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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눈맞춤에 病魔는 씻은 듯 사라지고…|신동아

달라이라마 눈맞춤에 病魔는 씻은 듯 사라지고…

티베트와 結婚한 韓國 女人의 다람살라 5年

  • 가연숙 │‘달라이라마 마음의 故鄕을 찾아’ 著者, 인터넷 ‘가교(www.gayo.org)’ 運營

    入力 2014-10-22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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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라이라마 5年 同行 取材하며 카메라에 담아
    • 티베트 亡命政府 勤務者와 結婚…“李 生은 티베트 爲해”
    • 딸 人庶에게 ‘뗀진빼마’ 이름 하사한 달라이라마
    • 亡命政府 現實 韓國에 알리는 게 疏明
    달라이라마 눈맞춤에 병마는 씻은 듯 사라지고…

    2010年 印度 累브라밸리에서 法會 後 外信記者들과 함께 한 달라이라마. 두番째 줄 오른쪽이 筆者.

    出嫁를 하고 싶었다.

    大學 時節, 어머니의 出家를 라디오 드라마로 製作하겠다며 順天行 無窮花號에 錄音 裝備를 싣고 仙巖寺로 向하던 나는 强靭해 보이려고 不斷히度 애쓰던 스무 살이었다. 自我와 마음의 本質을 찾는 데 陶醉한 熱情 넘치는 靑年으로 비치고 싶었던 게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나의 本質’에 關한 물음으로 이어졌고 短篇映畫 製作을 통해 答을 찾고 治癒하려고 努力했다.

    出嫁를 했음에도 前과 變함없이 子息을 챙기시던 어머니를 통해 接한 佛敎는 따뜻했고, 仁慈한 視角으로 人間을 直觀하게 하며, 論理的으로 思惟하는 힘을 키우는 資糧(資糧)李 됐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에게 지친 靈魂의 쉼터이자 唯一한 治癒의 安息處였다.

    徹底히 ‘자아’의 觀點으로 바라본 世上은 日常을 개인화했고, 結局 내가 바뀌어야 世上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가 變하지 않으면 世上도 變하지 않는다는 觀念을 고착시켰다. 그러나 굳어지고 싶지 않았다. 變化 속에서 柔軟해지고 싶었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至極히 사랑한 탓에 정작 山門 안에 歸依하지 못했다.

    以內 出嫁는 내 길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 契機가 된 때는 2009年 이른 봄. 英國 런던에서 열린 佛敎 國際映畫祭(Biff)를 參觀하면서 또 다른 世上, 참된 人間에 對한 眞正한 물음標를 接한 後부터다. 그렇게 나는 두 番째 印度 旅行을 위한 背囊을 꾸렸다.



    서른의 熱病

    다큐멘터리 映畫 製作을 위한 構想과 佛敎映畫 蒐集을 위해 印度를 다시 찾는다는 名目이었으나 事實 나는 서른의 熱病을 앓고 있었다. 韓國에서의 組織生活에 厭症을 느끼고 있었고, 價値를 잃어버릴까 念慮되는 삶의 패턴에 젖어 漸次 窮極의 熱情이 淘汰되는 걸 傍觀하고 싶지 않았다.

    델리에서 南쪽, 目的地는 카르나타카州였다. 9年 前 大學 初年 時節 背囊旅行으로 왔던 印度와는 完全히 다른 別天地였다. 남인도 門곳에 再建된 티베트 佛敎寺院 大鵬과 間덴에서 一週日을 보냈다. 數千 名의 學僧이 佛敎를 修學하는 寺院마을은 14代 달라이라마(텐진가초)의 願力으로 印度 亡命 以後 印度에 成功的으로 再建한 티베트佛敎 僧伽大學이다.

    韓國의 大學院에서 應用佛敎學을 修學하고 佛敎言論社 現場에서 接한 韓國 佛敎의 實相과는 全혀 다른 모습이 現實로 펼쳐지고 있었다. ‘金剛經’의 첫 句節, ‘歌詞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굽혀 法을 救한다’는 描寫가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해가 지자 선선해진 社員 마당에선 論爭이 벌어졌다. 金을 硏磨하듯 不法의 眞理 또한 疑問과 疑心을 내어 精髓만을 體得해야 한다는 因明學 授業이었다.

    그리고 印度의 首都 델리를 거쳐 北쪽으로, 달라이라마가 樹立한 티베트 亡命政府 所在地인 다람살라로 向했다. 高熱과 泄瀉病으로 온몸이 無氣力했으나 다람살라를 抛棄하고 싶지 않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다람살라行 夜間 버스에 12時間을 依支했다. 히말라야 雪山의 끝자락, 스며드는 寒氣에 어렴풋이 바라본 窓밖은 閑寂한 山골마을이었다.

    海拔 1800m. 거의 漢拏山 頂上 높이에 터를 마련한 티베트 亡命政府는 1959年 3月 10日 中國의 티베트 侵攻에 抗拒하는 티베트 民衆蜂起 後 印度로 亡命한 달라이라마가 세운 티베트 難民地區다. 印度 全域의 46個 티베트 難民마을을 總括해 責任 管理하는 中央政府가 이곳 다람살라에 있다. 12萬餘 名의 티베트人이 그들의 살길을 위해 暫時 머물거나 定着하는 곳. 英國의 印度 占領 當時 軍人들의 休養地였으며 印度가 獨立한 뒤 버려졌으나 달라이라마와 티베트人들이 再建한 以後 全 世界 旅行者들과 知識人들의 靈的 安息處로 變貌한 곳. 亡命 以後 印度에 難民으로 살면서 곧 티베트가 獨立해 그들의 故鄕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기다린 것이 오늘로 55年이다.

    티베트에 홀리다

    病勢는 好轉될 幾微를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듯 苦痛이 왔다. 餓鬼의 業報를 치르는 듯 飮食을 삼킬 때는 목 줄기가 타들어가듯 아팠다. 冥想과 呼吸으로 다스리려 해봤지만 末梢的 苦痛을 制御하기에도 力不足일 만큼 스스로의 根氣가 微弱했다. 藥을 먹기 위해 수프를 먹는 것으로 속을 달래며 나름대로 治癒의 時間을 보내는 사이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새해(로사) 外部 日程을 마치고 다람살라로 復歸 中이라는 消息이 들려왔다.

    여느 旅行者들과 어울려 달라이라마의 入城 歡迎 行列에 同參했다. 護衛 車輛들 속에서 달라이라마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 寫眞 속에서 뵌 溫和한 微笑 그대로였다. 時代의 成人과의 눈맞춤은 고작해야 3秒假量 됐을까. 興奮한 旅行者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歡喜心이 났다. 그 瞬間, 마치 地球의 自轉이 멈춘 듯 고요의 滴定에 들었고 나를 包圍했던 苦痛은 오간 데 없었다.

    歸國 後 어머니의 極盡한 看護를 받은 지 사흘 만에 奇跡처럼 回生했다. 그리고 確信했다. 내가 왜 다람살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半年 後. 다람살라는 나의 집이 됐다. 티베트語를 工夫하고 달라이라마의 定期 法文을 들으며 좋은 스승을 만나면 出嫁하고 싶다는 未練도 살짝 일으켜 보았다. 2009年 9月 韓國人 佛子들의 請으로 달라이라마의 法會가 열릴 때 敵을 두고 있던 佛敎言論社에 法文을 中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韓國에서 걸려온 電話 한 通을 받았다. 中國 베이징에서 8年 만에 달라이라마 特使와 中國 政府 間의 外交 會談이 열렸으나 그 內容이 韓國 言論에 仔細히 報道되지 않았으니 深層 取材를 해달라는 要請이었다. 이를 契機로 다람살라에 居住하는 唯一한 韓國人 記者의 삶이 始作됐다.

    베이징 特使 會談을 마치고 다람살라 티베트 亡命政府로 復歸한 달라이라마 特使團의 記者會見이 열린 2010年 2月 2日. 나는 작은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參席했다. 그 現場에서 나는 티베트의 現實과 달라이라마, 그리고 티베트 亡命政府의 三合을 體感했고 以後로 홀린 듯이 티베트 佛敎文化와 亡命政府의 現實을 韓國에 알리는 길에 沒入하게 됐다.

    ‘佛敎의 智慧와 方便’

    막상 客員記者 이름으로 佛敎言論社에 記事를 보내도 內容이 編輯되거나 때로는 실리지 않았다. 氣를 쓰고 取材한 原稿料로 4萬 원이 入金된 적도 있다. 10年이 넘도록 다람살라에서 韓國人을 위한 法會를 主管해오신 眞玉스님(慶州 東國大 티베트 大藏經 譯經院 院長)李 카메라를 사는 데 보태라며 미화를 얼마 주신 것을 가지고 專門家用 카메라 裝備를 正式으로 購入했다.

    取材를 위한 經費는 大部分 私費로 充當해야 했고 通帳 殘高는 恒常 不足했다. 韓國에 記事를 送稿하면 原稿料를 받았지만 活動 經費로 쓰기엔 力不足이었다. 取材 記事를 보내면 大部分 실어 주었지만 먼저 取材를 要請하지는 않는 構造였다.

    그나마 定期的으로 每달 月刊 ‘붓다’에 달라이라마의 法文을 寄稿한 것이 萬 4年이 돼간다. 티베트佛敎에 큰 關心과 愛情을 갖고 있는 정우스님(서울 구룡사 회주, 曹溪宗 軍宗特別敎區長)의 恩德이다. 이 모두가 忍耐와 疏明이 없었다면 不可能한 일이었고 周邊의 愛情 어린 關心이 없었다면 진즉에 그만둬야 했을 일이다. 取材 日程은 徹底히 혼자 計劃해야 했고 一種의 使命感을 갖고 버텨내는 孤獨한 自身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人生의 伴侶者를 만났다. 티베트 亡命政府 外交部에서 勤務하는 霸氣 넘치는 男子다. 亡命 3世代로 印度에서 태어난 無國籍者다. 우리는 다람살라 隣近의 山을 오르면서 티베트의 懸案을 함께 苦悶하고 共感하기를 즐겼다. 自然스럽게 티베트 亡命政府 젊은이들의 現住所도 接하게 됐다.

    “이番 生은 티베트를 위해 살아보자”고 決心한 우리는 兩家의 許諾을 얻어 百年佳約을 맺었다. 그리고 아빠를 쏙 빼닮은 健康한 女子아이를 낳았다. 달라이라마께서는 티베트와 韓國의 未來를 위해 成長할 우리의 딸 人庶에게 直接 ‘뗀진빼마’(불교의 智慧와 方便을 意味하는 티베트語)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妊娠 7個月 즈음이던 2011年 9月, 멕시코 法文 取材를 가게 됐다. 멕시코를 代表하는 超現實主義 女性畫家 프리다 칼로의 팬인 나로서는 달라이라마의 法文도 듣고 칼로의 生家 코野칸에서 그女의 그림도 直接 보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法會 日程 中 할리우드 映畫俳優 리처드 기어가 運營하는 財團의 主管으로 티베트 寫眞展이 열렸고 아침 일찍 展示會에 參席해야 했다. 무리해서였을까. 100餘 名의 貴賓과 外信 言論이 함께한 자리, 달라이라마 立場 5分 前에 極甚한현기증을 느낀 後 그만 精神을 잃고 말았다. 氣絶한 時間은 7秒假量. 배 속의 아이에게 酸素가 供給되지 않아 危險에 處할 수도 있었으나 多幸히 아이는 安全했다. 그날 눈밑으로 깊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憔悴한 몰골로 달라이라마의 公式 日程을 모두 消化했다. ‘後悔하고 싶지 않다면 그 瞬間을 살아라.’ 스스로에게 當付하는 나만의 決心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狀況이었다.

    “내가 航空料를 支援할 테니 티베트 民主主義 亡命政府 樹立 記念式에 함께 갑시다.”

    2010年 8月 韓國人法會가 열린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親見했을 때 달라이라마로부터 깜짝 提案을 받았다. 記者로서의 自負心이 일어난 瞬間으로 記憶된다. 韓國의 激動私와 類似한 經驗을 한 티베트의 現代史를 共感할 수 있는 機會였다. 그러나 佛敎界 記者로서 微弱한 環境에 處한 탓에 막상 韓國에는 티베트 亡命政府 樹立 50周年 行事를 크게 알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큰 後悔로 남는다.

    9月 1日 午前 델리 空港에서 벵갈로르行 에어인디아 便에 오르자 달라이라마께서 환한 微笑로 반겨주셨다. 그 자리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달라이라마의 손에 敬意를 표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飛行機로 남引導 세라 寺院으로 向했고 유럽聯合(EU)의 來賓들이 招請된 記念式에서 珠玉같은 寫眞을 撮影하는 榮光을 누렸다.

    “김치를 每日 맛보겠네요”

    달라이라마가 自進해 政治的 指導者 職務에서 隱退하고 民主主義 方式의 選擧를 통해 選出된 3代 總理 時롭想像게 博士가 民主政府 總理職에 任命된 2011年 8月 8日. 티베트 亡命政府가 半世紀 歷史를 딛고 民主主義로 跳躍하는 歷史的인 瞬間에 同參했다. 이날의 體驗 亦是 오랜 時間 내 몸과 마음을 戰慄케 하는 感動으로 回想될 것이다.

    2010年 末 中東에서 始作된 民主化運動은 人權과 自由가 人間에게 얼마나 所重한 實際인가를 訪蒸했다. 재스민 革命은 政權 交替를 隨伴하며 곳곳으로 擴散됐고 마침내 中國으로까지 불씨가 번지며 只今 홍콩을 달구고 있는 우산革命에 이르렀다. 一連의 民衆蜂起는 獨裁政權下에 蔓延한 不條理에 對한 市民들의 憤怒였다.

    그러나 여기 獨裁, 强壓과는 反對가 되는 人物이 있으니, 國民 모두가 “떠나지 말아달아. 부디 우리 곁에서 崇高한 指導者로 머물러달라”며 말려도, 굳이 本人은 더 以上 머물러선 안 된다고 辭讓하며 自身의 政治的 權力을 내려놓은 이가 바로 티베트의 靈的 指導者 달라이라마다. 머무르고 떠남의 때를 잘 아는 指導者는 드물다. 間덴包當이라고 하는 티베트 精巧(政敎)一致의 歷史 370年은 오늘 14代 달라이라마에 이르러 完全한 民主主義 政府를 向한 改革을 위해 徐徐히 變化하고 있다.

    첫 海外 取材로 2010年 4月 스위스 취리히에서 開催된 마음科生命硏究所 主管 ‘利他主義 經濟學’ 포럼에 參席했을 때, 달라이라마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으셨다. “日本에서 왔소?” 緊張한 탓에 “아닙니다. 韓國에서 온 記者입니다”라고만 答하고 말았다. 달라이라마는 疑訝해하며 한참을 생각하고는 “그렇군요”라고 答하고 가던 길을 가셨다.

    韓國에도 티베트事務所가 있지만 現在까지 正式 認可를 받지 못한 狀態로 運營되고 있다. 東北아시아를 總括하는 代表部는 日本 시부야에 있고 달라이라마는 1970年代 以後로 每年 日本을 訪問한다. 最近 7月에야 韓國에서 달라이라마 訪韓 推進委員會가 發足했다는 消息이 들려왔다. 中國과의 外交關係를 憂慮해 只今까지 달라이라마의 韓國 訪問이 成事되지 못했고 展望도 不透明한 現實이다. 몽골 訪問을 위해 韓國 航空便을 收束해야 했지만 이마저 거절당한 일도 있다.

    달라이라마 눈맞춤에 병마는 씻은 듯 사라지고…

    달라이라마의 法會를 取材中인 筆者.



    달라이라마 눈맞춤에 병마는 씻은 듯 사라지고…

    달라이라마를 親見하는 자리에서 筆者의 딸에게 ‘뗀진빼마’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웃 宗敎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敎皇의 訪韓을 앞둔 지난 4月 日本 고야산에서 열린 달라이라마 法會에 맞춰 日本을 訪問해 訪韓推進위 發足을 事前 報告하는 자리가 있었다. 달라이라마는 길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海外 巡訪 當時 韓國의 김치를 아주 맛있게 먹은 적이 있는데, 韓國 政府의 正式 節次에 맞춰 訪韓이 許容되면 김치를 每日 맛볼 수 있겠군요”라며 特有의 웃음을 보였다.

    “地球의 70億 人類가 信仰하는 다양한 宗敎가 있지만, 그 가운데 10億이 無宗敎人입니다. 그렇기에 宗敎를 넘어 우리는 人類 共同의 價値를 具現하기 위해 마음의 平和와 憐憫의 資質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現世的이고 世俗的인 倫理라고 稱합니다. 우리는 宗敎가 지닌 모든 形式과 體制를 拒否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平和와 憐憫은 拒否할 수 없는 價値를 지닌 그 以上의 것입니다.”

    이는 21世紀 對話의 時代를 여는 가장 革新的이고 改革的인 佛敎 리더 달라이라마가 宣布한 人類의 普遍的인 責任이다. 여든의 老將은 새벽 3時에 일어나 3時間의 個人 冥想을 끝낸 後 하루 終日 大衆을 親見하고 法門下는 日程을 消化한다. 每年 가을 다람살라 定期法會 시즌이 되면 싱가포르를 中心으로 한 東南亞 國家의 佛子들과 臺灣, 韓國, 몽골의 佛子들로 門前成市를 이룬다. 달라이라마가 다람살라에 머무는 期間은 1年 中에 고작 3個月이 全部다. 大部分의 時間은 印度 全域과 海外 法文에 割愛한다.

    그 가운데 달라이라마의 主管으로 創立된 마음科生命硏究所는 이미 30年이 됐다. 이 硏究所는 佛敎를 통해 科學과 心理學 精神分析學 甚至於 藝術의 領域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分野의 專門家들과 境界 없이 交流하고 接點을 摸索하는 作業을 펼친다. 달라이라마는 현대 科學과 佛敎가 만나 可能한 對話에 興味를 가졌다. 現代의 科學 知識이 過去 佛敎 經論과 對論했을 때 誤謬 때문에 그 正當함이 證明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붓다의 말씀에 根據한 論戰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言語로 修正되고 再證明돼야 한다는 見解를 갖고 있다. 깨어 있는 宗敎人이 아니라면 不可能한 收用일 것이며 이 時代의 眞正한 通涉이다.

    人類의 眞正한 課題

    歷代 달라이라마 가운데 가장 力動的인 삶을 사는 觀世音菩薩(慈悲와 憐憫을 象徵)의 化身. 世俗 나이 12歲 때 티베트의 法王으로 옹립돼 16歲에 自由를 잃고 19歲에 國家를 빼앗겼으며 24歲에 中國의 侵攻을 避해 印度로 亡命했다. 55年의 歲月을 印度에 投宿하는 가장 오래된 손님의 身分으로 全 世界에 人間의 價値를 說法하는 그는 “나의 이름이 但只 달라이라마日 뿐, 티베트 佛敎를 遂行하는 單純한 僧侶”라며 法文 旅行을 위한 가방을 꾸린다. 그의 素朴한 赤色 가방 안에는 눈물을 닦기 위한 손手巾과 法文이 열리는 舞臺의 뜨거운 照明을 가리기 위한 帽子, 그리고 透明한 琉璃 念珠가 全部다.

    나는 ‘人類의 共存과 宗敎 間의 和合 그리고 티베트의 懸案 解決’에 對한, 그의 一生에 걸친 書院을 支持한다. 여든의 老將이 傳하는 平和의 메시지 속에 담긴 티베트의 懸案에서 오늘 우리가 談論해야 할 人類의 眞正한 課題를 본다. 티베트의 問題가 解決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處한 人間의 普遍的인 葛藤 狀況이 終熄되는 것임과 同時에 眞正한 人類愛가 證明되는 것이라고 自信한다. 그러한 面에서 티베트 亡命政府에서 5年間 보고 들은 바를 根據로 생생히 記錄한 ‘달라이라마 마음의 故鄕을 찾아’(참글세상 出版)는 ‘나’를 再解釋하고 擴張해 眞正한 ‘우리’를 摸索하는 時代의 窓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祈禱한다. 다람살라의 첫 몬순을 겪는 사이 카메라 렌즈에 닦아낼 수 없는 곰팡이가 생겼을 때 혼자 울었던 經驗이 내가 티베트人들의 가슴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달라이라마가 늘 念慮하는 티베트 亡命政府의 民主化가 바르게 定着되기를. 그리고 보다 가까운 未來에 그들이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달라이라마의 涅槃 以後 티베트人들이 겪게 될 絶望과 混亂을 부디 그들 스스로 딛고 일어서는 힘을 키우는 데 微弱하게나마 助力이 되기를. 그들이 懇切히 바라던 것을 비로소 成就하는 날에 우리가 서로 부둥켜안고 어울려 歡喜의 춤을 추기를. 어머니의 憐憫으로 그들과 함께 선 이 길 위에서 살아 있는 모든 生命과 더불어 呂여(如如)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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