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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少女 ‘生存鬪爭’ 世界人 가슴 적시다|신동아

<새 연재=""> 新東亞-未來硏 共同企劃 | 未來韓國 靑年列傳

脫北少女 ‘生存鬪爭’ 世界人 가슴 적시다

人權運動家 이현서

  • 구해우 | 未來戰略硏究院 院長 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6-01-05 17: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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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일곱 살 때 鴨綠江을 건넜다. 갖은 苦難을 겪으면서 일곱 個의 이름을 가졌다. 10年 넘는 時間을 바쳐 家族을 救해냈다. 가녀린 女人의 파란 많은 서바이벌 스토리에 聽衆과 讀者는 萬感이 가슴에 사무쳤다.
    여기, 世界가 注目한 大韓民國 靑年이 있다. 이현서(35). 2013年 2月 28日 美國 캘리포니아 州 롱비치에서 열린 TED 講演에 演士로 나서면서 샛별로 떴다. 韓國보다 西歐에서 더 有名하다. 2015年 7月에는 ‘The Girl with Seven Names(일곱 個의 이름을 가진 少女)’라는 題目의 英文 著書를 냈다.
    TED는 世界 各地의 專門家와 實踐家가 아이디어를 나누는 知識의 饗宴. TED의 슬로건은 ‘Ideas Worth Spreading’이다. ‘퍼뜨릴 만한 價値가 있는 아이디어’를 世上에 알리는 게 目標. 데이비드 캐머런 英國 總理 같은 頂上級 指導者를 비롯해 映畫監督 제임스 캐머런, 料理師 제이미 올리버 等 多種多樣한 實踐家와 專門家가 TED 演壇에 올랐다.
    TED 講演을 現場에서 들으려면 入場料 4400달러(520萬 원)를 내야 한다. 1000名 남짓한 人員만 入場할 수 있다. ‘퍼뜨릴 만한 價値가 있는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리는 게 目標인 만큼 홈페이지(www.ted.com)에 講演 動映像을 올린다. 累積 視聽 人員이 10億 名을 넘었다. 이현서의 講義는 700萬 名이 봤다. 꾸미지 않은 眞實이 世界人의 心琴을 울렸다. ?
    ▼ TED 講演을 통해 賢壻 氏를 알게 됐어요. 스피치가 印象 깊었습니다.
    “와우~ 感謝합니다. TED에 자주 들어가세요? TED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英語 工夫하는 大學生은 다 알죠.”



    “막 떨려서, 心臟이 쿵쿵쿵”

    이현서는 脫北人이다. 1997年 鴨綠江을 건넜다. 韓國에는 2008年 入國했다. 動映像의 英語 액센트처럼 韓國語 發音이 또박또박하다. 말하는 套가 씩씩하면서도 輕快하다. ?
    ▼ TED는 靑年에게 꿈의 舞臺입니다. 어떻게 講演하게 됐나요.
    “사람들이 第一 궁금해하는 게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TED 舞臺에 올라갔냐는 거예요. 支援하거나 提案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主催 側에서 推薦해야 하거든요. 運이 엄청 좋았던 게, TED 歷史上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열었어요. 2012年 核安保頂上會議 때 서울 仁寺洞에서 닉 클레그 當時 英國 副總理를 만났습니다. 그분과 밥 먹는 게 TV에 나왔나 봐요. TED 側에서 뉴스를 보고 오디션 對象으로 推薦했습니다. 演壇에 오르기까지 1年이 걸렸어요. 1次, 2次, 3次 오디션. 첫 오디션은 서울 삼성동에서 聽衆 500名을 相對로 했습니다.”
    ▼ 豫選인 셈이네요.
    “네. 豫選 映像이 TED 웹사이트에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動映像을 본 後 ‘推薦’도 누르고, 이 사람 講演을 TED에서 듣고 싶은 理由를 적어냅니다. 最終 結果, 제가 1等을 했다고 해요. 놀랍죠? 講演을 잘해서가 아니라 콘텐츠 德分인 것 같아요. 서울에 있는 外國人 知人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르면서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는 直接 겪은 스토리를 날줄, 北韓 人權 問題를 씨줄로 삼아 講演을 構成했다.
    ▼ TED 講演이 賢壻 氏 人生에 어떤 變化를 줬나요. ?
    “轉換點!”


    ‘다른 宇宙’에서 온 女人

    ▼ 起立拍手度 받았죠.
    “只今도 떨려요. 그렇게 큰 舞臺인지 몰랐어요. 못하겠더라고요.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 안 나는 거예요. 아, 眞짜 世界的 亡身을 다 當하겠구나, 막 떨려서, 心臟이 쿵쿵쿵. 英語가 完璧하지 않아 스크립트를 桶으로 외웠거든요. 勇氣를 냈어요. 아, 내가 이 자리에 나를 위해 서 있는 게 아니라 北韓 사람들을 위해 代表로 서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렸죠.
    그런데 하나도 안 까먹고 그대로 다 뱉은 거예요. 反應이, 와…충격이었어요. 1000名 넘는 聽衆이 平凡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앨 고어 前 美國 副統領을 비롯해 엄청나게 有名한 사람들이 마구 안아 줬어요. 起立拍手度 眞짜 오래 받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稱讚해줘서 ‘Thank you’를 하도 많이 말했더니 입이 벌렸는지 닫혔는지 感覺이 없어질 程度였어요.”? ?
    이현서의 12分 講義는 聽衆에게 사무치는 感情을 느끼게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아프리카에서도 메시지가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도 ‘映像을 잘 봤다’는 反應이 왔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곳은 엄청난 紛爭地域이잖아요. 中國에서도 應援 메시지가 많이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울렁했어요. 中國人과 脫北者의 關係가 좀 그렇잖아요. 안 좋았던 記憶이 많죠. 脫北者들이 傷處를 입거든요, 中國에서. 中國人은 無條件 脫北者의 ‘안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우리의 現實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뿌듯한 點은 TED를 통해 最初로 北韓 人權 問題를 全 世界人에게 알렸다는 겁니다. 나쁜 點은 對人忌避症 비슷한 게 생겼다는 것. 異常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못 만나겠더라고요. 이 사람이 或是 北韓 스파이는 아닌지, 그런 게 좀 두려워서요.”
    2015年 12月 10日 오준 유엔大使가 유엔 安全保障理事會 會議場에서 各國 大使와 傍聽客의 가슴을 적시는 演說을 했다. 10代에 北韓을 脫出해 어머니와 동생을 救出하는 데 10年 넘는 時間을 바친 脫北 女性의 사무치는 事緣을 紹介했다. 吳 大使는 演說에서 ‘The Girl with Seven Names’의 한 대목을 引用했다.? ?
    ‘北韓을 떠나는 것은 그저 어떤 나라를 떠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다른 宇宙로 떠나는 것과 같다. 卽 내가 얼마나 멀리 떠나느냐에 相關없이 나는 그 重力으로부터 眞正 自由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吳竣 大使와는 페이스북 親舊”라면서 웃었다. ?
    ▼ 아마존의 子會社인 굿리즈가 選定하는 ‘2015 굿리즈 초이스’ 手記와 自敍傳 部門에 候補로 올라 最終 3라운드까지 進出했더군요.
    “12月 2日 굿리즈 어워드 最終 結果가 나왔는데요. 아쉽게도 20個 候補作 中 4位에 올랐습니다. 1位와 4位 得票 差가 크지 않아 아쉽기는 해요.”? ?





    “돌아오지 마”

    ▼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다른 脫北者가 낸 冊들과는 性格이 다르던데요. ?
    “只今껏 脫北者가 낸 冊들은 大部分 익스트림(extreme)韓 쪽이잖아요. 政治犯 收容所 아니면 목숨을 건 脫出, 뭐 그런 式이죠. 말씀한 대로 제 冊은 角度가 달라요. 北韓에서는 出身成分이 重要한데, 저는 運이 좋았어요. 돌아가신 아빠 職業이 ○○이었거든요. 苦生을 別로 안 하고 자랐습니다. 鴨綠江을 건넌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새로운 世界가 궁금해서였습니다. 中國의 親戚집을 찾아간 것이었거든요.
    中國에서 北韓의 實體를 알게 되면서 衝擊을 받았죠. 冊을 통해 ‘왜 우리가 洗腦를 當할 수밖에 없었는지’ 디테일하게 풀고자 했습니다. 北韓이 獨裁國家라거나 核武器를 開發하는 나라라는 건 世界人이 다 알아요. 冊을 읽은 분이 ‘왜 抵抗하지 않고 奴隸처럼 사는지에 對해 答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가녀린 女人이 온몸으로 겪은 ‘서바이벌 스토리’다. ?
    “제가 體軀는 작은데, 氣가 좀 센 거 같아요. 生存能力이 剛한 것 같아요. 오랫동안 家族과 生離別을 했습니다. 家族에 對한 끊임없는 사랑, 犧牲精神 같은 게 讀者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中國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탈출시킨 것은 家族의 목숨을 건 行動이었어요. 只今 생각해보면, 그것도 運이 좋았습니다. 同時代에 우리 家族 같은 삶을 산 이들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스릴러가 韓國말로는 뭐예요? 스릴러처럼 읽었다는 讀者가 많아요. 픽션 같은 논픽션이라고나 할까요.”
    1997年, 열일곱 살 겨울放學 때 鴨綠江을 건넜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딸과의 첫 通話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지 마.”
    “鴨綠江을 건너 中國의 親戚집에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北韓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어머니에게 電話를 했죠. 北韓에서는 選擧 前에 반드시 人口調査를 해요. 投票率이 無條件 100%여야 하거든요. 鴨綠江을 건너자마자 人口調査가 있었나 봅니다. 江을 건너는 것을 누가 봤다고도 해요. 北韓은 서울 같지 않고 洞네가 宏壯히 작아요. 이웃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죠. 所聞이 쫙 퍼진 겁니다. 1997年만 해도 雰圍氣가 只今과는 달랐어요. 江 건넌 게 알려지면 家族 모두 政治犯 收容所나 監獄에 가는 걸로 알고 엄청 떨었던 거죠. 그래서 엄마가 失踪申告를 했어요. 안 나타나는 게 家族이 狀況을 謀免하는 方法이었죠.” ?


    유엔 安保理 非公開 證言

    ▼ 中國에서 困境을 겪으면서 여러 個의 다른 이름을 갖게 된 事緣이 궁금합니다.
    “脫北者가 中國에서 산다는 게 힘듭니다. 숨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어요. 이름을 자주 바꾸게 된 理由는요, 누군가가 申告를 해 公安에 붙잡혔습니다. 中國 親舊 中 하나였겠죠. 私服 입은 男子가 아우디를 끌고 찾아왔습니다. 中國이 참 腐敗한 나라여서 公安도 ‘級’李 되면 아우디 타고 다녀요. 웨이트리스로 일했는데, ‘너, ○○○池?’ 하는 겁니다. ‘맞다’고 했죠. 公安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름을 부를 때 ‘아니다’라고 했으면 안 붙잡혔을 텐데요. 끌려가서 보니 脫北者가 많이 잡혀와 있더군요. 포대기에 싸인 채 테이블위에 놓인 新生兒도 있었어요. 特別檢閱 期間이었죠.”??? ?
    그때도 運이 좋았다. 中國語를 잘한다는 理由로 釋放된 것이다. 그가 붙잡힌 2000年 當時만 해도 中國은 全國의 戶口가 電算으로 整理돼 連結되지 않았다. 한 子女 政策 탓에 戶口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女性도 적지 않았다. 公安이 言語 能力을 테스트했는데 그는 脫北者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中國語를 잘했다.
    “中國엔 只今도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中國 간 지 3年 됐을 때인데, 漢字도 잘 쓰고 中國 新聞도 읽었거든요.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希望을 갖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잘못된 提報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北韓 애가 아닌 거예요. 韓國 大學生은 다른 나라 말을 工夫할 目的, 旅行갈 目的으로 배우잖아요. 저는 生存을 위해 배웠어요. 좀 슬픕니다. 韓國 젊은이들과 同時代에 사는데, 生存鬪爭을 해야 했으니까요.”


    “막 無視하면서 外界人 取扱”

    ▼ 사는 곳을 바꿀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군요.
    “이름 여러 個를 갖고 살았어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아요. 會社 사람들은 A라는 이름으로 알았는데, 밖에 사람들은 B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生日 파티에 갔는데, 兩쪽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이 사람은 A로 부르고, 저 사람은 B로 부르고…. 사람들이 어느 게 眞짜 이름이냐고 다그쳐 唐慌했죠.”
    ▼ 유엔 같은 國際機構나 NGO에서 北韓 人權과 關聯한 活動을 해보고 싶다고 했죠. 北韓 人權 問題와 關聯해 가장 重要한 問題가 뭐라고 봅니까.
    “北韓人權法을 制定해야 해요. 제가 2014年 4月 유엔 安全保障理事會에 參席했습니다. 유엔 駐在 美國大使를 비롯해 15個 나라 臺詞들이 다 參席했거든요. 아, 아니다…러시아대사와 中國大使는 不參했어요. 北韓에 對한 그쪽의 態度가 그렇잖아요. 北韓大使는 門 뒤에 숨어서 엿들었고요. 安保理가 여태까지 北韓의 核이나 政治的 이슈만 다뤘습니다. 제가 參席한 날 처음으로 北韓 人權 問題를 다뤘다고 해요. 臺詞들이 ‘歷史的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2014年 11月 北韓人權決議案이 유엔에서 採擇됐어요. 너무나도 感謝한 일이죠. 北韓 政權의 壓迫을 받은 지 70年이 됐습니다. 中國에서 脫北者가 人權 蹂躪을 當하고요. 그런데도 北韓의 慘狀이 世界에 穩全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國際社會에서 北韓 人權 이슈가 照明받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問題는 아직도 國際社會에서 北韓 人權 問題가 메인 이슈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世界 各國을 돌며 講演하면서 呼訴하는 거예요. 참 憫惘한 게, 外國에서 거꾸로 물어봅니다. ‘왜 韓國에서는 北韓人權法이 通過가 안 되느냐’고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
    그는 “北韓 人權 問題는 우리의 問題”라면서 “外國人들이 발 벗고 나서주는 것은 感謝한데, 정작 韓國에서는 關心이 적은 게 안타깝다”고 强調했다. ?
    ▼ 유엔에서 北韓 人權 實態를 告發한 脫北者 신동혁 氏의 證言과 그가 著書에서 밝힌 內容 中 一部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北韓 人權 問題에 對한 脫北者들의 主張이 信賴度가 떨어진다는 指摘도 있고요. ?
    “外國 記者들은 대놓고 물어봅니다. ‘誇張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問題가 있는데, 이현서 氏 이야기가 眞짜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고. 신동혁 氏뿐 아니라 放送에 나가는 사람들 탓에 불거지는 問題가 예전부터 있었는데, 一部 사람들의 거짓말 때문에 北韓에서 일어나는 實相이 事實이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 脫北者들이 北韓 人權 改善에 寄與하고 나아가 統一 過程과 統一 以後에 實質的으로 重要한 役割을 하려면 大韓民國 國民뿐 아니라 自身들이 함께 生活한 北韓 住民들로부터도 共히 信賴를 얻는 게 重要한 課題라고 봅니다.
    “우리 脫北者끼리도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統一이 되면 누가 거짓말하고 누가 眞實을 말했는지 다 들통나겠네, 이렇듯 좀 시니컬하게 이야기해요. 經歷을 부풀린 사람도 엄청 많고, 거짓말한 사람이 신동혁 씨만이 아니에요. 北韓에서 脫北者 證言의 거짓을 證明하는 비디오를 만들어 公開하잖아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使命感을 갖고 眞實한 마음으로 北韓 人權 改善을 위해 努力하는 脫北者가 더 많다는 點입니다.”


    ‘眞짜 저렇게 사는 걸까?’

    ▼ 韓國에서 脫北者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뭐였나요.
    “中國에 숨어살 때 韓國에 對한 期待와 希望이 컸어요. 韓國은 地球上에서 第一 못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北韓에서 敎育받았거든요. 김일성이 日帝로부터 北韓을 되찾아준 것에 對한 (北韓 住民들의) 監査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中國에 到着해 韓國이 잘산다는 것을 알았죠. 中國人도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는 게 率直히 자랑스러웠어요. 韓國에 오는 게 엄청난 꿈이었습니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죠. 10年 넘는 긴 時間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두 팔 벌려 歡呼해줄 줄 알았는데, 仁川空港에서 亡命申請을 하는데, 그냥 막 無視하는 겁니다. 外界人 取扱하더군요. ‘아.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바라던 거와는 正反對였어요. 韓國에서는 中國 僑胞라고 말해야 일자리를 求하기가 더 쉬워요. 저도 身分을 숨겼어요. 江原道에서 왔다고 했거든요. 中國에서도 身分을 숨겼는데, 韓國에 와서도 똑같아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中國은 내 나라, 내 땅이 아니지만 韓國은 다르잖아요. 상하이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中國에서 받는 偏見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故鄕이 江原道’라고 하면 ‘江原道 어디예요?’ ‘學校는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습니다. 거짓말이 꼬리를 무는 거죠. 只今은 ‘北韓에서 왔어요’라고 곧바로 말합니다. 只今 와서 생각하면, 不平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보니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가 2010年 어머니와 함께 탈출시킨 男동생은 韓國에 適應하지 못해 北韓으로 돌아가고자 北中 國境地帶까지 갔다고 한다. 누나의 說得으로 韓國에 되돌아왔다. 男동생은 美國 大學에 合格해 出國을 앞뒀다.
    “(동생이) 北韓으로 넘어간다면서 國境에서 電話를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韓國 旅券 가진 애가 北韓에 가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었거든요. 두 나라에서 다 犯罪者가 되는 거예요. 最善을 다해, 죽을힘 다해 說得했습니다. 그랬던 동생이 마음을 다잡고 美國 ○○大學으로 떠나요. 동생이 韓國에 다시 돌아와 잘 適應했어요. 저를 잘 따라줬고요. 너무나 고맙죠. ○○代에 入學한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臺는 美國의 名門 私立大다.
    ▼ 北韓에 사는 親戚을 걱정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北韓 人權 關聯 活動 탓에 親戚에게 害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北韓 當局이 이현서가 누구인지 못 알아내는 게 希望입니다. 어린 나이에 脫北한 터라 골칫덩어리 이현서가 어디 살던 누군인지 모를 겁니다. 엄마와 동생 얼굴은 冊에서도 모자이크로 處理했어요. 北韓의 親戚이 해를 안 입게 하는 게 使命이고 義務라고 생각해요. 北韓의 親戚과 通話는 가끔 해요, 姨母랑. 統一이 되는 날까지 健康하게 살아주면 좋겠어요. 언제쯤 우리 家族이 離散家族 相逢을 할까요.”



    “한 家族이잖아요, 우리는”

    ▼ 21世紀 韓半島의 가장 重要한 課題는 統一이라고 생각합니다. 南과 北의 靑年이 統一의 主役이 되면 좋겠어요. 北韓 靑年이 자유로운 삶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大韓民國 靑年도 統一 先進國을 만드는 過程에서 많은 機會를 갖게 될 겁니다. 大韓民國 靑年에게, 北韓 靑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外國 記者들은 하나같이 ‘韓國 젊은 世代는 統一을 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質問합니다. 슬프지만, 現實이죠. 率直히 氣分은 안 좋더라고요. 우리는 關心이 없고, 外部 世界는 關心을 갖는 統一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北韓에 있는 靑年에게 當付할 말은 없습니다. 北韓이 3代 世襲 獨裁라느니 이런 말 하면 오히려 南쪽에 拒否感만 더 생깁니다. 鴨綠江을 갓 넘었을 때 中國의 한 親戚이 ‘김정일, 金日成이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 親戚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세뇌당한 사람은 眞實을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宏壯히 어렵습니다.
    北韓의 現實을 알려주는 것보다 韓國 드라마 같은 것을 北韓 사람이 많이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배고파서 도망쳤지만 只今은 다릅니다. 새로운 希望을 찾아서 北韓을 떠나는 겁니다. 韓國 드라마, 率直히 아무 內容 없잖아요. 사랑 이야기, 눈물 짜내는 이야기인데, 北韓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眞짜 저렇게 사는 걸까’라고 疑問을 갖게 됩니다. 드라마를 包含한 外部의 미디어를 北韓에 보내는 게 엄청나게 重要해요. 그래서 미디어를 北韓에 들여보내는 外國 團體들도 있습니다.”
    ▼ 大韓民國 靑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講演 德에 美國, 유럽을 돌아다닙니다. 그쪽과 比較하면 南韓 靑年도 안 됐다 싶습니다. 統一을 하면 經濟에 惡影響을 끼친다고 생각해 反對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地球上에서 唯一하게 갈라진 나라거든요. 統一을 하면 人口가 8000萬 名입니다. 큰 나라가 되면 機會가 더 많아질 거예요. 왜 우리가 허리가 잘려 살아야 하나요. 한 家族이잖아요, 우리는 無條件 統一해야 해요. 그래야 利得 創出도 생깁니다. 北韓 經濟의 水準이 어느 程度 올라온 後 統一하자는 것은 잘못된 判斷이라고 봐요. 中國이 只今도 地下資源을 빼갑니다. 中國 會社가 北韓에 쫙 깔렸어요. 돈 좀 있는 北韓 사람들은 北韓이 中國 밑으로 가도 相關 없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南北韓이 統一해야지, 왜 中國 아래로 들어갑니까. 經濟는 잘 모르지만 統一하면 더 富强한 나라가 될 거예요.”
    그는 現在 ○○大 4學年이다. 늦깎이로 2011年 入學했다. 外國 活動 탓에 卒業이 늦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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