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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閥家 婚姻이 낳은 美國 超現代 美術 寶庫|新東亞

財閥家 婚姻이 낳은 美國 超現代 美術 寶庫

뉴욕 휘트니 美術館

  • 入力 2014-10-22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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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國은 株(州)마다 都市마다 世界 어디에 내놔도 遜色없는 美術館이 적어도 하나씩 있다.
    • 世界 美術의 中心이 유럽에서 美國으로 빠르게 移動한 데는 이런 美術館의 役割이 컸다. 여기, 美術館에 心醉한 經濟學者가 있다. 그는 美國 全域의 美術館을 巡禮하며 美國 富者들이 어떻게 藝術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實踐, 빛나는 遺産을 남겼는지에 注目했다. 뉴욕 휘트니 美術館을 始作으로 그를 따라 美國 東部에서 西部로 美術館 巡禮를 떠나본다. <편집자>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1931年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처음 門을 연 휘트니 美術館의 外觀 스케치.

    뉴욕 맨해튼의 富村, 어퍼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엔 周邊 建物과는 사뭇 다른 外樣의 現代式 建物이 하나 있다.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의 南쪽 끝자락에서 다섯 블록 아래로 내려가면 매디슨 애비뉴의 75番 스트리트에서 만나는 휘트니 美術館이다. 正式 이름은 휘트니 美國 作品 美術館(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이름에서 보여주듯 美國化(American art) 專門 美術館이다.

    이곳은 20世紀 以後 美國 作家 2900餘 名의 作品 2萬餘 點을 所藏한 美國 美術의 報告(寶庫)다. 生存 作家를 中心으로 作品을 蒐集해왔는데, 조지아 오키프, 잭슨 폴록 等 20世紀 全般 美國 作家들의 作品이 特히 많다. 只今은 作故했지만 生存해 있을 때, 그리고 아직 有名 作家가 되지 않았을 때 휘트니 美術館은 이들에게 關心을 가졌고 꾸준하게 作品을 購入했다. 이것이 다른 美國 美術館과 휘트니 美術館을 區別 짓는 重要한 差異點이다. 말하자면 휘트니 美術館은 美國 新銳 作家들을 위한, 新銳 作家들에 依한, 新銳 作家들의 美術館이다.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의 ‘誤判’

    이 美術館을 세운 사람은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라는 女性이다. 그女의 이름에는 美國의 名門家 ‘밴더빌트’와 ‘휘트니’가 함께 들어가 있다. 휘트니가 맨 뒤에 놓인 걸로 봐서 밴더빌트 집안에서 태어나 휘트니 家門으로 시집갔다는 것을 斟酌할 수 있다.

    거트루드는 서른 살 前後인 1900年代 初 유럽을 旅行하면서 藝術에 關心을 갖기 始作했다. 特히 조각에 關心이 많아 彫刻家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뉴욕과 파리에서 조각을 工夫했고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 스튜디오를 열고 作品活動에 沒入했다. 거트루드의 作品은 유럽과 美國에서 好評을 받았다. 한때는 로댕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女의 作品은 只今도 世界 여러 곳에 展示돼 있다. 뉴욕에도 있는데, 매디슨 스퀘어에 있는 ‘빅토리 아치(Victory Arch)’가 그女의 作品이다.



    直接 作品活動을 해본 거트루드는 新進 作家들의 苦衷을 알게 됐고, 그래서 이들을 後援하는 일에 나섰다. 1914年 마흔 살의 거트루드는 맨해튼에 젊은 作家들을 위한 展示空間人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휘트니 美術館의 싹이 된다. 거트루드는 여기에 自身이 蒐集한 作品들을 展示하면서 新進作家 後援家로서 이름을 알리기 始作했다.

    1929年 거트루드는 25年間 蒐集한 現代美術品 700餘 點을 寄贈하고자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의 門을 두드렸다. 그런데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은 拒絶했다. 거트루드가 所藏한 作品들은 當時로서는 대단한 作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作品들은 돈으로는 評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大作이 돼 있는데, 제아무리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이라도 앞을 내다보는 데는 限界가 있었던 模樣이다.

    이 일로 衝擊을 받은 거트루드는 直接 美術館을 세우기로 作心한다. 휘트니 美術館의 歷史가 本格的으로 始作된 것이다.

    거트루드는 얼마나 富者였기에 美術作品을 척척 蒐集하고 아예 美術館을 直接 세울 수 있었을까.

    거트루드의 親庭인 밴더빌트가(家)는 19世紀 初 美國 最高의 富者 家門 中 하나였고, 媤宅인 휘트니가는 19世紀 後半에 政界와 財界를 주름잡는 名門家였다. 밴더빌트가는 일찍이 1600年代 中盤 뉴욕으로 移民 온 네덜란드系의 後孫이다. 家門을 일으킨 사람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1794~1877)로, 그는 뉴욕 港 入口에 있는 스테이튼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自由의 女神像이 서 있는 바로 그 섬이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뉴욕 휘트니 美術館은 맨해튼 매디슨 애비뉴 75番 스트리트에 자리하고 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휘트니 美術館은 2015年 맨해튼 첼시 地域으로 擴張 移轉한다. 오른쪽 흰色 建物이 하이라인 파크와 隣接한 휘트니 美術館의 새 建物이다.

    록펠러 다음가는 富者

    코넬리우스는 初等學校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11歲 때부터 아버지가 일하던 뉴욕港의 旅客船에서 補助 일을 했다. 當時에는 가장 重要한 輸送手段이 旅客船이었고, 코넬리우스는 20代 中盤에 直接 旅客船 事業에 뛰어들었다. 旅客船은 허드슨 江을 건너는 것에 더해 隣近 沿岸을 連結하는 交通手段이 됐고, 大洋으로까지 나가는 重要 交通手段으로 發展했다. 그는 海上 輸送事業을 掌握하며 富의 城을 쌓아나갔다.

    코넬리우스는 陸地 輸送에도 進出했다. 當時 陸上 輸送의 寵兒는 鐵道였는데, 美國에선 民間이 鐵道를 建設하고 運營했다. 그는 東部地方의 重要 鐵道를 거의 다 掌握했고, 마침내 美國 最高의 富者로 登極했다.

    이 野心滿滿한 事業家의 痕跡은 美國 테네시 州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 大學(Vanderbilt University)에 남아 있다. 그는 죽기 直前 이 大學에 100萬 달러를 寄贈했는데, 이 金額은 當時까지 美國 歷史上 最高의 寄附金額이었다고 한다. 死亡 當時 그의 財産은 오늘날의 貨幣價値로 無慮 1400億 달러(藥 150兆 원)에 達한다고 한다. 빌 게이츠의 全盛期 財産이 1000億 달러였으니 그 크기를 斟酌할 수 있다. 美國 歷史上 록펠러 다음의 두 番째 富者라고 한다.

    코넬리우스는 19歲 때 한 살 아래의 四寸누이와 結婚해 13名의 子女를 낳았다. 大部分의 財産은 長男 윌리엄(William Henry Vanderbilt·1821~1885)에게 相續됐다. 거트루드는 윌리엄의 長孫女다. 거트루드가 1875年에 태어났고, 그女의 曾祖할아버지 코넬리우스가 1877年에 死亡했으니 둘의 生存期間은 暫時나마 겹친다. 거트루드는 財閥家의 相續女로 매우 裕福하게 자랐다.

    大財閥家의 相續女가 어디로 시집갈지는 뻔하다. 21歲에 또 다른 財閥家門의 後孫이면서 스포츠狂인 海里 휘트니(Harry Payne Whitney·1872~1930)와 結婚했다. 媤아버지 윌리엄 휘트니(William C. Whitney·1841~1904)는 財閥 事業家였고, 媤어머니는 上院議員의 딸이었다. 男便 해리는 예일대 出身의 辯護士이자 폴로 選手, 乘馬 選手로 活躍하면서 純宗 말을 키우기 위해 말 農場까지 經營한, 한마디로 美國 最高의 인텔리 旣得權者였다.

    媤宅 집안의 祖上들은 1635年 런던에서 美國으로 移民 와 매사추세츠 州에 定着한, 이른바 ‘美國 兩班’이었다. 媤아버지는 事業家이자 오늘날 美 國防長官인 海軍省 長官을 지낸 政治人이기도 했다. 男便 해리는 아버지의 銀行, 담배, 石油事業 分野에서 莫大한 富를 相續받았다.

    企劃展示에 焦點

    거트루드가 直接 美術館을 세우기로 決心한 무렵인 1929年,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李 開館한다. 이 美術館은 美國보다 유럽의 現代美術에 더 關心이 많았다. 거트루드는 이와 差別을 두어 美國 美術만을 위한 美術館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그女는 1931年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던 스튜디오 클럽 자리에 住居와 美術館 兼用의 새 建物을 마련, 當時 新進作家들의 作品을 展示하는 데 力量을 集中한다. 이것이 휘트니 美術館의 出發이다. 조지아 오키프, 잭슨 폴록, 제프 쿤스 等 美國 最高의 作家들은 이런 휘트니 美術館을 通해 成長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휘트니 美術館을 이야기할 때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e)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美國 新進作家를 養成한다는 美術館 設立 趣旨에 맞춰 2年마다 여는 젊은 作家들의 展示會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1973年부터 始作됐지만, 그 出發은 이보다 훨씬 以前인 1932年부터 開催된 年例 展示會(annual exhibition)라고 할 수 있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全 世界 藝術界의 最高 行事 中 하나로 꼽힌다. 이 展示會에서 好評받는 作家는 成功을 擔保한 셈이 된다. 代表的인 例가 現在 美國 最高의 現役 作家로 꼽히는 제프 쿤스다. 그는 1987年 휘트니 비엔날레에 參加한 以後 大衆的 人氣와 國際的 名聲을 얻기 始作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휘트니 美術館은 常設展示보다는 企劃展示에 무게를 둔다. 내가 訪問한 2011年에는 常設 展示品이 하나도 없고, 主로 奇想天外한 超現代 作品들(contemporary arts)을 展示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라이오넬 派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라는 옛 畫家의 企劃展示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은 作品을 모아놨는데, 派이닝거 作品을 이렇게 많이 한자리에서 鑑賞할 수 있는 機會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휘트니 美術館은 企劃展示에서 남다른 能力을 誇示하고 있다.

    휘트니 美術館은 가장 美國的인 畫家로 꼽히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 作品의 寶庫이기도 하다. 호퍼의 夫人은 男便이 死亡한 이듬해 2500點이 넘는 호퍼의 作品을 휘트니 美術館에 寄贈했다. 單一 作家 作品으로는 美國 美術館 歷史上 最大의 寄贈이다. 亦是나 거트루드가 호퍼를 높게 評價해 生前에 그의 作品을 많이 購入한 것이 因緣이 돼 이뤄진 일이다.

    뉴욕 州에서 태어난 호퍼는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서 平生을 보내면서 뉴욕의 모습, 特히 맨해튼의 人間 群像을 많이 그렸다. 그는 都市에 사는 人間의 疏外感과 孤獨을 表現한 畫家로 評價받는다. 호퍼는 1932年부터 휘트니 年例 展示會에 每年 參加했다.

    휘트니 美術館이 所藏한 그의 作品 中에 ‘햇빛을 받고 있는 女人’(A Woman in the Sun, 1961)을 꼭 言及하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女人이 房 한가운데 서서 窓門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正面으로 받고 있다. 女人 옆 寢臺의 이부자리를 보면 발가벗고 자다가 막 일어난 것 같다. 손가락에는 피우던 담배가 들려 있고, 女人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理智的이면서도 쓸쓸하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고 活動한 都市 사람인 만큼 都市人의 孤獨을 누구보다 잘 알고 表現한 作家다.

    휘트니 美術館은 거트루드의 肖像畫도 所藏하고 있다.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1865~1929)가 그린 1916年 作品인데, 이 그림이 注目받는 것은 거트루드가 휘트니 美術館의 創立者여서가 아니라 當時로서는 매우 破格的인 肖像畫이기 때문이다.

    當時만 해도 肖像畫, 特히 女性의 肖像畫는 華麗하게 丹粧한 優雅한 모습이 大勢였다. 그런데 헨리가 그린 거트루드는 파자마 같은 바지에 윗옷은 앞을 풀어헤쳤고, 安樂椅子에 비스듬히 누워 팔 다리를 자유롭게 뻗고 있다. 이런 모습은 19世紀에 많이 그려진 賣春婦 누드畫와 비슷하다. 但只 옷을 입고 있다는 差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男便 해리는 이 그림을 집 안에 걸지 못하게 했다. 結局 이 그림은 1931年 휘트니 美術館이 槪觀하고 나서야 壁에 걸릴 수 있었다.

    거트루드의 肖像畫를 그린 로버트 헨리 또한 한 時代를 風靡한 畫家다. 1929年 美國 最高의 生存作家 3人에 뽑혔을 程度다. 1865年 오하이오 州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放浪記 많은 아버지를 따라 네브래스카, 콜로라도 等을 轉轉하며 살았고, 18歲 때인 1883年 뉴욕으로 왔다. 以後에도 뉴저지, 필라델피아, 프랑스 파리 等으로 옮겨 다녔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많은 畫家를 養成했는데, 에드워드 호퍼, 조지 벨로스 等이 그의 弟子다.

    來年 새 둥지로 移徙

    휘트니 美術館은 2億 달러가 넘는 收益資産을 갖고 있다. 特히 에스디 로더 化粧品 會社의 社長인 레너드 로더가 2008年 이 美術館에 1億3000萬 달러라는 巨金을 寄附했다. 1931年 600餘 所藏品으로 始作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現在 建物로 移轉한 1966年에는 2000餘 點으로 늘어났다. 現在 所藏品은 2萬餘 點이라고 한다.

    거트루드는 1942年 67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美術館 運營에 온 精誠을 쏟았다. 그는 1男 2女를 뒀는데, 두 딸은 휘트니 美術館 運營에 直接 參與하기도 했다. 거트루드의 孫女 플로라 밀러 碑들은 1999年 家族에 對한 回顧錄인 ‘휘트니의 女子들과 美術館(The Whitney Women and the Museum They Made)’을 펴냈다. 이에 앞서 1982年에는 거트루드에 對한 映畫 ‘Little Gloria, Happy At Last’가 나온 바 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최정표

    1953年 慶南 河東 出生

    美國 뉴욕주립대 博士(經濟學)

    公正去來委員會 非常任委員, 建國大 상경大學長

    著書 :‘財閥들의 特別한 外道’ ‘韓國財閥社硏究’‘公正去來政策 허와실’‘韓國의 그림價格指數’等

    現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經實聯 共同代表


    휘트니 美術館은 2015年 完工을 目標로 맨해튼 첼시 地域에 새로운 建物을 짓고 있다. 맨해튼 西쪽 海岸가의 地上 鐵道를 公園으로 바꾸어놓은 하이라인 파크 바로 옆이다. 첼시로 移轉하고 나면 現在 建物은 한때 휘트니를 拒否했던 메트로폴리탄 美術館이 使用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美國 美術館들은 所藏品이 急速度로 늘어나 空間 問題에 골치를 앓고 있다. 美術館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美術館이 들어선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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