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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江大 떠난 哲學者 최진석|新東亞

송화선의 이 사람

西江大 떠난 哲學者 최진석

“짜릿하다. 앞으로 펼쳐질 삶이 期待된다”

  • 入力 2018-02-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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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虎狼이가 우리 안에서 죽을 수는 없지

    • 欲望대로 살지 않는 건 天刑을 받는 것과 같은 일

    • 人類 歷史는 危險한 곳으로 건너간 이들의 痕跡

    • 邊方에서 中央을 顚覆하리라

    [조영철 기자]

    [조영철 記者]

    노장哲學 專門家 최진석(59)李 서강대를 떠났다. 지난해 1月 辭表를 냈고, 12月 大學本部가 이를 受理했다. 國內 大學敎授 停年은 65歲. 7年 以上 保障된 ‘安定된’ 일자리를 박차고 荒野로 나선 理由가 궁금했다.

    辭表를 쓰게 된 契機가 있나. 

    “오래前부터 생각해온 일이다. 大學이 要求하는 學問 體系가 있다. 嚴密하라. 빈틈없이 너의 論理를 세워라. 그러나 난 人文學 分野의 境遇 빈틈없음이 最高의 價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自己를 擴張하는 일은 빈틈 하나 없는 論文이 아니라 구멍이 듬성듬성 나 있는 이야기로 可能하다고 믿는다. 學生들에게도 늘 ‘自己 생각을 論證하기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者’ ‘模糊함을 明瞭함으로 바꾸기보다는 模糊함 自體를 품어버리는 者’가 되라고 했다. 

    2015年 ‘件名원’ 設立 때부터 院長을 맡아 이런 信念을 現實에서 펼치고자 努力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 自身은 旣存 大學 體系 안에 繼續 머무르는 게 穩當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學生들에게 ‘便安한 데 머물지 말고 境界에 서서 不安을 堪當하는 者가 돼라’고 했는데, 學校를 떠남으로써 비로소 言行一致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論文의 世界에서 이야기의 世界로

    件名園은 어떤 곳인가. 



    “創意的 人材 養成을 目標로 하는 敎育機關이다. 오정택 두양文化財團 理事長이 私財를 出捐해 設立했다. 件名員이라는 이름엔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建明苑·件名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名(明)’이라는 漢字를 보면 對立된 해(日)와 달(月)李 共存한다. 害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 보는 것은 지(知)의 領域이다. 名(明)은 그런 區劃되고 區分된 次元을 넘어 두 個의 對立 面을 하나로 掌握할 수 있는 能力을 象徵한다. 우리나라의 未來를 開拓하려면 이런 能力을 갖춘 人材를 길러내야 한다는 게 吳 理事長의 뜻이다. 거기 共感하는 敎授들이 모여 少數의 學生에게 人文 藝術 科學 等을 가르친다. 敎育費는 全額 無料다.” 

    件名院과 大學 둘 다에서 講義할 수는 없나. 

    “그래도 된다. 나 自身이 그럴 수 없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그러기 싫었다. 내가 志向하는 것이 ‘이야기의 世界’라면 ‘論文의 世界’는 떠나야 한다고 봤다. 그것이 나에게 眞實한 行動 아니겠나.” 

    20年間 지켜온 敎壇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敎授를 그만둔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다만 서강대를 떠나는 데 對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내가 奬學金을 받으며 工夫했고, 1998年 敎授가 된 뒤부터는 月給을 받아 家庭을 꾸릴 수 있게 해 준 곳이다. 2月 3日 아침 마지막으로 硏究室에 들렀는데 그 안에서 지내온 여러 瞬間이 走馬燈처럼 머리를 스쳐가더라. 짐을 다 빼 텅 빈 空間에 대고 ‘고맙다’고 作別 人事를 했다.” 

    周邊 反應은 어떤가. 


    “어떻게 먹고살려고 저러나 하는 視線이 가장 많은 것 같다(웃음). 그런데 事實 내가 安定的인 空間을 박차고 나간 게 이番이 처음은 아니다. 1990年 서강대 哲學科에서 博士課程을 밟다가 學校를 그만두고 中國에 간 일이 있다. 韓中修交 前의 일이다. 그때는 中國에서 뭘 工夫하겠다거나 나중에 뭐가 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當時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完全히 새롭게 始作해야겠다고 決心했을 뿐이다. 中國에 간 뒤 2年 程度를 對策 없이 떠돌았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自身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처절히 苦悶했다. 그렇게 지내다 1992年 韓中修交가 이뤄지면서 다시 哲學을 工夫할 機會가 생겼다. 以後 헤이룽장代, 베이징대에서 工夫하고 돌아와 敎授가 된 것이다. 이番에 내가 辭表 썼다는 消息을 듣고 後輩 中 한 名이 ‘中國으로 표표히 떠나던 때의 뒷모습이 오버랩됩니다’라는 文字를 보냈더라. 나도 요즘 種種 그때 생각을 한다.” 

    1990年 當時 스스로에게 그토록 不滿을 느낀 理由가 뭔가. 

    “論理的으로 說明하기는 어렵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그 속에 學問的 進步가 없고 人格的으로도 엉망진창인, 아무것도 아닌 한 人間이 서 있더라. 그게 나라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삶을 一旦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行動한 것이다.” 

    이미 結婚하고 아이도 있던 때 아닌가. 

    “그래서 더 切迫했을 거다. 그 모습 그대로 산다면 子息 앞에서 얼마나 別 볼일 없는 아비가 되겠나. 아내에게는 또 어떻겠는가. 勿論 내가 中國으로 떠나면 우리 家族이 배를 곯게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當場 굶어 죽을 狀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버티기보다 어떻게든 突破口를 마련해 내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成長할 方法을 摸索하는 게 重要하지 않겠나. 그게 우리 家族을 眞正 責任지는 姿勢라고 생각했다. 當時 世上 모든 사람이 내게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오직 한 사람, 우리 아내만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힘을 얻었다.”

    스스로에게 眞實하게

    이番에도 마찬가진가. 

    “이番에는…(웃음). 우리가 31年을 같이 살았다. 그사이 집사람이 내 決定에 對해 ‘잘했어요’라고 하지 않은 게 이番이 처음이다(웃음). 學校에 辭表를 냈다고 하니 처음으로 다시 한番 생각해보라고 하더라. 大學에서도 다시 생각해보라고 無給休職을 줬다. 하지만 1年 가까이 時間이 흘러도 마음이 變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眞實했던 때가 30代 初盤 中國으로 無酌定 떠났을 때다. 거기서 學問과 人生에 對한 눈을 떴다. 내가 前보다 조금은 넓고 깊은 사람이 된 것도 그 時間 德分이다. 그 뒤로 나는 사람이 自己 自身한테 正말 眞實하게 行動하면 宇宙 大自然이 주는 膳物이 있다고 믿는다. 人生 方向은 多數決로 定하는 게 아니다. 내가 願하는 것, 내 欲望에 眞實한 것이 重要하다. 허투루 흘려보내기엔 삶이 너무 짧지 않나.” 

    뭔가 切迫하게 들린다. 

    “莊子 지北油 便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時間은, 千里馬가 壁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려 지나치는 瞬間과 같다. 忽然할 따름이다.’ 나는 살아가며 重要한 選擇의 岐路에 설 때마다 이 句節을 떠올린다. 돌아보면 正말 그렇다. 精神 안 차리면 10年, 20年이 훅훅 지나간다. 이처럼 人生이 忽然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늘 緊張하며 살 수밖에 없다. 어영부영 지내다가는 한瞬間도 별처럼 살지 못한 채, 남이 별처럼 사는 것을 評價하고 拍手만 치다 가버리게 된다.” 

    별처럼 살고 싶은가. 

    “勿論이다. 나뿐 아니라 世上 모든 사람이 별처럼 살기를 바란다. 人間은 매우 특별한 存在다. 自身이 모르는 것을 꿈꾸고, 危險한 곳으로 기꺼이 간다. 생각해보면 참 神祕한 일이다. 人類 歷史는 그런 사람들의 痕跡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을 움직인 힘이 내 안에도, 當身 안에도 있다. ‘우리’가 아니라 各自 自己 안에 自己를 빛나게 할 힘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所重한 ‘自己’를 제 마음에 들지 않은 狀態로 내버려두는 건 큰 잘못이다. 結局은 天刑을 받는 것 같은 苦痛을 겪게 된다.” 

    辭表를 쓴 理由를 묻는 한 知人에게 “虎狼이가 우리 안에 갇혀 죽을 수는 없지”라고 했다던데. 

    “그랬다(웃음). 말이 멋있지 않나. 내가 親舊들 앞에서 좀 폼을 잡는 게 있다. 結局은 같은 얘기다. 한 番뿐인 人生, 오직 나를 생각하며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다.”

    聖人爲腹不爲目

    1998년부터 재직해온 서강대 강단을 떠나 새로운 출발선에 선 철학자 최진석. [조영철 기자]

    1998年부터 在職해온 西江大 講壇을 떠나 새로운 出發線에 선 哲學者 최진석. [조영철 記者]

    모든 사람이 그렇게 ‘自己’만을 생각하면 社會가 제대로 굴러갈까.
     
    “道路 위 車線을 한番 생각해보라. 얼마나 허약한가. 가느다란 줄 하나에 不過하다. 그런데 그것이 次善이 되는 瞬間 强力한 힘을 發揮한다. 사람들은 나와 相對 모두 그 線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고 時速 100km 以上 速度로 道路를 疾走한다. 그게 사람이다. 定해놓은 것을 그렇게 잘 따르면서, 同時에 定해지지 않은 것을 追求한다. 境界 안에 머물면서 그 밖을 꿈꾼다. 그런 各自가 모여 있는 곳이 이 社會다. 構成員 모두가 ‘自己’를 생각하는 게 決코 社會의 利益과 配置되지 않는다. 오히려 各自 自身 앞에 眞實해지고, 自身의 欲望을 最優先으로 생각해야 社會가 發展한다고 믿는다.” 

    老子의 ‘道德經’ 中에서 ‘自身의 몸을 天下만큼 아낀다면 (그에게) 天下를 맡길 수 있다’는 대목이 떠오른다. 

    “그렇다. 孔子는 ‘殺身成仁’이나 ‘克己復禮’를 重視했다. 나의 利益보다 公益을 優先하는 ‘滅私奉公’의 態度를 가져야 한다고 봤다. 老子는 다르다. 自身을 사랑하고 自身을 貴하게 여기는 것을 가장 重要하게 여겼다. 道德經에는 ‘成人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聖人爲腹不爲目)’는 句節이 있다. 여기서 배(腹)는 具體的이고 個別的이며, 바로 여기 있는 것을 意味한다. 우리는 배가 부르거나 고플 때 어떤 理念 體系를 根據로 判斷하지 않는다. 그저 느낄 뿐이다. 反面 눈(目)은 밖을 向한다. 무엇인가를 보려면 必然的으로 그것과 다른 것을 區分해야 한다. 그 準據로 旣存 觀念이 必要하다. 例를 들어 우리가 冊床을 識別하려면 冊床이라는 이미 形成된 觀念에 바탕을 두고 冊床을 冊床이 아닌 다른 것들과 隔離해야 한다. 老子는 이런 行爲를 느낌보다 오히려 낮게 봤다. 老子 思想을 代表하는 말 中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取하라’가 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 뜻이다. 老子가 버리라고 한 ‘저것’은 鞏固히 構造化된 이념적 價値 體系 或은 理性이고, 取하라고 한 ‘이것’은 個別的 身體性, 달리 말하면 個人의 欲望이다.” 

    ‘自己에게 眞實해라’ ‘별처럼 살아라’ ‘배를 위하라’가 모두 하나로 통한다. 

    “그렇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저 멀리 걸려 있는 낡고 普遍的인 理念을 ‘消費’하는 데서 벗어나 只今 이 時代, 바로 나 自身에게 맞는 理念을 ‘生産’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個別的으로 동떨어진 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自己 自身과 眞實하게 대면하는 사람은 必然的으로 自己가 사는 時代 全體를 苦悶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過程에서 發見하는 自己 欲望은 時代의 問題와 當然히 맞닿게 된다. 

    나는 우리 時代의 가장 큰 問題가 世上이 變했는데도 새로운 言語가 생기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過去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只今 우리에게는 비전이 없다. 只今처럼 過去의 言語로 現在를 繼續 다뤄서는 決코 未來를 열 수 없다. 돌아보라. 이 世界에 存在하는 偉大한 것, 創意的인 것 가운데 固有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나. ‘따라 하기’를 통해서는 決코 偉大해질 수 없다. 나는 韓國이 繼續 이 狀態에 머물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恥辱을 다시 當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알았을 때 哲學者가 할 일이 무엇일까. 社會에 警告音을 울리고 行動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까 나 自身을 가장 위하는 길이, 窮極的으로는 이 時代의 問題를 풀어내는 것이라는 말인가. 

    “老子가 ‘自身의 몸을 天下만큼 아낀다면 (그에게) 天下를 맡길 수 있다’고 한 게 바로 그런 意味다. 나는 只今 내가 이 時代에 遂行해야 할 責任이 있다고 여긴다. 눈보다 배를 爲하는 사람, 철 지난 言語와 信念에서 벗어나 自己 言語와 自己 비전을 가진 사람, 그것을 바탕으로 이 時代를 省察하고 時代의 病을 고치고자 나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최진석은 現在 韓國이 모든 面에서 限界에 到達했다고 본다. 이 狀況을 克服하지 못하면 머잖아 ‘恥辱’을 當하게 될 수 있다고 憂慮한다. 왜 그가 學者로서 이 社會에 警告音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그에 따르면 지난 時節 우리는 ‘따라 하기’ 方式으로 나라를 발전시켜왔다. 다른 이들이 만든 文明, 制度, 物件 等을 가져다가 그대로 흉내 냈다. 이 領域에서 卓越한 能力을 發揮한 德에, 結果的으로 우리는 從屬的인 文明이 닿을 수 있는 最高 높이에 到達했다. 

    그러나 이것에 만족해서는 다음 次元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게 최진석의 생각이다. 從屬的인 文明에 익숙해진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代身 남이 해 놓은 생각을 自己 行動의 基準으로 삼는다. 분명한 基準이 있으니 그에 맞으면 참,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본다. 섣부른 ‘眞僞 論爭’에 빠지고, ‘善惡’에 對한 價値判斷에 執着한다. 우리 社會가 李承晩/金九, 親美/反美, 反北/親北, 保守꼴통/親北座빨 等으로 兩分돼 消耗的 葛藤을 持續하는 건, 우리 생각의 次元이 이 段階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는 게 최진석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 段階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只今 世界는 굳건히 자리 잡은 基準을 바탕으로 하는 ‘判斷’보다 開放的으로 進行되는 ‘思惟’를 통해 進步한다. 우리도 스스로 생각하는 創意的인 社會, 正答을 말하는 게 아니라 質問을 던질 수 있는 社會, 戰術的인 次元을 넘어 戰略을 苦悶할 수 있는 社會를 만들어야 한다. 최진석이 ‘反逆者’를 키우는 敎育을 强調하는 理由다.

    내가 나를 葬禮 지낸다

    反逆者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宗敎的 會心 水準의 決斷이 必要하다. 現在의 自己를 否定하고 反省하며 때로는 그동안 누려온 모든 것을 抛棄해야 한다. 莊子의 表現을 빌리면 ‘오상아(吾喪我)’, 卽 ‘내가 나를 葬禮 지내는 것’이 必要하다. 나는 이 말을 ‘自己 殺害’라고 풀이한다. 自身을 殺害한다고 할 만큼 徹底히 旣存의 自己와 訣別하지 않고는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없다는 意味다. ‘오상아’의 ‘오(吾)’는 새로워진 宇宙 秩序에 同參하거나 人格的으로 成熟해진 自我, ‘아(我)’는 旣存 價値와 理念에 固着돼 있는 自我다. ‘오’가 ‘아’를 죽여야 비로소 莊子가 ‘所要(逍遙)’라고 表現한 特別히 자유로운 精神的 境地에 到達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 어찌 들으면 섬뜩한 말이다. 

    “앞서 말했듯 人生은 짧다. 그 所重한 瞬間을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史上 理念 비전 言語에 갇혀 흘려보내는 건 너무 아깝다. 僭恣기를 찾는 게 決코 쉽지 않지만 그러기 위해 끝없이 努力해야 한다. 그게 人間답게 사는 길이다. 自身을 便한 자리에서 내쫓아 벼랑 끝에 세우면 動物的인 感覺, 野生的인 鬪志가 되살아난다. 只今 여기 내가 高度로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요즘 내가 그렇다. 廣闊한 宇宙 안에 生命을 갖고 存在함을 覺醒한다.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存在에 對한 苦悶, 살아 있음에 對한 覺醒 같은 건 思春期에 하고 그만두는 건 줄 알았다. 

    “나는 나이 들수록 오히려 그런 데 더 銳敏해지는 것 같다(웃음). 늘 그런 건 아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나를 좀 包裝하게 되는데 事實 나도 虛套루 보낸 時間이 적잖다. 根氣가 弱하고 輕率한 사람이라 여기저기 다른 길로 빠진 적도 많다. 그나마 ‘人生은 짧다’ ‘每 瞬間을 나 自身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기에 只今 이만큼이나마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每日 아침 일어나면 ‘나는 今方 죽는다’고 서너 番 되뇐다. 그러면 적어도 얼마만큼은 덜 쩨쩨해진다. 左顧右眄 하지 않고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자 하는 마음이 된다. 허튼 데 時間 쓰는 일도 줄어든다.” 

    者, 그렇게 새로운 出發線에 섰다. 기쁜가. 

    “기쁘기보다는 짜릿하다. 앞으로 내 人生이 어떻게 펼쳐질지 期待된다.”

    죽을 때까지 ‘凍死’로 살겠다

    최진석은 건명원, 섬진강인문학교 등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창조적 반역자를 길러낼 계획이다. [조영철 기자]

    최진석은 件名원, 蟾津江人文學校 等에서 時代를 거스르는 創造的 反逆者를 길러낼 計劃이다. [조영철 記者]

    앞으로의 計劃을 말해달라. 

    “件名원에서 講義한다. 大衆을 對象으로 한 著述과 講演 等도 할 것이다. 모든 活動의 目標는 少數로서 多數를 顚覆하는 것, 周邊에서 中心을 顚覆하는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면 多數와 中心이 깨었을 때 歷史的 進步가 일어날 것 같다. 하지만 人類 歷史를 보라. 實狀은 그렇지 않다. 少數와 周邊이 깨어났을 때 그 힘으로 巨大한 變化가 이루어져 왔다. 現在 우리나라는 少數와 周邊 구실을 하는 地域 或은 地方이 全部 서울의 亞流가 되려고 안달이다. 敎育機關들은 하나같이 名門大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틀을 벗어나야 한다. 지난해 서강대를 休職하면서부터 全南 順天의 한 閉校 建物에 門을 연 ‘蟾津江人文學校’ 校長을 맡고 있다. 오충근 指揮者가 이끄는 釜山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地域을 돌며 ‘老子와 베토벤’이라는 哲學과 音樂이 함께하는 콘서트도 하고 있다. 이런 活動을 통해 少數, 周邊의 힘을 깨우려 한다.” 

    그런 努力으로 具體的 變化가 나타날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할 때 結果부터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 時代의 問題를 認識했다면 그것을 解決하고자 뛰어드는 게 먼저다. 只今 내게 있어 가장 意味 있는 건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인가 ‘한다’는 것이다. 件名원을 하고, 蟾津江人文學校를 하고, ‘老子와 베토벤’을 한다. 가만히 앉아 旣存의 槪念이나 理念을 갖고 남들 行動을 批判하고 分析만 하는 데서 벗어나, 내가 直接 무엇이든 해보려고 덤빈다. 사람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함으로써만 宇宙의 運行에 參與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무엇인가를 할 때 나는 歷史의 評價者가 아니라 參與者, 달리 말하면 歷史의 主體가 되는 것이다.” 

    崔 敎授는 “우리나라 知性들은 언젠가부터 分析과 批判에 埋沒되거나 다른 學者들이 이미 해놓은 分析과 批判을 自己 삶에 受容하는 데만 傾倒돼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엇을 分析하고 批判하는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行動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했다. 긴 時間을 돌아, 그가 왜 學校를 떠났는지에 對한 解答을 받아 든 느낌이었다. 이제 최진석은 그동안 工夫해온 哲學을 온몸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최진석에 따르면 槪念이나 理念, 原則은 恒常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名詞다. 反面 世界는 끊임없이 變하고 움직이는 事件들 卽, 動詞다. 그는 名詞를 벗어나 凍死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안에서 ‘짜릿하게’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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