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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變化의 땅’ 미얀마에 切實한 것? 最善은 YS, 車線은 라모스|新東亞

오늘 ‘變化의 땅’ 미얀마에 切實한 것? 最善은 YS, 車線은 라모스

안경환 前 國家人權委員長 現地 르포

  • 안경환 | 서울대 法學專門大學院 名譽敎授, 第4代 國家人權委員長 ahnkw@snu.ac.kr

    入力 2016-01-12 14: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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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月 아웅산 수지 女史가 이끄는 野黨 民主主義民族同盟(NLD)李 總選에서 壓勝하면서 미얀마에 햇살을 드리웠다. 그러나 53年 軍部獨裁의 그늘은 如前히 스산하다. 미얀마에도 봄은 오는가. 안경환 前 國家人權委員長은 11月 15~19日 미얀마 人權委員會와 人權 懸案에 關한 國際調査團의 一員으로 옛 首都 양곤을 訪問해 希望이 움트는 미얀마 現地 取材에 나섰다.
    “아웅산 수지의 버마, 出口는 있는가?”
    10餘 年 前에 쓴 제법 긴 글의 題目이다. 1989年 軍事政府는 미얀마로 國號를 바꿨지만 國際社會에서는 如前히 버마로 通稱되고 있었다. 優雅한 姿態의 女人 아웅산 수지(70)는 버마 民主主義의 象徵이었다. 버마 國民은 그를 ‘다우(Daw, The Lady)’로 부르며 景慕한다. 建國의 英雄 마웅 아웅산 將軍의 夫人, 卽 어머니의 타이틀을 相續한 셈이다. 國際社會는 民主主義와 人權의 이름으로 水枝를 絶對善(善)의 化身으로 稱頌하는 反面 그와 버마 國民을 彈壓하는 軍事政府를 惡(惡)으로 規定했다.
    2001年 世界 人權의 心臟, 스위스 제네바에 ‘On-Line Burma Library(OBL)’가 開設된 것을 契機로 버마의 民主化를 支援하는 各種 인터넷 네트워크가 形成됐다. 汎濫하는 各種 ‘수지 文件’을 읽은 筆者가 어렵사리 두 次例 現地를 探問한 뒤에 글을 썼다. 隱密하게 ‘레이디’의 側近도 暫時 만났다. 나라 밖에서 모은 작은 마음의 徵標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現地의 狀況은 바깥에서 듣던 것처럼 一方的이지는 않았다. 軍事政府가 그토록 오래 執權한 것은 國民의 信賴가 全無했다면 不可能했을 것이다. 周邊 强大國 印度와 中國 사이의 緊張을 十分 活用하는 等 國際的 力學關係를 適切히 利用한 外交術이 돋보였다. 奧地를 連結하는 地方道路, 橋梁과 修理施設의 建設 等 社會間接資本(SOC) 構築에 監査하는 地方 住民도 많았다.



    老鍊한 軍部, 崇高한 反對者

    少數民族의 政治的 要求를 適切히 受容해 勢力均衡을 이룬 點도 點數를 얻을 만했다. 또한 開放政策을 통해 相當한 經濟成長을 이룩했고, 先進 外國에 留學生을 보내는 等 테크노크라트(技術官僚) 養成體制를 만든 功績도 작지 않았다. 한마디로, 體制의 源泉的 正當性 問題를 접어둔다면 軍事政府는 한 나라를 이끌 力量을 갖추고 있었다. ?
    反面 오로지 民主的 以上에 依支해 ‘崇高한 反對者’의 길을 걸은 수지와 이름뿐인 그의 政黨(NLD)은 寒心하기 짝이 없었다. 軍部를 支援하는 結果가 된다며 外國 資本의 投資를 말리고, 甚至於는 버마에 旅行조차 오지 말라는 當付를 黨의 公式 立場으로 採擇하는 水準이었다.? ?
    正말이지 답답했다. 出口가 보이지 않았다. 統合된 國內 民主勢力, 國際社會의 壓力, 그리고 民主化運動에 和答하는 軍部 內 勢力이 存在해야만 그나마 希望을 걸 수 있다는 게 專門家들의 診斷이었다. 當時로는 셋 中 어느 하나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버마에도 라모스가 出現할 것인가’라는 歎息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필리핀의 軍人이자 政治人인 피델 라모스의 先例처럼, 軍事政府를 文民政府로 代替하는 過渡期에는 새로운 時代精神에 改名한 軍人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정석의 手順인 듯했다.??? ?



    조지 오웰의 나라

    2015年 11月에 다시 찾은 미얀마는 確然히 달라 보인다. 稀微하게나마 出口가 보였다. 지난 10餘 年 동안 國際社會의 壓力은 한層 强度를 더했다. 軍部 指導者들도 한결 柔軟해졌다. 强勁·穩健勢力 사이의 葛藤은 如前하지만, 世上의 흐름을 正面으로 거스르긴 힘들 것이다. 國內 市場의 開放도 加速化했다. 外國 資本의 導入으로 産業이 誕生했다.
    “미얀마에서는 環境問題를 걱정할 必要가 없다. 도무지 工場이 없으니까.”
    이런 얘기는 이제 옛말이 됐다. 미얀마는 1997年 東南아시아國家聯合(ASEAN)에 加入했고, 2014年에는 議長國이 되기도 했다. 2011年 11月에는 國家人權會가 設立됐다. ‘獨立된 機關’일 것을 要求한 유엔의 基準에는 한참 未達하는 ‘알리바이 機關’이지만, 人權 問題를 公式的으로 다루는 國家機關이 誕生한 것 自體가 意味深長한 일이다. 希望에 가득 찬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作家 조지 오웰은 버마와 因緣이 깊다. 그는 오래前부터 버마 知識人들에게서 ‘偉大한 豫言者’라는 評判을 얻었다. 오웰이 버마를 念頭에 두고 3卷의 小說을 썼다는 것이다. 題目이 明示하는 ‘버마 時節(Burmese Days, 1934)’에 더해 世界人의 古典이 된 ‘동물농장(Animal Farm, 1945)’과 ‘1984年(Nineteen eighty Four, 1949)’도 버마 이야기라는 것이다.




    ‘버마 時節’은 英國 植民地 時節의 버마 狀況을 그린 一種의 年代記다. 靑年時節 植民地 警察로 勤務한 오웰 自身의 體驗이 投影됐다. 主人公인 英國 官吏가 自殺하는 것은 帝國主義의 沒落을 象徵한다고 읽힌다. 事後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오웰은 그 時節 現地人의 風習에 따라 손마디마다 文身을 새겼다고 한다. 아직도 버마의 시골사람들은 文身을 즐긴다. 銃彈을 막아주고 뱀에게 물리지 않게 하는 符籍이라고 믿는다.
    1947年 英國의 支配에서 벗어난 獨立國 버마는 複數政黨制 議會民主主義를 標榜했고, 1950年代엔 아시아에서 가장 前途洋洋한 新生國家로 비쳤다. 肥沃한 땅, 識見 높은 政治指導者, 豐盛한 文化인, 民主主義와 法治主義의 定着 等 모든 面에서 模範國이었다.
    그러나 1962年 쿠데타로 執權한 네윈 軍事政府는 ‘버마式 社會主義’를 志向했다. 그 結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轉落했다. 바로 ‘동물농장’의 이야기다. 이 作品에서 돼지들은 人間의 農場을 叛亂으로 무너뜨리고 動物共和國을 세운다. “모든 動物은 平等하다”라는 ‘革命’ 슬로건을 내걸지만 돼지階級의 獨裁가 强化되면서 “그러나 어떤 動物은 다른 動物들보다 더 平等하다”라는 但書가 덧붙여진다. 버마의 軍部가 곧 돼지다.
    ‘1984年’은 個人의 自由와 私生活이 悽慘하게 蹂躪되는 全體主義 社會를 그렸다. 嚴酷한 警察國家, 無慈悲한 軍事獨裁에 시달리는 미얀마人의 日常이었다. ‘조지 오웰 讀書 클럽’李 不穩團體로 낙인찍히고, 그의 作品이 流通 禁止된 理由를 斟酌할 수 있다. ?
    오웰은 肺結核으로 죽는 瞬間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病床에서 構想한 作品의 題目은 ‘吸煙室 이야기(A Smoking Room Story)’다. 不過 3000~4000單語 分量의 短篇小說을 構想한 것이다. 以上에 불타는 英國 靑年이 植民地 버마의 濕한 정글 生活 끝에 어떻게 變貌하는지를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小說의 아우트라인과 몇 個의 文章만 남긴 채 世上을 떠났다. 어쩌면 담배와 肺癌의 相關關係에 對한 豫言的 內容을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植民地 經營(담배)은 國際的 平和共同體(人體)를 破壞하는 癌的 制度라는 메시지를 담지 않았을까. 어쨌든 作家의 버마 사랑이 각별했던 만큼 이 나라에서 作家 오웰의 地位는 神話的이다.



    凍土에 핀 希望의 싹

    킨 마웅 소는 양곤의 택시 運轉士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요행히 아내와 아들을 얻었다. 1993~94年 양곤臺 歷史學徒이던 그는 入學한 學校 代身 世稱 ‘印稅인(In Sein)大學’을 卒業했다. 印稅인은 惡名 높은 政治犯 監獄이다. 發音대로 ‘精神 나간 놈들(insane)’의 收容所라는 冷笑的 諧謔이 通用된다. ‘印稅靭帶’ 出身을 採用해줄 職場이 없었기에 自營業者의 길을 擇했다. 양곤에서 英語를 할 줄 아는 택시 運轉士는 大部分 學生運動圈 出身이라고 한다. 오웰度 勤務한 적 있는 이 堅固한 植民地 建物은 오늘날에도 使用된다. 歷史博物館으로 變한 西大門刑務所가 聯想된다.
    마웅 소에게 이 나라 民主化運動의 聖地들을 案內해달라고 注文했다. 유니버시티 애비뉴 54番地, 수지의 邸宅 앞에 自動車를 세우고 寫眞을 찍었다. 過去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다. 양곤臺 中央圖書館의 司書主任은 語塞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그의 學生 時節을 記憶하는 듯했다. 大學 正門 오른便에 鐵網으로 가둔 綠地가 보인다. 오래前에 學生會館이 서 있던 자리다. 네윈 執權 時節에 學生會館을 撤去하고 새들의 놀이터로 造成했다고 한다.
    水位는 ‘許諾 없이’ 鐵網 안을 들여다보는 外部人에게 露骨的인 不快感을 드러냈다. 鐵網 너머 報 아웅 키油(Bo Aung Kyaw)의 記念碑가 마구 자란 草木 사이에 서 있다(‘보’는 ‘指導者’라는 뜻). 스산한 風景이다. 1938年 12月 20日, 英國 警察의 棍棒에 맞아 죽은 最初의 學生이다. 붉은 甓돌의 바고(Bago) 男學生 寄宿舍는 아웅산이 學生 時節에 寄宿한 建物이다. 버마 獨立運動의 搖籃인 셈이다.? ?
    양곤臺 웹사이트에선 뜻밖에도 수지의 動映像이 放映된다. 英語 메시지다. 大學發展委員長의 일을 맡아 寄附를 督勵하는 役割이다. 國際的 名聲을 勘案하면 더없는 適格者이지만 事緣이 궁금하다. 양곤臺 法學部의 專任敎授는 單 3名이다. 講師 10名과 外來敎授 3人이 일손을 더한다. 學生 數도 나라의 規模를 勘案하면 너무나 적다. 軍人은 本能的으로 法律家를 싫어한다. 于先 말이 많은 데다, 그들에게 公開的으로 말할 場所를 마련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캠퍼스에 한국국제교류재단(The Korea Foundation)의 痕跡이 보인다. 반가운 일이다. ?
    아웅民 키네는 갓 17歲가 된 高等學生이다. 2015年 3月 10日, 양곤에서 100餘 마일(藥 160km) 떨어진 中小都市 레破斷에서 街頭示威가 일어났다. 政府가 公表한 ‘學院安定法’ 制定을 反對해 나섰다. 一部 地域에 大學生과 高等學生의 祕密 連帶組織이 結成돼 있다고 한다. 警察의 無差別 暴力이 뒤따랐다. 3月 23日子 美國 時事週刊誌 ‘타임’에 실린 寫眞 한 張이 少年을 世界的 스타로 만들었다. 咆哮하는 듯 空中에 몸을 날리며 소리치는 少年을 에워싸고 10餘 名의 征服 警察이 棍棒 洗禮를 퍼붓는 寫眞이다.
    少年은 2個月 以上 타라와디 監獄에 監禁됐다가 保釋으로 釋放됐다. 어린 나이를 勘案한 裁判部의 配慮라고 했다. 少年은 國家人權委員會에 救濟를 申請했고, 人權委는 異例的으로 警察이 示威鎭壓 節次를 遵守하지 않았다는 意見書를 發表했다. 그러나 問題의 核心인 ‘集會 示威의 自由’에 關해서는 言及하지 않았다.? ?
    國際 人權團體의 調査에 따르면 現在 미얀마에는 最小 600名 以上의 政治犯이 收容돼 있다. 持續的인 國際的 壓力에 答하듯 2015年 4月 테인 세인 大統領은 모든 政治犯을 釋放하겠다고 發表했다. 그러나 約束을 履行하는 代身 바로 다음 날 大學生 둘을 새로 拘束했다.?


    “나의 舞臺는 거리와 法廷”

    總選을 한 週 앞둔 10月 末, 監禁된 60餘 名의 레破斷 示威學生은 모든 政治犯의 釋放을 要求하며 斷食籠城에 들어갔다. 11月 17日 양곤의 國立病院에서 만난 두 學生은 물만 마시면서 各各 24日, 22日을 버텼다고 했다. 그들은 나라의 未來에 對한 希望에 들떠 있었다. 1時間 面談하고 나오는 우리의 뒤를 한 무리의 僧侶들이 이어받았다. 몇 時間 後, 學生들이 斷食을 풀고 監獄으로 되돌아가 將棋鬪爭에 들어갔다는 消息이 傳해졌다. 이 나라 佛僧들의 道德的 權威를 確認케 하는 場面이다.
    로버트 산 마웅은 特異한 履歷의 辯護士다. 여섯 次例 政治犯으로 逮捕됐고 總 13年間 服役했다. 監獄 안이든 밖이든 버마의 모든 政治犯 뒤에는 그가 버티고 있다. 그는 2012年에 停止됐던 辯護士 資格을 되돌려받았다. 2015年 마틴 에널스 人權賞(Martin Ennals Award for Human Rights Defenders)을 受賞했다. 作故한 노벨平和賞 受賞者의 이름을 따서 1993年에 創設된 이 賞은 ‘人權運動家의 노벨賞’이라는 別稱이 따른다.
    양곤 市內 허름한 거리에 자리한 壅塞한 居所 兼 事務室에 ‘衛生法 클리닉(Hygienic Legal Clinic)’이라는 堂號(堂號)가 붙어 있다. 世上을 깨끗하게 만드는 法律事務所라는 뜻이다. 온갖 雜多한 文件이 빼곡히 들어찬 한쪽 壁面 中心에 수지의 寫眞 두 張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는 收支가(家)와 각별한 關係가 있다. 1954年 5月 26日 新生兒 로버트를 世上의 빛으로 받아낸 사람은 타워레인 病院의 首看護師이던 수지의 어머니 다우 킨 키였다. 後日 로버트는 수지의 伯父가 運營하던 法律事務室에서 實務 硏修를 마치고 辯護士가 된다.
    버마의 學生 民主化運動은 1974年 12月 世稱 ‘郵 탄트 抗拒(U Thant Uprising)’로 始作됐다. 유엔 事務總長(1961~1971)을 지낸 于 탄트가 그해 死亡했다. 그는 네윈에 依해 逐出된 禹 漏 總理의 側近이었다. 國際的 名望家 禹 누가 美國에서 反政府運動을 벌이자 네윈은 國境을 遮斷하고 彈壓政治를 强化했다. 國民의 期待와 달리 네윈은 于 탄트의 國家葬(國家葬)을 拒否했다. 양곤臺 學生들이 學校 構內에 墓域을 造成하고 追悼式을 擧行하자 警察의 無差別 銃擊과 逮捕가 뒤따랐다.
    로버트道 그때 逮捕됐다. 40年 苦行의 始作이었다. 로버트는 自身은 絶對로 政治에 參與하지 않는다는 所信을 闡明한다. 모든 政治家는 權力의 便이고 自身은 民衆의 便임을 거듭 强調한다. “萬若 收支가 要請할 境遇 人權委員이라도 맡으면 어떠냐”고 떠봐도 그의 反應은 斷乎했다. “나의 舞臺는 거리와 法廷이다.”? ?



    主婦에서 戰士로

    마 彈다르는 11月 總選에서 수지의 黨(NLD) 候補로 下院議員에 選出돼 2016年 2月 正式으로 登院한다. 地域區는 이라와디 地球의 엔메타韻(Enmae Township). 그는 2014年 8月 軍部의 銃彈에 男便을 잃었다. 國際社會에도 널리 알려진 코 파게티(Ko Par Geti) 事件이다. 言論人이던 男便은 軍部의 非理를 取材하다 殺害당했다. 서둘러 暗埋葬한 그의 屍體가 發見됐다. 軍部는 그가 武器를 뺏으려 했기에 射殺했다며 正當防衛라고 主張했다. 그를 殺害한 軍人은 處罰되지 않았다.
    아내는 上·下 兩院에 請願을 냈으나 감감無消息이다. 다만 請願을 받은 大統領은 國家人權위에 眞相調査를 指示했다. 人權委는 두 次例 儀禮的으로 安否를 물었을 뿐이다. “當身이 國會에 登院하면 眞相調査와 加害者 處罰이 이뤄질 것 같으냐”고 묻자 마 彈다르는 씁쓸한 微笑를 지었다. “個人의 問題가 아니라 나라 全體의 問題”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건넨 작은 부채에 그려진 수지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
    2008年 制定된 미얀마의 새 憲法은 別途의 場(7張)을 두고 다마吐(Damadaw,버마 軍隊)의 特殊한 地位를 明示했다. 以前 憲法에도 類似한 條項이 있었지만 한層 强化됐다. 버마 社會의 位階秩序는 어김없이 軍(軍)-官(官)-民(民) 巡이다.
    1988年 8月 8日, 그 堅固한 秩序에 正面으로 挑戰하는 一大 事件이 터졌다. ‘Four 8(8888)’로 불리는 國民 蜂起가 일어나자 아웅산 수지의 人生은 劇的으로 바뀐다. 外國人 學者 男便과의 사이에 子女를 둔 平凡한 인텔리 主婦이던 그가 猝地에 버마 國民의 英雄 아웅산 將軍의 後繼者로 浮上한 것이다. 어머니의 臨終과 葬禮를 爲해 一時 歸國한 그는 民主化를 熱望하는 버마 國民의 ‘永久 人質’이 됐다. 示威를 武力으로 鎭壓한 軍部는 水枝를 家宅年金에 處한다. 1989年 軍事政府는 國號를 미얀마로, 首都 郎君을 양곤으로 改稱한다. 英國 帝國主義의 치욕스러운 殘滓를 除去하는 ‘歷史 바로 세우기’ 意識이었다.


    憲法이 保障한 軍部 特權

    1990年 5月, 確信에 찬 軍部는 對國民 約束을 지켜 選擧를 치른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지의 急造된 政黨(NLD)李 壓勝한다. 唐慌한 軍部는 選擧의 效力을 否認한다. 그 選擧는 버마族(族)을 包含한 미얀마 全體 人民의 憲法을 만들기 위한 制憲會議 代表를 一部 뽑는 意識이었다고 牽强附會(牽强附會) 法理를 폈다. 2005年, 政府는 느닷없이 行政首都를 內陸에 새로 建設한 都市 ‘네피도’로 옮긴다는 布告를 한다. 祕密裏에 몇 달에 걸쳐 進行된 建設工事에는 中國의 資本과 技術, 勞動力이 動員된 것으로 드러났다.
    457個 條文으로 治粧한 새 憲法은 異例的으로 權力構造 條項을 앞세우고 基本權 條項(8張)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現實의 正直한 投影인 셈이다. 憲法은 血統의 純粹性을 大統領의 資格으로 要求한다. 卽 配偶者나 直系존비속이 外國 國籍을 保有하거나 保有했던 사람은 大統領이 될 수 없다. 勿論 水枝를 念頭에 둔 規定이지만, 이러한 民族主義 情緖의 뿌리는 깊다. 1947年 憲法과 1974年 憲法에도 類似한 條項이 있었다. 外國人과 結婚한 사람으로 20年 以上 外國에서 滯留한 사람은 公職에 나설 수 없었다.
    버마 軍隊의 地位는 憲法 以上으로 公告하다. 法典에 死刑(死刑)은 있지만 1988年 以來 한 件도 執行되지 않았다. 그러나 法的 節次를 거치지 않은 死刑(私刑)은 蔓延한다. 軍이 主犯이다. 軍의 힘은 地方으로 갈수록 强力하다. 軍事的 必要를 내세우면 無制限 土地收用이 可能하고, 土地補償委員會는 軍과 官이 支配한다. 땅을 빼앗긴 農民들의 怨聲이 外國 人權團體의 귀에도 쟁쟁하다. 軍의 協力 없이는 民主化가 不可能하다는 게 儼然한 現實이다.
    世界史엔 그런 例가 많다. 1次 世界大戰에서 敗한 獨逸에서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이끄는 社會民主黨은 傳統的 地主階級인 융커를 基盤으로 한 帝國軍部와 協商을 통해 過渡期 秩序를 잡았다. 軍이 議會主義를 尊重하는 代身 議會는 軍의 特權을 認定한다는 ‘에버트-그레나’ 協定이다. 그러나 獨逸 軍隊는 特權만 누렸지, 히틀러의 執權을 事前에 막지 못했다.
    미얀마에 김영삼(YS) 前 大統領 같은 人物이 必要하다는 생각이 든다. 自身을 選出한 文民의 힘을 바탕으로 軍部를 制壓할 强力한 指導者의 出現이 切實하게 期待된다. 그러나 버마 社會는 아직 그럴 만한 段階가 아닌 것 같다. 現在로서는 YS보다는 라모스가 正答에 더 가까울 것 같다. ?
    버마-미얀마 軍部는 韓國의 統治術을 배웠노라고 露骨的으로 말하곤 했다. 大統領에게 國會議員 3分의 1의 指名權을 준 維新憲法(1972~1980)李 미얀마 새 憲法의 모델이다. 한동안 양곤臺 캠퍼스는 閉鎖, 分散, 移轉을 거듭했다. 1975年 서울대 캠퍼스가 동숭동에서 冠岳山으로 移轉한 것도 學生運動을 效果的으로 封鎖하기 위한 妙手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
    世界는 迫害받는 民主化의 指導者 收支에게 過度한 好意를 보내왔다. 그러나 國家權力을 쥔 樹脂의 境遇는 다를 것이다. 人權과 民主라는 以上보다 힘과 目前의 利害에 따라 움직이는 게 國際政治다. 政治 民主化 要求를 앞세워 經濟 制裁를 풀지 않는 美國과 이미 버마 땅 깊숙이 資本을 담근 中國 사이에 均衡을 잡는 것도 큰 課題다. 11月 選擧는 水枝 黨의 壓勝으로 끝났다. 上·下院 選出職 491席 中 390席을 確保해 軍部에 自動 割當된 166席(25%)을 除하고도 折半을 훌쩍 넘겼다.



    憂慮 속 祝福과 激勵

    關心의 焦點은 大統領 자리다. 憲法에 따라 下院, 上院, 軍部가 各各 한 사람씩 候補를 내고 議員의 過半數를 얻은 사람이 大統領이 된다. 누가 行政府의 首班이 되든지 國政의 最終 責任은 수지와 選擧와는 無關하게 行政府를 堅固하게 掌握한 軍部의 몫이다.
    버마는 分明히 달라졌다. 적어도 양곤에서는 自由의 烈風이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그러나 噴出하는 國民의 欲望을 精製된 制度로 體化하는 國家的 課業은 모두에게 忍耐와 犧牲을 强要한다. 가녀린 容貌의 貴婦人, 아웅산 수지의 앞날에 憂慮 섞인 사랑의 祝福과 激勵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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