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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故鄕 돌아갈 수 없는 時間|新東亞

사라져 가는 故鄕 돌아갈 수 없는 時間

김희갑 ‘鄕愁’

  • 글·김동률 | 西江大 MOT大學院 敎授 yule@empas.com 寫眞·권태균 | 寫眞作家·신구대 敎授 photocivic@naver.com

    入力 2014-10-22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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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마 꿈엔들 잊히지 않는’ 故鄕의 노래. 越北 或은 拉北된 詩人 鄭芝溶의 詩에 大衆歌謠 作曲家 김희갑이 曲을 붙였다. 歌手 이동원이 曲을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聲樂家 박인수는 이 노래를 불렀다고 國立오페라團에서 除名당했다. 김희갑이 “노래로 만들기엔 適當치 않다”고 했던 詩. 그러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傳해졌다.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휘문高普 時節의 정지용. 極甚한 鄕愁病에 시달렸다고 傳해진다.

    온 나라가 올림픽 熱氣에 사로잡혔던 1988年 3月 15日, 只今은 없어진 서울 서대문구 忠正路 예음홀. ‘故鄕에 故鄕에 돌아와도/ 그리던 故鄕은 아니러뇨/ 山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바리톤 김관동의 重厚한 목소리가 餘韻 속에 잦아지자 200餘 名의 聽衆이 우레와 같은 感激의 拍手를 보냈다. 더러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6·25戰爭이 끝난 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이 노래는 꼭 38年 만인 이날 歷史의 저便에서 다시 찾아와 우리에게 ‘故鄕’의 목소리를 傳한 것이다.

    이날 音樂會의 公式 名稱은 ‘다시 찾은 우리의 노래’, 副題는 ‘鄭芝溶의 詩에 부친 蔡東鮮의 歌曲 되살리는 音樂會’였다. 38年 만에 鄭芝溶 文學의 奚琴과 더불어 作曲家 蔡東鮮이 曲을 붙인 歌曲 ‘故鄕’이 이날 復權된 것이다. 들을수록 故鄕에 對한 아련한 그리움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무척이나 抒情的이고 江물이 굽이를 도는 듯한 悠長한 曲調의 노래다.

    그러나 이날 부른 ‘故鄕’은 40代 以後의 旣成世代나 알 뿐 젊은 世代에겐 무척 낯선 노래다. 이 노랫말이 된 時 ‘故鄕’을 지은 鄭芝溶이 戰爭期間에 越北하거나 拉北됐다는 理由로 노래마저 오랫동안 禁止曲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旣成世代에게는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임은 아니 뵈네/ 들菊花는 愛妻럽고/ 갈 꽃만 바람에 날리고…’ 로 始作되는 ‘그리워’라야 理解가 되거나 아니면 ‘꽃피는 봄 四月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山 저 너머…’로 始作되는 ‘望鄕’이라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왜냐하면 鄭芝溶의 詩로 인해 노래 自體가 禁止된 後 이은상과 박화목이 曲調의 流麗한 아름다움에 感動해 各各 ‘그리워’ 와 ‘望鄕’이라는 노랫말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을 起點으로 이 노래는 鄭芝溶의 詩 ‘故鄕’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1989年 著名 聲樂家인 서울大 敎授 박인수는 곤혹스러운 狀況에 휩싸인다. 鄭芝溶의 詩에 流行歌 作曲家 김희갑이 曲을 붙인 노래 ‘鄕愁’가 그 端緖가 된다. 박인수는 歌手 이동원과 ‘鄕愁’를 錄音했다. 요즈음 말로 크로스오버 音樂인 셈이다. 當時로서는 聲樂家가 大衆歌謠를 부른다는 게 매우 異例的인 일. 노래 ‘鄕愁’가 國民歌謠처럼 큰 反響을 일으키자 國立오페라團은 그를 除名한다. 클래식 音樂을 冒瀆했다는 게 理由였다. 只今의 常識으로는 理解가 가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朴 敎授는 “클래식 音樂이 大衆音樂보다 優越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떤 先入觀이나 장르의 區分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며 順順히 除名을 받아들였다. 國立오페라團에서 쫓겨나는 자리에서 그가 “다른 大衆歌謠面 몰라도 그것이 鄭芝溶의 ‘鄕愁’라면 어떤 反對給付도 오히려 榮光”이라고 宣言하자, 한동안 純粹 音樂界는 ‘打倒 박인수’를 외치며 법석을 떨기도 했다.



    실개川, 질火爐, 얼룩배기 황소…

    그날 以後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부른 ‘鄕愁’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聲樂家의 첫 大衆歌謠 錄音이란 點에서도 自然스레 世間의 話題를 더했다.

    歲月이 흘렀다. 요즘 사람들은 ‘鄕愁’란 노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래 ‘鄕愁’의 후렴구에 登場하는 ‘參下(原文) 꿈엔들 잊힐리야’를 들으면 大部分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參賀 꿈엔들 잊힐리야’가 떠올리는 故鄕에 對한 無限한 그리움에 사람들은 暫時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도회인에게 故鄕은 오직 記憶으로만 存在할 뿐 이 世上의 指導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기에 노래 ‘鄕愁’를 통해 떠나온 故鄕을 追憶하게 된다.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鄭芝溶의 詩 ‘鄕愁’의 모티프가 된 草家집 風景. 더 以上 찾기 어려운 過去가 되고 있다.



    잘나가던 오페라 歌手를 한 放에 날려버린 노래 ‘鄕愁’의 始作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이다. 올림픽 熱氣가 한창이던 1988年, 歌手 이동원은 신촌의 한 書店에 들렀다. 只今은 痕跡조차 없어진 社會科學 專門 書店 ‘오늘의 冊’이다. 當時 이 書店은 理念書籍 販賣로 大學街에 널리 알려졌다.

    노랫말을 찾기 위해 詩集을 살피던 이동원은 書店 구석에 감춰진 ‘鄭芝溶 詩集’을 찾아내 읽다가 그 길로 汝矣島에 사는 作曲家 김희갑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희갑은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잘나가는 人氣 作曲家였다. 車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時 ‘鄕愁’에 빠져 있던 이동원은 김희갑에게 曲을 붙여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김희갑은 一言之下에 拒絶한다. ‘鄕愁’의 韻律이 曲을 붙이기가 쉽지 않고 또 억지로 曲을 붙일 境遇 오히려 이 詩의 意味를 다칠 수 있다는 것이 理由였다. 하지만 이동원은 莫無可奈로 固執했고 結局 김희갑은 1年 동안 苦心한 끝에 이듬해인 1989年 初 曲을 完成했다. 이어 이동원과 聲樂家 박인수가 함께 부르면서 世上에 公開됐다. ‘鄕愁’의 誕生 說話다.

    “넓은 벌 東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川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金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 始作되는 鄭芝溶의 ‘鄕愁’는 韓國人이 가장 사랑하고 또 愛誦하는 詩 中 하나다.

    後世의 詩人들은 그의 詩가 보여주는 感性은 새벽하늘의 샛별보다도 燦爛해 우러러보기조차 눈부시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1930年代 以來 文學의 기쁨을 알고 지내는 韓國의 知性 中에서 智勇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다고들 한다. 일찍이 英文學者 移讓하는 엘리어트 等 英語圈의 어떤 詩人보다도 지용의 詩가 뛰어나다고 讚歎한 적이 있다. 李敭河는 瘠薄했던 1920年代 도쿄 留學 時節에도 大部分의 朝鮮人 留學生은 植民地 靑年의 悲哀를 그린 지용의 時 ‘카페 프란스’를 즐겨 읊었으며 그가 同胞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回顧한다.

    알려진 대로 지용은 모더니즘風의 詩를 써서 文壇의 注目을 받은 詩人이다. 1930年代 初 ‘시문학’의 同人으로 參與, 金永郞과 함께 純粹 抒情詩 開拓에 힘을 썼다. 鮮明한 視覺的 이미지의 構築, 簡潔하고 正確한 言語 驅使 等으로 韓國 現代詩의 礎石을 놓은 詩人으로 評價된다.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沃川 舊邑의 精肉店 風景. 看板에 얼룩배기 황소가 登場한다.

    故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없다

    지용은 1930年代 末부터 ‘문장’誌의 審査委員으로 있으면서 박두진, 朴木月, 趙芝薰 等 靑鹿派를 發掘한 것으로도 有名하다. 그러나 光復 以後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加入해 活動했고 6·25를 전후해 行方不明돼 生死를 모른다. 한때 越北 詩人으로 分類돼 文學史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나 1988年 올림픽 熱氣 속에 解禁됐다.

    이런 緣由로 박인수, 이동원의 노래로 비로소 大衆에게 알려진 지용의 代表的인 時 ‘鄕愁’ 또한 越北 是非에 말려 오랫동안 韓國文學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의 純粹 母國語로 된 ‘鄕愁’가 던지는 意味가 至大해 많은 사람이 當局의 눈을 避해 ‘鄕愁’를 읽고 배웠다. 禁止된 1950年代 以後에도 韓國人의 끔찍한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실개川, 질火爐, 얼룩배기 황소, 짚베개, 어린 누이, 늙으신 아버지 等이 適切하게 配列된 ‘鄕愁’는 農耕社會를 母胎로 한 韓國人에게 幼年의 한 時代를 돌아보게 하는 특별난 시다.

    그러나 노래로서 ‘鄕愁’는 于先 어렵다. 그래서 베테랑 作曲家 김희갑조차 ‘鄕愁’만큼은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킬리만자로의 豹범’ ‘그 겨울의 茶집’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바닷가의 追憶’ ‘달맞이꽃’ ‘봄비’ 等 主로 抒情性이 짙은 노래를 作曲해왔지만 지용의 詩가 가진 모더니티가 노래로서는 適當치 않았다는 것이 김희갑의 說明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發表되자마자 입에서 입으로 傳해지면서 豫想을 깨고 大衆的인 人氣를 누렸다.

    무엇이 이 노래를 有名하게 만들었을까. 唐나라 詩人 李白이 ‘巨頭망산月(擧頭望山月) 低頭社故鄕(低頭思故鄕), 卽 ‘ 고개를 들어 달을 보고 머리를 숙여 故鄕 생각에 잠긴다’라고 言及한 것처럼 누군가는 말했다. 故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사람들은 故鄕은 어머니의 子宮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거친 世波와 싸우다 傷處 입은 우리의 靈魂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씻어주고 싸매준다는 것이다.

    ‘鄕愁’는 지용의 나이 18歲이던 1922年 휘문高普 在學 時節 當時 敎旨‘搖籃’에 처음 실렸고, 1927年 一般에 發表됐다. 元來는 日帝强占期 寶城 筏橋 出身의 有名 作曲家 蔡東鮮이 이미 이 詩에 曲을 붙였고 이어 作曲家 변훈, 강준일 等이 다투어 曲을 붙였으나 노래 부르기의 어려움 때문에 歌曲 ‘鄕愁’는 오늘날 大衆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代身 大衆歌謠 ‘鄕愁’가 그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넓은 벌 東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川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金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火爐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四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城으로 발을 옮기고,

    黍離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정지용 生家에서 700m 距離에 있는 육영수 生家.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川’은 지용의 故鄕인 忠北 沃川郡 옥천면 하계리 40番地, 請石橋 밑을 흐르는 조그만 河川이다. 지용 生家에 자리 잡은 정지용文學觀의 文化解說師는 이 대목에서 “‘鄕愁’의 舞臺는 반드시 이 작은 河川을 의미하기보다는 곧 幼年時代의 한 心狀일 것 같다”고 說明한다. 서울에서 두어 時間 半 만에 만난 실개川은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雜草와 汚水로 범벅이 된 不潔한 河川日 뿐이어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高速道路에 나오면 만나는 沃川 舊邑 道路 立看板은 정지용 生家와 육영수 生家를 나란히 적어놓았다. 정지용 生家는 沃川에서도 남루한 舊邑에 있다. 草家집 模樣새를 갖춘 生家를 찾노라면 房 한 켠을 裝飾한 詩 한 句節이 探訪客을 반긴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만 하니 눈감을밖에.” 짧은 詩 ‘湖水’다.

    지용에 依한, 智勇을 위한…

    舊邑으로 불리는 生家 洞네는 온통 鄭芝溶 詩 句節로 塗褙됐다. 大型 슈퍼마켓의 商號는 ‘詩가 있는 上廻’이고 精肉店 看板에는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金빛 게으른 울음 우는 곳’이라고 써놓았다. 有名 올갱이局 食堂의 看板에는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城으로’가 새겨졌다. 沃川은 한마디로 ‘지용에 依한 智勇을 위한 지용의 故障’쯤 된다. 生家에는 平日인데도 적잖은 探訪客이 오간다. 文化解說師의 얘기에 귀를 쫑긋하며 듣기에 熱心이다. 문사철(文史哲)李 무너져 가는 時代에도 文學의 힘은 如前히 센가보다.

    沃川은 陸英修 女史의 고장이기도 하다. 지용 生家에서 不過 700m 距離에 육영수 生家가 있다. 旗발部隊 사람들로 人山人海다. 全國 各地에서 몰려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朴正熙·육영수 肖像畫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거나 두 손을 모아 절을 한다. 巨大한 邸宅 한 켠에는 가난했던 時代를 찍은 黑白寫眞들이 展示돼 있다. 寫眞 속의 그들이 바로 只今 그 寫眞을 보는 그 사람들이다. 人間에게 배고픔만큼 잊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代물림 가난이 싫어 손발이 닳도록 일해온 저들이야말로 只今의 豐饒를 가져온 原動力이 아닐까. 육영수 生家에 가득한 老人들을 보며 문득 느낀 斷想이다.

    이제 ‘鄕愁’의 故鄕엔 지용도 ‘鄕愁’도 없다. 그의 生家 터에 建立된 지용의 胸像과 是非가 그의 옛 故鄕을 무심하게 證言해줄 뿐. 옛이야기 속삭이던 실개川은 이제 雜草만 茂盛하고 그 荒凉한 시멘트 다리 밑에선 오리 몇 마리가 시궁창에 주둥이를 처박고 꽥꽥거린다.

    이 땅에서 都會人들에게 故鄕은 이제 現在完了型이 돼간다. 眞情으로 사랑했던 故鄕은 이제 ‘차마 꿈엔들 잊히지 않는 鄕愁’로만 存在할 뿐 그 누구도 그리운 그 時節로 돌아갈 수는 없다. 只今의 旣成世代야말로 眞正한 意味의 故鄕을 가진 마지막 世代이지만 只今의 世代가 늙어 죽기 前에 故鄕은 벌써 아득히 사라져 간다. 그래서 이 땅의 中年들은 어디서든 노래 ‘鄕愁’를 들으면 時間을 돌려 세워 그 옛날의 故鄕으로 가고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그런데 그때로 돌아가면 正말 幸福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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