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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東廟 復元과 中火主義|新東亞

現職 外交官이 쓴 韓中韓中 5000年

萬東廟 復元과 中火主義

明皇帝 崇仰 송시열, 최익현… 中國 向한 事大主義의 復活

  • 入力 2018-03-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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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4年 朝鮮 性理學者들은 壬辰倭亂 때 再造之恩(再造之恩)을 理由로 萬曆帝를 崇仰하는 萬東廟를 세웠다. 儒生(儒生)들의 骨髓 中華主義는 1865年 大院君에 依해 撤去된 萬東廟를 10年 後인 1875年 다시 세우는 方式으로 表出됐다. 1942年 日帝(日帝)가 撤去한 萬東廟가 最近 復元됐다. 中華思想이 中華帝國(中華帝國) 槪念으로 나아가는 局面에서 韓國 社會 一角에 뿌리 박힌 中華主義는 治療 不可能한 痼疾病인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 동상.

    티무르 銅像.

    칭기즈칸의 2男 차가타이는 1227年 現在의 카자흐스탄 東南部 一理 盆地(盆地) 알말릭을 首都로 차가타이 칸國(Khanate)을 세웠다. 차가타이 칸國은 13世紀 中葉 칭기즈칸의 3男 오고타이의 後孫 카이두가 원(元) 世祖 쿠빌라이에 對抗해 일으킨 叛亂에 連累돼 원과 킵차크 칸國의 挾攻을 받은 데다 일 칸國과도 紛爭을 겪은 끝에 13世紀 末부터 弱化했다. 

    튀르크 系統의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國이 톈산山脈을 境界로 東部(某굴리스탄·신장)와 西部(우즈베키스탄)로 分裂된 機會를 틈타 1360年 西部에 屬한 故鄕 샤흐리샤브즈(史國) 一帶를 確保한 後 1370年에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大部分을 占領하고 大칸이 됐다. 

    티무르는 現在의 카자흐스탄, 이란, 이라크, 크리미아半島를 包含한 南部 러시아를 次例로 征服해 大帝國을 세웠다. 中央아시아-중동 核心部를 掌握한 티무르는 1398年 4月 인더스강을 건너 힌두스탄 平原에 進入했으며 같은 해 12月 델리를 掠奪했다. 1400年 10月 시리아의 알레포를 占領하고 1401年 3月 다마스쿠스를 陷落했다. 이로써 티무르의 敵手는 全 世界를 통틀어 오스만튀르크와 明나라만 남았다. 

    티무르는 시리아 征服을 끝낸 後 1401~1402年 겨울 南部 코카서스에서 戰列을 整備해 1402年 6月 오스만튀르크 攻擊을 開始했다. 40萬 티무르軍은 1402年 7月 20日 앙카라 大會戰(大會戰)에서 亦是 40萬 規模로 編成된 오스만튀르크君을 殲滅했다. 티무르軍은 西進을 繼續해 마르마라海 沿岸에 자리限 오스만튀르크의 首都 부르사를 掠奪하고 1402年 12月 性(聖) 요한 騎士團 治下의 難攻不落 海岸都市 이즈미르를 단 2週 만에 陷落했다. 

    1405年 티무르는 70萬 大軍을 編成해 宿敵 明나라 征服을 試圖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明나라로 進擊하던 途中 키르키스의 宿營地(宿營地)에서 老患으로 死亡했다.



    몽골의 再登場

    티무르의 崛起에 앞서 中原에서 逐出된 몽골度 明나라에 挑戰했다. 몽골의 復興은 迅速했으며 明나라의 對應도 빨랐다. 北元群(北元軍)李 明나라 藍玉(藍玉)의 軍隊에 敗北한 1388年 不이르號(湖) 戰鬪 以後 칭기즈칸 家門 等 할하族이 主流를 이룬 北元은 弱해지고 타타르族(러시아 居住 튀르크 系統 타타르와는 다르다)이 擡頭했다.
     
    티무르 帝國의 支援을 받은 타타르族 首長 벤야시리는 몽골高原을 統一하고 明나라에 挑戰했다. 1402年 ‘靖難의 便’을 敢行해 조카 建文帝를 逐出하고 政權을 掌握한 朱元璋의 넷째 아들 永樂帝는 口腹(丘福)에게 10萬 大軍을 주어 벤야시리를 치게 했으나 明나라軍은 1409年 케룰렌江 戰鬪에서 타타르軍에 전멸당했다. 이듬해 永樂帝는 50萬 大軍을 이끌고 親庭海 오논강에서 타타르軍을 擊破했다. 

    타타르族이 弱化되자 몽골 西部를 根據로 하는 오이라트족이 登場했다. 1414年 永樂帝는 다시 24萬 大軍을 動員해 몽골로 親庭했으나 오이라트 勢力을 뿌리 뽑지 못했다. 永樂帝는 1420年 난징에서 年庚(베이징)으로 遷都했다. 이로써 明나라는 몽골과 滿洲, 朝鮮의 情勢 變化에 極히 敏感할 수밖에 없게 됐다. 

    乞僧(乞僧)이자 名敎(明敎) 信者 出身인 朱元璋은 나라가 體制를 갖춰가자 權力을 威脅할 可能性이 있는 部下 尉官(魏觀), 李船長(李善長), 호유용(胡惟庸), 陸重刑(陸仲亨), 不우덕(傅友德), 風勝(馮勝) 等 숱한 공신숙腸(功臣宿將)을 殺害했다. 朱元璋은 臣下들을 可及的 죽이지 말 것을 呼訴하던 皇太子 朱標(朱標)에게 가시가 붙은 탱자가지를 쥐여주면서 “너에게 가시 없는 탱자를 남기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明나라 朝廷의 官吏들은 “每日 아침 入闕 時 妻子와 離別 人事를 하고 저녁에 無事히 돌아오면 서로 기뻐했다”고 할 程度로 恐怖 雰圍氣 속에서 살았다. 

    朱元璋은 宰相 호유용을 處刑한 다음 後任 宰相을 임명하지 않고 皇帝가 內閣을 直接 統轄하는 皇帝獨裁國家를 만들었다. 朱元璋은 皇太子 朱標가 죽은 後에는 皇太孫 주윤문의 未來를 위해 功臣들을 殺戮했지만 建文帝 주윤문은 4年間의 內戰 끝에 叔父인 연왕 主體(朱?)에게 皇帝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世祖·永樂帝 닮은꼴 政權 簒奪

    1399年 主體가 年庚에서 叛亂을 일으키자 조선도 明나라 內戰에 휘말렸다. 女眞族 出身 明나라 將帥 임팔라實利(林八剌失里)는 1萬 5000餘 名을 이끌고 國境을 넘어 朝鮮 入國을 要請했다. 임팔라實利를 따르는 1萬 5000餘 名 中에는 最强(崔康)을 包含한 랴오둥(搖動) 朝鮮人이 多數 包含돼 있었다. 

    朝鮮 太宗 李芳遠은 主體와 衝突하지 않으려고 임팔라實利 等 主謀者들을 主體에게 넘겨줬다. 朝鮮은 主體가 일으킨 內亂이 4年이나 持續됐는데도 觀望하는 姿勢를 取했다. 1次 王子의 亂을 통해 요동 征伐을 主張한 鄭道傳을 殺害하고 執權한 李芳遠으로서는 政權 安定을 위해 中國 政權의 支援이 必要했기에 主體든, 주윤문이든 어느 한쪽 便을 들 수가 없었다. 

    主體의 쿠데타가 일어난 50年 뒤 朝鮮에도 類似한 일이 일어났다. 世祖(理由)는 主體의 事例를 통해 政權 簒奪 方法을 배웠을 것이다. 永樂帝로 登極한 主體의 後宮 가운데 하나인 韓氏(韓氏)의 조카가 世祖의 며느리이자 成宗 이穴의 어머니 인수大妃다. 

    太祖 朱元璋이 農本主義的 한족 民族國家를 目標로 한 데 反해 永樂帝는 世界帝國을 志向했다. 永樂帝는 몽골 征伐을 試圖하면서 宦官 淨化(1371~1434)를 起用해 南中國海-印度洋 航海에 나섰다. 淨化의 아버지는 윈난(雲南) 出身 이슬람敎徒 무함마드다. 그의 家計(家系)는 이란 또는 터키界로 推定된다. 第1次 大航海는 1405年 창장 河口의 류자虛(劉家河)에서 出發했다. 난징에서 乾燥한 300~2000t級 大型船 62隻에 2萬 7800名의 將兵이 乘船해 푸젠-베트남 中部(퀴논)-자바(수라바야)-수마트라(팔렘방)-스리랑카(갈레)-印度(캘리컷) 航路를 總 2年間 航海한 끝에 1407年 歸還했다. 

    淨化의 大航海가 있은 지 60年 後인 1492年 제노아 共和國 出身 콜럼버스의 大西洋 航海 때 乘務員 88名이 250t級 산타마리아호 等 3隻에 乘船해 카리브海 히스파니올라섬에 到着한 것과 1497年 포르투갈 出身 바스코 다 가마의 喜望峯 航海 때 120t級 船舶 3隻이 使用된 것에 비춰 볼 때 明나라의 造船術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淨化의 大航海는 南中國海-印度洋 沿岸 國家에 明나라를 宗主國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主目的이었다. ‘靖難의 便’ 渦中에 行方不明된 建文帝의 行方을 搜索하고 후추와 各種 珍貴한 物品을 入手하는 것도 航海 目的 中 하나였다. 當時 수마트라 팔렘방에는 이미 相當數의 華僑가 살고 있었다. 明나라에 敵愾心을 갖고 있는 티무르 帝國에 對한 情報 蒐集도 航海 目的 中 하나였을 것이다.

    淨化의 大航海, 一帶一路로 復活

    明나라는 優越한 經濟力을 바탕으로 많은 나라로부터 朝貢을 받았다. 朝鮮, 몽골, 오키나와, 身長의 都市國家, 東中國海-印度洋 沿岸 多數의 나라로부터 朝貢을 받은 明나라는 性理學에 기초한 華夷館(華夷觀)과 朝貢貿易의 힘으로 中國 中心 秩序를 만들어갔다. 

    7回에 걸친 淨化의 大航海는 大體로 平和裏에 實施됐다. 第3次 航海 時 朝貢을 拒否하는 스리랑카 王과의 싸움이 거의 唯一한 戰鬪다. 3次까지는 印度의 캘리컷, 4次부터는 호르무즈海峽까지 航行(航行)했다. 分遣隊(分遣隊)가 예멘의 아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마린디까지 나아갔다. 

    淨化 艦隊는 기린 等 當時 基準으로 奇異한 짐승을 잡아왔다. 1431年 第7次 航海는 永樂帝의 孫子 선덕제 時代에 이뤄져 메카까지 航行했다. 性話題 時節 宦官들을 中心으로 大航海가 다시 推進됐으나, 農本主義的 民族國家를 志向하는 保守的 官僚들은 淨化가 남긴 報告書를 모두 破棄했다. 大型 船舶을 乾燥하는 技術이나 航海術度 이때 모두 社長(死藏)됐다. 유럽 國家들이 新大陸을 發見하고, 商工業 振興政策을 推進하기 始作한 時期에 明나라는 鎖國主義(鎖國主義)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淨化의 大航海는 最近 시진핑 政府에 依해 一帶一路(一帶一路)로 되살아났다. 

    연왕으로서 베이징을 다스려본 永樂帝는 몽골과 중원의 分離가 惹起한 몽골 部族의 經濟難이 몽골과 明나라 間 戰爭으로 이어진다는 事實을 잘 알았다. 그는 몽골 遠征을 통해 元나라처럼 幕남(中國)과 漠北(몽골)을 다시 統一할 計劃이었다. 

    永樂帝의 아들 홍희제는 征伐戰爭에도 不拘하고 몽골 勢力이 꺾이지 않자 朱元璋의 建國理念으로 돌아가 收縮型 民族國家를 志向했다. 그는 난징 在天도(再遷都)를 試圖했다. 홍희제의 在位 期間이 매우 짧은 까닭에 재薦度는 이뤄지지 못했다. 홍희제를 繼承한 선덕제는 朱元璋의 收縮型 民族國家와 永樂帝의 擴張型 世界帝國 사이의 中間을 選擇했다. 재薦度는 中斷했으나 몽골 쪽 國境守備隊를 허베이省 中北部까지 후퇴시키고 叛亂이 잦은 베트남은 抛棄하기로 했다.

    몽골 軍團, 베이징 壓迫하다

    선덕제가 消極的인 對外政策을 取한 것이 그의 아들 영종 時代에 災殃으로 다가왔다. 영종은 師傅(師父)인 宦官 往診(王振)을 重用해 2人者로 삼았다. 往診의 威勢는 相서(장관)의 무릎을 꿇릴 程度였다. 

    明나라에서 영종이라는 어리석은 指導者가 登場한 때 몽골에서는 오이라트족 出身 에센이라는 뛰어난 人物이 나타났다. 그는 몽골을 統一하고 明나라를 繼續 壓迫했다. 

    몽골은 마시(馬市)라는 朝貢貿易을 통해 明나라에 말을 비롯한 家畜을 輸出하고 代價로 食糧과 差 等을 輸入해 살아갔다. 朝貢貿易은 經濟的으로 弱者인 몽골에 유리하게 進行됐다. 朝貢貿易이 國家才情에 過度한 負擔을 주고 往診의 私益(私益)에도 해가 되기 始作하자 明나라는 交易量을 制限하려 했으며 에센은 1449年 랴오둥에서부터 간쑤까지 東-西 國境 全體를 大大的으로 攻擊하는 것으로 對應했다. 에센의 主力軍이 산시省의 要衝地 다퉁(大同)마저 攻擊하자 往診의 使嗾를 받은 泳踵은 親庭(親征)을 決定했다. 에센 軍團의 威力을 잘 알던 兵部尙書(國防長官) 曠野(??)와 兵部侍郞(國防次官) 우겸(于謙)李 親庭을 挽留했으나 英宗의 固執을 꺾을 수 없었다. 영종은 50萬 大軍을 이끌고 親庭하기로 하고 동생 주기옥을 甘菊(監國)으로 삼아 우겸과 함께 베이징을 지키게 했다. 

    英宗의 親庭은 悲劇으로 끝났다. 明나라 大軍은 長距離 行軍 끝에 물이 거의 없는 베이징 郊外 토목보(土木堡)에서 4萬 오이라트 騎兵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包圍된 명나라군 數十萬 名이 虐殺됐다. 영종은 捕虜가 됐으며 往診과 曠野 等은 참살당했다. 에센은 곧바로 베이징城을 包圍했다. 우겸은 주기옥을 皇帝로 推戴하고 22萬 兵力과 各種 火器(火器)를 곳곳에 配置해 5日間의 攻防戰을 勝利로 이끌었다. 에센은 朝鮮軍을 包含한 支援軍에 依해 退路가 끊어지는 것을 憂慮해 몽골로 退却했다.

    朝鮮이 搖動 占領 못 한 까닭은…

    우암 송시열 초상. 18세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이 그렸다. [국립춘천박물관]

    尤庵 宋時烈 肖像. 18世紀 文人이자 畫家인 金昌業이 그렸다. [國立春川博物館]

    李成桂와 鄭道傳 等 朝鮮 建國勢力은 몽골 帝國의 首都 카라코룸이 漢字로 花林(和林) 또는 花翎(和?)으로 表記된다는 것에 着眼해 明나라에 朝鮮과 花翎 中 하나를 나라 이름으로 選擇할 것을 要求함으로써 明나라로 하여금 滿洲를 永有한 적이 있는 ‘朝鮮’이라는 國號를 受容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나 時間이 흐르면서 朝鮮 王과 士大夫들은 性理學的 華夷館(華夷觀)에 깊이 물들어갔다. 

    오이라트가 대명(對明) 同盟을 要請하고 베이징城을 包圍하는 狀況임에도 世宗 이도의 朝鮮은 鴨綠江이나 豆滿江 건너便 어느 한 곳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亡國의 危機에 處한 明나라가 朝鮮 大軍의 랴오둥(搖動) 駐屯과 女眞族 蠢動 抑制를 要求한 機會마저 活用하지 못했다. 朝鮮은 오이라트君의 鴨綠江 도하에 對備해 江界에 大軍을 駐屯시키는 程度밖에 하지 못했다. 앞서 1433年과 1435年 4軍(四郡)·6陣(六鎭)을 開拓한 것이 朝鮮이 얻어낸 全部였다. 

    이도는 1433年 최윤덕(崔閏德)에게 1萬 5000餘 名의 兵士를 줘 서북면(平安道) 女眞族을 討伐하도록 했다. 崔潤德은 女眞族을 몰아낸 곳에 女聯(閭延), 자성(慈城), 武昌(武昌), 우예(虞芮) 4軍을 設置했다. 이도는 1435年 김종서(金宗瑞)를 동북면(咸鏡道)으로 派遣해 慶源(慶源), 慶興(慶興), 穩城(穩城), 鐘城(鍾城), 會寧(會寧), 富寧(富寧) 等 6陣을 開拓하게 했다. 當時 朝鮮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이라트와 손잡고 랴오둥을 占領했어야 했다.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둥 攻掠이 부담스러웠다면 6陣 司令官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적어도 只今의 지린省과 沿海州 一帶를 占領하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朝鮮과 名, 몽골, 日本 간 勢力 均衡을 維持하는 게 可能했을 것이다. 

    名을 하늘로 생각하고 明나라에 外交·國防을 맡기다시피 한 朝鮮의 小中華主義(小中華主義)와 世祖 主導의 癸酉靖難 以後 거듭된 政變과 士禍(士禍)는 朝鮮의 矮小化를 가져왔다. 成宗 以後 性理學者들의 政治 參與가 擴大되면서 朝鮮의 獨自性은 繼續 弱化됐다. 

    朝鮮의 또 다른 問題는 倭寇 出沒이었다. 高麗 末부터 始作된 倭寇의 侵略은 朝鮮 初期에도 이어졌다. 個國 初期부터 朝鮮은 銃砲를 裝着한 戰艦을 開發하는 等 海軍力을 增强하는 한便, 倭寇 活動을 統制할 수 있는 아시카가(足利) 幕府와 外交關係를 맺었다. 그럼에도 倭寇의 掠奪이 繼續되자 1419年 上王(上王) 李芳遠의 命을 받은 이종무는 艦船 227隻과 軍士 1萬 7000餘 名으로 倭寇의 巢窟인 對馬島를 討伐했다. 朝鮮은 류큐, 샴, 자바 等과도 交流했다.

    몽골, 野性 잃고 無力化

    왜구의 침략을 그린 16세기 명나라 그림.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알마 제공]

    倭寇의 侵略을 그린 16世紀 明나라 그림. 倭寇는 韓半島와 中國 海岸에 出沒해 掠奪을 일삼았다. [알마 提供]

    에센은 칭기즈칸 家門인 黃金氏族 出身이 아니었기에 大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後孫 톡土아부카를 大칸으로 擁立하고, 自身은 2人者인 太史(太師) 자리에 머물렀다. 에센의 妹夫이기도 한 톡土阿附카는 에센이 베이징을 칠 때 滿洲와 몽골을 境界 짓는 싱안링(興安嶺)을 넘어 女眞族 建州衛와 해서위 等을 攻擊해 勝利를 맛보았다. 

    톡土아부카가 에센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實力을 갖추자 明나라는 두 사람을 離間시키는 作戰에 들어갔다. 그 結果 톡土아부카와 에센 사이에 對立이 深化됐다. 톡土阿附카는 에센의 누이가 아닌 다른 女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後繼者로 세웠다. 참을 수 없게 된 에센은 1451年 톡土阿附카 一族을 虐殺하고 自立했다. 칭기즈칸의 後孫을 죽인 데 對한 反撥로 많은 몽골 部族이 에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勢力을 잃은 에센은 1454年 部下에게 被殺됐으며, 이로써 西北 滿洲에서 中央아시아까지를 領域으로 하던 오이라트 帝國도 崩壞하고 말았다. 

    오이라트족이 弱化되자 할하族이 擡頭했다. 에센의 虐殺에서 살아남은 할하族 出身 바투멩게, 卽 다얀 加한(大元可汗)은 1493年 以後 마시(馬市)를 둘러싼 緊張이 發生할 境遇, 산시와 허베이 等을 集中 攻擊함으로써 明나라가 讓步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다얀의 孫子 알탄 加한 時代에 이르러 마시를 둘러싼 明나라와 몽골 間 葛藤은 度를 더해갔다. 當時 明나라 變更에서는 軍隊의 叛亂이 자주 일어났는데 叛亂軍 一部는 몽골로 逃避했다. 알탄은 이들에게 內몽골의 土地를 내주어 耕作하게 했다. 이들은 알炭을 부추겨 明나라를 侵略하게 했다. 알탄은 1542年 산시省 太原 等을 攻擊했으며, 朝鮮 明宗 이환(李?)李 執權하던 1550年에는 베이징 郊外 古北口와 統主를 陷落시키고 베이징城을 包圍하기에 이르렀다. 알탄은 明나라 各地로부터 支援軍이 當到하자 베이징性 包圍를 풀고 後退했다. 이때도 朝鮮은 中國 狀況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0年 以後 알탄은 明나라보다는 中央아시아, 신장, 티베트에 더욱 關心을 뒀다. 그는 몽골, 신장, 칭하이, 티베트, 中央아시아 一部를 統合해 大帝國을 세웠다. 알탄은 遊牧 社會를 統合하기 위해 티베트로부터 라마佛敎를 받아들였다. 遊牧民族이 宗敎의 影響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後突厥(後突厥) 빌게 可汗의 동생 퀼테긴(Ku‥ltegin)과 宰相 톤유크의 業績을 새긴 오르콘 碑文(731)에 잘 나타나 있다. 톤유크 碑文에는 “異質的인 宗敎를 받아들이지 말고 突厥 精神을 保存하자”는 文章이 새겨졌다. 알탄의 라마佛敎 歸依는 톤유크가 남긴 가장 重要한 遺言을 無視하는 것이었다. 몽골의 오이라트, 타타르, 할하族은 急激히 라마佛敎化됐으며, 몽골族은 野性을 잃고 無力化(無力化) 되어갔다.

    大災殃 序曲, 倭寇

    明나라는 몽골(北虜)에 이어 日本으로부터 祈願한 倭寇(南倭)로부터도 시달림을 받았다. 電氣 倭寇는 元나라와 高麗의 衰退 및 南北朝(南北朝)로 나누어진 日本의 政治的 混亂과 密接한 關聯이 있다. 

    電氣 倭寇에는 日本人과 함께 少數 耽羅人(濟州島인)도 參加했다. 1563年 以後 發生한 後記 倭寇는 日本의 商工業 發達로 인한 貨幣經濟의 發達과 密接히 聯關돼 있다. 後記 倭寇는 日本의 朝貢貿易 使節團이 닝보(寧派)에서 海賊行爲를 한 데 對한 報復으로 明나라가 朝貢貿易을 中斷시킨 肺關節공(閉關絶貢) 以後 猖獗했다. 倭寇는 妊娠婦의 배를 가르고 胎兒를 끄집어낼 程度로 殘忍한 行動을 茶飯事로 했다. 

    明나라 正規軍마저 倭寇를 무서워하게 되자 中國人 中 倭寇 集團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倭寇를 自處하는 者가 늘어났다. 倭寇의 70~80%가 中國人이라는 統計가 있을 程度였다. 

    倭寇는 산둥부터 하이난까지 中國 海岸 곳곳을 掠奪했다. 海岸地方 密貿易 業者들은 倭寇와 緊密한 關係를 維持했다. 따라서 倭寇 對策은 密貿易을 겸하던 地方 豪族들에 對한 對策이라고도 할 수 있다. 地方 豪族들은 密貿易을 徹底히 團束하고, 倭寇에 强勁策으로 맞선 官僚들을 敵對視했다. 倭寇에 對해 强勁策을 醉한 주환(朱紈)이나 扈從헌(胡宗憲) 같은 官僚들은 안후이(安徽)의 代財閥 新安商人을 비롯한 豪族(豪族)들과 腐敗한 中央政府 官僚들에 依해 自殺로 내몰리기도 했다. 地方의 大財閥이 베이징 中央政府를 흔든 것이다. 後날 復命運動(復明運動) 主動者가 되는 中·日 混血 鄭成功 집안도 푸젠에서 密貿易으로 富를 蓄積했다. 

    16世紀 末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依해 戰國時代가 終熄될 幾微를 보이는 等 日本 情勢가 安定되고, 유대유(兪大猷) 척계광(戚繼光) 等 武將들의 活躍으로 倭寇는 漸次 줄어들기 始作했다. 後記 倭寇는 壬辰倭亂, 丁酉再亂으로 이어지는 大災殃의 序曲에 不過했다. 東아시아의 邊方이던 日本이 歷史舞臺의 中心으로 뛰어오르는 瞬間이 다가왔다.

    忠北 槐山郡 華陽洞 ‘萬東廟’

    충북 괴산군 만동묘.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됐다. [뉴시스]

    忠北 槐山郡 萬東廟. 萬東廟는 壬辰倭亂 때 朝鮮을 도운 明나라 毅宗과 神宗을 祭祀 지내기 위해 建立됐다. [뉴시스]

    明나라 官僚들의 祿俸은 甚할 程度로 적어 腐敗 可能性이 열려 있었다. 嘉靖帝 時期의 엄숭(嚴崇) 嚴세番(嚴世藩) 富者의 腐敗는 惡辣 그 自體였다. 無能한 嘉靖帝와 융經濟를 거쳐 융經濟의 3男 주익균(朱翊鈞)李 10歲 나이에 萬曆帝로 卽位했다. 

    萬曆帝 때 日本의 朝鮮 侵攻(壬辰倭亂), 滿洲의 負傷(浮上) 等 東아시아 歷史를 바꾸는 事件이 연달아 일어났다. 萬曆帝는 阿片 常習 服用者였다. 朝鮮 性理學者들은 壬辰倭亂 때 萬曆帝가 朝鮮에 派兵해 日本軍을 물리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再造之恩·再造之恩) 도움을 줬다는 理由로 그를 子子孫孫 崇仰(崇仰)했다. 1704年 宋時烈과 권상하 等이 萬曆帝와 그의 孫子인 崇禎帝를 崇仰하기 위해 忠北 槐山郡 화양동에 세운 萬東廟(明나라에 對한 忠誠을 뜻하게 된 萬折必東(萬折必東)에서 由來)도 그中 하나다. 萬折必東은, 荒墟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東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忠臣의 節槪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李杭魯(李恒老) 崔益鉉(崔益鉉)을 비롯한 朝鮮 末 儒生(儒生)들의 骨髓 中華主義는 1865年 大院君에 依해 撤去된 萬東廟를 그 10年 後인 1875年 다시 세우는 方式으로 表出됐다. 1942年 日帝(日帝)에 依해 完全 撤去된 萬東廟가 最近 復元됐다. 우리 社會 一角에 깊이 뿌리박힌 中華主義는 治療 不可能한 痼疾病으로 생각된다. 한족 優越主義 性理學은 明나라 初期에 本格的으로 發展했으며 反動的(反動的) 性格을 띤다. 

    中華思想은 中華帝國(中華帝國) 槪念으로 發展했다. ‘中華帝國’은 東으로는 西海, 西로는 타클라마칸沙漠, 南으로는 南中國海, 北으로는 고비沙漠 範圍 內에 있는 모든 民族과 國家가 中華圈에 屬한다는 政治·社會·文化的 槪念이다. 中國의 東北亞 및 西南亞 公程度 中華帝國 槪念의 延長線上에 있다. 

    朝鮮이 再造之恩이라는 表現으로 崇仰한 萬曆帝 初期 張居正(張居正) 主導로 實施된 土地改革 結果 감춰진 土地가 還收되고 租稅가 늘어나 明나라는 相當한 財政黑字를 達成했다. 萬曆帝는 張居正이 남겨놓은 400萬 兩의 貯蓄 가운데 아들 주상순의 結婚式에 30萬 兩이나 썼으며, 남은 돈은 主로 自身의 무덤 造成에 使用했다. 그의 在位 期間 中 士大夫 東林黨(東林黨)과 東林黨을 反對하는 宦官當 間 對立은 한層 더 激烈해지고 滿洲와 日本은 나날이 强盛해졌다. 

    오다 노부나가를 繼承해 100餘 年間 持續된 戰國時代를 끝장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年 4月 朝鮮 侵攻을 開始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遠征軍은 平壤과 會寧을 占領했다.


    백범흠
    ● 1962年 慶北 醴泉 出生
    ●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卒業, 政治學博士
    ● 駐中國大使館 總領事
    ● 現 駐프랑크푸르트 總領事館 總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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