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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신동아

한 글字로 본 中國 | 윈난省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云 ‘世上의 끝, 새로운 世界’

  • 글 · 寫眞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6-01-11 16: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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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윈난省의 아름다운 自然과 個性的인 文化는 一一이 列擧하기 힘들 程度로 많다. 높은 山과 大峽谷, 江, 湖水, 石淋(石林), ‘民族前市場’이라 할 다양한 少數民族. 西洋과 中國은 이 땅이 ‘奧地’로 남아 있기를 所望하지만, 그건 動物園에 動物을 가두는 것과 다름없는 欲心 아니냐고 윈난은 되묻는다.
    어느 해 1月 末, 윈난省 쿤밍(昆明)에 사는 親舊의 招待를 받았다. 추위에 시달리던 터라 반갑게 應했다. 日氣豫報를 보니 韓國은 맑은 날 最高氣溫이 5℃를 넘을까 말까 한데, 쿤밍은 最低氣溫이 6℃, 最高氣溫은 20℃를 넘나들었다. 韓國의 가을 날氏니까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지.
    그런데 웬걸? 쿤밍은 意外로 쌀쌀했다. 낮은 괜찮았지만, 밤이 問題였다. 南中國은 暖房 없이도 겨울을 버틸 만하기에 暖房을 全혀 하지 않는다! 北方은 暖房을 잘하기에, 밖은 추워도 안은 따뜻하다. 南方人과 結婚한 北方人들이 春節에 南方집이 춥다며 가기 싫어하는 心情이 理解가 됐다. 그래도 따사로운 낮은 참 좋았다. ‘永遠한 봄의 都市(春城)’라는 別名답게 날씨는 和暢했고 到處에 꽃이 滿發했다.



    꿈과 浪漫의 舞臺

    윈난(雲南)省의 略稱은 ‘구름 韻(云, 繁體는 雲)’字다. 아득히 먼 구름보다도 더 南쪽에 있는 곳. 俗世를 벗어난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는 곳. 꽃구름 피어오르는 南쪽 땅(彩雲之南). 윈난省은 中國人에게 꿈과 浪漫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小說 속에서 幻想적인 舞臺로 곧잘 登場한다. 그래서 諸葛亮은 獨擅(毒泉)을 넘고 猛獸部隊와 등甲病을 擊破해 남만(南蠻)을 平定했고, 代理단씨(大理段氏)는 節稅무공 六脈身檢(六脈神劍)과 日陽地(一陽指)를 驅使하며, 誤獨轎(五毒?)의 먀오족은 猛毒을 能手能爛하게 다룬다.
    윈난省은 地質學的으로 유라시아板과 引渡版이 衝突한 境界地帶다. 히말라야부터 바다로 가는 中間에 있어 海拔 76.4m에서 6740m까지 다양한 地形이 펼쳐지고, 그 위에 北回歸線이 지나간다. 四時四철 어느 때고 熱帶부터 寒帶까지 모든 氣候를 만날 수 있다. ‘山 하나에 四季節이 다 있고, 십리만 가도 날씨가 다르다(一山有四節,十里不同天)’고 할 만큼 윈난의 氣候는 變化無雙하다.
    雲貴高原(雲貴高原)에 發達한 代表的인 都市는 省都 쿤밍과 大理國의 根據地 다리(大理)다. 두 都市는 山과 湖水를 끼고 있다는 點에서 비슷하다. 北쪽의 山은 매서운 北風을 막아주고, 南쪽의 湖水는 뜨거운 南風을 식혀준다.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따뜻해서, 1年 내내 봄처럼 꽃이 피니 農事짓기도 좋다. 巨大한 湖水는 깨끗한 물과 豐富한 물고기를 膳賜한다.
    살기 좋은 만큼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들었다. 쿤밍의 뎬츠(?池) 湖水 附近에서 發見된 위안머우(元謀)原因은 約 200萬 年 前에 살았을 것으로 推定된다. 그 有名한 베이징原人의 生存 推定 時期는 70萬 年 前에 不過하다. 윈난의 歷史가 얼마나 깊은지 斟酌할 수 있다.
    윈난은 오랜 歲月 中國과 影響을 주고받으면서도 獨自性을 지켜왔다. 春秋戰國 末期 初場王의 後裔 將校(莊?) 將軍이 윈난을 征伐했으나 津이 醋를 치는 바람에 歸國할 수 없었다. 이에 將校는 ‘옷차림을 바꾸고 그곳 風俗을 따라 그들의 우두머리가 됐다.’(사마천, ‘詐欺’, 서남이列傳(西南夷列傳)). 中國의 將軍이 土着勢力을 征服한 뒤 現地 文化를 받아들이고 指導者가 된 것은 衛滿朝鮮, 趙佗의 南越과 類似한 事例다. 將校는 前王(?王)을 自稱했다. 쿤밍 一帶를 指稱한 ‘땅 이름 전(?)’자는 윈난의 또 다른 略稱이다. 戰國時代 末期부터 헤아려봐도 2000年이 넘는 悠久한 歷史를 담은 이름이다.



    鬪爭과 叛亂의 땅

    한 武帝와 諸葛亮이 南만을 征伐했을 때도 土着支配層을 除去하지 않고 自治權을 認定했다. 三國志 팬들은 諸葛亮이 윈난의 우두머리 맹획을 일곱 番 잡고 일곱 番 풀어줬다는 七縱七擒(七縱七擒)李 眞짜냐 아니냐 論爭하곤 한다. 그러나 核心은 諸葛亮의 宥和政策에 있다. 오는 老鍊한 社섭이 죽자마자 敎主를 占領하는 等 積極的인 征服政策을 폈고 現地人들의 激甚한 反撥을 샀다. 反面 諸葛亮은 蜀漢이 絶對 優位임을 現地人에게 刻印시키면서도, 管理 派遣도 駐屯軍 配置도 없이 곱게 물러난다. 오히려 現地人들의 信望을 얻던 맹획을 御史中丞(監査院 事務總長級)이란 要職에 앉히고 윈난의 自治權을 保障했다.
    윈난의 獨自的 發展은 唐宋時代에 絶頂에 이른다. 250年 南朝(南詔)와 300年 大理國 等 500年 넘게 獨立王朝가 이어졌다. 唐나라와 吐蕃 사이에서 줄타기 外交를 하며 黨 玄宗의 10萬 大軍 遠征을 두 次例나 擊破하는 等 만만찮은 力量을 誇示했다. 佛敎가 隆盛하며 윈난의 代表的 文化財인 法系統令名度僧榻(法界通靈明道乘塔)을 세우고 固有 文字를 만드는 等 文化의 꽃도 활짝 피었다.
    그러나 無敵의 몽골軍을 이기지는 못했다. 쿠빌라이는 南宋을 包圍 攻擊하려 大理國을 멸망시켰다. 원臺에 이르러 쿠빌라이 서자 血統의 王이 윈난을 다스렸지만, 代理 단씨의 影響力은 如前히 남아 있어 聯合政權的인 面을 보인다. 元나라가 沒落하며 윈난은 다시 獨立을 꿈꿨지만, 明 太祖 朱元璋은 윈난의 銀鑛山을 貪내 윈난을 武力으로 服屬시켰다. 이때부터 漢族 移住民이 많아지고 윈난은 中國과 一體化한다. 朝鮮 開國 때만 해도 獨立性을 維持하던 地域이 結局 中國에 編入된 것이다.




    하지만 名 以後에도 윈난의 獨特한 自立性이 完全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淸楚, 淸末 윈난은 叛亂의 據點이 된다. 평서王 吳三桂는 윈난에서 軍士를 일으켜 瞬息間에 中國 大陸의 折半을 휩쓸었다. 韻귀·陽光·幅巾 세 地域의 叛亂, 卽 삼번의 亂(三藩之亂)은 康熙帝에게 最大의 試鍊을 안겼다. 淸末에는 國政이 紊亂해지자 윈난 亦是 苛酷한 土地稅와 금은광 紛爭에 시달렸다. 回族 두문수(杜文秀)는 베이징에 가서 歎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回族을 中心으로 叛亂을 일으켰다. 윈난 全體도 掌握하지 못한 채 끝나기는 했지만 두문수는 술탄을 自處하며 16年 동안 回族 獨立國을 運營했다.
    抗日戰爭 時期 장제스는 충칭을 臨時 首都로, 윈난을 後方 支援基地로 삼았다. 後方基地의 任務 中 하나는 人材 養成이다. 西南聯合大學은 避難온 베이징大, 칭화大 等 當代 最高 名門大 敎授와 學生이 한자리에 모인 人材의 搖籃이었다. 雲南陸軍講武黨은 中國의 주더·예젠잉, 韓國의 이범석, 北韓의 최용건, 베트남의 報應우옌잡 等 4個國의 國防部 長官과 많은 戰爭英雄을 輩出했다.



    윈난은 그대로인데…

    윈난의 歷史는 이처럼 만만찮은 鬪爭의 記錄으로 가득하다. 멀고도 險한 邊方, 사나운 異民族, 風土病 等에 對한 重原因의 두려움은 小說에 赤裸裸하게 投影됐다. 닿기만 해도 죽는 獨擅(毒川), 槍으로 찔러도 죽지 않는 等甲兵. 野蠻人들은 猛獸를 부리고, 誤讀敎는 거미, 지네, 두꺼비, 뱀, 全蠍 等 奇怪망칙韓 動物의 毒을 쓴다. 邪惡한 毒을 쓰는 윈난 먀오족은 光明正大한 劍法과 拳法을 쓰는 중원의 名文政派와 根本的으로 다르다.
    그러나 21世紀 索莫한 現代化에 시달리는 中國은 思惟의 轉換을 겪는다. 윈난은 잃어버린 人間味와 破壞된 自然을 되찾고 힐링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이에 따라 野蠻은 때 묻지 않은 純粹함으로, 理解 못할 差異는 신비로움으로, 獨擅으로 象徵되던 거친 環境은 깨끗한 自然으로 이미지가 180度 變했다.
    實際로 윈난의 아름다운 自然과 個性的인 文化는 一一이 列擧하기 힘들 程度로 많다. 海拔 5000m가 넘는 위룽쉐산(玉龍雪山)과 하바쉐산(哈巴雪山), 그 사이에 낀 18km의 大峽谷 후탸오샤(虎跳峽), 히말라야의 마지막 봉우리 蒼山(蒼山), 아름다운 湖水 얼하이後(?海湖)와 壘구후(瀘沽湖). 유네스코 世界自然遺産人 三綱竝流(三江?流) 地域에 나란히 흐르는 세 江은 長江의 源流 진사강(金沙江), 메콩江의 源流 亂唱江(蘭滄江), 中國과 미얀마를 貫通하는 累强(怒江)이다.
    多彩로운 카르스트 地形은 槍劍이 堵列한 듯한 石淋(石林), 巨大한 地下世界를 彷彿케 하는 口香洞窟을 빚었다. 大理石 文樣이 한 幅의 山水畫를 보는 듯해 中國人은 말한다. “베이징에 가면 萬里長城에 올라야 하고, 試案에 가면 진시황릉의 寶物을 봐야 한다. 상하이에선 사람을, 쑤저우·항저우에선 女子를 구경해야 한다. 그리고 윈난에서는 돌을 鑑賞해야 한다.”
    變化無雙한 氣候와 複雜한 地形은 다양한 植生을 낳았다. 또한 ‘民族前市場’이라 불릴 만큼 많은 少數民族이 살고 있어 다채로움을 더한다. 윈난의 500年 中心地 다리엔 바이族,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都市 里長엔 나시族, 壘구후엔 母系社會의 傳統을 이어가는 某숴족, 라오스 接境地帶 시솽반나엔 타이족, 다랑논으로 有名한 위안量엔 하니族이 산다.
    하지만 이들이 옛날에는 없었나? 天下 征服을 위해 웬만한 風光은 다 봤을 법한 쿠빌라이조차 “皇帝가 아니라면 윈난王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왜 最近에야 脚光을 받고 있는가. 윈난은 예전과 다름없되 中國人의 視線이 變한 것이다.



    武陵桃源의 그림자

    産業化에 신물 난 西洋人들이 오리엔털리즘의 視線으로 東洋을 憧憬했듯이, 現代化한 中國人은 윈난을 憧憬한다. 이런 視角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샹그릴라다. 샹그릴라(Shangri-La)는 元來 小說家 제임스 힐턴이 ‘잃어버린 地平線’에서 創造한 假想의 空間이다. 假想의 空間이기에 實存 與否를 따질 수도 없건만, 中國은 大大的인 探査隊를 派遣하더니 윈난의 중뎬(中甸)이 바로 샹그릴라라며 이름마저 샹距離라(香格里拉)로 고쳐버렸다. 金允植 서울대 國文科 名譽敎授는 일찍이 武陵桃源이라는 멋진 理想鄕을 創造해낸 中國人들이 어째서 “그 좋은 自己 것을 헌신짝 模樣 버리고, 한갓 케임브리지 大學生이 지어낸 ‘샹그릴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라고 歎息했다. 이제 俗世에서 벗어난 理想鄕 샹그릴라는 團體觀光客들로 바글대는 觀光地로 變했다.
    그러나 現地人들이 돈에 靈魂을 팔아먹었다고 慨歎하기도 힘들다. 중뎬은 落後한 奧地 마을로 隣近 新都市로 人口가 빠져나가 텅빈 幽靈마을로 變할 危機에 있었다. 샹거리라로 改名하고 觀光地로 變質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없어질 뻔한 마을이 華麗하게 復活한 셈이다.


    商業的인 샹거리라가 마뜩지 않던 美國 作家 마크 젠킨스는 眞正한 샹그릴라를 찾겠다며 觀光客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숙한 奧地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만난 스너는 17歲 少女이지만, 3個月 된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다. “한쪽 팔로는 아기를 안고 젖까지 먹이면서 同時에 火爐에 땔감을 넣고, 밥이 잘되고 있는지 確認하고, 야크버터車를 저으며, 감자껍질을 欄干 아래 돼지들에게 던져주고, 설거지를 하고, 고추를 고르면서 얘기까지 나눈다.” 깜깜한 새벽부터 過重한 勞動에 시달리고, 아기는 正體不明의 病을 앓고 있다. 스너는 마크의 샹그릴라를 떠나 샹距離라 時에 가고 싶어 했다. 또래 親舊들과 學校에 다닐 수 있는 곳, 週末에는 親舊의 팔짱을 끼고 쇼핑할 수 있는 곳으로.
    東部 티베트 職業訓鍊所를 運營하는 濠洲國立大의 벤 힐만 敎授는 東洋에 對한 西洋人의 幻想이 얼마나 利己的인지를 꼬집었다. “經濟開發 德分에 傳統文化가 關心을 받기 쉽지만, 이런 關心이 結局은 文化를 歪曲시킨다. 一種의 文化 엘리트主義다. 오지 旅行을 즐길 수 있는 少數의 運 좋은 富者들이 動物園에 動物을 가두듯 地域色 담긴 볼거리가 保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시族 女人을 아내로 맞는 것이 노새 열 마리를 사는 것보다 낫다’는 里長 俗談이 있다. 그만큼 나시族 女性들이 過重한 勞動에 시달린다는 말인데, 이런 걸 傳統文化니 美風良俗이니 말하기도 힘들다.



    東南亞로 가는 關門

    2013年 1月, 泰國 치앙마이에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다. 平素처럼 느긋하게 아침 먹고 散策하다가 ‘云’ 番號版을 단 윈난 自動車들이 汽車놀이하듯 줄지어 道路를 달리는 것을 봤다. 泰國은 ‘旅行者의 天國’인 만큼 前에도 中國 觀光客들이 오긴 했지만 2012年 末부터 부쩍 많아졌다. 泰國을 背景으로 한 中國 코미디 映畫 ‘로스트 인 타일랜드(人再?途之泰?)’가 2012年 12月 12日 開封해서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기 때문이다. 映畫 한 篇이 히트하자마자 中國人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直感했다. ‘다음에 다시 泰國에 오면 只今과는 달라져 있겠지.’
    슬픈 豫感은 왜 틀리는 法이 없을까. 2014年 12月 다시 치앙마이를 찾았다. 채 2年도 안 되는 사이 치앙마이 風景은 宛然히 달라졌다. 거리 곳곳마다 中國人을 위한 旅行社, 商店들이 들어섰다. 작은 露店들도 中國語 牌말을 놓았다. 前에는 英語가 公用語였으나 어느새 中國語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中國人들이 사랑하는 欠궈 食堂도 곳곳에 보였다. 露天舞臺의 泰國 歌手는 ‘첨밀밀(?蜜蜜)’을 불렀다. 泰國人이 中國人을 썩 좋아하는 便은 아니지만, 亦是 紙匣 앞에 壯士 없다. 2011年에서 2013年 사이 泰國 風景은 別로 變하지 않았지만, 2013年에서 2014年 사이에는 크게 달라졌다. 中國이 움직이기 始作하면 周邊國의 風景까지 變한다. 中國이 무섭긴 무섭다.
    중원의 觀點으로 보면, 윈난은 世上 끝에 있는 邊方이지만, 實狀 새로운 世界가 열리는 곳이다.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國境이 맞닿아 있고, 印度도 멀지 않다. 다양한 사람과 나라가 만나는 곳이라 일찍부터 交易이 發達했다. 西南 실크로드는 아시아의 兩大 大國인 中國과 印度를 이었고, 차마高度(車馬古道)는 윈난의 푸얼차와 티베트의 名馬를 交換했다.
    한 武帝가 윈난을 征伐한 것도 交易 때문이다. 한 武帝는 匈奴를 牽制하기 위해 壯健을 大月氏(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로 派遣했다. 壯健은 現地에서 鏃의 옷감을 發見하고 神奇하게 여겼다. 匈奴 때문에 交易路가 막혔는데 어떻게 中國 物件이 흘러들어왔을까. 알고 보니 윈난이 쓰촨과 印度를 잇는 中繼貿易地였고, 다시 印度에서 大月氏까지 緋緞이 흘러간 것이었다. 한 武帝는 西南 실크로드를 掌握하기 위해 윈난을 征伐한다.
    帝國主義 時代 윈난의 價値는 더더욱 커졌다. 東南아시아를 掌握한 프랑스는 윈난을 中國 進出의 발板으로 여기고 베트남 하노이와 윈난을 連結하는 前月(?越) 鐵道를 建設했다. 鐵道 開通式을 본 윈난陸軍講武當 校長은 學生들에게 말했다. “前月鐵道가 開通됐으니 이제 윈난은 프랑스 勢力 範圍 안에 들어가 災難이 코앞에 닥쳤다. 모두들 오늘을 잊지 마라.”


    아이러니는 繼續된다

    抗日戰爭 時期 英國은 引渡·미얀마에서 윈난으로 補給品을 支援했다. 이때 建設된 것이 미얀마의 라시오부터 쿤밍까지 長長 1000km에 達하는 버마 로드다. 16萬 名의 中國人이 投入돼 별다른 建設裝備度 없이 맨몸으로 山을 깎아 만들었다. 日本이 東南亞를 掌握해 陸路가 遮斷되자 美國은 人道에서 쿤밍까지 貨物機로 普及을 支援했다.
    國共內戰 時期 윈난의 國民黨 敗殘兵들은 미얀마를 거쳐 泰國 北部의 山골로 逃亡쳤다.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은 痲藥을 栽培했다. 이들이 만든 泰國의 中國人 마을 도이 매살롱은 痲藥 産地가 됐고, 이들이 기른 少年 裝置푸(張記福)는 골든 트라이앵글을 支配한 痲藥王 쿤사가 됐다. 後날 泰國 王室은 强勁策과 懷柔策을 竝行해 痲藥商을 討伐하는 한便, 痲藥밭을 綠茶밭으로 바꾸게 했다. 阿片戰爭으로 亡한 中國을 되살리려던 國民黨의 正規軍이 痲藥商人이 됐고, 痲藥으로 誕生한 마을은 오늘날 綠茶마을로 名聲을 떨친다. 어떤 狀況에서든 살아남으려는 人間의 奮鬪는 歷史의 아이러니를 낳는다.
    歷史의 아이러니는 繼續된다. 近代 帝國主義 列强은 東南亞에서 中國으로 進出하기 위해 鐵道를 놓았지만, 現代에는 中國이 東南亞로 進出하기 위해 東南亞에 길을 닦고 있다. “길이 있으면 사람, 物件, 돈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기” 때문이다. 道路, 鐵道뿐만 아니라 電力網, 石油·가스 파이프라인 等의 인프라까지 設置하고 있다. 윈난과 싱가포르를 잇는 軸을 中心으로 삼고 메콩江 流域과 광시省 베이部만(北部灣) 經濟圈을 兩 날개로 삼는 一蹴兩翼(一軸兩翼, One Axis, Two Wings) 戰略이 推進 中이다. 윈난-미얀마 交通網 擴充에도 功을 들인다. 미얀마 回廊을 建設하면 印度洋이 直接的인 勢力圈으로 들어오고 南中國海로 迂廻하던 物流費用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윈난과 東南亞의 連繫가 剛해짐에 따라 東南亞 進出을 노리는 많은 企業이 쿤밍에 자리 잡고 있다.



    中華主義의 氣막힌 氣象

    윈난의 急速한 開發은 周邊 國家들의 環境마저 크게 바꾸고 있다. 泰國 北部 반팍잉 마을의 住民들은 中國 日氣豫報를 본다. 中國 南部에 暴雨가 내려 中國 댐에서 물을 放流하면 自己네 마을이 沈水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元來 漁業으로 먹고살던 마을이지만 中國 댐 建設로 流量이 줄어들자 漁船을 팔고 옥수수와 담배를 栽培하고 있다.
    윈난의 亂唱江(蘭滄江)은 바로 東南亞의 젖줄 메콩江이다. 中國, 미얀마, 泰國,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等 6個國을 흐르는 메콩江은 9000萬 住民의 生存과 直結된다. 中國은 20年間 亂唱江에 7個 大型 댐을 建設했고, 5個 댐이 追加 建設 中이다. 유엔環境計劃(UNEP)은 “中國의 댐 建設로 메콩江의 流量과 흐름이 變化하고 水質 惡化와 生物 多樣性 破壞가 일어날 可能性이 크다”라고 警告했다. 中國의 東南亞 元祖는 메콩江 流域國의 反撥을 撫摩하는 側面도 있다.

    中國의 東南亞에 對한 影響力 擴大는 果然 經濟에만 머무를까. 2014年 7月 27日, 서울 신촌에서는 泰國의 송크란을 본뜬 물銃祝祭가 열렸다. 신촌 거리에 모인 사람들과 서로 물을 쏘아대고 맞아가며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고 재미있게 보냈다. 中國의 SNS인 웨이신 펑유취안(微信朋友圈)에 “신촌 물銃祝祭는 泰國의 捕收劑(潑水節)를 模倣하긴 했지만 꽤 재밌었다”고 글을 올리니, 中國 親舊 한 名이 卽刻 答을 달았다. “泰國의 捕收劑가 아니라 타이족(泰族)의 捕收劑野!” 中國人에게 捕收劑란 시솽반나에서 타이족들이 물을 뿌리는 祝祭로 中國 少數民族의 文化다.
    참으로 떨떠름했다. 勿論 一理는 있다. 송크란은 南中國에서 東南亞 北部 一帶의 住民들이 第一 더운 4月에 물을 뿌리며 노는 行事다. 타이족이 中心인 泰國에서 가장 크고 有名하게 벌어지기는 하지만, 타이족은 윈난, 미얀마, 라오스 等地에도 퍼져 살고 이들이 모두 송크란을 즐긴다. 따라서 송크란이 泰國만의 文化는 아니다. 한데 그렇다고 中國이 송크란의 ‘領有權’을 主張하는 건 더욱 웃긴다. 타이족은 中國 少數民族 中에서도 存在感이 弱한 便인데, 이들을 빌미로 捕收劑는 中國 것이다?
    少數民族도 곧 中國人이니, 이들의 文化도 다 中國文化라고 主張하는 中華主義의 氣像은 正말 氣가 막힌다. 아리랑이 中國 少數民族인 朝鮮族의 文化라며 國家文化遺産으로 指定한 中國의 行步가 떠올랐다. 中國이 이웃 國家에 進出할 때 地域住民과 同族인 少數民族은 確實히 훌륭한 尖兵이 되겠지.



    里長의 女人, 아름다운 밤

    複雜한 속事情이야 어떻건 윈난은 中國에선 確實히 때가 덜 묻은 곳이다. “生活이 불만스럽고 只今 있는 곳이 싫어지면 다리로 가요”라는 ‘다리로 가요(去大理)’ 노랫말처럼 많은 中國人이 윈난을 찾는다. 더러는 코믹 映畫 ‘神話루팡(心花路放)’처럼 로맨스를 꿈꾸기도 하면서. 윈난 사람들은 淳朴하고 旅行客들도 이곳에서는 마음이 열려 로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因緣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어땠냐고? 쿤밍에서 다리로 가는 汽車 寢臺칸에서 里長의 姊妹를 만났다. 언니가 妊娠 3個月인데, 보다 正確한 診察을 받기 위해 省都 쿤밍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中이었다. 동생은 里長에 오면 꼭 連絡하라고 連絡處를 줬다. 다리 旅行 後 里長에 가서 그를 다시 만났다. 多少 늦게 나온 그는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하루 終日 里長 곳곳을 案內했고 저녁에 바에서 麥酒를 함께 마셨다. 다리 特産 麥酒인 ‘風化雪月(風花雪月)’이었다. 시원한 바람, 향기로운 꽃, 새하얀 눈, 아름다운 달. 아마 世上에서 가장 浪漫的인 麥酒 이름이리라. 바에는 歌手가 있었는데 손님이 노래하고 싶다면 伴奏를 해주기도 했다. 그는 류뤄잉의 ‘나중에(後來)’를 부르고는 내게 말했다. “딱히 오빠 때문에 부른 거 아냐. 그냥 이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야.” 누가 뭐랬나.
    中國語를 모를 때였다. 노래 歌詞처럼 나중에, 正말 나중에야 歌詞의 뜻을 알았다. “나중에야 난 마침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안타깝게도 當身은 이미 멀리 떠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렸죠. 나중에야 마침내 눈물 속에서 깨달았어요. 누군가는 一旦 놓치면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걸.”
    오랜만에 歌詞를 吟味하며 抒情的인 노래를 들으니 旅行의 追憶, 아름다운 里長의 밤, 多情하던 그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윈난에서는 돌을 봐야 한다고? 윈난에서도 봐야 할 것은 사람이었다. 만나야 할 것은 사람이었다.




    金 龍 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W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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