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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狀況室長’ 박남선 “죽기 前에 謝罪했었어야지…”|신동아

‘5·18 狀況室長’ 박남선 “죽기 前에 謝罪했었어야지…”

[單獨 인터뷰] “容恕 求하는 者와 그렇지 않은 者 區分해야”

  • 오홍석 記者

    lumiere@donga.com

    入力 2021-11-23 1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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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 審判 못 받았는데…사죄 없이 죽어 錯雜”

    • 盧 弔問? 憤怒 남아 있지만 아들 謝過에서 眞情性 봤다

    • 문전박대당한 노재헌, 이듬해 또 찾아와 謝過

    • 加害者가 잘못 비는데 容恕 않으면 나도 괴롭다

    • 全南道廳에서 逮捕된 뒤 死刑宣告, 2年 半 服役

    • 1988年 ‘신동아’에 “光州市民들은 왜 銃을 들었나” 手記 寄稿

    • 光州를 政治的으로 利用만 하는 政治人들

    • 5·18 被害者에게 ‘5月 光州’는 如前히 現在進行形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씨.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조문한 이유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진상 규명에 협조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5·18 光州民主化運動 當時 市民軍 狀況室長을 맡았던 박남선 氏. 그는 노태우 前 大統領을 弔問한 理由에 對해 “잘못을 認定하고 謝罪하면서 眞相 糾明에 協助하면 容恕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영철 記者]

    “罪를 지었으면 謝罪를 한 다음 죽었어야지…”

    ‘5?18 狀況室長’ 박남선(67) 氏는 11月 23日 전두환 前 大統領의 死亡 消息에 이같은 心境을 밝혔다. 그는 戒嚴軍이 全南道廳을 暴力 鎭壓한 1980年 5月 27日, 最後의 瞬間까지 現場을 지키다 逮捕돼 死刑宣告를 받은 人物이다. 10月 27日에는 故 노태우 前 大統領 殯所를 찾아 조문하祈禱 했다. 신동아는 앞서 11月 4日과 23日 두 次例 그와 對面?電話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그와의 一問一答.

    -先生님 消息 들으셨나요.

    “무슨 消息이요?”

    -전두환 前 大統領이 오늘 아침 8時 45分에 自宅에서 死亡했답니다.

    “아이고...아직 뉴스를 못 봤습니다.”

    -心情이 어떠신가요.

    “罪를 지었으면 謝罪를 한 다음 죽었어야지…학살의 主犯이 갑자기 죽었다니 마음이 錯雜합니다.”



    -노태우 前 大統領은 弔問했는데 이番에는 어떻게…

    “제가 왜 그 사람 弔問을 갑니까. 謝罪도 안한 사람을. (前 前 大統領은) 이승에서 지은 罪에 對해 審判을 못 받았는데 저승에서라도 받을 겁니다.”

    -全 前 大統領 夫婦는 2016年 신동아 6月號 인터뷰(‘全斗煥·이순자, 30年 沈默을 깨다!’)에서 ‘5·18 光州民主化運動 犧牲者들 冥福을 빌면서 遺族들 鬱憤이 풀린다면 光州에 가서 돌 맞더라도 가겠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當時 軍 最高 實力者로서 發砲 命令을 내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自己가 그때의 잘못함을 率直히 이야기하고 眞相 調査에 協助하고 容恕를 빈다면 被害者들度 容恕 안 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繼續해서 眞相을 밝히지 않고 잘못이 없다는 套로 말하고, 또 5?18 當時 헬기 射擊을 目擊한 數千 名의 市民이 있는데도 헬기 射擊은 없었다고 하니 어떻게 容恕할 수 있겠어요. 이제 死亡했으니 光州 사람들한테는 永遠히 傷處로 남겠죠.”

    5·18 當時 狀況室長으로 武裝 市民軍 指揮

    -5·18 當時 狀況室長으로 武裝한 市民軍을 指揮하신 걸로 압니다. 어떻게 狀況室長을 맡게 되신 건가요.

    “그때 제가 地域 豫備軍 副中隊長이었어요. 또래 豫備軍을 많이 알다 보니 自然스럽게 狀況室長이 된 거죠. 特別히 잘난 點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5·18 前까지는 民主化運動에 큰 關心이 없으셨다고요.

    “일찌감치 事業을 始作해 돈을 엄청 잘 벌었거든요. 當時 運營하던 骨材業體 規模가 꽤 컸어요. 5·18이 없었으면 只今쯤 財閥이 돼 있었을 겁니다(웃음).”

    -20代 中盤 겪은 5·18로 人生 行路가 完全히 바뀌신 거네요.

    “그때 全南道廳에서 붙잡힌 뒤 ‘505保安部隊’ 地下室로 끌려가 모진 拷問을 當했어요. 以後 內亂罪·戒嚴罪 等의 嫌疑로 裁判에 넘겨졌고요. 1·2審에서 다 死刑宣告를 받았는데, 天主敎界가 救命運動을 벌인 德에 無期懲役으로 減刑이 됐습니다.”

    當時 그의 목숨을 救하는 데 앞장선 人物은 윤공희 大主敎(天主敎 光州大敎區長)와 金壽煥 樞機卿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전두환 保安司令官을 찾아가 5·18 關聯者에게 善處를 베풀 것을 呼訴한 끝에 朴氏는 無期囚가 됐고, 2年 半쯤 受刑生活을 하다 1982年 12月 聖誕節 特赦로 出所했다. 하지만 이미 ‘잘나가던 靑年 事業家’의 삶은 끝난 뒤였다.

    “虐殺 元兇들이 政權을 잡은 世上에서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會社는 그새 亡해 버렸고, 저는 가난한 犯法者가 돼 있었습니다. 抑鬱했죠. 그때부터 ‘殺人魔 전두환 處刑’을 외치며 繼續 데모를 했어요. 숱하게 잡혀갔고, 持續的으로 監視를 當했죠. 暫時 就業이라도 할라치면 機關員이 會社에 찾아와 ‘저 사람 빨갱이입니다’ 하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平凡한 生活이 不可能했습니다.”

    “謝罪하면 容恕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박남선 씨가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조문한 뒤 유족인 노재헌 변호사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위로하고 있다. [뉴시스]

    박남선 氏가 10月 27日 노태우 前 大統領 殯所를 弔問한 뒤 遺族인 노재헌 辯護士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館長을 慰勞하고 있다. [뉴시스]

    朴氏는 “얼마 前 計算해 보니 5·18 以後 只今까지 職場에 다닌 期間이 19個月에 不過하더라”며 “家族들한테 未安한 點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아들이 工夫를 제법 잘했거든요. 서울 名門大에도 갈 수 있는 成跡이었어요. 하지만 生活費를 대줄 餘力이 없어 집 近處 大學에 보냈습니다. 아들은 늘 제게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저 未安할 뿐이에요.”

    -말씀을 들어보면 5·18은 先生님께 많은 傷處를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노태우 前 大統領 殯所를 찾아 조문하新 까닭이 궁금합니다.

    “理由는 두 가지예요. 첫째, 5·18 以後 41年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내가 發砲 命令을 내렸다. 잘못했다. 容恕를 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태우 氏 아들(노재헌 辯護士)은 2019年부터 每年 光州에 찾아와 謝罪하고 容恕를 빌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分身이라고 하잖아요.”

    朴氏는 盧 辯護士가 2019年 처음 만남을 要請했을 때 斷乎히 拒絶했다고 한다. 그런데 盧 辯護士는 이듬해 다시 그를 찾아왔고, 아버지가 謝過하고자 한다는 뜻을 傳했다.

    “올해 5月에 또 왔죠. 盧 辯護士는 아버지 病勢가 好轉되면 直接 모시고 謝罪하러 오겠다고 約束했어요. 眞實을 밝힐 수 있는 資料를 提供하겠다고도 했고요. 그 約束이 지켜지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門前薄待를 當하면서도 繼續 謝過하는 모습에서 眞情性이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盧 辯護士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弔問을 가겠다’고 約束했죠.”

    -앞서 盧 前 大統領을 弔問한 理由가 두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전두환 氏를 包含해 如前히 잘못을 認定하지 않는 虐殺 元兇들에게 메시지를 傳達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잘못을 認定하고 謝罪하면서 眞相糾明에 協助하면 容恕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容恕를 求하는 者와 그러지 않는 者는 區分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盧 前 大統領에 對한 憤怒는 사라지신 건가요.

    “천만에요.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죠. 다만 加害者가 잘못을 비는데 容恕하지 않고 마음에 담고 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뿐 아니라 나까지 괴롭잖아요. 그래서 容恕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朴氏는 1988年 5月 ‘신동아’에 “光州市民들은 왜 銃을 들었나”라는 題目의 手記를 寄稿한 일이 있다. 當時는 노태우 大統領 任期 첫해로, 아직 軍事政權의 서슬이 퍼렇던 때다. 그는 “5·18의 實相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直接 겪은 이야기를 傳하고자 勇氣를 냈다”고 回顧했다.

    朴氏 手記에는 光州 市民들이 抗爭 途中 戒嚴軍 捕虜를 붙잡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當時 軍人들이 저지른 暴力에 家族과 이웃을 잃고 憤怒에 차 있던 市民들은 “저들에게 우리가 當한 만큼 갚아주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朴氏는 “戒嚴軍이 우리를 無慈悲하게 對했다고 해서 똑같이 報復하면 안 된다. 捕虜 處理 問題는 내게 맡겨달라”며 同僚들을 다독였다. 以後 軍人에게 밥을 먹이고 軍部隊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復讐 代身 容恕를 擇한 셈이다. 이番 盧 前 大統領 弔問도 그 延長線에 있는 行動이었다고 볼 수 있다.

    “盧泰愚 弔問 批判하는 사람들 心情 理解한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무장한 시민과 공방을 벌이고 있는 계엄군. [동아DB]

    1980年 5月 21日 全南道廳 앞에서 武裝한 市民과 攻防을 벌이고 있는 戒嚴軍. [東亞DB]

    -先生님이 盧 前 大統領을 弔問한 뒤 5·18 關聯 團體들이 “犧牲者나 遺族 뜻과 無關한 個人 行動일 뿐”이라는 內容의 聲明을 냈습니다.

    “저는 그분들 마음을 充分히 理解합니다. 5·18 有功者가 저를 包含해 4500名 程度 돼요. 大部分이 1980年 以後 큰 苦痛 속에 살고 있죠. 生活苦로 自殺한 사람이 80名이고, 600名 程度는 基礎受給對象者예요. 저도 次上位階層으로 살림이 넉넉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병든 原因이 어디 있을까요. ‘5月 光州에서 虐殺을 저지른 이들 때문에 내 人生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加害者가 容恕를 빌지도 않았으니 憤怒가 쉽게 사라질 수 없어요.”

    -盧 前 大統領이 5·18에 對해 直接 謝過했다면 被害者 및 遺族들 反應이 달랐을까요.

    “달랐을 겁니다. 光州 사람들이 그렇게 막혀 있거나 偏狹하지 않습니다. 오래前부터 ‘眞實을 밝히고 잘못을 뉘우치면 容恕하겠다’는 內容의 聲明을 여러 次例 發表했어요. 이番에 弔問을 다녀온 뒤 ‘잘했다’는 激勵 電話도 300統 가까이 받았습니다.”

    尹錫悅 國民의힘 大選候補는 지난 11月 10日 光州를 찾았다. 全斗煥 擁護 發言으로 論難을 빚은 그는 5·18民主墓地를 參拜하며 “제 發言으로 傷處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當時 尹 候補는 五月 어머니 5名과 市民들에 가로막혀 追慕塔까지 가지 못했다. 박남선 氏는 5.18民主墓地로 向하는 尹 候補를 案內하는 役割을 맡았다.

    -尹錫悅 國民의힘 候補가 光州 5.18民主墓地 參拜할 當時 옆에 계시던데요.

    “候補 側에서 먼저 連絡이 왔어요. 墓地에 參拜하고 내가 5.18 遺跡地인 尙武臺 營倉 둘러볼 豫定인데 案內 해줄 수 있냐고 물었죠. 尹 候補 訪問으로 光州가 시끄러웠는데, 反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제가 案內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큰소리가 안 났는데 墓地에서 어머니들이 목소리 내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生떼 같은 子息들이 죽었는데 화내시는 걸 理解해야죠.”

    -5·18 關聯者들의 삶이 如前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1990年代 以後 5·18補償法, 5·18有功者法 等이 制定되지 않았나요. 그 德에 生活이 어느 程度 安定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實狀은 다릅니다. 國家有功者法에는 對象者에게 年金을 支給하는 內容이 規定돼 있어요. 反面 5·18 關聯法은 被害 程度에 따라 策定된 補償金을 한 次例 支給하도록 할 뿐입니다.”

    朴氏에 따르면 國家有功者法 適用을 받는 4·19 負傷者의 境遇 床이1급 判定을 받으면 每달 約 300萬 원에서 800萬 원 程度의 年金을 受領한다. 反面 두 다리를 잃은 床이1급 5·18 有功者는 一時金 9800萬 원을 받는 게 全部라고 한다. 朴氏는 “公務員 試驗 應試者에게 주는 加算點度 受惠 對象이 매우 制限的”이라고 指摘했다.

    “5·18 有功者 子息 가운데 3分의 1은 아예 大學에도 못 가는 게 現實이거든요. 政治權에서는 必要에 따라 5·18을 民主化의 礎石이라 치켜세우지만, 정작 有功者들이 處한 狀況에 對해서는 크게 神經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與野 모두 5·18 이슈를 疏忽하게 다룬다고 여기시나요.

    “그렇습니다. 다 똑같아요. 金大中 前 大統領에게도 個人的으로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그분은 偉大한 政治人이지만, 執權을 위해 湖南 사람들 同意도 求하지 않은 채 全斗煥·노태우와 和解했거든요. 大選候補 時節이던 1997年 ‘執權하면 前·盧를 赦免하겠다’고 公約했죠. 當選 뒤엔 김영삼 當時 大統領에게 두 사람 赦免을 建議했고요.”

    -‘光州의 5月’李 後孫들에게 어떻게 記憶되길 바라시나요.

    “決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일이죠. 그런 意味에서 죽음의 門턱에 선 加害者들이 어서 謝罪하고, 眞相糾明에 協助하길 바랍니다. 犧牲者들의 被害 復舊도 必要하고요. 이 모든 過程이 끝나기 前까지 5·18은 如前히 現在進行形日 수밖에 없어요. 加害者들이 合當한 處罰을 받고 敎訓을 남길 때 비로소 5·18은 歷史의 한 張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실린 박남선 씨 수기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왼쪽)’와 2016년 6월호에 실린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 기사.

    ‘신동아’ 1988年 5月號에 실린 박남선 氏 手記 ‘光州市民은 왜 銃을 들었나(왼쪽)’와 2016年 6月號에 실린 전두환 前 大統領 인터뷰 記事.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朴氏는 ‘신동아’ 1989年 1月號에 실린 505保安部隊원 허장환 氏 手記 이야기를 꺼냈다. 505保安部隊는 5·18 當時 示威 鎭壓과 主動者 搜査 等을 擔當한 部隊다. 許氏는 신동아에 실린 글에서 當時 自身들이 5·18 關聯 事實을 어떻게 造作하고 歪曲했는지에 對해 생생히 告白했다. 그의 原稿에는 “光州民主化抗爭 當時 숨져간 수많은 民主烈士들의 靈魂 앞에 謝罪하면서, 歷史를 바로 세우는 길은 전두환 保安司令官의 親衛隊員이었던 나 같은 사람이 겪은 事實을 그대로 公開하는 길밖에 없다고 判斷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朴氏는 “許氏가 이 글을 쓴 건 아들 때문이었다”고 說明했다. 當時 中學生이던 許氏 아들이 新東亞 1988年 5月號에 실린 朴氏 寄稿文을 읽고 아버지에게 “이게 事實이냐”고 물은 것이 契機가 됐다는 것이다. 許氏는 “어린 아들에게마저 眞實을 糊塗할 수는 없었다”며 모든 ‘事實’을 털어놓기로 決心했다고 한다. 朴氏는 “이番 盧 前 大統領 弔問을 契機로 許氏처럼 謝罪하고 容恕를 求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傳했다.

    #박남선 #5·18光州民主化運動 #盧泰愚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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