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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甲상어 가죽에 옻漆하는 世界 唯一 漆皮(漆皮) 專門家|新東亞

鐵甲상어 가죽에 옻漆하는 世界 唯一 漆皮(漆皮) 專門家

漆皮工藝家 박성규

  • 글·한경심 │韓國文化評論家 寫眞·박해윤 記者

    入力 2014-10-21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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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돼지와 羊가죽은 勿論이고 다루기 어려운 鐵甲상어 가죽에 옻漆해 器物을 만드는 漆皮는 우리나라에만 있지만 일찍이 그 傳統이 끊어졌다. 가죽에 漆하는 옻 配合 比率을 알아내는 데 平生을 바친 박성규(朴成圭·62)는 朝鮮時代 中期 以後 사라진 漆皮工藝를 혼자 힘으로 되살려냈다.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박성규가 나타나기 前까지 사람들은 가죽에 옻漆하는 技術을 알지 못했다. 1992年 傳承工藝大展에서 그가 津한 밤色으로 옻漆한 소가죽을 씌운 死角함을 出品했을 때, 사람들은 이런 技術이 있었던가, 하고 깜짝 놀랐다. 가죽 表面은 陰刻한 다음 검정에 가까운 짙은 色으로 蓮꽃唐草紋을 象嵌해 넣고, 가장자리는 붉은 色 實線을 둘러 品位를 더한 이 作品은 現代的인 멋까지 풍긴다. 처음 낸 作品이지만 文化部長官賞을 받은 것은 當然했다.

    긴 歷史를 자랑하는 옻漆은 東洋에서 愛用해온 度料다. 傳統 木材 器物에 발라왔으니 가죽에 바른다고 뭐 별다른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가죽에 옻漆하는 技法은 意外로 까다롭다고 한다.

    “가죽은 질기고 가볍지만 熱과 濕氣에 弱합니다. 열에 터지고 물 한 방울이 닿아도 얼룩이 지지요. 가죽에 옻漆을 해주면 熱과 濕氣에 强해지고 곰팡이도 피지 않아 오래 保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옻漆을 잘못하면 오히려 가죽이 터지고 갈라집니다. 가죽에만 맞는 옻 配合 方式이 따로 있답니다.”

    옻은 물과 불, 空氣를 빼고 世上 어느 物質에도 다 漆할 수 있다는 萬能 塗料지만 가죽에 옻이 잘 스며들도록 漆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다롭기 때문인지 가죽에 옻漆해 만드는 漆皮工藝는 中國과 日本에서는 古代 遺物 外에는 남은 게 없고, 우리나라는 朝鮮時代 遺物이 남아 있을 만큼 漆皮工藝家 發展한 痕跡이 있으나 그것도 朝鮮時代 中期에서 멈추고 만다.

    漆皮工藝의 脈이 이렇듯 일찍 끊어져버리면서 가죽에 바르는 옻의 配合 比率 亦是 알 수 없게 된 것인데, 박성규의 한平生은 한마디로 그 配合 比率을 찾는 旅程이었다. 마치 科學者가 自身의 硏究課題에 沒頭하듯 그는 수수께끼로 남은 옻 配合의 祕密을 풀기 위해 가죽과 옻에 매달렸고, 마침내 그 祕法을 알아내는 데 成功했다.



    螺鈿漆器 上監 技術이 바탕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주칠한 鐵甲상어의 突起가 돋보이는 玉璽函. 鐵甲상어 가죽은 붙이기가 어렵다.

    1952年 全北 익산시 함라면에서 태어난 그는 그 年輩 匠人들처럼 10代 中盤에 처음 工藝의 길로 들어섰다. 故鄕에서 가까운 都市 이리(現 益山市)까지 通學하며 中學校를 마쳤지만 職場을 못 求한 그에게 한洞네 사는 아주머니가 일자리를 紹介했다.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欌籠 짜는 ‘農房’이었습니다. 技術도 배우고 用돈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用돈은커녕 집에 갈 車費조차 없어서 農房에서 먹고 잤지요.”

    技術도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攻防의 徒弟式 敎育이 그렇듯 처음 한동안은 煉炭불 갈고 淸掃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婚需用 欌籠이 잘 팔리던 때라 農房은 規模가 꽤 커서 家口 形態를 짜는 백骨盤과 籠에 붙일 자개를 자르고 붙이는 나全般, 漆半이 따로 있었다. 그는 나全般 所屬이었다. 只今 그가 가죽에 자개를 象嵌한 作品을 만들 수 있는 데는 이때 배운 技術이 바탕이 됐다.

    우리 螺鈿漆器 상감법은 그냥 器物 表面을 파서 자개를 박아 넣는 中國의 상감법과 달리 象嵌한 위에 옻漆을 새로 한 다음 表面을 곱게 갈아낸다. 그가 가죽 作品에 자개를 象嵌할 때도 螺鈿漆器와 마찬가지로 가죽을 파서 자개를 새겨 넣고 옻漆한 다음 갈아낸다. 그래서 언뜻 보면 螺鈿漆器와 區別하기 힘들다. 다만 螺鈿漆器처럼 번쩍거리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自身의 技術에 對해서는 언제나 ‘才能보다 努力’을 내세우는 그이지만 이리 農房에서는 最高 솜씨로 여기저기 오라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스무 살이 가까워올 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몸담은 곳은 賞牌를 製作하는 攻防이 많이 모여 있던 鍾路通의 한 攻防이었다.

    “서울에 오니 솜씨 좋은 親舊가 수두룩하더군요. 제가 일한 곳에서는 完成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文樣대로 자개를 오려 붙여주는 일만 했어요. 主로 글씨를 오려 붙이는 일이었지요.”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주칠한 소가죽에 統營 自然産 全鰒 껍데기를 象嵌한 二層農. 자개 빛이 神祕할 程度로 隱隱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1年 程度 일을 해보니 그 일이 適性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씨를 오려 붙이는 單純한 作業을 反復하는 것이 그의 探究心과 創意力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곧 농방거리로 有名한 三陽洞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뒤로도 여러 農房을 거치면서 螺鈿은 勿論이고 옻漆까지 하게 됐다.

    “서울에서는 月給도 받고 休日도 있으니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할 餘裕가 있었지요. 저는 只今도 專門 分野인 工藝品뿐 아니라 모든 것에 關心을 갖고 探究하길 좋아해요.”

    타고난 好奇心과 觀察力이 그의 가장 큰 資産이라 할 수 있는데, 好奇心은 그가 가죽 옻漆 配合 比率을 알아내는 일에 挑戰하게 만들었고, 觀察力은 遺物을 몇 番 보고 똑같이 再現하는 눈썰미를 갖추게 했다. 그의 資産은 또 있다. 바로 끈氣다. 한 技術을 完全히 알아낼 때까지 가난과 無名의 설움조차 밀어낼 수 있는 固執과 集中力, 끝없이 試驗하고 試圖하게 하는 힘.

    그는 休日이면 博物館이나 인사동 等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好奇心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物件을 만난다.

    “큰 007가방 같은 模樣인데,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고 아마 옛날 平民들이 썼던 것 같아요. 오래돼 가죽이 딱딱하게 굳어 오므라들고 모서리는 뒤틀린 것이었습니다. 漆도 제대로 안 된 것이었지요.”

    비록 뛰어난 作品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런 가죽 作品을 오늘날에도 만드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알아보게 됐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스스로 해볼 수밖에.

    “가죽에 옻漆을 하면 속에서부터 먹어들어 徐徐히 빛깔이 나와야 하는데, 잘 먹질 않더군요. 나무에 하듯 해보면 가죽이 갈라지고요. 나중에는 구두工場에 가서 여러 가지 試圖를 해보았어요. 구두에 옻漆을 하면 防水가 되니 좋을 것 같아 해봤더니, 접히는 部分이 꺾어지고 갈라지더군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市中에서 去來되는 가죽은 腐敗를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量의 化學藥品으로 處理하고 防水效果를 높이기 위해 코팅劑까지 발라놓아 옻이 吸收도 안 될 뿐 아니라 코팅劑가 山城이어서 알칼리성인 옻을 漆하면 色깔이 칙칙하게 變하고 만다. 이런 施行錯誤를 거치긴 했지만 구두工場에서 얻은 收穫은 있었다. 붓桶 같은 商品을 디자인해서 만들어보았고, 무엇보다 가죽을 어디서 求하는지 알게 되어 가죽의 기름氣를 빼는 데 化學 處理를 하지 않은 가죽을 注文할 수 있게 된 것이다.

    鐵甲상어 가죽의 ‘性質’을 바꾸다

    “가죽의 기름을 빼지 않으면 장구나 북 가죽처럼 딱딱해집니다. 樂器에 쓰는 가죽은 큰 地方만 긁어내고 기름氣는 그대로 두어야 空氣가 遮斷돼 좋지만 工藝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름氣를 除去해야 하는데, 저는 가죽工場에 特別히 天然잿물로 빼달라고 注文하지요.”

    큰 桶에 가죽을 몇 千 張씩 넣고 기름氣를 除去하는 工場으로서는 기껏해야 몇 百 張을, 그것도 天然잿물로 해달라는 그의 要求가 반가울 理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去來해온 因緣으로 工場에서는 그의 注文대로 좋은 가죽을 대준다고 한다. 기름氣를 除去하는 또 다른 傳統 方式으로는 닭똥과 石灰質, 잿물 等을 섞은 混合物에 며칠씩 담가 脂肪質을 除去하고 쌀겨를 묻혀 부드럽게 말리는 法도 있다. 2007年 國璽함을 製作할 때 鐵甲상어 가죽 기름은 이 번거로운 方法으로 뺐다고 한다.

    온 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各 分野의 丈人 스물아홉 名이 參與한 國璽 製作 때 그가 맡은 일은 國璽를 담는 函(뒤웅이 模樣)에 鐵甲상어 가죽을 입히는 것이었다. 40年 넘게 가죽과 씨름하며 이제 웬만한 가죽은 다 수월하게 다루게 된 그도 아직 鐵甲상어 가죽만큼은 完全히 征服하지는 못했다고 告白한다.

    “鐵甲상어 가죽에는 작은 突起가 오돌토돌 나 있는데, 단단하기가 鐵板 같습니다. 熱에도 剛하고 칼로 때려도 끄떡없고 화살도 뚫지 못해요. 그런데 가죽 自體는 기름氣가 있어 수축력이 매우 剛해 白骨(漆을 하지 않은 뼈대 狀態의 木器)에 붙이면 白骨인 나무가 뒤틀리거나 가죽이 터지는 境遇가 種種 생깁니다. 그래서 붙이기가 매우 어렵지요.”

    짐승 가죽은 漆하기가 어렵고 魚皮의 大多數를 차지하는 鐵甲상어 가죽은 붙이기가 어렵다. 가죽을 白骨에 붙일 때는 옻과 찹쌀 풀을 섞어 발라 붙이는데, 이 亦是 매우 强力한 接着劑다. 얌전한 소가죽은 한番 붙으면 떨어지는 法이 없지만, 鐵甲상어 가죽은 나무를 물고 오므라들어 나무가 뒤집힐 程度라고 한다. 단단한 接着劑와 收縮力 强한 가죽 사이에서 結局 나무가 결딴나고 마는 것이다. 國璽함을 만들 때 큰 苦生을 한 그는 以後로도 硏究를 繼續해 只今은 훨씬 수월하게 붙일 수 있는 ‘祕訣’을 攄得했다고 귀띔한다. 祕訣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예 가죽의 性質을 바꾸었다”고 對答한다. 仔細한 祕法은 公開를 꺼리지만 地方을 잘 빼내고 두들겨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斟酌해본다.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소가죽 黃漆文書函(함부르크博物館 所藏)을 再現한 作品. 年當初 紋樣과 어우러진 色感이 무척 아름답다.

    鐵甲상어 가죽을 쓸 때는 두 가지 方法이 있다. 튀어나온 突起를 그대로 살려 쓰기도 하고 돌기를 沙布로 깎아내 表面을 平平하게 만들고 代身 동그란 무늬를 얻기도 한다. 흔히 眼鏡집에 쓰는 魚皮가 바로 돌기를 깎아낸 鐵甲상어 가죽이다. 國璽함을 만들 때는 돌기를 그대로 살려 썼는데, 거기엔 나름대로 理由가 있다.

    “剛한 돌기는 함을 保護하는 힘이 있고, 또한 보기에도 雄壯한 맛이 납니다. 그런데 函 全體를 가죽 한 張으로 둘러쌀 만큼 큰 가죽을 求하기가 참 힘들어요. 多幸히 釜山 자갈치시장에서 가죽을 대주는 이에게 付託해 길이 1m가 좀 넘는 것을 求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만든 國璽函(22×22×27cm)은 아니지만 遺物을 復元한 玉璽函을 보니 朱漆(붉은 옻漆)까지 더해져 突起가 더욱 돋보여 强烈한 힘이 느껴진다. 突起를 깎아낸 鐵甲상어 가죽은 예부터 眼鏡집이나 退枕, 書類函, 칼 손잡이 等에 많이 썼는데,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 1m20cm짜리 鐵甲상어가 잡혔다는 記錄이 있지만 요즘엔 기껏해야 45cm짜리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鐵甲상어라면 어쩐지 우리나라보다는 러시아 같은 外國産이 제格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써온 魚皮는 다 우리나라 山인 데다, 輸入品이라고 더 크고 괜찮은 것은 없다고 한다.

    ‘最高 材料’ 固執…黃漆나무 發見하기도

    뚝심의 丈人답게 박성규는 材料 하나에도 徹底하다. 꼭 國産이나 有名한 것을 主張한다기보다 좋은 것, 純粹한 것을 고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무슨 材料든 어디서 生産되고 어떻게 流通되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事實. 그의 探究心은 이런 데서도 發揮되는 模樣이다. 그의 집 居室에 있는 붉은빛 소가죽을 씌운 二層農에 朴은 자개가 五色玲瓏한 여느 자개欌과 달리 隱隱하면서 하도 神祕한 色깔을 내기에 무슨 자개냐고 물었더니 統營 바닷가 全鰒 껍데기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自然産 代身 樣式 全鰒을 많이들 쓰지요. 하지만 海女가 딴 自然産 顚覆 빛깔이 第一 좋아요. 그런데 自然産은 바다가 汚染된 탓인지 구멍이 많이 나 있어요. 또 우리 工藝人이 쓸 全鰒은 좀 자란 것이 크고 빛깔도 좋은데, 사람들은 軟한 어린 顚覆을 자라기도 前에 즐겨 먹어 큰 걸 求하기 힘듭니다.”

    統營에는 그를 위해 좋은 自然産 全鰒 껍데기만 골라 모아놓는 사람이 있다. 좋은 것은 價格이 세 倍 以上 비싸지만 그는 언제나 最高 좋은 材料만 固執한다. 於此彼 作品을 팔아 生計를 꾸리는 게 아니므로 收支를 맞추기 위해 싼 材料를 찾을 必要는 없다. 옻 亦是 마찬가지다. 옻 精製技術이 뛰어난 日本産 精製 옻은 小盤이나 螺鈿漆器의 木心(옻을 漆하는 對象 材料가 나무라는 뜻)에 漆하면 別 상관없지만 가죽에 漆하면 가죽이 다 갈라진다. 그는 언제나 國産 生옻으로 漆한다.

    “日本은 우리 옻을 사다 精製해서 우리에게 되팝니다. 우리 옻이 좋거든요. 요즘은 中國에서 옻을 싸게 사들이지만요. 우리 옻은 中部地方 위 것이 좋은데 南韓에서는 江原道 原州, 北韓에서는 平安北道 태천 옻을 알아줍니다. 옻은 伏날에 採取해야 가장 좋은데, 그렇게 좋은 옻을 求해오다 最近 그곳에 組合이 생겨 모든 옻을 뒤섞어 팔고 있어요.”

    좋은 옻만 골라 팔면 結局 안 좋은 것만 남으니 組合에서 그러는 거라고 理解는 하지만 丈人은 못내 서운한 눈치다. 그의 探究心은 사라진 材料를 再發見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工藝에서 누런色을 내는 黃漆 亦是 材料조차 求할 수 없는 사라진 工藝였는데, 1989年 정명호 동국대敎授(考古美術史·現在는 退任)가 古書를 읽다가 偶然히 우리나라에서도 貴해 잘 쓰지 못하고 中國 皇室에 서 말씩 보냈다는 記錄을 찾아냈다.

    “그 冊에는 黃漆 材料를 얻을 수 있는 나무가 南海 끝자락 섬 地方에서 자라는 常綠樹라며 이파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都大體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었지요. 鄭 敎授와 漆匠人 홍동화(뒤에 서울市 無形文化財 黃漆腸이 됐다)와 그의 親舊, 저 이렇게 넷이 이파리 그림만 가지고 莞島와 甫吉島로 내려갔습니다.”

    섬사람들에게 이파리 그림을 보여주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 結局 山을 헤매고 다녔는데, 入山 禁止한 山에 들어가기 위해 道에 가서 通行證을 끊어 와야 했고, 길도 없고 온갖 水腫이 뒤섞인 山에서 이파리 그림만 가지고 찾기가 어려워 다른 나무는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와 찾는 等 苦生을 많이 했다. 그러기를 몇 季節, 甫吉島의 어느 初等學校에서 그림 속 이파리와 똑같은 이파리를 가진 나무를 만났다. 그 나무 이름은 참 싱겁게도 ‘黃漆나무’였다.

    “알고 보니 全南大 樹木園에서 2000~3000그루를 꺾꽂이하더군요. 常綠樹니 街路樹나 庭園樹로 쓸 料量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황칠이 뭔지 몰랐고, 工藝 專門家들은 나무를 몰라 생긴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貴했던 黃漆나무는 輸液 價格이 작은 寫眞필름 통 하나 程度의 量에 10萬 원 했는데, 最近엔 全南 全域에 널리 퍼질 程度로 人氣가 많아 價格도 내려갔다. 이제 사람들이 黃漆의 價値를 안 건가.

    “黃漆나무가 肝에 좋고 血壓도 떨어뜨린다는 情報가 퍼져 農夫들이 너도나도 심게 된 거랍니다. 道에서도 保護樹로 指定하고 나무 씨앗을 널리 普及해 이제는 黃漆나무 水厄을 쉽게 求할 수 있게 됐지요.”

    그렇게 힘들게 救한 黃漆 輸液으로 그는 함부르크 博物館에 所藏된 아름다운 黃漆文書函을 再現해냈다.

    日本 提案 拒絶한 까닭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商品으로 開發한 茶盞과 접시. 소가죽에 옻漆하면 속心을 넣지 않아도 단단하다. 옻漆한 가죽으로 酒煎子도 만들 수 있다.

    漆皮에 關한 限 世界 唯一의 專門家가 됐지만 그는 無形文化財가 되지 못했다. 無形文化財에 漆皮 分野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잘 文化財 復元이나 修理 일을 맡는데, 옛사람의 솜씨와 技法을 배울 수 있어 文化財 다루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옛 遺物 가운데 只今도 理解하기 힘들 程度로 뛰어난 技術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현대는 販賣를 위해 材料도 單價에 맞추어 고르지만 나라에 所屬된 技術者들은 그런 걱정 없이 오직 自己 솜씨를 最大限 發揮해서 그렇게 좋은 것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三國史記’를 보면 新羅에 피전(皮田)攻防이 있었다는 記錄이 있어 우리나라 가죽工藝의 歷史는 무척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遺物로는 天馬塚에서 發見된 天馬圖가 그려진 다래(障泥·障泥, 말鞍裝 아래 늘어뜨리는 진흙받이)를 들 수 있다. 자작나무로 만든 이 다래 가장자리를 두른 테가 바로 옻漆한 가죽이라고 한다.

    朝鮮時代 遺物로는 壬辰倭亂 때 活躍한 최문병 義兵將의 말鞍裝이 있다. 寶物로 指定된 이 鞍裝은 다래가 걸리는 安葬자리 亦是 가죽으로 돼 있다. 소뼈로 梅花文樣을 아름답게 박아 넣은 이 鞍裝은 朝鮮時代 中期까지 가죽工藝가 얼마나 섬세하게 發達해왔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以後 漆皮의 痕跡은 안타깝게도 끊어지고 만다. 無形文化財에 漆皮 分野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番은 日本人이 배우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韓國을 紹介한 冊子에 가죽에 옻漆하는 工藝家 있다는 말을 듣고 搜所聞해서 저를 찾아왔다더군요. 하도 가르쳐달라고 事情하기에 제가 가르쳐준 적이 있어요.”

    韓國 사람들은 오히려 배우겠다고 왔다가도 一週日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境遇가 太半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弟子를 받지 않는다. 代身 大學에서 文化財管理를 專攻한 딸이 그의 뒤를 잇는다. 그의 솜씨를 일찍이 알아본 곳은 日本이다. 그래서 높은 報酬를 줄 테니 日本에 와서 일해달라는 付託도 받았지만 拒絶했단다.

    “아내는 딱 3年만 있다 오자고 했지만, 日本 工藝를 보고 오면 아무래도 저의 感受性에 若干이라도 日本風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拒絶했지요.”

    비록 아직은 無形文化財에 漆皮 分野가 없지만 1999年 機能傳授者가 됐으니 뒷날 文化財가 될 可能性도 크다. 2006年에는 漆皮 名將이 됐고, 2007年 國璽 製作에도 參與했을 程度로 그의 實力은 이미 公認된 바다. 文化財가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가 世上에 漆皮를 알린 것이 너무 늦은 탓도 있다.

    “傳承工藝大展에 미리 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걸 몰랐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 熱心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처럼 혼자서 熱心히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公募展에 出品해 自身을 알리라고 熱心히 忠告합니다.”

    유성룡 가죽甲옷 再現 中

    藝術家와 作品은 모름지기 世上 사람이 알아주어야 存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1992年 傳承工藝大展에 出品해 文化部長官賞을 타고 이듬해는 赤褐色으로 옻漆한 羊가죽을 손으로 두들겨 文樣을 내는 打出(打出)技法으로 鳶唐草紋을 돋을새김한 아주 세련된 文書函으로 文化財管理局長上, 그리고 이듬해는 日本 寶物로 도쿄博物館에 所藏된 高麗鏡함을 가죽을 씌워 再現해내 文藝振興院長賞까지 굵직한 賞을 연이어 탔다. 이 高麗鏡함은 황동선을 꼬아 테두리에 얇은 線을 두르고 자개와 얇은 黃銅판을 잘라 菊花文을 象嵌한 것으로 感歎이 절로 나온다. 그는 只今도 來年 傳承工藝大展에 出品할 作品을 만드는 中이다.

    그가 또 하나 念頭에 두는 것은 가죽匣옷이다. 西厓 柳成龍이 입었던 甲옷을 再現하는 中인데 옻漆한 소가죽 조각을 鹿皮(사슴가죽) 끈으로 엮은 이 甲옷은 完成하면 陸軍士官學校에서 사가겠다고 벼르는데, 只今 다른 일에 밀려 暫時 손을 놓았다.

    “하회마을 유성룡 先生 故宅에서 이 甲옷을 봤는데 많이 損傷돼 있어 제가 修理하겠다고 했더니 拒絶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뒤 다시 가봤더니 아예 보이질 않았습디다. 더 망가지지 않았는지 안타깝습니다.”

    이미 소가죽 조각을 크기대로 다 잘라서 臨時로 엮어둔 이 甲옷은 未完成 狀態인데도 아름답고 멋지다. 이 甲옷이 完成되는 날, 이 世上에 傑作이 또 하나 誕生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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