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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凉한 들판에서 穩全한 自由를 꿈꾸다|신동아

荒凉한 들판에서 穩全한 自由를 꿈꾸다

南原과 任實 사이

  • 정윤수│文化評論家 prague@naver.com

    入力 2014-10-22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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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聞은, 고양이에 對해 애틋한 마음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썼다.
    • 고양이가 는 것은 自身만의 ‘內面 空間’을 갖고자 하는 欲望의 表現이 아닐까. ‘內密한 感情’李 다치지 않는 ‘나만의 空間’을 어떻게 찾을까.
    황량한 들판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다
    들판에 서서, 철 지난 新聞을 훑어본다. ‘고양이가 늘고 있다’는 記事다. ‘아, 그래, 맞아, 온 洞네가 고양이 天國이지’하며 담배를 피워 문다.

    오랜 習慣이다. 國道邊을 달리다 낡고 오래된 休憩所가 있으면 車를 세운다. 안에 들러 담배 한 匣 사고, 밖에 나와 自販機 커피를 뽑는다. 날씨가 흐려 잿빛이 들판에 물들어 있으면 車를 그 方向으로 세워두고, 椅子를 조금 뒤로 젖힌 後, 미지근한 믹스 커피가 完全히 식어버릴 때까지, 그 後로도 오랫동안, 잿빛 들판이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그렇게 하염없이 時間을 지켜본다. 그런 習慣으로 春川에서, 浦項에서, 順天에서, 瑞山에서, 坡州에서, 荒凉한 들판을 한참 凝視하곤 했다.

    只今은 智異山을 넘어 任實로, 다시 거기서 電柱를 거쳤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 智異山의 옛길을 넘어 달리다가 國道邊 一帶가 거의 衰落해 이렇다 할 쉴 곳도 如意치 않은데, 艱辛히 낡은 休憩所 하나 發見해, 미지근한 커피 한 盞을 잠깐 입에 댔다가 녹슨 椅子 위에 커피 종이컵 올려놓고 들판 저 먼 곳을 바라보는 中이다. 山野는 곧 어두워질 氣勢다.

    왜 고양이가 늘었을까?

    다시, 오래된 新聞을 심드렁하게 훑어본다. 낡은 休憩所의 肝이 벤치 위에 놓여 있던 것인데, 購讀해 읽기보다는, 무슨 雜동사니를 싸기 위해 活用했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듯한 것이었다.



    ‘고양이가 늘고 있다’는 記事,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 그렇기는 하지, 길고양이 天國이 된 지 오래인 듯, 내 사는 아파트 團地의 地下 機械실 入口는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避하려는 고양이 食口들의 安息處였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친김에 記事를 마저 읽고 檢索도 해보니, 果然 고양이가 많이 늘었다. 農林水産檢疫檢事本部가 2012年 末 發表한 ‘動物 保護에 對한 國民意識 調査’ 結果에 따르면, 우리나라 國民 다섯 家口 中 한 家口는 개, 고양이 等 伴侶動物을 키운다. 全國 17.9%, 約 359萬 家口, 人口로 換算하면 1000萬 名假量, 個體 數는 개가 440萬 마리, 고양이는 115萬 마리다. 最近 趨勢는 고양이 急增이다. 2013年 9月 6日, 農林水産食品部가 韓國社會經濟硏究院에 調査 依賴한 結果에 따르면, 집고양이의 數는 2006年 47萬 마리, 2010年 62萬 마리, 2012年에는 115萬 마리로 急增했다.

    關聯 産業도 急伸張 趨勢다. 人間 育兒 關聯 市場은 2012年 基準으로 2兆6600億 원臺. 衣類가 1兆6500億 원으로 60% 좀 넘고 기저귀 4600億 원, 粉乳 4000億 원, 幼兒스킨케어·授乳用品 1500億 원 等이다. 이 中 人間의 生長 特性에 따라 購入하는 ‘衣類’ 項目을 除하고 計算하면 1兆 원 程度. 옷을 ‘거의’ 사 입히지 않는 伴侶動物의 市場 規模 亦是 2012年 基準으로 約 9000億 원, 곧 1兆 원이다. ‘衣類’ 特性을 除하고 보면, 人間 育兒와 伴侶動物 市場 規模가 비슷하다. 低出産과 反比例하는 伴侶動物 産業 成長에 따라 곧 뒤바뀔 수도 있다.

    新聞은, 젊은 ‘愛猫人’이 늘었다고 쓴다. 2012年 末 統計廳 發表 ‘韓國의 社會同鄕 2012’報告書에 따르면 韓國의 1人 家口 比率은 23.9%. 1990年 9%, 2000年 15.5%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에 反比例해 4人 家口 比率은 줄었다. 1990年 29.5%, 2010年 22.5%다. 이 1人 家口 집에 고양이가 들어간다. ‘G마켓’이 2013年 1月 1日부터 10月 21日까지 伴侶動物 用品 購買者를 分析한 結果 女性과 男性 比率이 各各 78%, 22%다. 가장 높은 比重(33%)을 차지하는 것은 30代 女性이다. ‘11番街’의 伴侶動物 用品 購買者 分析에선 같은 期間 30臺가 45%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왜 고양이가 늘고 젊은 愛猫印度 늘까. 斟酌해 보니, 고양이는 개에 비해 외로움을 덜 타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강아지에 비해 잔神經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홀로 견디고 버티는 動物이다. 그래서 大都市 20~30臺가 選好한다. 그들의 顯在的 삶과 겹치는 狀況이다. 核家族化 및 1人 家口 急增, 伴侶動物 人口 增加, 집고양이 急增 等은 서로 맞물린 現象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들판 저 너머를 바라본다.

    國道邊의 風景

    智異山 굽이굽이 옛길은 거의 閉鎖된 地域 같았다. 오래된 그 길을 代身해 시원스레 19番 國道가 뻗어 있고 또 그 위로 麗水엑스포로 인해 延長 擴張된 直進의 完州·順天 高速道路가 快走의 車輛들을 떠받치니, 智異山 옛길은 隣近 住民 말고는 거의 利用하는 사람이 드물다.

    智異山 中턱의 巨大한 休養 施設은 工事가 中斷돼 恰似 프란시스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에 나오는 槐宸처럼 山中에 버티고 서서 數十 個의 퀭한 눈으로 山의 위와 아래를 凝視한다. 그 옛날에 굽이굽이 길 오르던 車輛들이 暫時 쉬어 가던 休憩所도 機能을 다해 아예 出入口조차 廢木材로 단단히 막혔다. 簡易食堂들, 膳物가게들, 注油所들도 길의 運命이 衰한 탓인 듯 더 以上의 營業 必要性을 느끼지 못해 門을 닫았다. 景致 좋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던 모텔들도 오래된 사랑의 痕跡마저 다 지운 채로 낡은 凶家로 變해간다.

    그 길을, 그 길가의 衰落한 建物들을 보면서 한참을 달리다가, 오히려 나는 문득 이러한 風景이 주는 느닷없는 荒凉함의 기운을 못 이겨 겨우 낡은 休憩所 한 곳을 發見海종이컵 커피 하나 들고 서푼어치 感傷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衰落한 道路, 이렇게 기울어져 가는 風景에 對해 事實 지나친 感傷은 不必要하다. 이러한 風景은, 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이 地域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視線으로 現實感 있게 解釋돼야 하고 行政的 判斷이 내려져야 한다. 그럼에도, 어찌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서, 한瞬間의 鑑賞 또한 禁止돼야 할 것인가, 그것을 핑계 삼아 나는 쓸쓸한 國道와 낡은 新聞의 한 뼘짜리 記事와 저물어 가는 들판을 이렇게도 보고, 또 저렇게도 보면서, 한두 가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新聞은 고양이가 늘고 있다고 썼다. 고양이에 對해 애틋한 마음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달리 말해, 이는 都市人들이 自身만의 內面 空間을 갖고자 하는 欲望의 表現이 아닐까, 自身만의 內面世界, 自身만의 感情 말이다.

    最近 學界에서는 ‘感情’ ‘情緖’ ‘마음’ ‘熱情’ 等에 對한 關心이 부쩍 늘고 있다. 좀더 學問的으로 檢討하건대, 西歐에서 近代 世界란 中世의 宗敎的 熱情과 强力했던 世襲 權力에 對한 否定과 抵抗의 連續이었거니와 그것은 合理的 社會關係의 成立으로 歸結됐다. 近代의 制度, 秩序, 構造 等은 中世的 熱狂을 抑制하는 것, 卽 人間의 다양한 感情을 積極的으로 表出하기보다는 合理的으로 調節하는 것, 境遇에 따라서는 社會的 約束에 따라 그 感情을 抑制하는 것, 그것이 西歐의 近代였다. 西歐의 近代를 ‘合理化’로 說明한 막스 베버는 “非合理的 衝動의 節制, 적어도 이 衝動의 合理的 調節”을 西歐 合理性의 要諦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꽤 오랫동안 西歐의 近代, 或은 그것을 解明하려는 學問的 試圖는 一旦 感情을 學問的 對象에서 排除하거나 最小限 括弧 안에 넣어두었다. 또한 西歐의 近代는 일정한 規範과 制度가 行爲를 産出하며 一定한 變數와 測量으로 사람의 社會的 行爲를 豫測할 수 있다고 믿었다.

    ‘感情 生産’과 ‘內面 演技’

    그랬는데, 排除했던, 적어도 括弧 안에 넣어두었던 感情이 强力한 變數로 登場하기 始作한 것이다. 單純히 ‘人間은 感情의 動物’이라는 常識的 堤堰이 아니라 感情 勞動, 感情 規則, 感情 生産, 感情 統制 같은 말이 注目할 만한 學問的 探査 對象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엘리 혹실드는 ‘感情勞動’에서 現代社會가 感情을 管理한다는 點, 單純히 感情을 ‘統制’하고 ‘抑壓’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感情을 느끼고 불러일으키도록 構造的으로 作動한다는 點을 强調했다. 이는 어빙 고프먼이 말한 ‘內面 演技(deep acting)’와 같은 脈絡이다. 人間은 不知不識間에 社會的 規則과 調和를 이룰 수 있는 ‘內面 演技’를 遂行한다는 것이다. 人間的 感情은 특정한 方式으로 規定한 狀況 속에서 公式的 프레임이 要求하는 適切한 感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演技까지 스스로 履行한다.

    황량한 들판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다

    工事가 中斷돼 智異山 中턱에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서 있는 休養 施設.



    황량한 들판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다

    智異山 옛길 衰落한 注油所.

    重要한 것은 이 ‘感情 生産’과 ‘內面 演技’가 억지로, 일부러, 上司에게 잘 보이려고, 顧客에게 맞춤 서비스를 하려고, 아내 役割을 하려고,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作爲的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익히고 배운 것처럼, 自然스럽게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총을 받고 뒷談話를 듣고 排除를 當해, 結局 그 集團으로부터 추방당할 수도 있다. 이 分野에서 큰 硏究 成果를 낸 에바 日루즈 또한 ‘感情資本主義’에서 國家와 社會가 感情의 生成, 管理, 表現 等에 關聯한 일정한 틀을 形成하고, 個人은 그 안에서(피상적인 흉내가 아니라) 國家와 社會가 要求하는 最高 水準의 密度 있는 感情 演技를 主體的으로 한다고 말했다.

    都市의 匿名性이 주는 自由

    이렇게 要約하고 보니, 한瞬間에 내가 저 巨大한 大都市에서 나름대로 履行했던, 그때는 몰랐으나 只今 돌이켜보니, 꽤나 眞摯하게 遂行했던, 수많은 感情 煙氣가 떠오른다. 나의 눈빛, 나의 말套, 나의 行動, 나의 걸음걸이, 나의 視線 等은 나 스스로 生産한 것이면서 同時에 어떤 社會的 프레임이 要求한 것일 수도 있었다. 社會가 나를 디렉팅(演出)했고 나는 그것을 演技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허름한 休憩所에서 한 줌 뽑아낸, 미지근한 믹스 커피가 오히려 쓰디쓰다.

    나는 올 初 ‘신동아’의 이 紙面에서 西歐 近代의 ‘感情’에 對해 쓴 적 있다. 그때, 나는 諸人 오스틴의 小說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를 引用하면서, 西歐의 近代人들이 ‘率直한 感情’을 確保하기 위해 얼마나 孤軍奮鬪했는지를 說明하려 했다. 이를테면 그 小說에서 “내 感情이 더 强하다고 믿으렴”이라는 臺詞는, 오늘의 大韓民國이라는 感情株式會社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政治的 命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게오르그 짐멜 또한 注目했던 現象이다. 19世紀 유럽이 本格的으로 大都市로 急成長할 때, 짐멜은 ‘大都市와 精神的 삶’(1903)이라는 짧은 講演錄을 통해 이 새로운 文明의 속살을 날카롭게 들여다보았다.

    그에 따르면 傳統 社會란 個人이 오랜 慣習으로 굳어진 社會的 秩序와 位階에 復屬될 수밖에 없는데, 都市는, 都市의 匿名性은, 都市의 숨 가쁜 速度는 個人에게 일정한 自由를 附與하게 된다. 짐멜은 “大都市는 人間 存在의 發達에 無限한 意味를 가진 매우 重要한 場所”라고 생각했으며 이 “大都市는 人間의 삶을 包括하는, 서로 對立的인 藻類들이 同等한 權利를 갖고 回合하고 展開되는 偉大한 歷史的 産物 中 하나”라고 썼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을 共同體를 떠나 都市로 몰려든다.

    大都市에 들어선 個人은, 그러나 엄청난 都市 이미지의 絢爛한 洪水에 휘말린다. “急速度로 이미지들이 交替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捕捉되는 內容의 變化가 急激하거나, 밀려오는 印象들이 全혀 豫期치 못한” 것이어서 都市人은 ‘神經過敏症’에 시달리게 된다고 짐멜은 썼다. 그는 “大都市에서는 建物과 敎育 施設들, 空間을 뛰어넘는 技術의 奇跡과 便宜施設들, 共同體的 삶의 形態들, 그리고 國家의 制度들 안에 엄청난 量의 精神이 非人格的인 結晶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個人은 그것에 屈服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都市의 絢爛한 이미지들, 그리고 個人이 거역할 수 없는 巨大한 構造들로 말미암아 神經過敏症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巨大한 都市 이미지의 洪水에 無防備로 露出된 都市人은, 一次的으로 過度한 神經過敏症에 시달리지만, 그러나 곧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外部의 刺戟을 “人格의 深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精神的 機關”, 卽 異性이 適切히 統制하도록 努力한다. 그리하여 ‘人格의 深層’, 곧 內面世界, 짐멜의 用語로는 ‘主觀 文化’, 오늘 우리의 用語로는 內密한 ‘感情’李 다치지 않도록 保護하고자 한다.

    ‘主觀的인 空間’을 찾아서

    황량한 들판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다

    쓸쓸한 國道邊에 터 잡은 레포츠 施設이 亡한 後 放置돼 있다.

    짐멜은 大都市가 個人의 삶을 頑强하게 支配할수록 個人은 그에 反해 ‘主觀的’이고 ‘個別的인’ 空間을 찾게 된다고 썼다. 여기서 ‘공간’은 書齋나 카페 같은 物理的 空間을 뜻하기도 하지만 더 本質的으로는 思索, 祈禱, 音樂 듣기, 親友와의 對話, 散策 같은 審美的 行爲를 뜻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이뤄질 수 있을까. 告白하건대, 나는 9月 中旬, 내 作業室의 오디오를 좀 더 强力한 것으로 交替했다. 스피커의 外形이나 크기가 音質이나 音場이나 音感을 더욱 擴張하거나 密度 있게 만드는 것은 決코 아니지만, 그동안 使用하던 小型 北셸프 스타일에서 어른 눈높이만한 덩치의 筋肉質 스피커로 交替하고, 이를 驅動하기 위해 앰프도 適切한 펀치力을 지닌 것으로 交替한 後, 나는 내 作業室을 웬만하면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날마다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 내 作業室이 있는 建物, 그 4層의 入住者들은 7時쯤이면 大槪들 退勤했고 10時쯤이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서, 나는 그 時間 以後 새벽까지 許容 可能한 最大 音量으로 베토벤의 絃樂四重奏를 새로 들었고 말러의 大編成 交響樂들을 모조리 暗記하듯 들었다.

    황량한 들판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다

    오래된 사랑의 痕跡마저 지운 채 서 있는 빛바랜 ‘아담’과 ‘이브’ 모텔.

    그리하여 나는, 그 物理的 個人 空間을 통해, 이 大都市가 犯接할 수 없는 나만의 ‘內面 空間’을 確保한 것인가, 그 ‘主觀 文化’ 안에서, 이 巨大 都市가 要求하는 感情과 行爲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自由로운 內面世界를 누렸단 말인가. 이렇게 質問하자마자 그에 對해 全혀 答할 수 없는 나를, 내 焦燥한 얼굴을, 이 저물어가는 荒凉한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私的 空間에서 音樂 좀 시원하게 듣는다고 해서 個人의 ‘內的 自由’가 얻어진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나 自身에 對한 虛僞的 欺瞞, 俗物的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를테면, 永遠히 되새길 수밖에 없는 ‘세월호 慘事’와 關聯한 鑑定 統制 方式을 보자. 몇몇 言論과 放送은 持續的으로 ‘理性을 回復하고’ ‘日常으로 돌아가라’고 썼다. 全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當場 그렇게 해야 한다는 注文은 대단히 政治 偏向的으로 들린다.

    自由와 不自由

    어느 新聞은 英國의 災難 事例를 言及하면서 “合理가 感情을 눌러 이겼다”고 쓰고는 “이 마지막 關門을 通過해야 비로소 先進國”李 된다고 썼다. 그런데 누군가의 가슴에 큰 傷處를 남기면서, 그 나머지 사람들이 先進國에 進入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가, 沈痛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先進國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文學評論家이자 대한민국예술원 會長인 유종호 先生은 “누구를 탓할 問題가 아니고 各自가 우리 社會의 虛點을 克服하고 正말 살기 좋은 社會를 만들기 위해 努力하는 轉禍爲福의 契機로 삼아야 한다. 各自가 ‘나는 내 位置에서 내 몫을 다 했는가’라는 自己 省察을 하고 다 같이 힘을 모아 우리 서로가 依支할 수 있는 社會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를 額面 그대로 反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元老의 高見이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談話, 卽 ‘내 탓이오’ 式의 忠告는 事態의 原因과 過程을 海邊에 밀려든 波濤처럼 다 휩쓸어버린다. 게다가 어떤 時點에서, 어떤 脈絡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發話됐는지를 살펴보면 이는 매우 偏向的이며 危險한, 品位와 敎養과 省察이라는 近似한 말들의 ‘攻擊’이 될 수밖에 없다.

    正確히 歲月號 狀況에 對한 言及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悲劇 以後에 문광훈 敎授가 “感情이 適切하게 制御되지 못할 때, 그래서 쉽게 興奮하거나 陶醉될 때, 그것은 現實의 改善에 寄與하기보다는 그 表面에 머무르기 쉽다. 憤怒와 怨恨의 感情이 意味 있는 에너지로 結集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感情은 社會 全體, 그리고 構成員 모두를 위해서도 좀 더 精製될 必要가 있다”고 썼을 때, 이러한 發言은, 子息을 珍島 앞바다에 묻은 父母들의 애통한 絶叫를 ‘敎養’이라는 이름으로 制壓하는 逆效果를 빚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나 自身을 위해, 내 勞動의 密度를 가파르게 더하고 그리하여 지친 몸을 慰勞하려고, 내가 마련한 空間(쉼 없이 읽고 써야 하는 勞動의 空間)에 오디오를 새로 들여놓고는, 壓倒的인 音響의 抽象的 世界를 承認한다. 그래봤자 웬만한 골프채 하나 값도 안 하는 素朴한 滿足이지만 말이다.

    이 連載를 爲해 全國 곳곳의 ‘힐링 場所’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내게는 내 作業室만한 힐링 空間은 달리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로워졌는가. 글쎄, 斷言할 수 없다. 率直히 內面이 穩全히 자유롭지는 않다. 일하는 空間 한 켠에 오디오가 새로 들어왔을 뿐, 그리하여 暫時 멈추고는, 作業室을 豐滿하게 채우는 旋律 속에서, 다만 한두 時間이고 아늑한 疲勞에 젖을 뿐이다.

    社會가 자유롭지 않은데 어찌 個人의 自由가 可能하겠는가, 그 非對稱的 自由는 누구의 不自由 위에서 누리는 豪奢인가, 이 같은 鬪爭的 發言을 스스럼없이 할 만한 勇氣는, 내게 없다. 다만 이 巨大한 都市를 살아가는 個人의 內的 自由는, 書齋나 북카페 같은 物理的 空間의 有無가 아니라, 그 社會의 自由가 가진 크기와 넓이에 聯關돼 있다는 點은 分明하다. 나는, 이젠 完全히 어둠 속으로 사무치고 있는, 南原과 任實 사이의 國道邊 들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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