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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正말 내가 選擇한 것일까|신동아

내 삶은 正말 내가 選擇한 것일까

  • 정여울 │文學評論家 suburbs@daum.net

    入力 2014-10-21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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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일까

    選擇이라는 이데올로기<br>레나타 살레츨 저, 박광호 驛, 후마니타스

    人生을 스스로 選擇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人間은 누구든지 豫測하지 못했던, 그리고 順應하고 싶지 않았던 要因들에 이끌려

    現在의 處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새뮤얼 존슨 ‘라셀라스’ 中에서

    그건 나의 選擇이 아니야!



    얼마 前 부다페스트에서 노트북컴퓨터를 잃어버린 나는 한 달 넘게 벙어리 冷가슴을 앓았다. 처음에는 노트북을 유레일 汽車 선반에 올려놓고 깜빡해버린 나 自身을 무던히도 怨望했고, 나중에는 온갖 e메일과 電話를 動員해 아무리 懇切한 ‘SOS’ 信號를 보내도 答狀이 없는 헝가리 鐵道廳에 憤怒했으며, 그러다가 비로소 主人 없는 노트북을 發見하고서도 汽車驛이나 警察署에 알리지 않은 이름 모를 사람에게 憤怒했다.

    憤怒의 時間이 지나가자 喪失의 時間, 걱정의 時間이 到來했다. 내 노트북에 貯藏된 그 수많은 資料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온갖 資料, 特히 數年 동안 모아둔 所重한 寫眞들, 무엇보다도 미처 백업하지 못한 原稿나 아이디어 메모가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것은 至極히 人間的인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을 할 때조차 나는 ‘사람다운 狀態’를 維持하고 있었다.

    喪失의 時間이 지나가자 미쳐버릴 것 같은 不安의 時間이 到來했다. 그곳에 담긴 나의 個人 身上 情報가 걱정되기 始作했다. 그곳에 貯藏된 公認認證書를 누가 複寫하면 어떡하지? 住民登錄番號도 어딘가에 貯藏돼 있을 텐데. 國籍도 나이도 身分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제는 내 얼굴과 내 情報를 다 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正말 어처구니없게도 그 소름끼치는 不安의 時間을 견디며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새로 산 것이 아니라 公認認證書를 廢棄한 것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저 잃어버린 노트북과 똑같은 노트북을 삼으로써 喪失感을 最少化하려 했을 것이다. 外國에서 公認認證書를 廢棄하는 法을 몰라 온갖 官廳에 다 電話를 해보고, 結局 엄청난 國際 電話 料金을 堪當하며 無事히(?) 認證書를 廢棄했다.

    勿論 그런다고 그 쓰라린 喪失感과 不安感이 完全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公認認證書를 廢棄하는 그 複雜한 節次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오기 始作했다. 잃어버린 것은 노트북이라는 事物이었는데, 나를 미쳐버리게 한 것은 그 잃어버린 物件이 아니라 盜難當한 情報였다. 나는 이미 내 情報에 對한 ‘選擇權’을 喪失했다.

    레나타 살레츨의 ‘選擇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合理的으로 選擇할 수 있다’고 믿는 資本主義의 神話를 파헤친다. 題目부터가 가슴을 찌른다. ‘選擇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내게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너는 正말 네 삶을 選擇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니? 選擇다운 選擇을 해본 적이나 있는 거야? 네가 主體的인 選擇이라 믿었던 것이 事實은 周邊 사람들이나, 社會의 시스템이나, 아니면 ‘他人의 視線’이라는 無言의 壓力에 屈服한 受動的인 適應은 아니었어?

    한便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 冊의 原題가 ‘選擇의 暴政(暴政·The Tyranny of Choice)’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우리는 選擇可能性이라 불리는 暴力的인 시스템 속에서,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選擇할 수 있다’는 幻想 속에서 끝없이 ‘내가 뭔가 잘못 選擇한 것은 아닐까’ 하는 强迫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구나. 처음부터 네가 選擇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어. ‘選擇할 수 있다’고 믿었던 네 幻想이 바로 이 社會가 注入한 勝者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어느새 그렇게 스스로에게 質問하고 있었다.

    社會의 選擇을 忘却하다

    레나타 살레츨은 우리의 삶이 ‘個人의 合理的 選擇’에 依해 바뀔 수 있다는 可能性에 疑問符號를 붙인다. 그는 質問한다. 왜 醫療保險의 惠澤을 全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醫療保險 改革 法案 通過를 反對할까. 왜 選擇의 餘地가 없는 사람들까지 ‘내가 選擇에 失敗해서 내 삶이 이렇게 됐다’는 생각에 시달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大學은 勿論 職業, 職場까지 選擇의 問題라고 생각한다. 사랑, 結婚, 出産의 問題까지 個人의 合理的인 選擇의 問題라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 周邊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자. 當身의 職業을 選擇한 契機는 무엇입니까. 當身의 職場을 選擇한 理由는 무엇인지요. 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나요. 그 當時 周邊에 있던 수많은 理性 中에서 왜 何必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지요. 이런 質問에 똑 부러지게, 合理的으로, 論理的으로 對答할 수 있는 사람이 몇 名이나 될까.

    그렇다. 우리는 우리 人生의 매우 決定的인 部分을 ‘個人의 合理的 選擇’만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일이 잘못됐을 境遇, 내 삶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이런 自愧感에 빠져든다. 내가 뭔가 잘못 選擇한 거야. 나에게는 오래前 選擇權이 있었는데, 나는 제비를 잘 못 뽑은 거야. 나는 男子를 고르는 能力이 없어. 나는 내 才能을 判別할 能力이 없어. 이런 式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自己破壞的인 憂鬱로 치닫곤 한다. 그 모든 決定은 ‘個人의 合理的 選擇’으로 左之右之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레스토랑에서 飮食을 注文할 때 우리는 어떻게 行動하는가? 곧잘 우리는 親舊들에게 무엇을 選擇할 것인지 묻고, 웨이터에게 推薦 메뉴를 묻기도 하며, 리뷰에서 사람들이 選擇한 것을 따르기도 한다. 高級 레스토랑에서라면 廚房長이 推薦하는 메뉴를 그냥 選擇할지 모른다. (…) 그러나 料理가 나오면, 남들이 注文한 料理가 탐나고 또다시 잘못 選擇했다는 느낌이 든다. 레스토랑에서의 메뉴 選擇과 같은 單純한 選擇조차도 그런 不安을 불러일으킨다는 點에서, 런던의 어느 有名 레스토랑이 한 가지 메뉴만 提供하기로 決定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現在 그 레스토랑은 門前成市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選擇지에 壓倒되어 있다는 徵候이기도 하다.

    - 中에서

    레나타 살레츨은 ‘選擇의 合理性’이 아닌 ‘選擇의 苦痛’에 注目한다. 飮食店의 메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속 便하게 ‘後悔 없는 選擇’을 하지 못하는 우리, ‘짬짜면’이라는 엄청난 發明品을 만들어도 ‘그냥 짜장면만 먹을걸 그랬나?’하고 後悔하는 우리,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가도 ‘李 시럽 한 스푼에 칼로리가 얼마지?’하고 諮問하며 마음 놓고 커피 한 盞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우리의 不安을 解剖한다. 그 不安에는 ‘우리의 無能力’이 아니라 이 모든 細部事項을 끊임없이 選擇하느라 정신없게 만드는 資本主義의 巨大하고도 精巧한 選擇의 시스템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가 物件을 選擇하는 것이 아니라, 資本의 效率性이라는 抽象的 價値가 우리 日常을 支配하도록 만드는 價値의 顚倒가 가로놓여 있다.

    選擇의 餘地는 남아 있다

    나는 이 冊을 읽으면서 그女의 수많은 質問에 덧붙여 나 自身의 質問도 덧붙여 보았다. 왜 福祉 惠澤의 死角地帶에 놓인 사람들까지 富者들의 增稅에 反對하는 것일까. 왜 한 番도 資本家가 돼보지 못한 사람들이 ‘資本家의 눈’으로 世上을 바라보는 것일까. 왜 權力의 中心에 한 番도 서보지 못한 사람들이 權力自意 눈으로 世上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 또한 우리가 ‘무언가를 選擇할 수 있다’는 錯覺 속에 살아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選擇한 政治家들’이 사람들의 믿음에 副應한 적은 많지 않다. 게다가 多數決이라는 ‘民主主義의 選擇’은 그 選擇에 同意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憤怒와 鬱憤에 발 디딘 채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眞情으로 무언가를 ‘選擇’할 수 있는 엄청난 自由를 누린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 冊은 無限한 選擇이 可能해 보이지만, 事實은 그 無限한 選擇이 우리의 選擇 不可能한 삶을 가리고 있는 巨大한 帳幕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살레츨의 結論은 悲觀的이지 않다. 우리가 ‘個人의 選擇’에 執着하는 그 수많은 時間을, 그러니까 飮料水와 化粧品과 인테리어 小品을 고르는 데 바치는 時間을, 自動車와 카메라와 時計를 고르는 데 바치는 時間을, ‘나만의 選擇’이 아니라 ‘우리의 選擇’으로 함께할 수 있는 時間으로 돌릴 수 있는 機會가 아직 남아 있다. 個人의 選擇에 보내는 수많은 時間을 ‘社會의 選擇’‘共同體의 選擇’에 活用해보자는 것이다.

    ‘機會均等의 時代’라는 幻想, ‘모든 것을 個人이 選擇할 수 있다’는 幻想은 우리가 社會의 變化에 對해 생각하는 時間을 빼앗아왔다. 우리가 ‘잘못된 選擇’을 한 스스로를 批判하는 동안, 이 社會가 수많은 잘못된 選擇을 하는 것에 對해서는 批判的 思惟를 할 時間이 없었다. 社會를 批判하기보다는 漸漸 더 自己 自身을 批判하는 데 熱中하는 사람들,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平生 自己啓發의 幻想에 빠져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現代人에게, 著者는 눈길을 ‘나’에게만 固定하지 말고 ‘社會’와 ‘共同體’로 돌려보자고 提案한다.

    選擇은 늘 變化와 連結돼 있다. 우리는 個人的인 變化도 可能하지만 社會的 變化도 일으킬 수 있다. 環境을 변화시키는 決定도 할 수 있고, 信用評價機關을 바꾸겠다고 할 수도 있다. 企業이 우리를 統制하도록 하는 代身에, 우리가 企業을 統制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變化를 만들어낼 可能性이 있다. 過去에 우리가 한 國家의 一員으로서, 그리고 人民으로서 어떤 選擇을 했듯이 우리는 將次 우리가 어떤 社會에서 살고 싶은지 다시 한 番 생각해볼 選擇權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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