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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을 위한 飮食에 藝術을 입히다|신동아

神을 위한 飮食에 藝術을 입히다

떡살 木彫刻匠 김규석

  • 글·한경심 │韓國文化評論家 寫眞·박해윤 記者

    入力 2014-09-19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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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갖 提議와 잔치에 登場하는 떡은 福을 求하고 厄을 막으려 神에게 바치는 飮食이다. 그 떡에 富貴榮華와 健康, 出世, 子孫 繁榮을 祈願하는 意味로 찍은 떡살은 神에게 드리는 祈禱文과 같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떡은 神을 위한 飮食이다. 일常識이 아니라는 말이다. 떡은 기쁘고 특별한 날이나 神에게 祭祀를 드릴 때 마련한다. 아이의 百日喪에는 깨끗한 白설기가 올라가며, 開業을 하거나 移徙를 가게 되면 厄막이 구실을 하는 팥 시루떡을 돌린다. 祭祀床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떡이다. 勿論 告祀床에도 떡이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떡은 술만큼이나 靈性이 剛한 飮食이다. 魂魄을 불러오는 술이 日常을 超越하는 世界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한다면, 떡은 神을 달래고 神에게 人間의 所望을 付託하려 바치는 膳物과도 같다. 그래서 떡은 매우 人間的인 飮食이기도 하다.

    사람의 懇切한 所望을 담은 떡살 製作 傳統을 唯一하게 잇는 김규석(金奎奭·55)은 30年 동안 우리 文樣의 豐富한 象徵性과 아름다움을 世上에 알린 匠人이다.

    “떡에 찍는 文樣을 그저 떡을 예쁘게 꾸미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떡살 文樣 하나하나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生日과 婚禮, 祭祀床에 오르는 떡에 찍는 떡살 文樣이 다 다릅니다. 아무거나 찍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古物도 묻히지 않고 다른 副材料를 裝飾으로 올리지도 않은, 가장 單純한 形態의 절편을 裝飾하는 것은 다만 凹凸로 남는 떡살 文樣뿐이다. 그 밋밋한 떡에 살이 찍히면 떡은 메시지를 담은 神聖한 飮食이 된다. 그래서 옛말에 ‘當場 먹을 떡이라도 살 박아 먹으랬다’는 말이 있다. 살이 박힘으로써 그 떡은 神의 祝福을 받는 飮食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祖上은 떡을 올리는 境遇에 따라 適切한 文樣을 골라 썼다. 例를 들어 百日喪에 오르는 떡에는 물결무늬와 芭蕉門을 많이 찍는다. 물은 東洋에서 生命의 起源으로 꼽고, 芭蕉는 生命力과 富를 象徵한다. 또한 물결무늬는 ‘물결 兆(潮)’가 調整(朝廷)의 兆(朝)와 音이 같아서 나중에 朝廷에 나가는 出世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떡 한 조각에 담은 意味가 正말로 크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여러 가지 크기와 模樣의 떡살과 茶食板. 文樣 조각 麵의 나무와 떡살 몸體 나무가 다른 境遇도 種種 있다. 文樣뿐 아니라 떡살 全體 形態도 藝術的으로 아름다운 게 많다.

    百日떡이 이 程度니 婚禮나 慣例, 祭祀와 葬禮 等에 쓰는 떡살 文樣의 種類와 意味는 어마어마하다. 茶山, 多男(多男), 警査, 富貴榮華, 長壽, 極樂往生, 淸廉, 고매, 回復, 夫婦琴瑟, 厄막이, 永遠不滅, 기쁨…. 人間의 모든 念願을 다 담은 듯하다. 그래서 그 작은 떡 한 조각에 하늘의 해와 달을 넣고 물결도 새겨 넣고, 토끼와 十長生, 나비와 벌, 菊花와 蓮꽃, 唐草瓦 格子門, 그리고 아예 富貴(富貴) 같은 글字를 露骨的으로 박거나 幾何學的 文樣까지 찍었다. 幾何學的 文樣은 宇宙의 神祕나 人間의 原初的인 두려움을 나타낸다는 說이 있다.



    富貴榮華와 장수는 時代를 莫論하고 누구나 바라는 바지만, 떡살文은 時代相도 담았다. 日帝强占期에는 太極 文樣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고 美國 文化가 들어온 뒤 만든 것에는 英語로 새긴 것도 있다고 한다. 近世에 쓰던 떡살에는 어느 가난한 집에서 만든 것인지 學校와 自動車를 새긴 것도 있다. 敎育을 받아 더 나은 삶을 保障받고 싶고, 自動車를 탈 만큼 富者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素朴하게 表現한 것이렷다.

    神에게 보내는 메시지

    永遠不滅부터 自動車까지, 人間의 原初的인 所望부터 아주 世俗的인 欲望까지 含蓄的으로 담아낸 떡살 文樣은 그 念願의 種類만큼 다양하다. ‘鬼神 듣는데 떡 소리 한다’는 俗談이 있을 程度로 神이 떡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事實은 人間이 神들에게 그만큼 많은 所望을 빌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많은 所願을 크지 않은 떡 조각에 담아내려니 表現이 含蓄的日 수밖에 없다. 그래서 떡살 文樣은 같은 文樣이 單獨으로 쓰이기도 하고 여러 文樣이 함께 複合的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같은 菊花文이라 해도 背景에 물결이 들어갈 수도 있고, 햇살이나 私選, 昆蟲, 幾何學的 文樣을 넣을 수도 있어 비슷한 듯하면서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限도 끝도 없이 變容된 文樣들을 보노라면 記號와 象徵의 바다에 빠진 氣分이 든다.

    “文樣은 글씨가 나오기 前의 言語 表現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떡살뿐 아니라 옷이나 기와, 陶瓷器, 丹靑 等에 들어가는 모든 傳統 文樣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特히 떡에 찍는 떡살 文樣은 神에게 드리는 祈願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그래서일까. 떡살 材料로 엄나무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엄나무는 鬼神을 쫓는 나무라는 俗說이 있다. 그런 믿음 말고 實際로 떡살에 적합한 나무의 條件은 뭘까.

    “먹는 飮食에 찍는 것이므로 于先 냄새가 나지 않는 나무여야 합니다. 그리고 물氣(晉)가 없어야 하고요. 숨구멍이 稠密한 組織의 나무면 좋지요. 소나무처럼 纖維質이 많은 나무는 그 纖維質이 먼저 닳으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條件에 가장 잘 들어맞는 나무는 감나무, 먹감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회楊木 等이다. 다 단단해 잘 닳지 않는 나무다. 그中에서도 8割이 감나무다.

    “어느 집에나 감나무 한두 그루는 심을 程度로 求하기가 쉬운 材料여서 감나무 떡살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요. 茶食板은 잘사는 집에서만 썼지만 떡살은 庶民도 다 썼기 때문에 求하기 쉬운 材料로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떡살로 쓰는 나무 中 禁忌하는 나무가 있으니 바로 祠堂이나 城隍堂에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이 비는 나무와 벼락 맞은 나무다. 사람들이 빌었다는 것은 그 나무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는 뜻이니 그런 나무를 쓰지 않는 것은 當然해 보이지만, ‘霹棗木(霹棗木)’이라 불리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圖章으로 만들 만큼 財數 좋은 나무가 아니던가.

    “벼락 맞은 나무는 符籍 구실을 하지만, 집에 떨어질 벼락을 代身 받은 것이라 不正 탔다고 보기에 떡살 材料로는 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災厄을 받아낸 것이므로 厄땜하는 役割은 할지 몰라도 한便으론 ‘깨끗하지 못하다(不淨)’고 본 것이다. 神에게 올릴 떡에 찍는 떡살을 만들 나무는 人間의 마음이든 自然의 災害든 하나도 손이 안 간 깨끗한 나무여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쯤 되면 떡살은 單純한 부엌세간 調理用具가 아니라 오히려 提起(祭器)에 가까운 게 아닌가.

    스승 찾아 咸平에서 京畿道까지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鳳凰의 날갯짓을 聯想시키는 김규석의 木彫刻 作品. 香나무를 象嵌해 깎아낸 것으로 매우 獨特하다.

    먹을 것이 흔해지고, 신령스러움이 迷信으로 置簿되는 오늘날 떡 한 조각에 담긴 意味를 理解하고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먹는 사람은 且置하고 떡 만드는 이도 意味를 알고 떡에 살을 박는 境遇가 몇이나 될까. 김규석 丈人은 맞지 않게 찍힌 떡살 文樣을 볼 때마다 마음이 便치 않다고 한다.

    “婚禮 때는 多産을 象徵하는 葡萄나 福을 의미하는 박쥐, 기쁨을 倍로 한다는 雙喜(囍)字 文樣을 쓰고, 生日床이나 回甲床에는 長壽를 뜻하는 국수나 거북, 十長生 等을 主로 찍습니다. 또 葬禮나 祭祀에 올릴 떡에는 輪廻思想을 담은 수레바퀴 文樣을 넣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文樣이 엉뚱한 곳에 들어가면 異常하지요.”

    우리나라에서 唯一한 떡살 專門 木彫刻匠으로 無形文化財가 된 그이지만 事實 그도 예전엔 떡살에 門外漢이었다. 처음 木彫刻을 始作했을 때만 해도 떡살이 그의 삶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1959年 全南 咸平에서 태어난 김규석은 故鄕에서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이듬해 木彫刻匠 이주철 先生 門下에 들어가면서 木彫刻 人生을 始作했다.

    “先生님은 世上에 널리 알려진, 골프 치는 裸體女人像을 彫刻한 有名 彫刻家 이수영 先生의 아들로, 虎狼이를 처음 木彫刻으로 만들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난 분입니다.”

    이주철 先生은 虎狼이를 비롯해 소를 끌고 밭을 가는 모습 等 韓國籍 風俗을 描寫한 彫刻에 뛰어나 흔히 ‘風俗彫刻가’로 불렸다. 이런 彫刻은 外國人에게 記念品으로 많이 팔려 이 先生이 運營한 ‘國際工藝’는 한때 職員이 100名에 達할 만큼 잘됐는데, 1970年代 들어 亡하고 말았다고 한다.

    “哀惜하게도 저는 國際工藝가 亡한 다음 弟子로 들어갔지요. 그래도 조각 實力이 뛰어난 先生님 밑에서 木彫刻의 基礎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彫刻칼로 파낸 거친 背景에 香나무를 象嵌한 꽃, 그리고 아래위로 萬(卍)諮問이 이어지는 裝飾까지 여러 가지 技法을 動員한 作品.

    咸平에서 京畿道까지, 大體 어떤 因緣으로 스승을 찾아갔느냐고 물으니, “우리나라에서 彫刻 솜씨 第一 좋은 분을 찾다보니 이 先生님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글쎄, 왜 彫刻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스승을 찾았던 걸까. 혹 彫刻 솜씨가 좋았다는 할아버지의 影響 때문에?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먹고살려고’ 始作했다고 한다. 그래도 素質 따라 生計를 求하게 마련인데, 그는 끝까지 自身은 “솜씨가 없다”고 謙遜해한다. 아무리 봐도 그의 對答은 빈말인 것 같다. 손作業을 즐길 만큼의 솜씨 없이는 떡살을 되살리는 일에 그토록 매달릴 수 없을 것이다. 勿論 그에게는 솜씨보다 더한 資産이 있긴 하다. 바로 執念과 努力이다.

    이연채 先生과의 만남

    軍隊를 다녀오고 난 뒤 1985年 그는 全南 光州에 ‘硅石木彫刻硏究所’를 열었다. 스승에게서 獨立한 것이지만, 그는 只今도 스승을 모신다. 그의 집에 스승을 1年間 모시고 산 적도 있고, 只今도 자주 서울을 오간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한 분의 스승이 있었으니, 그를 떡살의 世界로 引導한 故(故) 이연채 先生이다. 南道儀禮飮食 匠人으로 光州 無形文化財인 이연채 先生을 김규석이 처음 만났을 때, 이 先生은 文化財도 아니었고, 홀로 子息을 키우며 예전 가난한 兩班 아낙네들이 自己 집에서 하는 안침술집처럼 아는 사람에게만 飮食을 待接해 파는 處地였다.

    “先生님은 飮食 솜씨는 勿論이고 동동酒 等 술 담그는 솜씨도 뛰어나셨죠. 先生님은 떡살도 直接 만드셨는데, 先生님 宅을 드나들면서 나무를 자르고 깎아드리고 하면서 漸漸 떡살에 빠져든 겁니다.”

    이연채 先生은 母親이 光州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崔富者집 딸인 만큼 먹고살기 힘들어 傳統을 維持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傳統을 잘 알고 있었고, 이 先生 自身 수피아여고 1回 卒業生으로서 우리 傳統을 이어야 한다는 意識도 있었다. 그래서 自身을 도와주는 젊은 김규석에게 ‘이 일을 해보라’ ‘이것은 꼭 이어가야 할 傳統이다’라며 자꾸 꾀었다.

    “그때만 해도 조각에 欲心이 있어서 떡살을 할 생각은 없었지요. 그런데 先生님이 元體 剛하게 勸誘하시는 데다 그 누군가는 해야겠기에, 더구나 資料 모아놓은 것까지 제게 주시니 안 하려고 해야 안 할 수가 없게 됐지요.”

    自意 半 他意 半이었든, 아니면 偶然인지 必然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떡살을 떠안게 된 것은 千萬多幸이었다. 當時 떡살은 蒐集家나 在野 硏究者는 더러 있었어도 만드는 사람의 脈은 끊어질 地境에 이르른 때였다. 6·25戰爭이 터지기 前까지는 그래도 慶北 醴泉의 有名한 떡살 집안의 김한량(失明인지 別名인지 분명치 않다. 實際로 閑良이었다고 한다) 氏가 뛰어난 떡살을 만들어냈는데, 그가 6·25 때 失踪되면서 醴泉 떡살의 脈은 끊기고 말았다.

    김규석이 이연채 先生과 함께 떡살 硏究에 本格的으로 突入하던 時期, 처음에는 무척 답답했다고 한다.

    “떡살에 關한 硏究나 整理된 資料가 別로 없어 技術을 傳受받는 것만으로는 不足했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體系的으로 整理할 兼 冊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事實 그때까지만 해도 釜山의 김길성 氏가 在野 硏究者로서 떡살을 많이 모으는 程度였고, 日本에서 우리 떡살에 關한 冊이 나와 있을 뿐이었다. 김규석은 떡살에 關한 제대로 된 冊을 멋지게 펴낼 決心을 하고 資料를 모으는 한便, 우리 民畫나 各種 紋樣집을 죄다 涉獵하며 理論 工夫도 해나갔다. 그리고 떡살 文樣을 하나씩 새로이 파나가면서 拓本도 하며 冊을 만들기 위한 긴 準備 作業에 들어갔다.

    17年間 一週日에 하나씩 만들어

    冊을 準備하는 期間은 그에게 修鍊期이기도 했다. 一週日에 하나씩 作品을 만드는 것을 目標로 해서 새벽 두세 時에 일어나 作業을 始作했다. 마치 禪僧이 修鍊하듯 그렇게 作業한 지 17年, 1000餘 點의 作品을 만들 수 있었다. 販賣한 作品까지 合하면 6000點은 만든 것 같다고 한다. 작은 作業臺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열 몇 時間씩 새기고 파는 그 作業에 무슨 재미가 있어서 그렇게 沒頭할 수 있었을까.

    “그저 勞動하듯 했습니다. 보람요? 누가 알아주느냐고요? 안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누가 시켜 한 일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요. 아예 어렵게 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 놀라운 것은, 作品으로 만든 1000餘 點 가운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傳統 文樣을 基本으로 하되, 모두 自身의 意圖를 살린 創作品이다. 그렇게 만든 作品으로 두 卷의 冊을 펴냈으니 바로 2005年에 나온 ‘所重한 우리 떡살’과 이듬해 나온 拓本집 ‘아름다운 떡살무늬’다. 이 두 卷은 만드는 데만 3年이 걸렸을 만큼 厖大한 資料를 分類해 담았으며 영문도 倂記했다. 이 冊을 보면 우리 文樣이 이토록 다양하며 華麗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編輯하는 데만 3年이 걸린 이 冊 두 卷에 들어갈 떡살 作品을 만들기 위해 김규석은 17年間 쉬지 않고 作業했다.

    “기와나 담牆, 丹靑, 옷, 裝身具, 冊表紙(菱花板), 詩箋紙(便紙紙) 等에도 文樣을 쓰지만 떡살처럼 文樣 種類가 많은 것은 없지요. 우리 文樣의 報告라고 할 떡살만 硏究해도 우리 民族이 무엇을 念願하고, 그것을 어떤 式으로 表現했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文樣이 完成되고 가장 華麗하게 꽃핀 時期를 高麗時代로 본다. 高麗의 文樣만큼 세련되고 아름다운 게 없다는 것이다. 高麗時代 떡살은 남아 있는 게 없지만, 朝鮮時代에 그대로 이어져 發展했다. 現在 남아 있는 떡살은 오래된 것이 200年 前後 것인데, 좋은 떡살은 300萬~400萬 원을 呼價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남아 있는 떡살이 貴해서 더 비쌌는데, 北韓 것이 中國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값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떡살에도 地方色이 있다고 한다. 慶尙道는 儒林이 많아서인지 옛 傳統 그대로 原形을 維持한 투박하고 單純한 模樣인 데 反해 穀物이 豐富했던 全羅道 떡살은 세련되고 얄팍하게 예쁘다.

    “京畿道와 서울에는 떡살보다 茶食板이 많습니다. 茶를 즐길 만큼 餘裕 있는 집안이 많았다는 뜻이지요.”

    茶食과 藥果에도 떡살과 마찬가지로 文樣을 새기지만, 떡살에 비해 文樣이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다고 한다. 茶食菓 藥果는 菓子類로 選擇해서 먹는 것이지만, 祭禮가 必須였던 傳統社會에서 떡은 必須였다. 그래서 떡살은 全國 어느 집에도 꼭 있어야 해서 文樣이 그만큼 發展하게 됐다. 또 山間地方 떡살에는 토끼나 노루, 野生花 文樣이 많이 보이고, 海岸地方 떡살에는 게나 물고기, 새우 文樣 等이 보인다. 그만큼 地方色이 두드러지는 것도 떡살問議 魅力이다.

    상서로운 鶴 같은 새, 不老長生한다는 사슴과 거북, 出世와 여유로운 삶을 象徵하는 잉어, 吉兆를 뜻하는 까치와 매미,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벌, 子孫 蕃盛을 祈願하는 葡萄와 石榴, 그리고 대나무巡, 福과 辟邪(?邪)를 뜻하는 박쥐 等 거의 모든 動植物이 떡살文에 두루 쓰였다. 宇宙를 나타내는 太極과 無限大로 뻗어나감을 象徵하는 萬(卍)字, 天地開闢을 뜻하는 벼락(雷紋·雷文)도 우리 民族이 즐겨 쓰던 文樣이다. 하지만 特異하게도 12地神이나 使臣(靑龍, 白虎, 玄武, 朱雀)은 文樣으로 쓰지 않았다. 아마도 12地神과 使臣은 그 自體가 神이기 때문에 神에게 바치는 떡에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떡살文은 未來 디자인의 源泉

    그가 만드는 떡살은 一一이 손으로 다듬은 것이라 當然히 값이 꽤 나가는데, 最近 우리나라 사람들이 中國이나 나무가 많이 나는 印度네시아에서 떡살을 大量으로 만들어와 打擊이 크다고 한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圖案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中國 사람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만든 것에는 우리 美感에 맞지 않는 部分이 있지요. 그런데 그런 製品이 인터넷에서 2萬~3萬 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꼭 外國에서 들어오는 떡살이 아니어도 떡살의 需要는 現代社會에서 크게 늘 것 같지 않다. 예전에는 冠婚喪祭는 勿論이고 茶禮, 철철이 드는 명일(名日)까지 떡을 해야 할 날이 많았다. 그래서 떡살에 누구네 집 떡살인지 적혀 있을 만큼 집집마다 몇 種類의 떡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名節도 簡素하게 지내고 집에서 直接 떡을 하는 境遇도 거의 없으니 떡살의 未來는 어찌될까.

    “1980年代 우리 茶와 떡이 暫時 流行했을 때 떡살이 잘나갔는데, 갈수록 需要가 적어지는 게 事實입니다. 그러나 떡살文은 디자인의 報告로 앞으로 産業 分野로 發展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衣食住가 變했다지만 裝飾이 들어가지 않는 分野는 없다. 天障과 壁, 타일, 窓살, 옷감, 담벼락, 有利, 企業의 로고나 便紙紙, 冊表紙까지 文樣이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 只今은 洗練된 外國 文樣을 選好해서 그대로 쓰고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 文樣을 活用하는 디자인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그는 希望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希望의 불씨를 直接 일군 사람은 바로 김규석 그 自身이다. 그가 떡살을 直接 파고 冊으로 整理해내기 前까지 文化界에서도 떡살을 所重한 文化財로 待接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피나는 努力 德澤에 2000年 그는 機能戰勝者로 指定받았고, 2007年에는 木工藝 部門 名將이 되었다. 그리고 2013年, 드디어 全南道 無形文化財가 되었다. 그러나 文化財에 떡살 分野가 없으므로 木彫刻 部門에서 떡살 專門으로 올랐다. 그러나 떡살이 우리가 保存해야 할 文化財라는 認識 自體도 그가 아니었으면 不可能했으니, 그가 받은 ‘타이틀’은 모두 그가 直接 이룬 것이다.

    “그동안 木彫刻 分野는 佛像 爲主였습니다. 떡살 前文은 저 하나뿐이니 文化財에서 차지하는 比重이 아직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文樣은 빗살무늬 土器 以來 사람의 가장 原初的인 美意識을 담고 있고, 時代에 따라 變形을 거듭해왔습니다. 이 時代에도 새로운 걸 創造해 高麗時代 水準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석은 우리 떡살 文樣은 웬만큼 整理했다고 보고 이제 그만의 作品을 해나간다. 繪畫的인 描寫와 圖案的인 文樣을 結合해 創造한 새로운 作品과 느티나무에 香나무를 象嵌해 넣은 木彫刻 作品을 만드는데, 그 結實은 只今 準備 中인 ‘김규석 木工藝 作品集’과 ‘김규석 紋樣집’으로 發表할 豫定이다.

    1996年 光州 가까운 潭陽에 自身의 號를 딴 目算工藝館을 짓고 한창 作業 中인 그에게는 든든한 後繼者도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直接 그림과 彫刻을 가르친 딸과 아들이 모두 扶餘에 있는 韓國傳統文化大學校에서 繪畫와 嘲笑를 專攻한다. “아직 어떤 길을 갈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30年間 홀로 作業해온 그의 떡살 人生이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目算工藝館에 展示된 自身의 作品과 함께. 떡살이 專門이지만 木彫刻匠으로서 다양한 彫刻 作品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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