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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살렸는데 너희가 나를 背信해?”|신동아

새 連載 | 김충립 前 首警司 保安班長 肉筆手記 ‘陰謀와 暗鬪’

“내가 너희를 살렸는데 너희가 나를 背信해?”

1963年 7·6 쿠데타 陰謀와 하나회

  • 김충립 前 首警司 保安班長 | kimchoonglib@naver.com

    入力 2016-01-05 18: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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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政治軍人 肅正’ 내걸고 8期 겨냥 擧事 計劃
    • 손영길(朴正熙 專屬副官)李 쿠데타 勢力 救命
    • 하나회, 별 달린 短劍 주며 “背信者는 이 칼로 自決”
    • 惡貨가 良貨 構築한 윤필용 事件…全斗煥 浮上 契機
    • 김재춘 助言 흘려들은 정승화의 崎嶇한 運命

    1. 朴正熙, 윤필용, 손영길의 因緣

    6·25戰爭 中 釜山에서 開校한 陸軍士官學校는 生徒들에게 4年間 正規 大學課程 敎育을 시킨 뒤 學士學位를 授與하고, 1955年 生徒들을 陸軍 少尉로 任官시켰다. 6個月間 短期 敎育을 받고 任官한 陸士 1~10期 出身과 區別하는 次元에서 ‘正規 陸士 1期’라고 했다. 1973年 윤필용 將軍 事件 以後 ‘陸士 11期’라고 불렀다.
    陸士 11期는 1966年 ‘하나회’라는 親睦團體를 組織했다. 1973年 윤필용·손영길 將軍이 쿠데타 陰謀 謀陷을 받고 拘束되자 ‘하나회’는 軍內 政治 組織으로 變質됐다. 以後 大韓民國 君을 주무르면서 전두환, 노태우 大統領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93年 김영삼 大統領에 依해 軍에서 퇴출당했고, 1996年에는 法의 審判을 받으면서 完全히 沒落했다. ?
    陸士 11期로 任官한 손영길, 정호용, 路程記 小委는 前方(講院 인제·華川) 地域 7師團에 配置됐다. 當時 7師團長은 김익렬 將軍이었다. 1957年, 6軍團 副軍團長이던 朴正熙 將軍이 7師團長으로 赴任했다. 朴正熙는 예전 5師團에서 같이 勤務한 윤필용 中領을 軍需參謀, 차규헌 中領을 人事參謀, 조천성 中領을 情報參謀로 布陣시켰다. 셋 다 陸士 8기다.
    朴正熙 師團長이 赴任할 때 손영길 中尉는 7師團 3聯隊 9中隊長으로 勤務했다. 當時에는 한 해 동안 1個 中隊가 脫營 乃至는 越北해 脫營兵 問題로 前 部隊가 골치를 앓았는데, 손영길의 9重大에선 脫營兵이 한 名도 없어 朴正熙 師團長으로부터 稱讚을 받았다.
    1961年 朴正熙 將軍이 5·16 軍事政變을 일으킨 後 윤필용 將軍은 祕書室長, 손영길 大尉는 專屬副官으로 함께 勤務했다. 그러나 1973年 朴正熙 大統領은 윤필용, 손영길 將軍을 쿠데타 嫌疑로 拘束한다. 只今까지 이 事件은 軍部 內에서 있을 수 없는 抗命 事件으로 置簿됐다.
    그러나 이 ‘쿠데타 陰謀 事件’은 事件 發生 두 달도 못 돼 ‘謀陷’에 依한 것으로 朴 大統領에게 報告됐고, 이 事件을 調査해 報告하라는 指示를 받은 강창성 保安司令官은 調査·報告 不實로 補職 解任을 當했다. 42年이 지난 2015年 두 將軍의 쿠데타 陰謀 嫌疑는 大法院에서 無罪 判決을 받았다.
    筆者는 1973年 4月 진종채 新任 首警司令官을 通해 朴正熙 大統領에게 윤필용 事件은 ‘謀陷에 依한 事件’임을 報告한 事實이 있다. 나는 이렇듯 只今까지 世上에 ‘잘못 알려진 事件’에 對한 眞實을 말하려 한다.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陰謀 謀陷 事件’은 大韓民國 50年 政治史에 至大한 影響力을 미친 事件이다. 惡化(惡貨)가 洋畫(良貨)를 構築하듯, 忠臣이 逆賊으로 몰린 事件이다. 30餘 名의 優秀한 將校가 退出되면서 1979年 10·26事件을 일으킨 김재규가 再登場하는 端初를 提供했다. 1979年 12·12事件과 1980年 5·18民主化運動의 原因(遠因)이기도 하다. 이 事件의 餘波로 전두환, 노태우 將軍은 大統領 자리에까지 올랐다.



    2. 全斗煥의 電話

    7師團長을 마친 朴正熙 將軍은 1軍 參謀長, 管區司令官을 거쳐 1960年 釜山 軍需基地司令官으로 赴任했다. 손영길 大尉는 7師團을 떠나 論山 新兵訓鍊所에서 中隊長으로 勤務했다. 1960年 孫 大尉는 故鄕 蔚山으로 가던 길에 朴正熙 司令官을 찾아가 人事했는데 그 直後 軍需司令部로 轉入해 警備中隊腸을 지냈다.
    그다음 해에 5·16 軍事政變이 일어났다.
    政變 다음 날인 5月 17日, 손영길 大尉는 서울에서 學軍團 敎官으로 勤務하던 陸士 同期生이자 切親한 親舊 全斗煥 大尉로부터 電話를 받았다.
    “5·16 主體勢力이 陸軍士官學校에 5·16 支持 市街行進을 要請했는데, 陸士 敎官들이 拒絶하는 바람에 모두 反革命分子로 몰려 拘束됐다. 그러니 손 大尉가 서울에 와서 朴正熙 將軍께 말씀드려 誤解를 풀어주고, 敎官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孫 大尉는 밤 列車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5月 18日 아침 서울驛에서 전두환 大尉를 만났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狀況이 바뀌었다. 陸士 生徒들이 革命支持 市街行進을 했고, 拘束된 敎官들度 모두 풀려났다는 것이다. 孫 大尉는 서울에 온 김에 國家再建最高會議 朴正熙 副議長(當時 議長은 장도영 將軍)을 만나 人事하고는 서울에 온 經緯를 報告했다. 對話를 마친 뒤 그가 “釜山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朴正熙 將軍은 “가긴 어딜 가. 여기서 勤務해”라며 주저앉혔다. 孫 大尉는 그때부터 朴正熙 將軍의 專屬副官으로 勤務했다.



    3. “背信者는 自決” 하나회의 誕生

    손영길 大尉는 朴正熙 副議長에게 陸士 11期 同期生과 後輩들을 國家再建最高會議, 中央情報部, 防諜部隊 等 核心 權力機關에 勤務할 수 있도록 推薦한다. 國家再建最高會議 祕書室長 윤필용 大領에게 推薦해 全斗煥 大尉는 民願祕書, 최성택 大尉는 總務祕書, 路程記 大尉는 警護室에 勤務하게 했다. 後輩(13期)인 신재기 大尉는 朴正熙에 이어 國家再建最高會議 副議長이 된 이週日 將軍 專屬副官으로 推薦해 함께 勤務한다.
    陸士 11期 中 손영길·전두환·김복동 大尉가 頭角을 나타내면서 優劣을 가릴 수 없는 競爭 構圖가 形成됐다. 朴 大統領 專屬副官 孫 大尉가 莫强한 파워를 갖고 親睦 모임을 先導했다. 1964年 11月 孫 大尉는 少領으로 進級해 靑瓦臺 外郭을 警備하는 30大隊長에 補職된 데 이어 1966年 中領으로 進級하면서 自他公人 正規 陸士 出身의 象徵이 됐다. ?
    손 中領은 部隊隊長을 選拔하면서 優秀한 後輩를 選拔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11期 同期生을 中心으로 後輩 旗手마다 10名 程度를 包含시킨 ‘優秀 將校 모임’이 必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66年 初 30大隊長 손 中領이 全斗煥·김복동·盧泰愚·정호용·권익현·박갑용·路程記·최성택·박병하(異常 11期), 박희도(12期), 배명국·이종구(14期), 金相球(15期), 金晋榮·허화평·허삼수(異常 17期) 等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은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國家와 民族을 위해 충성하자. 不淨腐敗를 멀리하고 正義로운 軍人이 되자. 그리고 朴 大統領의 崇高한 愛國愛族 精神을 받들고 忠誠을 다하자”는 決意를 하고, 모임 名稱을 ‘하나회’로 定했다. 전두환 中領을 會長으로, 李鍾九 大尉를 總務로 選出했다.
    ‘會員 間에는 義理를 지키고, 배반하는 者는 自決해야 한다. 組織은 絶對로 祕密로 해야 한다’는 行動綱領을 滿場一致로 採擇하고, 이를 徹底히 지키기로 다짐했다. 期數別 模範 將校 10名 程度를 選拔해 加入시켰고, 先後輩 間 親睦과 紐帶를 强化하자는 決意를 한 뒤 ‘兄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



    “靑瓦臺에 안 계시는 동안에 불미스러운 事件이 發生했습니다”라고 報告했다. 陸士 11期 出身 一部 領官, 尉官 將校들이 쿠데타 陰謀를 꾸미다 防諜部隊에 摘發돼 防諜部隊長이 拘束해 調査했습니다. 靑瓦臺에 到着하시면 報告하려고 防諜部隊長이 待機 中입니다.”
    朴 大統領이 “어떤 將校들이야?” 하고 묻자 朴 室長은 “正規 陸士 11期 出身 將校들인데 전두환 少領, 정호용 大尉 等입니다”라고 對答했다. 이때 앞자리에 있던 大統領 專屬副官 손영길 少領이 “閣下, 이 事件은 陰謀입니다. 正規 陸士 出身 11期들이 이제 겨우 大尉, 少領입니다. 무슨 힘이 있다고 쿠데타를 謀議했겠습니까. 전두환 少領은 最高會議 議長 祕書室에 勤務한 將校입니다. 誤解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손 少領이 이렇게 말하자 朴 室長도 더 以上 報告하지 않았다. 손 少領은 나아가 “잘해보려다 誤解를 받고 調査를 받게 됐으니 閣下께서 이들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懇請했다.
    朴 大統領이 靑瓦臺에 到着하니 鄭昇和 防諜部隊長이 國防部 長官, 參謀總長 陪席 下에 쿠데타 陰謀 事件을 報告하려고 待機 中이었다. 그러나 朴 大統領은 報告를 받기도 前에 “正規 陸士 出身으로, 階級도 낮은 將校들이 무슨 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겠나. 이들을 잘 교육시키고 타일러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國家를 위해 獻身할 수 있도록 訓放하라”고 指示했다.
    事件은 終結됐다. 그때 軍 生活을 마감하고 處罰받았어야 할 전두환 少領, 盧泰愚 大尉 等은 同期生인 손영길 少領 德分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쿠데타로 調査받은 記錄은 機務司 存案記錄에 分明 存在한다.? ?



    6. 전두환, 노태우를 살려준 後患

    이 이야기는 53年 前인 1963年에 ‘쿠데타 陰謀’라는 犯罪行爲를 저지른 者들에 對한 숨은 이야기다. 이 事件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쿠데타를 主導한 전두환 少領이 30大隊長, 第1空輸旅團長, 第1師團長을 거친 뒤 保安司令官과 中央情報部長을 兼任한 後 1980年 第5共和國 大統領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인 盧泰愚 大尉는 1988年 第6共和國 大統領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 이 事件이 擧論된 것은 1973年 이른바 윤필용 事件으로 拘束됐다가 1975年에 出監한 손영길 前 將軍이 自身의 집을 慰勞車 訪問한 전두환, 노태우 將軍에게 言及하면서다. 이 자리에서 손 前 將軍이 “내가 쿠데타 陰謀를 한 事實이 있냐. 너희들은 1963年에 實際로 쿠데타 陰謀를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防諜隊에 拘束돼 調査받을 때 내가 大統領에게 懇請해 살려내지 않았냐. 그러니 너희들도 내가 쿠데타 陰謀를 꾸미지 않았다고 얘기해줬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자 두 사람은 아무 말 못하고 듣기만 했다. 孫 前 將軍은 “義理를 배반할 境遇 自決하기로 盟誓한 사이가 아니냐. 너희는 나에 對한 義理를 지켰어야 했다”며 섭섭함을 吐露했다.
    이 事件의 一部가 두 番째로 擧論된 것은 2014年이다. 中情部長을 지낸 김재춘 將軍이 2014年 世上을 떠나자 이 事件을 아는 陸士 11期 中 한 名이 블로그에 追慕글과 몇 張의 寫眞을 인터넷에 올렸다. 內容은 이렇다. ?
    “1979年 10·26이 發生한 後 김재춘 將軍은 親舊인 陸軍參謀總長이자 戒嚴司令官 정승화 將軍을 만나 1963年 7·6 쿠데타 陰謀 事件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여러 番 만남을 試圖했으나 鄭 將軍이 바쁘다며 時間을 내주지 않아 12·12 直前에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이때 金 將軍은 正 參謀總長에게 ‘7·6 쿠데타 事件을 調査한 後 이 事件을 主導한 전두환, 노태우를 處理하지 못하고 살려준 것은 잘못한 일이다. 只今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操心하라’고 助言했으나, 鄭 總長은 ‘이番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말라’고 自信 있게 答했다고 한다.”
    정승화 將軍은 結局 新軍部에 依해 체포당했다. 결론적으로 1963年 7·6 쿠데타 陰謀 事件은 전두환 少領과 盧泰愚 大尉 等의 政治的 欲望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7. 하나회, 윤필용 事件 後 全斗煥 私組織으로

    1973年 3月 윤필용, 손영길이 拘束되고, 이 事件을 調査하던 강창성 保安司令官이 쿠데타 陰謀 背景에 하나회라는 組織이 있다는 것을 擧論하려 했다. 이때가 하나회라는 組織을 認定하고 처음 公開한 時點이다. 姜 司令官은 하나회 會長인 전두환 將軍을 調査하려 했다. 그러나 박종규 警護室長과 전두환 將軍의 反撥로 中斷된다.
    하나회는 손영길 將軍이 拘束된 1973年 以後 政治 志向 軍人들에 依해 私組織으로 變質됐다. 1979年 전두환 將軍이 保安司令官이 되고 난 뒤 더욱 세(勢)를 擴張해 第5共和國과 第6共和國의 核心 勢力이 됐다.
    그로부터 11年이 지난 1991年 9月과 10月, 나는 신동아에 ‘하나회 파워게임’을 連載하면서 하나회라는 組織이 軍內에 存在해서는 안 된다고 主張했다. 나는 首都警備司令官 노태우 將軍의 非違 事實을 摘發한 적도 있다. 노 司令官이 9空輸 旅團에서 같이 勤務한 特戰司 領官級 將校 조某 中領 等에게 現金封套를 돌리는 것을 摘發하고 保安司令部에 報告해 돈 封套를 卽刻 回收하도록 措置한 事件이다. 이때부터 하나회 組織은 그 實體를 徐徐히 드러냈고, 一般 將校들로부터 非難을 받기 始作했다. 하나회 會員이 아니면 優秀한 將校라 할지라도 進級·補職에서 除外됐다. 하나회는 不平不滿과 葛藤의 要因이 돼 軍의 團結과 士氣를 떨어뜨렸다.
    新東亞 連載 以後 하나회에 對한 認識이 極度로 惡化됐고 YS는 大統領이 되자마자 이 組織을 瓦解시켰다. 當時 나는 陸軍參謀總長 金晋榮 大將을 爲始해 하나회 會員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쉬운 機務司令官·首都警備司令官·特戰司令官 等 重要한 3個 大全鰒部隊長을 掌握한 事實에 驚愕했다. YS가 이들에 對해 잘 알지 못한 狀態에서 電擊的으로 處理한 게 아닌가 했다. 이들이 反旗를 들지 않았기 망정이지 危險千萬한 일이었다. YS의 가장 重要한 業績은 하나회를 除去함으로써 軍部가 다시는 政權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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