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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人 胡馬타스 敎授와의 50年 友情|新東亞

‘肝 移植 開拓者’ 이종수의 獨逸 便紙

그리스人 胡馬타스 敎授와의 50年 友情

아테네餘, 델포이餘, 親舊여~ 永遠하라!

  • 入力 2018-03-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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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다보면 셰익스피어의 ‘리어王’에서 確認할 수 있듯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는 悲劇도 겪지만, 胡馬타스 敎授와의 關係처럼 數十 年 知己들과 交遊하며 사는 生의 기쁨도 누리게 된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뉴시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뉴시스]

    2017年 聖誕節 밤 12時頃 電話벨이 울렸다. 家族으로부터 온 聖誕節 祝賀電話겠지 하고 受話器를 들었는데, 電話番號 앞자리에 0030이라는 數字가 눈에 띄었다. 國際電話였다. 

    “여보세요 여기 존이야. 크리스마스 祝賀해. 하느님의 祝福 많이 받아.” 

    그리스 아테네大學에서 停年退職한 胡馬타스 敎授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나도 말이 많아졌다. “家族 모두 잘 있지? 애들 家族은? 그리스는 破産 狀態는 면했나?” 

    그가 말했다. “나는 잘 있어. 우리가 언제 만났지? 며칠 前 硏究所로 電話 걸었는데, 祕書로부터 大學 硏究所를 그만두신다고 들었어. 健康에 問題가 있나?” 

    나는 6·25戰爭을 겪다 보니 늦은 나이인 30歲에 獨逸 留學을 떠났다. 一般的인 學生보다 10年 늦게 醫學 工夫를 始作했으니 10年 더 길게 醫學을 위해 活動해야겠다고 다짐했고, 80代에도 硏究를 繼續했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 나이로 90歲 門턱을 넘게 됐다. 늙으면 몸을 中古車처럼 修理해가며 活動해야 한다. 한 달 前 아주 健康하게 살아오던 15年 손아래 妹弟가 크리스마스 準備로 無理하다가 心臟痲痹로 갑자기 世上을 떠났다. 



    “내가 일 欲心이 많아. 波瀾萬丈한 내 人生에서 精力을 쏟아온 肝 硏究도 繼續하고 내가 體驗한 人生 이야기도 冊으로 쓰고 싶고, 어려운 나라의 醫學 發展에 보탬이 되도록 20餘 年 도와온 일도 速度를 내고 싶고…. 그러나 늙은 몸에 無理가 되지 않게 짐을 덜었어. 잊지 않고 크리스마스에 記憶해줘 고마워.” 

    살다보면 셰익스피어의 ‘리어王’에서 確認할 수 있듯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는 悲劇도 겪지만, 胡馬타스 敎授와의 關係처럼 數十 年 知己들과 交遊하며 사는 生의 기쁨도 누리게 된다. ‘親舊가 스스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論語 句節을 殘忍한 半世紀의 外國 生活을 뒤로한 오늘 더욱 切感한다.

    胡馬타스 敎授와 첫 만남

    1968年 9月 初 나는 午後 늦게 美國 콜로라도州 덴버 空港에 내렸다. 獨逸 本大學病院 外科科長이 내게 LA의 州立 캘리포니아大學病院과 덴버의 州立 콜로라도大學病院, 그리고 뉴욕의 컬럼비아大學病院을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當時 本大學病院은 臟器移植과 關聯한 새 事業을 準備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重要한 硏究·調査 役割을 맡긴 것이다. 

    덴버에 到着한 3日 後 午前에 病棟 回診을 따라다니고 있는데 180cm가 넘는 키에 아주 날씬한 外國人 醫師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握手를 請했다. 

    “난 그리스 아테네大學에서 왔어요. 오늘 內 宿所에서 點心 같이할까요?” 

    胡馬타스 敎授는 덴버에 온 지 6個月이 됐다며 簡單히 自己紹介를 했다. 點心時間에 나는 그의 宿所로 갔다. 그는 東洋 사람은 쌀밥을 먹어야 한다며 쌀로 밥을 지어 오징어젓갈과 같이 차려내 나를 待接했다. 그리고 작은 盞에 까맣게 끓인 터키式 커피에 그리스에서 가져왔다는 단맛이 剛한 젤리를 내놓았다. 쓴 커피에 그리스 菓子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그러잖아도 며칠 동안 食事가 입에 맞지 않아 속이 不便했는데 쌀밥에 젓갈을 곁들여 먹고 나니 消化不良 症勢가 없어졌다. 그 고마움은 只今도 내 記憶에 생생하다. 그는 그리스人 特有의 明朗하고 태평스러운 性格을 갖고 있었다. 

    “李 博士, 여기 病院에는 世界 各國에서 視察 나온 사람이 많아 外國서 온 펠로에게 그렇게 親切하지 않아요.” 

    胡馬타스 敎授는 이 病院의 제니라는 아일랜드系 看護師와 親한 사이였다. 어느 日曜日 그는 아침부터 그 女子의 次에 나를 태워 덴버 附近의 로키山脈 쪽까지 드라이브도 해주었다. 또 내가 어느 곳을 좀 가봤으면 하고 願하면 그 車로 데려다주곤 했다. 

    나는 그리스人이라면 그때까지 4名밖에 알지 못했다. 첫째는 中學校에서 幾何를 배울 때 알게 되는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의 定理를 모르고 幾何學을 알 수 없고 幾何學을 모르면 中學校를 卒業할 수 없다. 더욱이 獨逸 留學 前 젊은 나이에 高等學校 數學敎師 生活을 하며 家族의 生計를 解決한 나에게 피타고라스는 個人的 因緣은 없지만 特別한 그리스人人 것은 分明하다.

    悲運의 그리스 歷史

    내가 두 番째로 만난 그리스인은 히포크라테스다. 醫學 分野에 從事하는 사람, 醫學에 關心이 있는 사람 中 그리스의 義城 히포크라테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卽 그 사람 自體보다도 ‘히포크라테스의 宣誓文’ 때문에 더 널리 알려졌다. 유럽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그 宣誓文의 10個 條項 中 ‘나는 人種, 宗敎, 國籍, 政黨, 政派 또는 社會的 地位 如何를 超越하여 오직 患者에 對한 나의 義務를 지키겠노라’는 文句를 恒時 마음속에서 외쳤다. 紀元前 5世紀頃의 그리스 醫學 知識을 ‘히포크라테스의 人體’라는 著書에 綜合한 그는 肝炎 分野에서도 黃疸이 膽汁의 흐름에 異常이 있어 發生한다는 事實을 當時에 이미 發見했다. 내 專攻인 肝 疾患의 어느 分野를 더듬어봐도 히포크라테스가 나타난다. 이것이 그와 내가 아주 가까운 理由다. 

    그다음이 1959年 獨逸 留學 1年째에 學生寄宿舍에서 만난 亞打나스포로스 夫婦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留學 왔는데, 恒時 明朗하고 부드러워 피타고라스의 意識構造를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이 亞打나스포로스의 夫人으로부터 그때까지 全然 알지 못했던 그리스의 歷史的 悲運에 對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스는 유럽 文明의 發祥地이지만 紀元前 146年 고린도 戰爭 때 로마에 敗亡해 外國의 支配를 받는 運命 속에 들어갔다. 1829年 獨立戰爭에서 勝利해 오스만터키의 支配에서 벗어날 때까지 2000年 가까이 他國의 支配下에 있었다. 20世紀 初盤에도 이탈리아의 統治 아래 苦痛받았으며, 第2次 世界大戰 後 1952年 비로소 國家憲法을 制定하고 獨立國家로서 平和를 찾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그리스인은 紀元前 9世紀에 制定한 그리스文字를 持續的으로 使用하며 그리스어를 지켰고, 民俗 文化를 지켜온 壯한 民族이다.

    胡馬타스 敎授의 발레리나 愛人

    胡馬타스 敎授까지 合하면 5名의 그리스인이 隱然中에 이 나라에 對한 나의 親密感을 이어주었다. 約 8週 後에 나는 덴버를 떠나고 胡馬타스 敎授는 다음 해 봄에 그리스로 돌아가면서 나의 집에도 暫時 들렀다. 

    1972年 6月, 나는 國際間移植學會를 獨逸 본에서 開催했다. 美國 덴버에서 받은 胡馬타스 敎授의 親切에 報答하기 위해 學會에 그를 招待하고 그의 硏究 分野인 ‘臟器 保存’ 세션의 座長으로 委囑했다. 그는 世界 各國 大學에서 온 學者들 앞에서 座長을 볼 수 있는 榮光을 주어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그가 덴버에서 제니의 車로 로키산맥을 觀光시켜준 일을 잊지 않고 學會가 끝난 뒤 그를 태우고 라인江 西安 地域을 案內했다. 6月 라인 江邊이 너무 아름다워 그에게 特히 아름다운 追憶이 됐다고 한다. 

    그해 7月 初 그는 나에게 아테네大學에서 講演을 해달라며 招請狀을 보냈는데 航空券이 添附돼 있었다. 世界醫學會에서는 이와 같이 서로 相對方의 學問을 尊敬하며 招請 講演을 付託하는 아름다운 慣習이 있다. 나는 5名의 그리스人과는 2000年 以上 時差를 두고 사귀어왔지만-내 式으로 表現하면 그렇다- 그리스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空港에 胡馬타스 敎授가 愛人과 같이 마중 나왔다. 30代 中盤의 날씬한 발레리나였다. 

    “이종수 博士, 지난番에 獨逸에 招待해주어 感謝했어요. 그리스에 오신 것을 歡迎합니다. 이쪽은 제 愛人 샤샤입니다. 아테네國立劇場의 프리마발레리나입니다.” 

    空港을 나온 우리는 胡馬타스 敎授 집에서 茶를 한 盞 마시고 아테네大學病院으로 갔다. 午後 7時半頃 콘퍼런스를 마치고 病院을 나와 途中에 샤샤를 데리고 다 같이 필로파포스의 언덕으로 向했다. 그리고 夕陽의 아테네詩를 바라볼 수 있는 한 食堂의 屋外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크로폴리스와 우소 술

    “저기 보세요. 저것이 그 有名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예요. 해가 저물어갈 때의 景致가 아름답죠.” 

    샤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크로폴리스는 언덕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光線 속에 번쩍이고 있었고, 파르테논 神殿이 地中海 海岸의 맑고 푸른 저녁하늘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女는 “닥터 리, 아테네에서 이 夜景을 볼 때는 반드시 ‘우소’를 마셔야 해요. 우소 석 盞!” 하며 그리스 액센트가 섞인 英語로 나에게 說明했다. 

    “迂疏는 그리스에서만 釀造할 수 있어요. 이것은 葡萄酒를 釀造하기 위해 葡萄를 으깨서 짜고 난 찌꺼기를 발효시켜 蒸溜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소 술을 모르면 그리스를 모른다고 해야죠.” 

    寓所를 마신 뒤 午後 9時半頃 우리는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食堂街 프라카로 갔다. 이 時間이면 獨逸에서는 저녁食事가 끝나는데 그리스에서는 저녁食事가 始作된다. 프라카는 數百 個의 食堂이 密集해 있음에도 觀光客으로 超滿員이었다. 샤샤는 나에게 스브라키를 들라고 勸했다. 이것은 돼지고기살 숯불求이다. 量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가 食堂 內에 넘쳐흘러 나는 脾胃가 傷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量의 치즈가 우리나라 김치와 마찬가지다. 庶民들에게는 量의 치즈와 빵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온 飮食은 모두 올리브油로 조리됐고 食卓 위에는 여러 種類의 올리브가 놓여 있었다. 胡馬타스 博士는 올리브는 特히 心臟血管 疾患 豫防에 좋은 食品이라며 勸했다. 

    다음 날 나의 講義는 午前 10時 半부터 90分 동안 豫定돼 있었다. 나는 人體 肝移植에 對해, 特히 移植에서 血液型과 臟器 保存의 問題 等에 對해 講演했다. 그때만 해도 새로운 分野의 學問이기에 質問도 많았고 拍手도 많이 받았다. 

    이어서 나는 外科敎授들과 같이 點心을 들기 위해 피레우스港으로 갔다. 아테네의 南쪽 사로니코스만 沿岸에 있는 피레우스港은 아테네의 關門이며 그리스 最大 港口다. 지난날 强大國의 支配下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인이 이 港口에서 海外로 逃避했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포세이돈 神殿

    約 30分 自動車로 달리니 미크로리마櫓에 닿았다. 아테네의 混雜度 騷音도 아랑곳없고 바닷바람이 여름의 太陽熱을 받아 뜨거운 내 이마를 식혀줌과 同時에 비릿하면서도 爽快한 바다냄새를 실어왔다. 海邊에는 食堂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密集해 있었다. 우리는 바닷가에 놓인 한 食堂의 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地中海에서 잡힌 生鮮을 專門的으로 料理하는 집이었다. 

    “닥터 리, 이리 와요. 먹고 싶은 生鮮 하나 골라요.” 

    나는 서울이나 仁川의 活魚 가게처럼 물속에서 搖動치는 生鮮을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食堂 主人은 나를 食堂 안으로 끌고 가더니 數十 칸의 서랍을 하나씩 열어서 내게 얼음 속에 保管돼 있는 生鮮을 보여주며 무엇을 들겠느냐고 했다. 서랍마다 種類가 다른 生鮮이 들어 있었다. 胡馬타스 博士의 勸誘에 따라 한 놈을 골랐다. 다른 敎授들도 고르고 있었다. 約 30分 後에 숯불에 구운 生鮮이 나왔는데,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은 生鮮 숯불구이였다. 거기에 올리브油와 레몬을 뿌려서 와인과 같이 먹는다고 했다. 

    “우리 그리스인은 數千 年 前부터 新鮮한 生鮮을 攝取해왔고, 生鮮에 다른 調味料는 使用하지 않아요.” 

    이것이 古代로부터 내려온 그들의 食生活이다. 올리브나무와 레몬나무는 그리스와 같이 돌山이 많은 地域에서도 잘 자란다. 거기에 바다가 있고 돌山에는 염소가 잘 살 수 있으니 여기에서 이 民族의 이와 같은 健康한 自然食 食生活이 發達했다. 

    이날 午後 나는 胡馬타스 敎授와 같이 아테네에서 南쪽으로 約 70km 地點에 있는 발칸반도의 最南端, 卽 아티카半島의 끝에 있는 스니온串의 포세이돈 神殿 遺跡을 訪問했다. 그리스 어디를 가나 遺跡 大部分이 破壞되고 돌기둥만 몇 個 남아 있었는데, 스니온串의 포세이돈 神殿도 마찬가지였다. 元來 神殿은 34個의 기둥으로 이뤄졌는데 數千 年間 激烈한 戰爭의 飽和에서 破壞되고 남아 있는 몇 個의 기둥만이 夕陽에 反射돼 그 긴 歲月의 歷史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게海域에서 적이 그리스를 攻擊해올 때 이곳은 最前方 防禦陣地였다고 胡馬타스 博士는 말했다.

    古代 世上의 中心 델포이

    나는 그 後 約 4日間 胡馬타스 敎授와 아테네大學病院을 오가며 그리스式 日常을 觀察했다. 午前 6時 半 또는 7時에 始作한 病院 일은 午後 1時에 끝난다. 한낮의 氣溫이 높은 關係로 다른 地中海 沿岸國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午後 1時부터 5時까지 休息을 取했다. 大部分이 點心 食事 뒤에 낮잠을 잔다. 그리고 午後 5時부터 午後 業務가 始作된다. 저녁 食事는 午後 9時 또는 10時에 始作되니 하루가 무척 길었다. 午後 1時가 되면 나와 胡馬타스 敎授는 아테네大學病院에서 出發해 샤샤를 픽업하고 海邊에서 水泳을 했다. 當時 아테네의 富裕層은 大部分 海邊가에 別莊을 갖고 있었다. 아테네 國立劇場의 프리마발레리나人 샤샤도 海岸線에서 1km도 안 되는 位置에 곱게 丹粧한 別莊을 가지고 있었다. 

    水泳하러 가기 前 近處 食堂에 들러 生鮮을 골랐고, 海水浴한 뒤 食堂으로 가면 숯불구이 生鮮이 料理돼 食卓 위에 놓여 있었다. 點心을 먹고 別莊으로 가면 샤샤는 나를 房 한 칸에 몰아넣으면서 낮잠을 자라고 强要했다. 

    아테네 名所 아크로폴리스는 샤샤의 案內를 받아 돌아봤다. 紀元前 6世紀頃 아크로폴리스에 神殿이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紀元前 5世紀에 페르시아軍의 侵攻을 받아 破壞되고 그 後에 로마帝國, 오스만 터키, 그리고 베네치아군 等에 依해 破壞됐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란 元來 古代 그리스 各 都市의 要塞를 뜻하는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雄大하고 有名하기에 오늘날 아크로폴리스 하면 아테네를 떠올리게 됐다고 샤샤는 說明했다. 只今으로부터 約 2500年 前에, 卽 紀元前 467年에서 406年 사이에 그리스인들은 높이 156m의 平平한 巖盤 위에 니케 神殿, 에레크티온 神殿, 파르테논 神殿 等을 세웠다. 아크로폴리스는 最初에 王宮이 있던 곳이다. 王이 그 높은 곳에서 市民들을 威壓統治했다. 그러나 古代 民主主義의 아테네에서는 그곳이 神들을 모신 곳으로 變했다. 아테네의 守護神 아테네 女神像을 이곳에서 가장 雄壯한 神殿인 파르테논 神殿에서 볼 수 있었다. 

    며칠 뒤 土曜日 아침 7時에 胡馬타스 敎授와 나는 또다른 遺跡地 델포이로 떠났다. 胡馬타스 敎授는 道路 事情이 좋지 않은 길에서 車를 모느라 애를 썼다. 우리는 4時間 가까이 달린 끝에 델포이에 到着했다. 델포이는 고린피스만 北쪽 파르나스山 中턱 約 700m 높이에 있는데, 그 아래 폴레이스토스 江이 흘러서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델포이가 가까워질수록 山자락이 우리가 가는 길을 높이 에워쌌다. 델포이란 말은 古代 그리스어 ‘子宮’에서 由來했다. 이는 古代에 델포이에서 大地의 女神 가이아를 崇拜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紀元前 8世紀부터는 아폴로 神을 崇拜하게 됐다.

    自己 自身을 알라

    이윽고 우리는 아주 작은 마을 亞里아르토스를 지나면서 길가 商店에서 커피 한 盞을 마시고 休息을 取했다. 커피가루를 태워놓은 것처럼 쓴맛이 强한 터키式 커피였다. 내가 마시기를 躊躇했더니 胡馬타스 敎授는 “이것이 커피의 援助입니다. 이 맛을 알아야 발칸반도에서 살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커피 量은 아주 적어 몇 모금 마시자 금세 盞이 비었다. 

    “여기서 몇 分 달리면 레바티아가 나오는데 그다음이 델포이의 聖地입니다. 汽車를 타면 레바티아까지 옵니다.” 

    이 델포이의 聖地 遺跡은 中世에 地震 等으로 埋沒되었고 그 聖地 遺跡 위에 카스트리란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이 1500年 以上 델포이를 忘却하고 있었는데 1892年 프랑스 考古學者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우리가 오늘 보게 된 古代 델포이의 遺跡을 發掘했다고 한다. 

    우리는 드디어 2475m 높이의 파르나소스山 中턱에 位置한 델포이 聖地에 到着했다. 나는 胡馬타스 博士의 뒤를 따라 아폴론 聖域으로 들어가서 아폴론 神殿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寶物轉移 櫛比했다. 

    이 아폴론 神殿은 紀元前 373年에 建築한 建物인데 現在는 6個의 도리아식 둥근기둥과 그 神殿의 基礎石만 남아 있다. 元來는 38個의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神殿은 唯獨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아폴론 神殿은 古代 그리스에서 가장 重要한 神託이 봉헌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폴론의 信託은 아주 重要한 豫言으로 받아들여져 좋은 收入源 구실을 했다. 많은 喜捨金과 信託料 德分에 이 神殿이 地震에 依해 여러 番 破壞됐어도 再建될 수 있었다. 信託은 書記 394年 로마 皇帝 테오도시우스가 禁했는데 그때까지는 유럽 및 中東地域 王들이 여기에서 信託 받기를 願했다. 古代 그리스 作家 소포클레스가 지은 悲劇 ‘오이디푸스 王’도 信託을 받으러 보내는 이야기로 始作된다. 

    아폴론 神殿의 入口 壁에는 그 有名한 格言이 새겨져 있었다. 그 眞理는 오늘날에도 妥當하다고 胡馬타스 敎授는 자랑했다. ‘1. 自己 自身을 알라. 2. 大部分의 사람은 좋지 않다. 3. 練習이 모든 일에 重要하다. 4. 時間을 아껴 써라. 5. 過한 것은 不足한 것보다 못하다. 6. 바쁘면 돌아가라. 7. 아무도 自己 運命을 避해가지 못한다.’

    生活의 目標는 돈과 사랑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 [동아DB]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神殿. [東亞DB]

    아폴론 神殿 遺跡을 한참 쳐다보다 우리는 約 5000名이 들어갔다는 野外劇場으로 갔다. 劇場은 언덕 위에 位置했으며 原形대로 保存돼 있었다. 胡馬타스 敎授는 劇場 바닥의 中心에 서서 소리를 지르며 날더러 劇場의 여러 座席에 가서 들어보라고 했다. 中心에서 하는 말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거의 同一하게 들렸다. 

    “古代 그리스의 科學이 얼마나 發達했었는지 確認해봐요. 어디서 들어도 音響이 다 같게 들리도록 設計됐어요.” 

    그는 자랑스럽게 說明했다. 劇場에서 한참 걸어서 아래로 내려와 우리는 아테네 女神의 聖域에 이르렀다. 여기도 建物의 基礎를 이루는 돌들만 남아있었다. 아테네 女神의 神殿은 元來 原形이지만 20個의 도리스型 기둥 中 現在 3個만 서 있는데 이 기둥이 델포이 그림葉書의 代表 그림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델포이나 보이는 것은 全部가 부서진 돌덩어리들이었다. 

    午後 늦게 點心 食事를 하고 우리는 아테네로 出發했다. 胡馬타스 敎授는 내게 그리스 시골을 보여주기 위해 풀레이토스江 골짜기로 내려가 海邊 길을 따라 안티키라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나갔다. 胡馬타스 敎授는 가는 途中 들른 食堂에서 身體에 異常이 있는 사람만 보면 그 자리에서 診察을 하고 自己 名銜을 주었다. 그리고 “아테네의 ○○醫師가 그 病에 關해서 잘 보는 분이니 그리로 가보세요” 하며 周旋을 했다. 나로선 大學敎授가 지나치게 職業 宣傳을 한다는 感이 있었다. 

    “닥터 리, 그리스인이 追求하는 生活의 目標는 돈을 버는 것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뿐이에요.” 

    自身이 이렇게 內科 患者들을 親舊인 內科敎授에게 보내면, 그 親舊는 手術해야 할 患者가 있을 境遇 自身에게 보내온다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인의 意識構造는 2000年 以上 持續된 植民 支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苛酷한 오스만터키의 支配下에서도 그리스인은 비록 高級 官職에 任用은 안 됐어도 商業만은 卓越하게 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食堂을 發見하지 못하자 胡馬타스 敎授는 시골마을의 한 집을 無條件 찾아갔다. 그가 이 近處에 食事할 곳이 있느냐고 묻자 그 집主人은 近處에는 食堂이 없으니 自己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招待했다. 主人은 우리나라 시골에서처럼 뜰 앞에 모닥불을 피워서 모기떼를 쫓아내고 그 불에 긴 쇠꼬챙이에 끼운 羊고기 기름덩어리를 굽고 있었다. 빵 한쪽에 기름진 羊고기와 올리브 몇 個를 먹었고, 葡萄酒 몇 盞을 들었다.

    農家의 따뜻한 人心

    “참 簡單한 食事죠. 그리스의 시골 사람은 이렇게 貧寒하게 살아요. 그러나 人心은 좋아요. 羊고기 기름덩어리지만 이것이 모두 그리스의 眞味예요.” 

    羊을 잡아 좋은 고기는 모두 팔고 主人은 남은 찌꺼기인 기름덩이만 먹는다. 葡萄酒는 흙냄새가 나고 모닥불에 구운 기름덩어리에서는 兩 냄새가 甚했으나 그리스의 親切한 시골 人心은 나의 마음을 便하게 해주었다. 

    며칠 後 나는 그리스를 떠났다. 胡馬타스 敎授 그리고 샤샤의 精誠이 참으로 고마웠고, 나는 흐뭇한 幸福感에 젖어들었다. 그로부터 6年間 우리는 서로 連絡하지 못하고 지냈다. 生存競爭에서 敗北하지 않으려고 每日 싸우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 成功하기를, 그리고 幸福하기를 늘 빌었다. 

    1978年 나는 다시 國際學會의 會長으로서 獨逸 본(Bonn)에서 學會를 開催했다. 

    “존(胡馬타스의 이름), 그間 時間이 많이 흘렀어요. 서로 病院 일로 바쁘게 뛰다보니 消息 傳할 마음의 餘裕도 없이 時間만 지나갔군요. 제가 이番 9月에 본에서 國際學會 會長으로서 다시 學會를 열게 됐습니다. 時間이 되시면 1972年 때처럼 座長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友情이 다시 꽃피고 再會하기를 빕니다.” 

    이 便紙에 對한 回答이 왔다. 

    “李 敎授, 제가 오래 消息을 드리지 못해 罪悚합니다. 그間 제게도 變化가 많았어요. 제가 齒科를 專攻하는 女醫師와 結婚해서 벌써 딸애를 하나 두었어요. 저를 또 學會에 座長으로 招待해주셔서 感謝합니다. 저의 家族이 全部 같이 獨逸로 가서 뵙겠습니다.” 

    胡馬타스 敎授는 家族과 같이 獨逸에 왔고, 成長한 家長으로서의 面貌를 갖추고 있었다. 夫人은 亦是 生活力이 强한 齒科醫師였다. 1972年 때처럼 그는 學會가 끝나자 그리스에 와서 講演을 한 番 해달라고 招請했다. 그때는 내가 病院 일이 너무 밀려서 그리스에 갔다가 2泊만 하고 돌아왔지만 아테네에 到着하던 날 當時 그리스의 敎育部 長官이 저녁 晩餐을 主催해주었다. 그런데 敎育部 長官이 大統領에게 急히 갈 일이 생겼다며 農林部 長官이 代身 호스트로 나왔다.

    寶物단지에 실크로 싸두고 싶은 友情

    이 晩餐은 胡馬타스 敎授의 옛 女子親舊인 샤샤가 周旋한 것이었다. 샤샤는 胡馬타스 敎授와 헤어진 뒤 富豪의 夫人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親舊로서 友情을 維持하고 있었고, 胡馬타스 夫人과도 서로 理解하며 親舊로 지낸다고 했다. 내가 招待되어 訪問한다고 하니 샤샤가 그리스 政府에 이야기해 政府 次元에서 迎接했다고 한다. 이날 저녁 晩餐은 아테네에서 若干 떨어진 郊外의 숲 속에서 있었다. 샤샤는 男便과 같이 왔다. 

    “존으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참 眞正한 國際的 友情을 가지고 계신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番 迎接은 저희 男便이 周旋했습니다. 아주 훌륭하신 분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옛날과 比較해도 하나도 變하지 않으셨군요.”

    샤샤의 얼굴에는 늘 아름다운 웃음이 배어 있었다. 午後 10時가 다 돼가는데 長官은 如前히 參席하지 않아 焦燥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獨逸과 달리 그리스는 晩餐이 9時나 10時에 始作돼요. 배가 고프시지요?” 샤샤가 귓속말로 狀況을 說明했다. 마침내 키가 작은 農林部 長官이 到着했다. 

    “훌륭하신 敎授님을 뵙게 되어 榮光입니다. 元來 韓國에서 오셨다는데 獨逸에서 많은 活躍을 하시고, 우리 그리스學會와도 끊임없는 關係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여러 사람과 헤어져 호텔로 왔다. 다음 날 아테네大學病院에서 講演하고, 다시 大學에서 하루를 보낸 뒤 獨逸로 돌아왔다. 아테네 空港에서 샤샤에게 電話로 感謝의 뜻을 表示했다. 

    “샤샤, 훌륭하세요. 結婚하시고도 胡馬타스 敎授와 좋은 親舊가 되어 제게도 이런 盛大한 晩餐을 베풀어주셨으니 平生 感謝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벌써 30年 以上의 歲月이 훌쩍 흘렀다. 胡馬타스 敎授와는 年末이나 新年 秒에 가끔 電話를 주고받는다. 亦是 내가 尊敬하고, 아끼고 싶은 平生의 親舊여서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고 그 友情을 실크로 싸서 寶物단지에 넣어두고 싶다. 우리의 呼吸이 繼續되는 날까지.

    이종수
    ● 1929年生
    ● 1964年 獨逸 뒤셀도르프臺 醫學博士
    ● 1969年 유럽大陸 最初 肝 移植 成功
    ● 1975年 本隊 醫大 移植과 課長
    ● 1994年 肝疾患硏究所長
    ● 著書: ‘새로 쓰는 間 다스리는 法’ ‘間이 두 個인 男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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