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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新東亞

한 글字로 본 中國 | 헤이룽장省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 글 · 寫眞 김용한|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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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에서 重化學工業이 가장 먼저 發達한 헤이룽장省은 그 때문에 中國에서 가장 落後한 工業地帶가 됐다. 스스로 弱點을 잘 알기에 産業構造를 先進化하고, 金融·物流業, IT 서비스 分野를 育成하며, 러시아·몽골 等과의 交流에 나서지만 成果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大帝國 淸나라를 세운 根據地 헤이룽장은 이제 러시아, 몽골, 南北韓, 日本, 美國 等 周邊國들의 共存共榮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旅行 가이드북의 代名詞 ‘論理 플래닛’은 헤이룽장 旅行의 첫 番째 하이라이트로 中國 最北端 마을 모허(漠河)를 꼽으며 이렇게 說明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莊嚴한 오로라를 볼 수 있기를 期待해보라.”

    夏至 무렵 오로라를 볼 確率이 가장 높고, 이때 오로라 祝祭(北極光節)가 열린다고 했다. 나도 生涯 처음 오로라를 보길 期待하며 한番 가보려는데 마침 某許에 갔다 온 親舊를 만났다. 이 親舊는 某許에 하루 이틀 머무른 게 아니라 제법 오래, 한 달이나 있었다고 했다.

    “그럼 오로라 봤어?”

    “못 봤어.”



    “한 달이나 있었는데도 못 봤단 말이야?”

    “내 親舊 아버지는 四五十 年을 某許에 살면서 오로라를 딱 두 番 보셨대.”

    “그런데 每年 夏至에 某許에서 오로라 祝祭가 열리잖아?”

    “거짓말이지(騙人).”

    그는 親切하게 助言을 繼續했다.

    “오로라를 보고 싶으면 캐나다, 러시아, 北유럽에 가봐. 中國에선 보기 힘들어.”

    생각해보니 論理 플래닛度 오로라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길 期待해보라”며 사람을 眩惑한 것이다. 가이드북의 代名詞 論理 플래닛度 結局 中國의 商術과 妥協한 걸까.

    헤이룽장(黑龍江)省의 略稱은 ‘劍을 黑(黑)’ 자다. 世界에서 10番째, 中國에서 長江, 黃河 다음으로 긴 黑龍江에서 따온 略稱이다. 黑龍江은 이름 그대로 검은 龍처럼 東北아시아를 휘감고, 兩大 强國인 中國과 러시아 國境을 가른다. 그래서 中國 이름은 黑龍江이고, 러시아 이름은 아무르(Amur) 江이다.


    東北亞를 휘감는 龍

    프랑스 作家 아멜리 노통브는 小說 ‘攻擊(Attentat)’에서 “‘아무르’는 프랑스語로 ‘사랑’을 뜻한다”며, 아무르 江을 ‘사랑의 江’으로 解釋한다.

    “江과 사랑의 닮은 點 中에 가장 놀라운 건, 決코 마르지 않는다는 點이야. 가뭄이 들면 얕아지고 甚하면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江은 絶對로 사라지지 않아. 옛사람들이 왜 江을 神으로 섬겼는지 알 만하지.”

    感受性이 남다른 노통브답게 매우 아름답고 浪漫的이지만, 實際와는 동떨어진 解釋이다. 아무르는 ‘큰 江’ 또는 ‘검은 물’이란 뜻의 퉁구스어에서 나온 이름으로 推定된다.

    추운 北方, 山은 恒常 눈에 덮여 있어 희고, 차디찬 江은 검푸르다. 白山黑水(白山黑水). 滿洲 南쪽의 白頭山과 北쪽 黑龍江은 東北의 自然環境을 象徵한다. 中國人은 讚歎한다.

    “흰 山이여, 높고도 높구나! 검푸른 江이여, 흐르고 또 흐르는구나!(白山兮高高,黑水兮滔滔)”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둘러쳐진 헤이룽장省에는 헤이룽江, 쑹화江, 우수리강이 흐르며 肥沃한 土地를 만든다. 나선征伐에 參加했던 朝鮮 武裝 神類도 헤이룽장의 黑土 大地에 感歎했다.

    “이달 6月은 지난 5月보다 가뭄이 더 甚했다. 그런데도 밀, 보리, 수수, 조 等 밭穀식이 말라 죽지 않는다. 이곳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알 만하다.”

    黑手(黑水)가 黑土(黑土)를 적셔주는 黑色의 헤이룽장은 黃河(黃河)와 黃土(黃土)가 어우러지는 黃色의 中原과 色彩부터 鮮明한 對比를 이룬다.

    中原과 異質的인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中國 史書는 滿洲의 北部에 살던 이들을 ‘肅愼(肅愼)’이라고 記錄한다. 肅愼界는 挹婁(?婁), 물길(勿吉), 靺鞨(靺鞨), 餘震(女眞) 等 錚錚한 種族을 包括한다. 南部의 藝脈界(古朝鮮·高句麗), 西部의 동호界(거란·몽골)와 팽팽하게 겨루던 勢力이다.

    그러나 肅愼은 單一한 集團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헤이룽장에는 다우르族, 허저族, 오로첸族, 에벤키族 等 다양한 少數民族이 산다. 中國의 少數民族 分類는 嚴密한 文化人類學的 分類라기보다 行政管理를 위한 便宜的 分類의 性格이 剛한데도, 이처럼 여러 集團으로 나눈 것은 東北方 一帶 民族들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部族마다 性格이 相當히 다르고 獨立性 亦是 더욱 强했을 것이다. 그러니 ‘肅愼’이란 말은 ‘北滿洲 一帶에 살던 온갖 사람들과 勢力들’을 統稱한다고 생각하자.



    다우르, 허저, 오로첸, 에벤키族

    森林이 빽빽한 추운 北方의 山에 살던 이들은 生存을 위해 農事·採集·狩獵·漁撈·牧畜 等 매우 다양한 活動을 했다. 滿洲 森林의 遊牧民은 몽골 高原의 遊牧民과도 크게 달랐다. 몽골 遊牧民이 소·量·말을 키우며 草原의 풀을 뜯게 했다면, 滿洲의 에벤키族은 馴鹿을 키우며 森林의 리트머스 이끼를 먹게 했다.

    헤이룽장 모허 出身 作家 츠쯔젠(遲子建)의 小說 ‘語噦嘔나 江의 오른쪽’에서 에벤키族의 馴鹿 禮讚을 들어보자.

    “馴鹿은 머리는 말을 닮았고, 사슴처럼 생긴 뿔, 나귀 같은 몸집에 발굽은 소와 비슷하다. 말과 恰似하지만 말이 아니고, 사슴과도 비슷하지만 사슴이 아니고, 나귀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귀도 아니고, 소 같기도 하지만 소도 아니었다. 한족은 이러한 모습을 두고 ‘四不像(四不像)’이라고 불렀다. 馴鹿은 말머리처럼 威風堂堂하고, 사슴의 뿔처럼 아름답고, 나귀의 몸처럼 健康하고, 소발굽처럼 强靭하다.”

    肅愼의 勇猛함과 뛰어난 弓術은 멀고 먼 중원까지 알려졌다. 孔子는 새에 꽂힌 正體不明의 화살을 보고 肅愼의 화살임을 알아맞혔고, 진수도 ‘三國志 동이전’에서 肅愼의 後裔인 挹婁(?婁) 사람들은 大部分 勇敢하고 힘이 세며 활쏘기에 뛰어나다고 했다.

    肅愼 땅은 扶餘보다 훨씬 춥고, 人口는 적고, 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했다. 진수는 挹婁에 “臺軍將(大君長)은 없고, 마을마다 對人(大人)이 있다”고 했다. 卽, 統一된 指導者가 없고 마을 單位로 族長이 있을 뿐이었다. 國家體制를 整備하지 못하고 群小 部族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後날 扶餘와 高句麗가 헤이룽장까지 影響力을 미치기는 했지만, 헤이룽장을 中心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헤이룽장을 中心으로 삼은 첫 國家는 渤海다. 高句麗 滅亡 後 滿洲는 黨·突厥·新羅의 勢力이 미치지 못해 힘의 空白地帶가 됐다. 698年 大祚榮은 高句麗 遺民과 말갈족을 糾合해 遼東에서 脫出한 後 지린省 鈍化視 東牟山에 이르러 渤海를 建國했다. ‘東北의 王子’ 高句麗를 繼承한다는 名分은 滿洲 一帶의 呼應을 얻었다. 727年 武王은 成功裏에 周邊 勢力을 統合했음을 日本에 알렸다.
    “列國(列國)을 主管하고 除番(諸蕃)을 거느려 高句麗의 옛 땅을 回復하고 扶餘의 風俗을 잇게 되었다.”

    渤海는 黑手말갈·黨·新羅의 挑戰을 물리치고 東北의 새로운 主人으로 자리를 굳혔다. 東北아시아의 情勢가 安定되자 渤海는 唐나라의 先進 文物을 積極的으로 受容하고 制度를 整備해 內實을 다졌다.

    755年 唐나라에서 안록산의 亂이 일어나자, 756年 文王은 上京용천부(헤이룽장 닝안縣)로 遷都했다. 안록산은 3個 節度使를 겸해 허베이·랴오닝·산시(山西) 一帶를 掌握하고 있었다. 渤海는 안록산의 襲擊을 憂慮해 防禦에 더 有利한 上京으로 遷都한 것으로 보인다.

    上京용천부는 넓은 平野地帶에 무단강(牡丹江)과 징푸호(鏡泊湖)를 끼고 있다. 무단강은 쑹화江 最大 支流이고, 징푸호는 95㎢ 面積에 오늘날에도 40種의 물고기가 사는 天然 貯水池다. 이처럼 上京용천부는 江·湖水·山으로 둘러싸여 農漁業과 防禦에 유리했다.

    마침 8世紀는 地球的 溫暖期여서 추운 滿洲에서도 農耕·牧畜 與件이 좋아졌다. 안록산의 亂 以後 기운이 크게 衰退한 唐나라는 더 以上 威脅的인 存在가 아니었다. 對內外的 好材가 겹쳐 渤海는 ‘東方의 풍요로운 나라(海東盛國)’가 되었다. 渤海 領土는 高句麗의 두 倍에 達했고, 上京용천부는 當時 아시아에서 唐나라 長安城 다음으로 큰 都市였다. 上京용천부의 둘레는 16km. 600年 뒤에 세워진 朝鮮 漢陽(둘레 18km)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無窮花 나라, 화살의 나라

    이런 財源은 어디서 나왔을까? 渤海 特産品인 가죽·毛皮·人蔘·꿀을 輸出한 德分일 것이다. 920年 日本 王子가 담비 毛皮옷을 여덟 벌이나 겹쳐 입고 渤海 使臣을 맞이했을 程度로 毛皮는 高貴함의 象徵이었다.

    國力이 忠實해지자 文化도 發展했다. 渤海는 唐나라에 60番 以上 使臣을 派遣해 中國의 文物을 받아들였으며, 賓貢科 及第者度 新羅 다음으로 많았다. 唐나라 詩人 溫庭筠은 唐나라를 訪問한 뒤 歸國하는 渤海 王子를 電送하며 노래했다.

    “그대의 나라는 비록 바다 너머에 있으나, 수레 타고 글 읽는 文物은 본디 한집안이네(疆理雖海重, 車書本一家).”

    國力이 新羅보다 剛해졌다고 생각한 渤海는 唐나라에 渤海 使臣이 新羅 使臣보다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要請했으나, 黨은 拒絶했다.

    “國名의 先後는 (國力의) 强弱에 따라 稱하는 것이 아니니, 調劑의 等級을 어찌 只今의 盛衰(盛衰)로써 바꿀 것인가. 마땅히 옛 慣例에 따르도록 하라.”

    이에 新羅의 崔致遠은 ‘渤海에 윗자리를 許諾하지 않은 것에 感謝하는 表文(謝不許北國居上表)’을 올렸다. 崔致遠은 當代 最高의 名文章家답게 讚辭에도 能했지만 嘲弄에도 能했다. 지증大師가 別世했을 때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고 哀悼한 崔致遠은 渤海에 對해서는 辛辣한 嘲弄을 아끼지 않았다.

    崔致遠은 渤海가 本來 말갈족 오랑캐의 무리로 “高句麗가 아직 滅亡하지 않았을 때는 本來 사마귀처럼 보잘것없는 部落이었는데 (中略) 올빼미 같은 者들이 白山에서 소란스럽게 모여들고 솔개 같은 무리는 黑手에서 떠들썩하게 울어대” 天下를 混亂케 했으니, “萬若 陛下의 뛰어난 생각과 외로운 決斷이 신필로 내려지지 않았다면, 槿花鄕(槿花鄕, 新羅)의 廉恥와 謙讓의 氣風이 가라앉고 好時局(?矢國,渤海)의 毒痛(毒痛)이 더욱 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感謝를 표했다. 新羅를 아름다운 ‘無窮花의 나라’로 稱하고, 渤海를 사나운 ‘화살의 나라’라고 稱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渤海와 新羅 사이의 熾烈한 라이벌 意識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海東盛國 渤海의 最後는 어이없을 程度로 虛妄했다. 925年 12月 16日 遼나라 太祖 耶律阿保機가 출격한 지 한 달도 안 돼 926年 1月 12日 渤海는 滅亡했다. 渤海 國境의 부여부가 陷落된 지는 11日, 首都 上京용천부가 包圍된 지 고작 사흘 만이었다. 歷史書에 傳하는 바가 없어 속事情은 詳細히 알 수 없다.

    다만 歷史家들이 推測하기로 渤海는 唐나라 制度를 받아들였지만 中央集權力은 크게 떨어졌다. 수많은 土着 勢力이 各 村落의 軍事·行政的 權限을 갖고 있어 이들의 合意와 支持가 매우 重要했다. 그런데 渤海 末期 紀綱이 解弛해지고 內紛이 일어났을 때, 遼나라가 渤海의 土着勢力들을 包攝하며 進擊해 瞬息間에 渤海를 制壓한 듯하다. 耶律阿保機 스스로도 말했다.

    “渤海 사람들의 分裂을 틈타 出擊했기에 싸우지 않고 이겼다.”



    滿洲의 海東靑, 女眞族

    遼나라는 遊牧民族 最初의 大帝國이었다. 몽골, 滿洲, 華北의 要旨를 掌握한 遼나라는 宋나라에 莫大한 歲幣를 받고, 交易을 奬勵하며 富强한 나라가 됐다. 黑龍江 一帶에 살던 黑手말갈(黑水靺鞨)을 高句麗·渤海도 制壓하지 못했으나, 遼나라는 黑龍江까지 손을 뻗쳐 黑手靺鞨에 朝貢을 要求했다. 그러나 過度한 朝貢 要求는 스스로 무덤을 판 格이 되었다.

    黑手靺鞨의 하나로 女眞族이 있었다. ‘여진(女?)’은 海東靑이라는 뜻이다. 날래고 勇猛한 海東靑은 女眞族의 理想型이었고, 萬응支神(萬鷹之神)이었다. 遼나라는 女眞族에게 海東靑을 貢物로 바치기를 强要했다. 海東靑은 10萬 마리의 매 中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程度로 稀貴한 데다 女眞族의 自尊心을 象徵하는 터라, 遼나라의 處事는 女眞族의 公憤을 샀다. 東北의 王子 扶餘·高句麗·渤海에도 굽히지 않은 黑手靺鞨의 後裔 女眞族은 거란족에게 決코 屈服하지 않았다.

    이때 英雄 완안阿骨打(완옌아구다)가 登場해 女眞族을 糾合하고 遼나라에 反旗를 들었다. 遼나라 亦是 莫强한 大帝國이었지만, ‘1萬 名이 뭉치면 天下가 當할 수 없다’던 女眞族 앞에서는 無力했다. 阿骨打는 1114年 尿意 10萬 大軍을 出荷點(出河店, 헤이룽장省 자오慰安縣)에서 擊破하고, 1115年 金(金)나라 建國을 宣布했다.

    “遼나라는 ‘빈鐵(賓鐵)’을 國號로 삼아 鐵의 强靭함을 醉했다. 그러나 철이 비록 剛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變할 것이다. 오직 金(金)만이 變하지 않는다.”

    요 皇帝는 20萬 大軍을 이끌고 親庭했지만, 阿骨打는 겨우 2萬 名으로 遼나라 軍隊를 潰滅시킨다. 以後 金나라는 거칠 것 없이 1122年 베이징을 陷落하고 3年 뒤에는 遼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金나라는 阿骨打의 希望대로 永遠한 帝國이 되지 못했다. 金나라는 遼나라의 電鐵을 그대로 밟았다. 金나라는 勇猛한 몽골族을 쥐어짰고, 稀代의 英雄 칭기즈칸이 몽골族을 糾合해서 金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金나라는 華北·滿洲 一帶를 100餘 年間 支配하며 女眞族의 正體性을 確實히 잡아놓았고, 同時에 力量을 키웠다. 비록 金나라는 몽골族에게 亡했지만, 그 몽골族을 쫓아낸 明나라를 멸망시키고 中國 天下를 制霸한다. 淸나라는 첫 國號를 後金(後金)이라고 지었을 만큼 金나라 繼承 意志가 뚜렷했다.



    大帝國 러시아의 登場

    그런데 淸나라가 中國을 삼키고 있을 때, 저 멀리 西方에서 라이벌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大帝國으로 飛上하고 있던 러시아였다. 몽골의 壓制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부지런히 힘을 키워 마침내 몽골을 몰아냈다. 이반 4歲(이반 뇌제)는 對外 征服事業을 活潑히 벌였다. 그의 主要 關心事는 발트海를 둘러싼 北유럽 一帶였지만, 北方의 獅子 스웨덴을 制壓하기에는 아직 無理였다. 熾烈한 戰鬪에 비해 實益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東쪽은 달랐다. 몽골의 殘餘 勢力을 除外하고는 큰 勢力이 없어 러시아의 疾走를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시베리아의 豐富한 담비 毛皮는 러시아의 큰 收入源이 됐다.

    유럽은 아메리카 大陸의 은이 쏟아져 들어오며 商業革命이 일어났다. 莫大한 富를 蓄積한 貴族·商人 階級은 富裕함을 誇示하기 위한 奢侈에 熱을 올렸다. 그中에서도 어둠보다 까맣고, 白雪보다 부드러운 담비 毛皮는 有史 以來 絶對的 地位의 象徵이었다.

    러시아는 毛皮를 찾아 끝없이 東쪽으로 進軍했다. 1650年代 러시아 總收入의 10~30%가 毛皮 貿易에서 나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征服으로 領土 大國이 됐을 뿐 아니라, 담비·물고기·소금 等 시베리아의 特産物로 莫大한 輸入을 올렸다. 이렇게 蓄積한 財源으로 러시아는 近代化 改革을 推進하며 莫强한 軍隊를 組織했다. 시베리아 征服을 통해 大帝國 러시아가 誕生했다.

    거침없이 東進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東쪽 끄트머리에서 처음으로 强力한 맞手 淸나라를 만났다. 滿洲와 시베리아가 交叉하는 헤이룽장省에서 兩大 帝國 淸나라와 러시아는 交戰을 벌였다. 다만 兩國 모두에 邊方이었기에 大規模 戰爭이 일어나지는 않고 小規模 交戰에 그쳤다.

    이때 淸나라 主力은 中國 本土를 平定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淸나라는 朝鮮에 支援軍을 要請했다. 마침 當時 孝宗은 丙子胡亂의 恥辱을 씻어내자며 北伐(北伐)의 旗幟를 높이 들고 精銳 砲手들을 育成했다. 孝宗은 1654年과 1658年 두 次例 支援軍을 보내 靑軍과 함께 러시아 遠征隊를 擊退했다. 이 때문에 靑·러 國境紛爭 事件은 우리에게는 ‘나선征伐’로 有名하다. 淸나라를 치자는 大義名分으로 養成한 軍隊가 오히려 淸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것은 分明 아이러니지만, 朝鮮 砲手의 卓越한 射擊術은 러시아軍의 肝膽을 서늘케 했다. 러시아軍은 벙거지(戰笠) 쓴 朝鮮軍을 두고 말했다.

    “머리 큰 兵士들이 두렵다.”

    以後 淸나라는 中國 全域을 掌握하고 삼번의 亂을 平定하며, 臺灣의 鄭氏 王朝를 征服해 中國 支配를 鞏固히 했다. 內部가 安定되자 淸나라는 러시아의 알바陣 요새를 攻掠하고 1689年 네르친스크 條約을 맺어 北滿洲의 國境 紛爭을 끝냈다. 이때 滿洲는 太平洋까지 이어진 廣闊한 땅이었다.

    그러나 淸나라와 러시아의 國力이 逆轉되면서 國境線도 變했다. 阿片戰爭으로 淸나라가 危機에 몰린 틈을 타서 러시아는 太平洋으로 나갈 수 있는 沿海州를 確保했다. 니콜라이 1世는 意氣揚揚하게 말했다.

    “러시아 帝國의 國旗는 한番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지 않는 法이니라.”

    1860年 베이징 條約을 締結한 러시아는 本格的으로 滿洲에 影響力을 擴大했다. 東쪽의 블라디보스토크, 西쪽의 랴오닝, 다롄을 兩 날개 삼아 南下했다. ‘東方을 征服하라’는 뜻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野心을 赤裸裸하게 보여주었다. 이때 러시아는 하얼빈을 東北의 허브로 삼았다. 하얼빈은 시베리아 橫斷鐵道와 블라디보스토크, 다롄을 잇는 北滿洲의 中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深刻한 危機를 느낀 것은 日本이었다. 러시아의 南下 政策은 日本의 北進 政策과 正面으로 衝突했다. 日本은 時間이 흐를수록 不利하다고 判斷했다. 大國 러시아가 ‘帝國의 通路’ 鐵道를 完備하고 나면 莫大한 物量을 瞬息間에 萬株로 投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日本은 러시아를 先制攻擊했고, 1年 半의 戰爭 끝에 힘겹게 勝利한다.



    “코레아 우라!”

    只今 돌이켜보면 稀罕한 일이지만, 러일戰爭에서 日本이 勝利했을 때 많은 아시아人이 歡呼했다. 當時 아시아는 英國·美國·러시아 等 西歐 列强의 侵略과 收奪에 시달리며 西洋에 劣等感을 느꼈다. 황인은 제아무리 애써봤자 白人에게 안 된다고 自嘲하는 風潮가 퍼졌다. 그런데 日本이 러시아를 이기자, 아시아人들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自信感이 생겼다. 中國의 쑨원, 인도네시아의 네루도 모두 日本의 勝戰에 기뻐했고, 印度의 간디는 “日本의 勝利가 四方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까지 했다.

    朝鮮의 靑年 安重根도 日本의 勝利에 기뻐했다. 그러나 當時의 情勢로 보면 큰 誤判이었다. 朝鮮의 高宗과 明成皇后는 新進 强豪 러시아로 淸나라와 日本을 牽制한다는 戰略을 갖고 있었다. 日本은 1895年 淸나라를 꺾고 明成皇后를 殺害하며 朝鮮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이듬해 高宗은 宮을 脫出해 러시아 大使館으로 避身하면서까지(俄館播遷) 親日內閣을 牽制했다. 러시아와 日本이 팽팽하게 對立할 때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日本을 牽制하는 戰略[引俄拒日]’李 效果 있었다. 그러나 러일戰爭에서 日本이 이기자 唯一한 牽制 勢力인 러시아가 사라졌다. 이제 日本이 朝鮮을 植民地로 삼는 데 妨害될 것이 없었다.

    1905年 9月 5日 러일戰爭에서 勝利하자마자, 11月 17日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締結을 强行했다. 이로써 朝鮮은 正式으로 外交權을 박탈당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부 初代 統監이 되어 朝鮮의 內政에 깊숙이 關與했다. 高宗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心情으로 헤이그 萬國平和會議에 特使 李儁·李相卨·李範晉을 派遣해 乙巳勒約의 不當함을 알렸지만, 列强의 同情을 샀을 뿐 變化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1907年 高宗 皇帝는 退位했고, 朝鮮의 軍部와 武官學校가 廢止되어 外交安保 主權이 모두 사라졌다.

    그 後 2年 뒤 1909年 10月 26日 安重根 義士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射殺했다. 淸나라 領土지만 러시아 동靑鐵道가 管轄하는 하얼빈 驛에서 朝鮮 獨立軍 參謀中將이 日本의 首相을 벨기에製 拳銃 FN M1900으로 射殺하며 에스페란토어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大韓帝國 萬歲)!”安重根 義士의 義擧는 하얼빈이 얼마나 다양한 勢力 간 利害關係가 얽혀 돌아가는 땅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安重根은 먼저 러시아 官憲에게 逮捕돼 審問을 받았으나, 러시아는 그가 朝鮮 國籍을 가졌기에 러시아 裁判에 回附하지 않고 日本에 引繼했다. 日本은 ‘韓國 臣民과 日本帝國 臣民을 同等하게 對하는’ 을사늑약과 日本帝國의 刑法에 依據해 安重根을 死刑시켰다.

    1910年 8月 29日 日本이 大韓帝國의 統治權을 받아내며 大韓帝國은 滅亡했다. 朝鮮總督府가 朝鮮을 다스리는 日帝强占 時代가 되었다. 韓半島를 植民地로 삼은 日本은 푸이의 傀儡政府를 내세워 滿洲國을 事實上 植民統治했다. 日本帝國은 美國·英國과 敵對하며 交流·儒學이 모두 끊어졌고 西洋 文明을 만날 곳이 없었다. 이때 하얼빈은 “日本人이 接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西洋”이었다. 1917年 러시아革命 後 많은 白系(反共) 러시아人, 유대人, 東유럽의 폴란드人, 中央아시아의 무슬림들까지 하얼빈에 亡命했다. 하얼빈은 30餘 民族이 섞여 사는 國際都市였고 ‘西洋文明의 프런티어’였다.

    더욱이 나라가 亡하고 悲慘한 身世가 된 러시아人을 보며 日本人은 自負心을 느끼기도 했다. 小說家 다치바나 소토오는 말했다.
    “하얼빈! 바다가 없는 상하이…(中略)…獵奇와 小說的인 것(로맨틱한 것)과 冒險이 소용돌이치며, 過去와 未來가 지그재그로 交響樂을 울리고 있는 북만의 國際都市! 그리고 衰落한 帝政 러시아의 臺工作이 길모퉁이에서 行人의 구두를 닦으며 帝室(帝室) 歌劇團의 看板 舞踊手가 나이 들어 길가에서 성냥을 팔고 있는 슬픈 都會!”


    새로운 武器, 細菌

    그러나 日本의 氣高萬丈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中國은 連이은 敗戰에도 不拘하고 抗日 意志를 決코 抛棄하지 않았다. 蘇聯은 힘겨운 內戰과 混亂을 克服한 뒤 5個年計劃으로 經濟를 추스르고 다시금 大國의 底力을 보여주었다. 軍事冒險主義에 맛들인 日本은 蘇聯을 攻擊해보았으나 연달아 敗했다. 1939年 할힌골 戰鬪에서 慘敗한 日本은 蘇聯과 不可侵條約을 맺었다. 이로써 第2次 世界大戰에서 蘇聯은 獨逸과의 戰爭에, 日本은 中國과의 戰爭에 集中할 수 있었다.

    그러나 全力을 集中한다고 해도 廣闊한 中國 大陸을 征服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日本은 物量 不足을 挽回하기 위해 細菌戰 武器를 開發했다. 當時 日本軍 首腦는 主張했다.

    “日本은 철·鑛物 等 武器를 만들 수 있는 原資材가 不足하므로 새로운 武器를 開發해야 한다. 細菌戰 武器가 그中 하나다.”

    하얼빈에 設置된 731部隊는 사람을 통나무(마루타) 取扱하며 殘虐한 生體實驗을 했다. 또한 日本은 “다 죽이고, 다 태우고, 다 뺏는(殺光, 燒光, ?光)” 三光作戰(三光作戰)을 遂行하며 中國을 殘酷하게 支配했다.

    그럼에도 日本은 敗戰했다. 日本은 끝내 中國을 制壓하지 못했고, 美國은 日本 本土에 原子爆彈을 投下했으며, 蘇聯은 滿洲로 進擊했다. 蘇聯의 名匠 바실레프스키는 ‘8月의 暴風’ 作戰을 始作한 지 한 달도 안 돼 滿洲 全域을 占領했다. 國民黨에 비해 絶對 劣勢였던 共産黨은 逆轉의 瞬間이 온 것을 直感했다. 마오쩌둥은 말했다.

    “萬若 우리가 모든 根據地를 다 잃는다 해도 東北만 있다면 中國 革命의 基礎는 堅固하다. 勿論 다른 根據地도 잃지 않고 東北度 있다면 中國 革命의 基礎는 더욱더 鞏固하다.”

    國民黨의 장제스度 滿洲의 重要性을 잘 알고 있었지만, 共産黨의 主力이 北方에 있는 反面, 國民黨의 主力은 南方에 있었다. 더욱이 蘇聯은 다롄항을 閉鎖해 國民黨의 輸送船을 들여보내주지 않았고, 鐵道도 利用하지 못하게 했다.

    國民黨의 발이 묶인 사이에 共産黨은 재빨리 滿洲 要旨를 掌握했다. 蘇聯은 鹵獲한 日本軍 航空機 925代, 戰車 369代, 野砲 1226門, 小銃 30萬 鄭 等 莫大한 武器와 彈藥·食糧·軍需品을 大部分 紅軍에 넘겨주었다.

    1948年 린뱌오가 滿洲 全域에서 國民黨 軍隊에게 勝利를 거두면서, 共産軍은 確實히 勝機를 잡기 始作했다. 結局 共産黨은 萬株를 基盤으로 天下를 統一한 淸나라의 征服을 再現했고, 壓倒的 優位에 있던 장제스는 거짓말처럼 마오쩌둥에게 밀려 臺灣으로 도망치는 身世가 되었다. 中國은 傳統的으로 “中原을 얻어야 天下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淸나라 以後로는 “滿洲를 얻어야 天下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겼다.



    “滿洲 얻어야 天下 얻는다”

    共産革命 初期에 中國과 蘇聯의 關係는 매우 굳건했다. 그러나 하늘에 두 個의 太陽이 있을 수 없다던가. 蘇聯이 社會主義 陣營의 盟主로 나서며 ‘社會主義 兄弟國’들의 內政에 干涉瑕疵 中國은 크게 反撥했다. 兩國의 緊張은 헤이룽장省 地域 國境紛爭으로 이어졌다.

    츠쯔젠의 小說 ‘돼지기름 한 缸아리’는 中國·蘇聯의 微妙한 關係 變化에 휘둘리는 헤이룽장 사람들의 一面을 그려냈다. 中國과 蘇聯의 關係가 좋았을 때, 헤이룽장의 한 山村에서 살던 女子가 出産을 앞두고 極甚한 陣痛이 왔다. 山村에서 中國 邑內까지 가기보다 차라리 江 건너便 蘇聯 邑內에 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래서 家族은 썰매로 얼어붙은 江을 건너 蘇聯의 病院에서 無事히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文化大革命이 일어나고 兩國 關係가 險惡해지자, 蘇聯에서 出産한 家族 全體가 蘇聯 스파이로 몰려 苦楚를 겪었다. 모든 狂風이 지나가고 난 다음 그女는 “날개를 활짝 펴고 江 量案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外交에는 永遠한 親舊도 적도 없다. 中國은 蘇聯을 牽制하기 위해 美國을 끌어들였지만, 오늘날은 美國을 牽制하기 위해 러시아와 協力하고 있다.

    오늘날 헤이룽장省은 多少 矛盾的인 狀況에 빠져 있다. 重化學工業이 中國에서 가장 먼저 發達한 곳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中國에서 가장 落後한 工業地帶가 됐다. 中國·러시아·몽골·韓半島를 잇는 東北亞의 허브임에도 隣近 地域의 經濟가 그리 發達하지 않고 經濟交流가 制限的이라 物動量 不足으로 허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臺(對)러시아 窓口이나 러시아는 中國과 協力·親善 關係를 維持하면서도 어마어마한 中國 人口가 沿海州를 蠶食할 것을 憂慮해 極東 交流에는 消極的이다.

    헤이룽장의 經濟는 過去의 덫에 걸려 있다. 1次産業은 쌀·옥수수·콩 爲主고, 2次産業은 老朽한 重化學 工業이며, 3次産業은 流通·要式·交通 等 傳統 서비스業 爲主다. 헤이룽장度 스스로의 弱點을 잘 알기에 産業構造를 先進化하고, 金融·物流業, IT 서비스 分野(클라우드 컴퓨팅) 等을 育成하며, 러시아·몽골 等과의 交流를 促進하려고 努力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時間이 걸리며 成果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헤이룽장을 둘러싸고 있는 中國·러시아·몽골·南北韓·日本·美國 等 여러 나라가 和解 協力하고 共存共榮을 推進할 때 헤이룽장에 眞正한 繁榮이 찾아오지 않을까. 過去 緊張의 땅이었던 헤이룽장이 未來에는 協力의 땅이 되기를 바란다.




    김용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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