아”

    운덕 “이 자리에 앉아 얘기 들으면서 나도 참 誤解가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事實 光州 問題는 前 大統領께서 關聯돼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各自의 主張과 생각이 달라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네요. 마음 아픈 모든 사람의 誤解도 풀어졌으면 좋겠네요. 政府나 光州 市民들이 이런 얘기를 얼마만큼 믿고 듣느냐는 問題가 남았습니다.”

    이순자 “閣下가 망월동 墓地에 假面, 그래서 誤解를 풀고 眞實이 밝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충립 “그럼 只今까지 對話를 綜合해보면, 5·18 當時 重要職에 있었고 그 直後 大統領의 한 사람으로서 犧牲者들의 冥福을 빌고, 家族에게는 慰勞의 말씀을 드리며, 總體的으로 遺憾의 뜻을 표한다는 遺憾 表明이네요.”

    全斗煥 “네. 좋네, 좋아.”

    全·李 인터뷰 이렇게 이뤄졌다


    신동아는 지난 年末부터 전두환 前 大統領 인터뷰를 推進했다. 올해 1月號부터 김충립 牧師(前 首都警備司令部 保安班長)의 肉筆手記 ‘陰謀와 暗鬪’를 連載하면서 金 牧師의 厖大한 옛 記錄을 檢證해왔는데, 1960~80年代 激動의 時期를 다루는 이 手記의 中心에 朴正熙, 전두환 前 大統領이 있었다. 신동아는 5共 人士들을 包含, 過去 權力 周邊 人士들과 接觸하며 事實關係를 確認했으나 專 前 大統領과는 直接 連絡이 닿지 않았다. 5共 人事를 통해 만남을 要請했지만 默默不答이었다.

    그러다 新東亞와 金 牧師의 거듭된 說得, 天台宗 운덕大宗師의 會同 提案 끝에 연희동은 4月 27日 드디어 自宅 門을 열었다. 운덕大宗師는 7次例 天台宗 總務院長을 지내며 오늘의 宗團을 키운 人物로 國民和合 次元에서 專 前 大統領의 赦免復權을 도운 因緣이 있다. 金 牧師는 1980年 新軍部에 依해 軍服을 벗었지만, 5共 人士와 5·18 關聯 團體의 和解를 周旋해왔다.

    인터뷰는 4月 27日 午後 約 3時間 동안 進行됐다. 以後 이순자 女史, 고명승 前 司令官 等과 電話通話를 했다. 대면 및 電話 인터뷰에서 이순자 女史는 記憶을 되살려 比較的 또박또박 答辯했지만, 專 前 大統領은 가끔씩 記憶을 잘 떠올리지 못했고 몇 次例 했던 말을 反復했다. 李 女史는 “誤解와 偏見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며 미리 準備한 資料를 記者에게 건네기도 했다. 인터뷰 자리에 많은 人員이 參席한 탓에 인터뷰가 一貫된 흐름으로 進行되지 않아 一部 對話 內容은 主題別로 順序를 바꿔 再構成했다.

    專 前 大統領에 對한 評價는 엇갈린다. 인터뷰는 論難의 餘地가 큰 政治的 葛藤과 對立, 5·18民主化運動 當時 發砲命令, 專 前 大統領의 謝過, 5共 人士들의 認識, 追徵金 問題 等 敏感한 事案들을 담았다. 인터뷰의 一部 內容은 正確한 事實 糾明이 必要한 一方的 主張일 수도 있지만, 專 前 大統領의 나이와 健康 狀態 等을 考慮할 때 于先 그의 育成을 그대로 記錄으로 남기는 作業도 意味가 클 것이다. ‘어둠의 時代’ 5共을 照明하고 意味를 짚어보는 일은 앞으로도 繼續돼야 할 課題다.

    5·18 發砲命令 論難
    大法院_ “再進入作戰 强行은 發砲命令”
    全斗煥_ “모르고 하는 바보 같은 소리”


    1997年 4月 17日 大法院의 ‘5·18 內亂 事件’ 判決文은 ‘發砲命令’과 關聯, 크게 3가지 時間대로 나눠 有無罪를 判斷했다.

    먼저 最初 發砲와 關聯해서는 “5月 21日 以後 陸軍本部로부터 2軍司令部를 거쳐 光州 戒嚴軍에게 移牒, 下達된 自衛權 發動 指示를 內容으로 하는 傳統을 發令하거나, 5月 22日 自衛權 發動 指示라는 題目으로 된 戒嚴訓鍊 第11號를 下達함에 있어 關與하였다고 認定할 證據가 없다. (…) 示威鎭壓의 效果를 早速히 올리기 위해 ‘武裝示威隊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發砲하여도 좋다’고 하는 이른바 ‘發砲命令’李 位 被告人들의 指示에 依해 陸軍本部로부터 光州의 戒嚴軍에게 下達됐다고 認定할 證據가 없다”고 判示했다.

    3空輸旅團 11大隊 兵力이 5月 21~23日 광주교도소로 接近하면서, 銃擊을 加해 오는 武裝示威隊와 交戰 過程에 市民을 死亡하게 한 것도 內亂目的殺人罪로 處罰할 수 없다고 判斷했다. ‘不法한 攻擊을 敢行하는 武裝示威隊로부터 矯導所와 같은 主要 國家保安施設을 防禦하기 위한 正當行爲’라고 봤다.

    여기까지 보면 이순자 女史의 말처럼 ‘發砲命令을 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虐殺者 陋名을 벗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月 27日 實施된 光州 再進入作戰에 對해선 內亂目的殺人 責任을 認定한다.

    “光州 再進入作戰(常務忠情作戰)은 이희성 戒嚴司令官이 作戰指針으로 完成하고, 이를 全斗煥 황영시 等이 參與한 가운데 實施를 決定했다. (…) 再進入作戰 實施 强行한 데는 殺傷行爲를 指示 乃至 容認하는 意思가 있었음이 분명하고, 示威隊에 對한 射擊을 前提하지 아니하고는 遂行할 수 없는 性質이어서 作戰 範圍 내 사람을 殺害해도 좋다는 發砲命令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 光州 示威를 早速히 制壓해 示威가 다른 곳으로 擴散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內亂目的을 達成할 수 없는, 다시 말해 執權에 成功할 수 없는 重要한 狀況인 만큼 作戰에 抵抗 乃至 障礙가 되는 範圍의 사람들을 殺傷하는 것은 內亂目的을 위한 必要 手段이다.”

    이 같은 大法院 判決에 對해 前 前 大統領은 “모르고 하는 바보 같은 소리”, 李 女史는 “判決文이 ‘맞다’ 해도 우리가 아는 眞實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


    10·26 1979年 10月 26日 午後 7時 40分頃 서울 鍾路區 궁정동 中央情報部 安家에서 김재규 中情部長이 朴正熙 大統領을 弑害한 事件.

    12·12 1979年 12月 12日 전두환·노태우 等이 이끌던 新軍部勢力이 정승화 陸軍參謀總長을 連行하면서 일으킨 軍事叛亂.

    5·18 光州民主化運動 1980年 5月 18~27日 光州·全南 市民들이 軍事獨裁에 反對하고 戒嚴令 撤廢, 政治 指導者 釋放 等을 要求하며 벌인 民主化運動.

    6·29 宣言 1987年 6月 29日 노태우 民主正義黨 代表가 國民의 民主化와 大統領 直選制 改憲 要求를 받아들여 發表한 特別宣言. 6·29 宣言 發表 過程에 對해선 전두환, 노태우 前 大統領의 主張이 엇갈린다.

    5共, 5共 特委 5共和國(5共)은 전두환 等 新軍部勢力이 主導해 1981年 3月부터 1988年 2月까지 持續된 다섯 番째 共和國. 5共 特委는 第13代 國會 內에 設置된 ‘第5共和國에 있어서의 政治權力型 非理調査 特別委員會’ 略稱.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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