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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年 全斗煥·盧泰愚 쿠데타 陰謀 옐로카드 <신상카드> 記錄하려다 霧散”|新東亞 </신상카드>

Interview

“1963年 全斗煥·盧泰愚 쿠데타 陰謀 옐로카드 <신상카드> 記錄하려다 霧散”

25年 만에 ‘신동아’ 手記 連載 再開 김충립 前 首警司 保安班長

  • 배수강 記者 | bsk@donga.com

    入力 2016-01-05 18: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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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陸士 11期들이 8期 40名 除去하려다 發覺
    • ‘윤필용 事件’ 本質은 파워게임
    • 新軍部, 1980年 1月부터 執權 시나리오 稼動
    • YS 하나회 解體 情報 샜으면 쿠데타 났을 것
    • ‘신동아’에 하나회 처음 알리자 殺害 脅迫
    김충립(69) 前 首都警備司令部 保安班長은 激動의 時期에 ‘情報의 길목’에 서 있었던 人物이다. 1968年 경북대 師範大를 卒業하고 ROTC 6期로 任官해 前方 小隊長으로 勤務하던 中 當時 전두환 中領의 紹介로 陸軍保安司令部에서 일했다. 1969年 11月부터 1980年 12月 少領으로 豫編할 때까지 首警司, 特戰司 等 主要 部隊의 保安部署에 勤務하면서 權力 上層部의 파워게임과 離合集散 動向을 分析했다. 그의 表現을 빌리면 ‘힘 있는 놈이 陰謀를 꾸미기 前에 미리 잡아 西氷庫 分室로 데려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15年 11月 ‘신동아’ 編輯室로 電話를 걸어왔다.
    “25年 前 ‘신동아’에 手記를 連載하다 殺害 脅迫을 當해 連載를 中斷한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手記를 完成했는데, 美國으로 돌아가기 前에 한番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993年 김영삼(YS) 大統領은 就任 直後 電擊的으로 軍 私組織 하나회를 解體했다. 그에 앞서 김충립 前 班長은 1991年 新東亞 9, 10月號에 실린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記事를 통해 하나會議 存在를 世上에 처음 알렸다. 情報를 分析해 保安司令官에게 要約 報告하는 그에게 하나會 動向 分析은 主要 業務였다. 하나회의 存在와 그들의 暗鬪가 알려지자 世上은 시끄러워졌다. 軍은 否認했고, 그와 家族은 殺害 脅迫에 시달렸다. ‘東亞日報’ ‘中央日報’ 等 主要 言論은 이 事件을 테러로 規定하고 連日 크게 報道했다. 25年 만에 신동아 編輯室을 찾은 그를 만났다.



    “김충립 목숨 거두겠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美國으로 건너가 牧會學 博士學位를 받고 神學大 敎授를 하다가 歸國해 2012年 總選 때 基督自由民主黨 比例代表로 出馬했다. 以後 脫北者와 統一 關聯 모임을 만들어 活動했는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世間을 모두 整理해 美國으로 돌아가려 한다. 1991年 신동아 10月號에 ‘언젠가 다시 手記를 連載하겠다’고 썼는데, 約束을 지켜야 할 것 같아 連絡했다.”
    ▼ 신동아에 手記가 실린 後 어떤 脅迫을 當했나.
    “하나회 出身 軍人들이 ‘김충립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脅迫했다. 高校生 딸과 初等生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等 온갖 脅迫을 받았다. 아이들은 親戚 집으로 避身시켰다. 恐喝 脅迫한 무리 中에는 ROTC 出身도 있었는데, ‘너 때문에 우리 ROTC 出身 全體가 軍에서 背信者로 찍혔다’고 하더라.”
    ▼ 어떻게 對應했나.
    “當時 大韓民國 軍人들에게 신동아는 必讀書였다. 軍에서도 (하나회의 存在가) 徐徐히 알려지게 되니 그해 12月 김진영 陸軍參謀總長이 ‘하나회는 存在하지 않는다’는 聲明을 發表했다. 그래서 서울 鍾路에 있는 基督敎放送局에 가서 記者會見을 했다. 恐喝脅迫犯意 音聲 錄音을 들려주고, ‘卑怯하게 脅迫하지 마라. 參謀總長이 否認했으니 나를 法的으로 걸어라. 法廷에서 밝히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錄音된 脅迫犯 中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 當時 新東亞 9, 10月號에 1, 2畫가 실리고 連載가 中斷됐는데.
    “軍에 있어봐서 잘 안다. 決코 점잖게 對應할 사람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家族 殺害 脅迫이 괴로웠다. 3回 原稿를 脫稿할 무렵 임재문 中將(1993~98年 機務部大將)李 찾아왔다. 그는 1975年 保安司 監察室에서 1年間 監察要員으로 함께 일한 ROTC 3期 先輩다. 自身이 전두환 前 大統領을 찾아가 ‘김충립을 處罰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專 前 大統領이 ‘김충립의 말은 모두 옳다’며 ‘處罰해선 안 된다’ 했다고 傳하더라. 3回 原稿에서는 1973年 윤필용 事件을 다뤘는데, 신동아 編輯室로 가서 揭載를 中斷하겠다고 했다. 殺害 脅迫에 너무 시달린 탓에 좀 쉬고 싶었다. 適切한 時期에 다시 手記를 連載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너무 오랜 時間이 흘렀다.”


    윤필용과 김재규의 血鬪

    “나는 時間帶別로 윤필용 事件을 記錄해놓았다. 越南 猛虎部隊腸을 마치고 歸國한 윤필용 將軍이 1970年 首警司令官으로 赴任하자 라이벌인 김재규 保安司令官이 움직였다. 1971年 6月, 515通信保安部隊 所屬 通信保安 監聽遙遠 2名을 首警司 步안반에 配置해 尹 司令官의 電話를 24時間 監聽하게 했다. 錄音器를 連結한 後 錄取해 每日 保安司令部에 報告했는데, 이를 感知한 首警司 通信參謀가 尹 司令官에게 報告하는 바람에 綻露 났다. 밤새 保安部隊원 2名이 憲兵隊에 拘束됐고, 우리(保安半) 事務室은 閉鎖됐다. 그 程度로 파워게임이 熾烈했다. 以後 윤필용 事件이 터졌다.”
    ▼ 윤필용 事件도 파워게임의 結果物?
    “그렇다. 윤필용 事件이 불거진 건 1972年 11月인데, 當時 박종규 靑瓦臺 警護室長도 ‘訛傳된 것’으로 매듭짓고 水面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다 ‘統一情事 事件’과 맞물려 1973年 3月에 다시 불거졌다. 統一政事는 신범식 서울신문 社長이 “여기에 절을 지으면 朴 大統領 任期 內에 統一이 된다”는 風水쟁이의 얘기를 듣고 靑瓦臺 境內에 지었다는 절이다. 그런데 윤필용 事件이 터지자 ‘손영길 首警司 參謀長이 이후락 中情部長을 大統領 만들려고 祈禱하는 節’이라는 報告가 올라갔다. 統一政事 工事期間은 1972年 11月부터 이듬해 1月 15日까지였는데, 時期가 참 妙했다.
    이 報告를 들은 朴 大統領은 강창성 保安司令官에게 손 參謀長 拘束을 嚴命했다. 結果的으로 1972年 11月 以後 유야무야된 윤필용 事件이 統一情事 事件과 맞물려 1973年 3月에 드러난 것이다. 2015年, 이 事件 關係者들에 對한 無罪 判決이 났다. 나는 事件이 불거진 當時에도 윤필용 事件은 軍에서 인정받던 將軍을 쳐내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主張했다.”
    ▼ 根據는 뭔가.
    “내가 윤필용 司令官의 一日動向을 時間帶別로 報告하는 일을 4年 동안 했다. 다시 말해 尹 司令官의 쿠데타 企圖 與否를 確認하는 게 任務였다. 몇 달 묵혀놨다가 狀況을 엮어 先手를 친 거다. 앞으로 眞實을 正確하게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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