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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英·佛에서의 惡戰苦鬪 1963~1972|新東亞

世界를 向한 熱情과 挑戰 - 송상현 回顧錄

美·英·佛에서의 惡戰苦鬪 1963~1972

丈人인 南在 김상협의 助言… “大韓民國은 바다로 나가야”

  • 入力 2018-03-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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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戰爭을 經驗한 내가 어떻게 하면 戰爭 없는 평화로운 世上을 만드는 데 寄與할 수 있을까 하는 平素의 생각이 雄大한 解法體系의 建設로 徐徐히 바뀌어갔다. 檢察과 法院에서는 操心스럽게 任官 意向을 打診해 왔지만 나는 確信이 서지 않아 漠然한 對答으로 一貫했다.
    내가 大學 4學年이던 1962年 高等考試 司法과 15回, 16回를 半年 間隔으로 實施하는 바람에 1年에 2次例 司法試驗 合格者가 輩出됐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1963年 3月 서울대 司法大學院에 進學했다. 나는 大學 在學 中인 1962年 10月 高等考試 行政科를 通過했고, 卒業 直前인 1963年 2月 司法科에 合格해 大學을 卒業하자마자 司法大學院에 進學했다. 司法大學院은 司法硏修院의 全身으로 내가 入學하기 1年 前 新設된 판·檢査 및 辯護士 訓鍊機關이다. 

    얼마間 出席해 講義를 들어보니 敎授陣 大部分이 서울對 法大에서 가르쳐주신 恩師여서 마음이 便安했으나 講義 內容은 法大 2~3學年 때 배운 內容과 別般 差異가 없는 無責任한 反復이었다. 司法大學院의 準備 不足과 無責任함을 輕蔑하면서 이곳에서 熱心히 工夫할 생각을 접었다. 건방진 말이지만 別로 새롭거나 배울 만한 것이 없다는 印象이 剛하게 들었으며 日本 判例에 傾倒되는 現實에도 不滿이 있었다. 

    司法大學院 運營에 失望한 나는 行政府 官僚로 進出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여기고는 總務處에 任官 申請을 했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高等考試 行政과 第1部 合格者는 內務部 地方局에서 收拾을 마치면 곧바로 郡守(事務官)로 나가고 治安局에서 收拾 딱紙를 떼면 警察署長(總警)으로 임명하던 時節이다. 이것이 日帝强占期부터 내려온 關係 進出 定石이었다. 나는 當時 內閣事務處 事務官으로 發令이 났다.

    大理石으로 지은 中央廳으로 出勤

    1965년 군법무관 복무시절. 맨 왼쪽이 나다.

    1965年 軍法務官 服務時節. 맨 왼쪽이 나다.

    나는 司法大學院은 試驗 때만 나가고 只今은 헐리고 없는 우람한 大理石 建物인 中央廳으로 出勤했다. 只今 같으면 事理에 어긋나는 兼職을 했다고 非難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法的으로도 不可能한 일이다. 短期間의 條件附 任用을 마치고 1964年 初 總務處 職位分類과 第5係長의 補職을 받았다. 內 契에는 職員이 10名 넘게 있었는데 나를 補佐하는 두 名의 注射(6級)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普通考試 出身과 서울대 行政大學院을 卒業해 注射로 公職 生活을 始作한 분이 各各 버티고 있었다. 契員으로는 景武臺(現 靑瓦臺)에서 步哨 서던 經歷者, 普通考試 合格者, 다른 部處에서 밀려서 넘어온 分 等 實로 出身과 經歷이 다양한 사람들과 打字手 미스 吳가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5·16 軍士政變 以後 얼마 안 됐을 때여서인지 革命 主體라고 할 수 있는 陸士 8期生이 軍服을 입은 채 直屬 局長으로 赴任하는 等 緊張된 雰圍氣에서 勤務했다. 

    하루는 아버님이 나를 불러놓고 公務員은 薄俸 탓에 自制하려고 해도 誘惑에 넘어가기 쉬운 데다 不淨腐敗에 빠져 身世를 망치는 수가 있으므로 每月 내 月給額과 同一한 額數를 用돈으로 줄 테니 絶對로 誘惑에 빠지지 말고 되도록이면 部下 職員에게 베풀면서 살라고 단단히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님이 준 돈으로 當時 거의 唯一한 大衆用 술인 카바이트로 발효시킨 막걸리를 職員들에게 자주 샀고 비싸서 잘 못 찾는 武橋洞 補身湯집에 데리고 가 保身을 시켜줬다. 司法大學院 同僚들과는 鍾路5街 雙寡婦집에서 豆腐찌개를 按酒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司法大學院은 元來 2年 過程인데 3期生인 우리는 1年 半 만에 修了했다. 1964年 9月 修了 直後 光州 尙武臺에 있던 戰鬪敎育司令部 傘下 步兵學校에 軍法務官 訓鍊을 위해 入隊했다. 2代 讀者에 該當되므로 士兵으로 入隊하면 6個月로 兵役을 마치는데도 法務官 要員이 極度로 不足하던 時節이기에 法務官으로 徵集돼 3年間 服務했다. 全國에서 軍紀가 가장 세다는 戰鬪敎育司令部에 準士官候補生과 同時에 入所했다. 같은 날 入所한 幹部候補生들이 우리를 氣合 주고 못살게 굴었다. 같은 날 함께 入所했지만 入所時間이 우리보다 若干 먼저이므로 先輩로 待接하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2個月의 訓鍊을 마치면 中尉 階級章을 다는 데 비해 그들은 1年間의 고된 訓鍊을 받은 뒤 少尉 階級章을 다는데도 우리를 아주 힘들게 들볶아대는 것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

    陸軍本部에서 1年 半 勤務한 後 講院 麟蹄郡 원통리 11師團으로 轉勤 配置됐다. 서울에서 가장 먼 38線 以北인 데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라는 말을 듣는 奧地 中 奧地다. 원통리는 當時 서울에서 春川과 良久를 거쳐 버스를 세 番 갈아타고 12時間假量 가야만 到達하는 마을이었다. 先任下士가 얻어준 下宿房은 草家지붕 이엉 밑에 감추어진 서까래의 끝이 내 턱쯤에 와 닿는 나지막한 곳이었다. 文化生活이란 一切 없는 데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甚한 辱說이 담긴 北韓의 對南放送이 밤새도록 들려와 熟眠을 取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서울에 나왔다가 法務參謀部에 오래 勤務한 將校들을 일정한 條件下에서 法務官으로 임명하는 法案이 國會에서 發議돼 論難이 이는 것을 알았다. 高等考試 司法과 合格者가 매우 적어 軍 未畢 合格者가 法務官으로 모두 入隊해도 軍의 法律 需要를 充當할 수 없으므로 慢性的 缺員을 充員한다는 名分下에 손쉬운 銓衡을 통해 一旦의 步兵將校를 法務將校로 임명한 後 10年을 服務하면 辯護士 資格을 준다는 內容이었던 것으로 記憶한다. 이 같은 計劃은 法曹界 人士들의 甚한 抵抗을 받았다. 몇몇 同期生을 만나 昭詳한 顚末을 들었는데 藥局에서 10年間 심부름했다고 一定 條件을 갖추면 藥師 資格을 줄 수 있느냐는 式으로 聲討하는 雰圍氣였다. 우리는 意見書를 作成하고 同期生들의 署名捺印을 받아 野黨 總務 等에게 修交했다. 이 같은 意思表示가 나중에 큰 問題로 飛火할 것으로는 豫想하지 못했다. 

    軍 當局은 許可 없이 集團行動에 나섰다고 問題를 삼으면서 强勁하게 對應했다. 主動者級으로 分類된 나를 包含한 3名의 軍法務官은 서울에서 憲兵隊의 調査를 받았다. 朴某 陸軍 法務監은 이 事件이 出世와 進級에 支障을 줄까 憂慮해서인지 지레 嚴斷을 主張하면서 必要 以上으로 일을 키웠다. 나를 包含한 현홍주, 김찬진 等 이른바 主動者 3人은 우리와 全혀 關係없는 김유후, 장기욱 等 先輩 法務官의 使嗾를 받아 일을 벌였다는 脚本에 따라 罷免됐다. 김유후, 장기욱 等 高等學校 때부터 親한 親舊 두 사람이 背後라고 허황되게 指目하는 等 全然 承服할 수 없는 웃기는 脚本을 作成해 誘致하고도 形式的인 水準의 懲戒가 이뤄진 것이다. 刑事事件의 搜査와 事件 處理의 水準, 懲戒調査와 그 節次 等이 아주 後進的인 時節이었다.

    熱帶 琪花瑤草 가득한 뉴올리언스

    罷免의 法的 效果를 꼼꼼하게 알아봤다. 當時에는 罷免당하면 卽時 不名譽 除隊해야 하고 3年間 公職 就任이 制限되는 不利益이 있었으나 3年이 經過하면 懲戒에 따른 不利益이 모두 實效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을 處理하는 當局者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誘致하고 실망스러워 罷免을 甘受한 채 卽刻 除隊한 後 美國으로 留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恩師 김기두 先生님의 勸告로 풀브라이트 奬學金을 받아둔 것이 있었다. 決然한 마음으로 1967年 7月 美國 南部 루이지애나州 뉴올리언스에 있는 名門 튤레인대 大學院으로 留學을 떠났다. 

    學校에 들어가기 前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參加하고자 뉴욕에 머물렀다. 소낙비의 빗방울이 굵은 것에 놀라 ‘美國 것은 빗방울조차 크네’라고 중얼거린 생각이 난다. 外國에서 온 풀브라이트 留學生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運營하는 프린스턴大 寄宿舍에 入住했다. 韓國이 그리우면 주머니 事情 탓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大學 앞 唯一한 中國 飮食店에서 豆腐찌개 비슷한 얼큰한 飮食을 사 먹곤 했다. 뉴욕 市內에 나가도 韓國 飮食店의 數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程度였다. 서울에 電話를 걸려면 申請하고도 여러 時間을 기다려야 通話가 될까 말까 하던 時節이다. 

    나는 풀브라이트로부터 登錄金과 冊값 外 每달 270달러씩 生活費를 받았는데 獨身이므로 견딜 만했다. 學生 食堂에서 70센트 程度에 한 끼 사 먹을 수 있었다. 처음 보거나 神奇한 飮食이 매우 많았다. 프린스턴大 構內食堂에서 종이팩에 든 新鮮한 牛乳를 처음 보았다. 韓國에서는 美8군에서 流出된 粉乳를 끓는 물에 타 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이스크림이 그처럼 種類가 많은 것도 美國에 到着해 알았는데 願하는 種類를 正確히 말할 줄 몰라 사 먹지 못한 記憶도 있다. 

    튤레인대가 터 잡은 뉴올리언스에 到着하니 처음 接해보는 熱帶地方의 琪花瑤草가 나를 반기고 植民地 時代부터 여러 나라의 影響을 받아 뒤섞인 獨特한 文化的 特色을 今方 느낄 수 있었다. 美國 聯邦大法院의 劃期的 黑白 統合 判決을 完璧하게 執行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南部였기에 黑人도 白人도 아닌 나는 곤혹스러운 境遇가 間或 있었다. 버스나 電車에 人種 間 座席 配置 表示의 痕跡이 남아 있었으며, 共用建物 入口의 人種別 出入口 標示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잘 들리지도 않는 英語로 惡戰苦鬪

    1966년 8월 30일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1966年 8月 30日 서울대 司法大學院 卒業式 때 찍은 寫眞이다.

    내가 튤레인대에서 LL.M(法學碩士) 課程을 工夫하는 동안 서울에서 사달이 났다. 나는 罷免 處分을 甘受하고 不名譽 除隊한 民間人 身分으로 旅券을 發給받아 풀브라이트 奬學生으로 渡美했고, 3年만 工夫하고 歸國하면 身分上 不利益이 解消된다고 믿었으나 問題가 생긴 것이다. 

    62名의 同期生을 한꺼번에 懲戒 處分한 法務監室에서는 일이 커져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지 當事者 모두에게 不服抗告를 하라고 指示했다. 全員이 抗告한 結果 나의 境遇는 罷免이 降等으로 한 段階 輕減됐다. 中尉로 軍에 復歸해 3個月 未滿의 殘餘期間을 服務해야 했는데 나는 美國에 居住했다. 後日 알고 보니 朴某 法務監이 神經質을 내면서 모두 빠짐없이 抗告를 해야만 한다고 强要하는 통에 先任下士가 怯을 먹고 나의 軍番圖章을 任意로 찍어 抗告書類를 올린 것이었다. 

    豫想치 못한 懲戒 減輕 處分에 따라 兵營에 復歸하더라도 除隊가 두세 달 남은 境遇에는 집에서 除隊 準備를 하는 게 當時의 慣例였다. 歸國 後 殘餘期間 또는 그 異常을 服務하도록 處理해도 問題가 없는 것이었으나 朴某 法務監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길길이 뛰면서 나를 當場 歸國시켜 映窓에 처넣으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外務部를 통해 美國 政府에 送還 要請을 하라고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1967년 로이 헌트와 북한산에서.

    1967年 로이 헌트와 北漢山에서.

    數年 後 歸國해 서울법대 敎授가 된 後 이 고약하기 짝이 없는 法務監을 여러 番 만났다. 朴正熙 政權 時節에는 軍隊에서 豫編한 將星들에게 여기저기 자리를 만들어 감투를 나눠줬다. 이 사람도 아무런 專門性도 없이 韓國製糖協會라는 民間團體의 常勤 副會長 자리를 얻었는데 業界에서 選出된 協會 會長이 나의 妻三寸이었다. 그런 緣故로 가끔 妻家 쪽 大小事에서 그를 만났지만 나는 끝내 이 고약한 性格의 所有者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튤레인대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英語로 惡戰苦鬪하면서 碩士 學位를 取得했다. 只今처럼 韓國人 先輩가 남겨놓은 各種 要領과 資料도 없었으며 韓國人 居住者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狀況에서 힘들게 工夫했다. 

    南部의 뉴올리언스는 典型的인 美國이 아니라고들 한다. 이 地域은 스페인, 프랑스 및 英國의 支配를 받는 동안 그들의 文化가 黑人奴隸들의 生活과 뒤섞여 獨特한 雰圍氣와 飮食, 音樂, 生活樣式을 創造해낸 곳이다. 映畫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보이는 植民地 時代에 形成된 浪漫이 慇懃하다. 그러나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동백림 事件으로 뒤숭숭하던 파리

    法務部에서 프랑스 司法官養成學校에 派遣해 1年間 敎育訓鍊車 파리에 와 있던 외우 김유후 檢査와 連絡이 닿아 1968年 5月 一旦 파리로 갔다. 

    파리는 學生 示威가 最高潮에 達해 催淚彈이 터지고 돌이 날아다니는 險惡한 狀況이었다. 드골 政權의 退陣을 要求하는 左派 學生들의 示威였는데 프랑스 警察은 참으로 無慈悲한 데다 示威하는 學生을 鎭壓하고 잡아가는 方法이 아주 暴力的이다. 유럽은 美國式 個人主義的 自由主義가 아니라 政府가 統制하는 社會的 民主主義요 規制된 資本主義 社會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파리 韓人 社會 雰圍氣는 동백림(동베를린) 事件으로 뒤숭숭했다. 中央情報部 祕密要員들이 파리에도 潛入해 北韓 쪽과 往來했거나 北韓의 도움을 받은 留學生들을 한밤中에 拉致해 韓國으로 送還했다는 것이다. 獨逸에서는 더 많은 留學生이 類似한 方法으로 强制 送還된 模樣이었다. 事情이 이렇다 보니 小規模면서 가난한 파리 韓人學生社會는 서로를 疑心해 來往이 끊어지는 等 險惡한 雰圍氣였다. 

    유럽 社會는 美國 等 新世界와 달리 外國人 留學生이 學費가 떨어졌다고 해서 허드렛일로 用돈을 벌 수 있는 社會構造가 아니었는데 가난에 시달린 一部 留學生이 北韓 工作員의 誘惑에 넘어가는 境遇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유럽은 一般的으로 社會民主主義가 優勢했으며 北韓 政權의 本質을 잘 몰랐다. 이런 狀況에서 北韓 工作員이 유럽 國家에 浸透해 가난한 韓國 留學生을 誘惑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所聞으로는 北韓 工作員의 誘惑에 넘어간 留學生은 于先 동베를린으로 招待돼 그곳에서 平壤冷麵 等을 待接받고는 北韓을 몰래 다녀오는 境遇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共産國家를 訪問하는 것은 勿論 共産國家의 郵票 等 物品을 사도 國家保安法 違反 是非가 일어나던 時節이었지만 留學生들의 北韓 往來 所聞은 韓人 社會에 조금씩 퍼져가고 있었다. 

    이렇듯 우려스러운 事態를 拔本塞源한다고 中央情報部가 앞장서 電光石火 같은 方法으로 嫌疑者를 밤에 자는 中에 毯요로 싸서 拉致해 와버렸으니 남의 나라의 主權을 無視해도 分數가 있지 이런 國際法上 無知莫知한 일을 저지르고도 無事할 수 있겠는가. 韓國과 여러 유럽 國家의 關係가 數年間 冷却되고 韓國의 國際的 이미지가 몹시 毁損된 일은 모두가 아는 바다.

    總罷業으로 都市 機能 痲痹… 걷고 또 걸어 파리 脫出

    1968년 5월 27일 미국 튤레인대 법대, LL.M. 과정에 입학한 8인. 맨 오른쪽이 나다.

    1968年 5月 27日 美國 튤레인대 法大, LL.M. 課程에 入學한 8人. 맨 오른쪽이 나다.

    나 나름대로 파리 生活에 익숙해갔으나 프랑스의 情勢는 더욱 惡化돼 强力한 全國勞組가 總罷業(General strike)을 決意했다. 總罷業의 威力은 經驗해본 사람이 아니면 想像도 하기 어렵다. 

    總罷業에 突入하면 經濟·公共活動이 停止된다. 飛行機·地下鐵·버스·電車가 멈춰 서고 通信 業務, 卽 便紙配達·電話通話·小包配達이 中斷되며 食料品店, 注油所, 藥局, 新聞·雜誌 販賣所, 淸掃 作業 等 日常生活에 緊要한 서비스가 모조리 中斷된다. 商店이 門을 닫으며 去來가 모두 停止된다. 

    나처럼 外國에서 온 留學生은 總罷業 때 굶어 죽기 딱 좋은 狀況에 處한다. 나는 버티는 게 到底히 不可能하다는 생각에 걷고 또 걸어 파리 市內를 벗어났다. 總罷業은 파리 市內만을 標的으로 한 것이므로 市內를 벗어나자마자 商店에는 菜蔬와 과일은 勿論 新鮮한 빵이 豐盛하게 陳列돼 있었다. 平素에 딱딱해서 잇몸을 다치게 한다고 不平하던 바게트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未曾有의 狀況에서 苦悶을 거듭했다. 英國 케임브리지大 入學 許可를 받아둔 것이 있었다. 프랑스法을 파리에서 工夫하는 것을 抛棄한 채 파리 郊外에서 히치하이크(hitchhike·지나가는 自動車를 얻어 타는 일)로 벨기에 브뤼셀까지 간 다음 런던을 거쳐 케임브리지로 移動할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듣던 大英帝國에 온 것이다. 1968年 9月 末 모처럼 하늘이 맑은 날 入學式을 했다. 케임브리지 市場과 여러 貴賓이 임석해 盛大한 歡迎式을 했다. 貴族인 市場 말씀 中 두 가지가 잊히지 않는다. 新入生 여러분은 두 가지 問題로 고통당할지 모르는데 하나는 나쁜 氣候, 다른 하나는 臨席下新 貴婦人들 앞에서 말씀드리기 뭣하나 그들이 料理하는 형편없는 飮食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以後로 나는 이 말이 얼마나 眞實인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지냈다. 

    살면서 보니 해가 나는 날이 別로 없는 데다 氣候가 變化無雙했다. 英國人의 食事는 다섯 가지 菜蔬와 고기를 삶아 소금을 찍어 먹는 게 다였다. 삶은 감자, 豌豆콩, 당근, 미니洋배추, 브로콜리에 어떻게 익혔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고기 한 點을 곁들여 소금을 뿌린 後 맛없는 빵과 함께 먹는다. 只今은 英國의 飮食이 다양해졌으며 맛도 있지만 그 當時의 飮食은 형편없었다. 

    住居 環境도 水準 未達이었다. 처음 入住한 下宿房은 暖房施設이 全然 없었다. 손바닥만 한 電氣暖爐가 있는데 가운데를 지나가는 가느다란 熱線 한 個가 내는 熱을 反射鏡을 통해 받는 求刑이었다. 問題는 電熱器 뒤에 달려 있는 銅錢 통에 10펜스를 넣으면 10分間 電熱線이 빨갛게 熱을 내다가 꺼지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10分마다 銅錢을 投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유럽 大學과 美國 大學의 差異

    韓國에서 軟式庭球만 알던 나는 푸른 잔디밭에서 치는 테니스가 그렇게 神奇할 수 없었다. 처음 接해본 론(lawn·잔디밭)테니스를 한동안 즐겼고 윔블던에서 열린 競技에도 구경 갔다. 調整 팀에 加入해 熱心히 櫓를 젓기도 했다. 歸國 後 韓國에 紹介가 안 된 調整 普及에 參與하고자 했으나 調整을 모르는 財閥家에서 協會를 組織하고 會長을 맡은 後 職員을 投入해 獨占 運營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文明, 部, 思想 및 學問과 藝術의 蓄積, 傳統과 秩序 意識 等 英國의 엄청난 蘊蓄을 부러워하면서도 日常生活 經驗에서는 큰 失望을 느꼈다. 學生會館에서 食事할 때 飮食을 많이 퍼가는 아일랜드 學生을 向해 온갖 輕蔑의 말을 公公然히 내뱉는 英國 學生들을 보곤 했다. 또한 내가 모처럼 音樂會나 뮤지컬 또는 演劇을 觀覽하고자 英國 女性과 함께 汽車를 타고 런던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行人들이 큰 소리로 어떻게 英國 女性이 有色 人種과 데이트하느냐며 是非를 걸었다. 

    英國人들이 가진 優越感은 참으로 못 말리는 水準이다. 英國의 것이 世界 標準이 되는 것은 當然한 일이고 野蠻的이긴 하나 無視할 수 없는 美國人을 除外하면 自己네가 世界 第一이라는 態度를 서슴없이 보인다. 剛한 優越感, 二重人格的 態度, 人種差別的 言行이 相當히 不便했다. 

    해를 넘기고 케임브리지 生活을 마감했다. 美國 코넬대 法學博士 課程에 入學한 것이다. 코넬大는 뉴욕 市內에서 自動車로 5時間 半假量 걸리는 자그마한 都市 이타카에 있다. 나는 이곳에서 工夫를 참으로 熱心히 했다. 學位 過程을 빨리 마쳐 學費를 節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새도록 論文 資料를 整理했다. 

    暫時지만 英國과 프랑스의 大學을 經驗해본 바로는 大學이 유럽에서 처음 생겨났을 때는 少數의 貴族 子弟를 위한 敎育機關이었던 것 같다. 또한 單純한 知識의 傳授만이 아니라 人格 涵養도 同時에 强調한 前(全)人格的 人材 養成機關이었다. 大學이 少數精銳를 위한 敎育을 提供했으므로 國立임이 當然視됐다. 多數의 유럽人이 美國으로 移民을 온 後 敎育熱이 남다른 移民者 家庭 父母의 要求를 消化하고자 大學이 雨後竹筍 設立됐고 各 大學은 많은 數의 學生을 받아 少數精銳가 아닌 大規模 敎育을 實施했다. 이 過程에서 敎育의 質이 低下되는 것을 막고자 試驗에 따른 學點制, 必修科目 指定, 其他 여러 가지 學士 制限 및 監督 制度를 導入한 것이다. 少數精銳의 自由로운 全人格的 敎育의 傳統을 가진 유럽 大學의 眼目으로 美國의 大學을 보면 同意하기 어려운 面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韓國의 大學은 日帝强占期에는 유럽의 影響을 間接的으로 받은 셈이나 光復 後에는 美國의 壓倒的 影響下에 있다고 봐도 큰 無理는 없을 것이다.

    美國 로펌에 辯護士로 들어가

    나는 學位 工夫를 마친 後 이타카의 自炊房을 떠나 뉴저지州 유니언시티의 高層아파트로 移徙했으며 맨해튼 最南端 월스트리트의 海上法 專門 로펌에 就職했다. 歷史가 오래됐으며 海上 關係의 피고, 卽 海運會社만 專門的으로 代理하는 海上法界 世界 最大 로펌이었다. 

    1970年만 해도 美國에서는 韓國을 잘 몰랐다. 韓國法 關聯 需要나 韓國과의 去來를 위해 韓國人을 雇用하는 事例가 全無했다. 나는 運 좋게도 博士學位 論文이 注目받아 어렵사리 採用됐다. 함께 어울리던 또래의 新出내기 同僚 美國 辯護士들이 只今은 隱退했는데 이따금 交信하거나 聖誕 카드를 주고받는다. 

    로펌에 들어가기 한 해 前 將來의 처父母님이 코넬까지 오셔서 나를 보고 다녀가신 뒤 집안 間 公論이 成事되고 뉴욕에 사는 妻姨母 內外분의 中間 役割로 인해 이화여대 卒業 後 學士 編入해 코네티컷 칼리지를 마친 아내와 約婚했다. 

    나는 大學院과 兵役을 마치고 비로소 海外 留學을 했으므로 늦깎이 留學生에 該當할 것이다. 英語 發音이 原語民처럼 되지 않았으며 情緖的으로도 그들의 社會에 쉽게 同化되지 않았으나 家庭을 이룬 後 留學을 온 분들보다는 훨씬 다채롭게 西歐 文化를 익혔다. 

    1971年 下半期 歸國하자마자 兵役 問題 解決에 着手했다. 君의 經緯 調査를 거친 後 석 달이 채 안 되는 殘餘期間을 服務한 다음 除隊하는 것으로 決定이 나 그대로 施行했다. 除隊한 뒤 韓國에서의 나의 進路에 關해 무척 苦心했다. 

    나는 여러 어른을 찾아뵙고 助言을 求하고자 했다. 먼저 서울法大 恩師님을 여러분 찾아갔다. 大部分의 先生님이 當身들이 敎授로서 處한 여러 가지 經濟的 및 其他 어려움을 들면서 나처럼 進路에 選擇의 餘地가 많은 사람이 구태여 고달픈 學者 生活을 할 必要가 있느냐는 式의 말씀을 異口同聲으로 해주셨다. 

    집안에서는 法曹界나 政府에 出仕하는 것에 對해 贊反意見이 팽팽했다. 留學 後 歸國하고 보니 高等考試 行政과 合格 同期生들이 이미 고을의 郡守를 지냈는가 하면 큰 都市의 警察署長으로 赴任해 重要한 役割을 하고 있었다. 日帝强占期 末期 이른바 ‘拷問 패스’(高等文官試驗 合格)를 하면 어린 나이에도 郡守 發令을 내던 慣行이 繼續됐기 때문인 것 같다. 大學을 갓 卒業한 狀態에서 郡守로 發令받으면 大學生 校服을 입은 채 赴任하기도 해 그런 사람을 日本語로 이른바 ‘쓰메에리 郡守’라고 부르기도 했다. 쓰메에리란 大學生 校服 목둘레 안쪽에 달린 흰 플라스틱으로 된 칼라를 뜻하는 말이다. 

    當時에는 司法試驗 合格者도 아주 어린 나이에 판·검사로 發令받는 일이 大部分이었고 그런 境遇 아무리 어린 판·檢査라도 令監이라고 尊稱을 쓰면서 모시는 時代였다. 當時 90歲가 다 되신 할머니께서는 옛날 생각으로 내가 어느 고을의 郡守나 아니면 檢事로 進出하는 것을 力說하셨다. 父母님은 나의 決定에 따르겠다는 融通性 있는 態度를 보이셨다.

    “공·司法 아우르는 解法體系 構築해보라”

    나는 1971년 11월 4일 결혼했다. 이희승 선생이 주례를 맡았다.

    나는 1971年 11月 4日 結婚했다. 李熙昇 先生이 主禮를 맡았다.

    1971年 11月 4日 함께 歸國한 約婚女 김명신과 타워호텔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無職者 둘이 結婚부터 한 셈이었다. 

    고려대 總長으로 막 赴任해 몹시 바쁘신 丈人어른(南在 김상협 先生)을 뵙고 오랜 時間 進路를 相談했다. 그분은 當身의 意見을 먼저 明確하고 剛하게 開陳하는 便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決定하는 것을 勸奬하면서 當身의 學者 生活에 비춰 敎授로 出發하는 것도 좋겠다는 點과 一旦 法學敎授가 되면 現在 私法 分野에 屬하는 商法傳 第5篇 海上法과 公法 分野에 屬하는 海洋國際法을 아울러 이를 모두 包攝하는 巨大한 解法體系를 構築하는 것을 畢生의 課題로 삼아 學問에 挑戰해보는 것도 意味 있는 일이라고 말씀했다. 韓國이 유라시아大陸 東쪽 끝에 位置한 半島이므로 바다로 나아가야 하며 海運의 重要性을 看過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긴 助言이었다. 丈人께서는 어느 分野를 專攻하더라도 國際的 動向을 綿密히 注視해 分析 및 比較해야 한다는 말씀도 곁들였다. 

    6·25戰爭을 經驗한 내가 어떻게 하면 戰爭 없는 평화로운 世上을 만드는데 寄與할 수 있을까 하는 平素의 생각이 雄大한 解法體系의 建設로 徐徐히 바뀌어가는 過程이었다. 檢察과 法院에서는 操心스럽게 任官 意向을 打診해 왔지만 나는 確信이 서지 않아 漠然한 對答으로 一貫했다. 

    熟考한 끝에 1971年 9月 서울대에 任用申請書를 提出했다. 採用을 樂觀했으나 當時 서울法大 學長은 暫時 생각하는 듯하더니 拒絶 通報를 해왔다. 所聞으로는 一部 法大 敎授님들이 考試 兩科를 合格해 法曹人 資格이 있으므로 法曹界나 關係로 달아날 사람이 아닌지 疑心했다고도 한다. 當時에는 敎授 公開採用 制度가 存在하지 않았다. 學長이 마음만 먹으면 意中 人物을 任用하는 게 不可能하지는 않던 時節이다. 

    當時 서울대 總長이던 한심석 先生님은 내 先親과 오랜 낚시 親舊였다, 副總長이던 민병구 先生님은 나의 丈人과 도쿄大 同門이었으며 문교부 長官이던 민관식 博士는 집안 間 相當한 因緣이 있는 분이다. 時體말로 든든한 ‘빽’이 있으므로 이분들이 힘을 쓰면 나를 밀어 넣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이분들은 서울法大 學長의 決定을 듣고 한결같이 憤慨했다. 한 분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아니 檀君 할아버지 以來 처음으로 考試 量과 合格 後 美國에서 工夫해 博士學位를 받아온 젊은이가 母校 敎壇에 서겠다는데 그런 卒業生을 뽑지 않는다면 都大體 누구를 任用하겠다는 말인가.”

    서울법대 講壇에 서다

    한심석 總長은 나를 따로 불러 失望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學長에게 壓力을 加해 任用하도록 못 할 바도 아니지만 참고 기다리면서 順理대로 일을 處理하는 게 말 많은 學界에서 앞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참으로 感謝하고 思慮 깊은 말씀이지만 얼마나 더 빈둥빈둥 놀아야 하는지 참으로 漠然했다. 

    민관식 文敎部 長官은 朴正熙 大統領의 信任이 두터워 이따금 伴奏를 곁들여 朴 大統領과 저녁食事를 함께 할 機會가 있었다고 듣고 있었다. 朴 大統領은 민 長官의 弄談을 즐기고 그분을 통해 靑瓦臺 밖 世上 돌아가는 事情을 듣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話題가 궁한 나머지 민 長官이 朴 大統領에게 내가 서울法大에 提出한 任用 申請이 拒絶된 事例를 말했다고 한다. 朴 大統領은 서울대의 偏狹하고 固陋한 雰圍氣를 非難하는 反應을 보였다고 한다. 나의 任用 申請 拒否와 關聯한 逸話가 朴 大統領 記憶에 남아 以後에도 내 事例를 言及했다고 한다. 

    1972年 5月 갑자기 機會가 왔다. 나의 任用을 極力 反對하던 서돈각 學長은 篤實한 佛敎 信者였는데, 동국대 總長으로 榮轉하면서 서울법대를 떠나시게 된 것이다. 그後 나의 任用 節次는 一瀉千里로 進行됐으며 後任 學長인 김증한 敎授는 商法 敎授로 採用하겠으나 當場은 民事訴訟法 敎授가 必要하니 民事訴訟法度 함께 가르쳐주길 바란다고 特別히 付託하셨다. 只今과 달리 當時는 法大 敎授 中 司法考試 合格者가 全혀 없었다. 例外 없이 法曹界로 나갔기에 學校에 敎授로 남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동숭동 캠퍼스에 新築된 圖書館 내 硏究室을 配定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學者 生活의 첫出發을 했다. 그해 9月 5日 첫 講義를 成功的으로 마치기는 했으나 學生 數百 名 앞에서 2時間 동안 講義하고 집에 돌아오니 疲困함이 몰려왔다. 바로 그다음 날 첫아기인 재혁이가 태어났다. 동숭동에서 講義를 마치자마자 명륜동에 있던 고려대병원으로 順産한 안사람과 아기를 보러 갔다. 첫 아이의 誕生을 보는 느낌은 戰慄 그 自體였다.

    송상현
    ● 1941年出生
    ● 경기고, 서울대 法大 卒業
    ● 高等考試 行政과(14회)· 司法과(16회) 合格
    ● 美國 코넬대 法學博士
    ● 서울對 法大 敎授
    ● 서울對 法大 學長
    ● 國際刑事裁判所 裁判官
    ● 國際刑事裁判所 所長
    ● 現 유니세프韓國委員會 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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