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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故鄕|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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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故鄕

《네이멍구自治區》

  • 글·寫眞 김용한|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7-10-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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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下無敵의 盲腸 濾胞와 그의 赤兎馬가 달리던 땅. 世界 最大 征服者 칭기즈칸을 輩出한 땅. 그러나 오늘날의 內몽골은 ‘사람은 늘고 家畜은 줄어든’ 흔한 現代 都市일 뿐이다. 서투른 開發로 草原은 沙漠이 되고, 地下資源을 캐내 間 現場엔 至毒한 汚染만 남았다. 몽골 戰士의 後裔들은 말한다. 돈 벌어 아파트 사고 싶다고.
    旅行 中 內몽골 出身 中國人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와~ 그러면 너도 어릴 때 말 타고 다녔어?”

    그는 어이없다는 듯 對答했다. “아니거든?! 內몽골度 이제 車 타고 다니거든!”

    後날 內몽골의 構圖(區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가보니 높은 빌딩이 줄지어 서 있고 넓은 車道에 車들이 달리는 平凡한 都市였다. 말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아 內몽골의 興趣를 느낄 수 없었다.

    한 男子가 車道를 無斷橫斷해 中央線 가드레일을 넘는 모습이 그나마 가장 內몽골다웠다고 할까? 그는 가슴 높이의 가드레일을 매우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한달음에 말 위에 올라타는 몽골 戰死 같았다.

    네이멍구自治區(內蒙古自治區)의 略稱은 ‘어리석을 몽(蒙)’字다. 몽골語로 ‘몽골’은 ‘世上의 中心’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원의 한족은 몽골族에 ‘蒙古(蒙古)’라는 이름을 붙였다. ‘無知蒙昧하고[蒙] 固陋한[古] 것들’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한족에게 몽골族은 無知함을 일깨워줘야 할, 卽 啓蒙(啓蒙)의 對象이었다.



    이 같은 偏見은 몽골의 祖上, 匈奴 때부터 始作됐다. ‘匈奴’는 匈奴語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中原은 ‘凶惡한 奴隸’를 떠올리게끔 ‘匈奴(匈奴)’라고 音借했다. 司馬遷은 比較的 점잖게 下(夏)나라 하후(夏侯)氏의 後裔가 北方으로 가서 흉노족이 되었다고 說明했지만, 戰國時代 중원의 奴隸들이 混亂을 틈타 北方으로 도망쳐 흉노족이 되었다는 俗說이 橫行했다. 중원의 떨거지들이 北方 奧地에 가서 야만스럽게 산다는 蔑視가 깔려 있다.



    ‘황소 꼬리가 부러지는 추위’

    그러나 匈奴는 중원의 偏見에 휘둘리지 않았다. 中原이 天下의 中心이라고 自負했듯이, 匈奴 亦是 自身의 터전을 世上의 中心으로 여겼다. ‘하늘의 아들’, 卽 天子(天子)가 中原을 다스리듯이, 亦是 하늘(Tengri)의 아들인 탱犁鶘度선우가 北方을 다스렸다.
     
    北方 草原은 매우 거친 땅이다. 北쪽인 데다 高原地帶라 겨울은 매우 길고 여름은 매우 짧다. 몽골국의 官公署는 每年 9月 中旬 暖房을 틀기 始作해 5月 中旬에야 멈춘다. 몽골語는 추위를 區分하는 말이 發達했는데, ‘量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 ‘3살 된 황소의 뿔이 얼어 부러지는 추위’ ‘4살 된 황소의 꼬리가 얼어 부러지는 추위’ 等 추위의 이름도 매우 殺伐하고 다양하다.

    草原은 日照量과 물이 적고 乾燥해 풀만 자랄 수 있을 뿐 農事에 不適合하다. 풀조차 家畜이 다 뜯어먹으면 草原은 금세 荒蕪地와 沙漠으로 變한다. 따라서 몽골 高原에 사는 이들은 家畜을 데리고 牧草地를 옮기며 살아가는 遊牧民이 되었다.

    유목은 草原에 가장 적합한 生活樣式이었지만, 그 삶은 決코 만만치 않았다. 精誠껏 家畜을 길러도 벼락 한 番, 暴雪과 洪水 한 番에 沒殺당하기도 한다. ‘將軍도 화살 한 對面 끝장나고, 三代 富者도 暴雪 한 番이면 亡한다’는 몽골 俗談은 草原 生活의 어려움을 端的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遊牧民이라 해도 遊牧만으로 生活하기란 힘들었다. 사냥, 掠奪, 장사 等 여러 活動을 竝行해야 했다. 이런 遊牧民에게 戰死(戰士)는 매우 重要했다. 牧草地와 家畜을 지키고, 사냥을 이끌며, 戰爭·掠奪을 遂行하는 일은 不足의 生存과 直結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北方 遊牧民들은 勇士를 尊敬했고, 指導者를 뽑을 때에도 能力을 最優先으로 考慮했다.


    草原의 戰士들

    여러 部族이 모여 會議를 통해 優秀한 指導者를 選出하는 것은 平等하고 合理的으로 보인다. 그러나 副作用도 만만치 않았다. 會議 決定에 不服하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며 不足 聯盟 間 戰爭을 치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卓越한 英雄이 遊牧民族을 糾合해 威勢를 떨치다가도, 瞬息間에 分裂해 사라지는 일은 遊牧民族 歷史의 典型的인 패턴이 되었다.

    春秋戰國時代 말에 秦始皇이 中國 天下를 統一했을 때, 匈奴의 英雄 두만선우는 北方의 여러 不足을 倂合했다. 南方의 秦나라와 北方의 匈奴가 팽팽히 겨루는 局面이 形成됐다. “진나라를 亡하게 할 사람은 號(亡秦者胡也)”라는 占卦를 들은 秦始皇은 ‘湖(胡)’를 오랑캐, 그中에서도 北方의 匈奴라 여겼다. 그만큼 匈奴는 秦나라에도 威脅的인 存在였다.

    紀元前 215年 몽염 將軍은 30萬 大軍으로 匈奴를 쳐서 오르도스를 빼앗고 44個의 城을 이어 쌓아 萬里長城을 만들었다. 그러나 秦始皇이 죽자 次男 호해(胡亥)는 奸臣 祖考와 함께 國政을 壟斷했다. 秦나라는 연이은 叛亂으로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網振子호야’의 ‘湖(胡)’는 바로 秦始皇의 아들 호해다.

    紀元前 209年 陳勝·오광의 난 以後부터 紀元前 202年 劉邦의 天下 統一까지 長長 7年이 걸렸다. 天下 統一 以後에도 한나라가 諸侯의 叛亂을 平定하고 戰亂의 傷處를 收拾하는 데에는 相當한 歲月이 必要했다.

    中國의 牽制가 사라진 사이 匈奴는 飛躍的으로 發展했다. 두만선우가 英雄이라면 그의 아들 묵돌은 大英雄이었다. 두만은 寵愛하던 後宮의 아들을 太子로 세우고 싶어서, 묵돌을 競爭國인 月池에 人質로 보내놓고 月池를 攻擊했다. 月池의 손으로 묵돌을 除去하려는 借刀殺人(借刀殺人)의 計略이었다. 그러나 묵돌은 混亂한 틈을 타서 月池의 名馬를 훔쳐 타고 匈奴로 돌아왔다. 英雄을 崇尙하는 匈奴인에게 묵돌의 人氣는 限껏 높아졌다.

    묵돌은 自身에게 絶對的 忠誠을 바치는 親衛隊를 養成했다. 묵돌이 소리 나는 화살인 鳴鏑(鳴鏑)을 날리면 1萬 名의 親衛隊度 無條件 一齊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묵돌은 愛馬를 向해 名籍을 날린 다음, 主君의 愛馬가 다칠까봐 躊躇하고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다음으로 愛妾을 向해 名籍을 날리고, 亦是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名籍을 쏘았을 때는 화살을 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나라 位 匈奴

    匈奴를 掌握한 묵돌은 宿敵 月池를 擊破하고 隣近의 26國을 平定했다. 다시 한 番 南中國과 北匈奴가 對立하는 時期가 되었다. 項羽를 꺾은 乳房도 匈奴에게 餘地없이 完敗했다. 漢나라는 匈奴와 兄弟의 盟約을 맺고 休戰한다. 漢나라는 每年 솜 緋緞 쌀 술 等의 物品을 支給하며 皇室의 女子를 匈奴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約束했다.

    以後 匈奴는 한나라 위에 君臨하는 態度를 보였다. 묵돌은 乳房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淫談悖說을 國書로 보냈다. 여태후는 性質이 고약해 皇帝 乳房도 그女를 꺼렸었다. 그女는 묵돌의 侮辱的인 便紙를 받고 “피를 吐할 地境이 되었지만”, 匈奴君의 威力 앞에서는 性質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氣力이 衰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려 大王의 마음에 드시지 않을 것”이라고 謙讓하며 묵돌에게 수레 두 臺와 말 여덟 疋을 보냈다.

    限問題(漢文帝)가 1隻 1寸 木簡(木簡)의 國書를 보내자 路上界竹扇우는 그보다 큰 1尺 2寸의 木簡에 兄처럼 으스대는 內容의 答狀을 보냈다. “天地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匈奴 대선우, 삼가 恨의 皇帝에게 묻노니 安寧하신가?”

    이 時期 匈奴가 自負한 대로 “여러 활을 쏘는 民族은 합쳐져 一家가 되고, 北方의 고을은 모두 安定되었다.” 匈奴는 東西交易路의 商權을 掌握해 財源을 確保하며 乘勝長驅했다.

    그러나 한나라 問題·經濟는 2代에 걸쳐 臥薪嘗膽하는 姿勢로 부지런히 힘을 길렀고, 韓武帝는 半世紀나 匈奴와 執拗하게 싸웠다. 結局 匈奴는 한나라의 힘에 밀려 勢力이 꺾인다. 同時에 權力을 둘러싸고 內紛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惡天候로 匈奴의 살림살이가 큰 被害를 입자 匈奴에 復屬되었던 여러 遊牧民族(精靈 烏桓 오손 等)李 만만해진 匈奴를 攻擊한다. 漢나라는 이들 遊牧民族을 後援한다.

    漢書(漢書) 흉노전은 傳한다. “數個月에 걸쳐서 눈이 그치지 않아 家畜은 죽고, 百姓은 病에 걸리고, 穀食은 열리지 않았다.” “精靈은 匈奴의 衰弱함에 힘입어 그 北쪽을 攻擊하고, 오환은 그 東쪽을 치고, 汚損은 그 西쪽을 攻擊하였다. 이들 세 나라는 數萬 名의 百姓과 數萬 匹의 말과 그 밖에 수많은 소와 羊을 죽였다. 더욱이 飢餓에 따른 死亡도 이어져 百姓의 10分의 3, 家畜의 10分의 5街 죽었다.”

    匈奴는 內紛 끝에 南匈奴와 北匈奴로 갈라졌다. 한便 漢나라는 王莽의 簒奪로 滅亡했다가 光武帝 有數가 後恨을 열었다. 이때 光武帝는 烏桓族 騎兵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以後 北方 遊牧民과 곧잘 提携했다. 南匈奴가 北匈奴에게 밀리자, 光武帝는 남匈奴의 8部落을 倂奏(幷州)에 살게 했다. 南匈奴로 北匈奴를 牽制하는 戰略이었다.

    後漢 末 病주는 산시(山西)成果 內몽골 一部 地域을 합친 地域이다. 이곳은 遊牧民과 한족이 섞여 살며 獨特한 氣風을 지니게 됐고, 遊牧民族이 中國으로 進出하는 발板이 되었다.


    濾胞의 英雄譚은 ‘事實’

    ‘三國志演義’는 한족 中心의 歷史小說이라 異民族은 助演일 뿐이다. 그런데 三國志를 읽었건 읽지 않았건 누구나 다 아는 內몽골 出身의 勇士가 있다. 天下無敵의 盲腸 濾胞다. 濾胞는 倂奏 五원群 舊怨縣(?州 五原郡 九原縣) 出身이다. 이 곳은 오늘날 內몽골의 바오터우(包頭)市 駐위안(九原)구다.

    三國志演義는 事實과 虛構가 絶妙하게 配合된 小說이다. ‘이건 事實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虛構이고, ‘이건 뻥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事實인 境遇가 種種 있다. 濾胞와 關聯된 三國志演義의 記錄은 意外로 事實과 一致하는 部分이 많다.

    濾胞가 멀찍이 세워둔 火劇(畵戟)의 槍날을 활로 쏴 맞춰 劉備와 元述의 싸움을 仲裁한 ‘原文史劇(轅門射戟)’ 이야기는 創作이라 여겼지만, 정사인 진수의 ‘三國志’에도 버젓이 記錄된 事實이다. 이처럼 濾胞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매우 뛰어나 스스로 ‘悲壯(飛將)’이라 自負했다. 濾胞의 故鄕이 內몽골임을 勘案하면 그가 활 쏘고 말 타는 法을 어디서 배웠을지 斟酌이 간다.

    呂布에게 名馬 ‘積土(赤兎)’가 있던 것 亦是 事實이다. 三國志演義의 3代 名馬는 濾胞의 赤兎馬, 曹操의 絶影, 劉備의 馰盧馬지만, 實際로 正史에 記錄된 말은 赤兎馬가 唯一하다. “世上에 말은 많지만 그中 單 한 마리뿐인 赤兎馬野, 天下에 사람은 많지만 그中 單 하나뿐인 呂布 봉선(馬中赤兎 人中呂布)”이라는 말도 當代에 實際로 膾炙되었다.

    赤兎馬는 亞할테케(Akhal-Teke)로 推測된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天然記念物이며, 크고 늘씬한 體軀에 黃金빛 털로 빛나 ‘世界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讚辭를 받는 名마다. 말을 重視하는 內몽골 現地人들이 草原 실크로드 交易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名馬를 入手했던 것이리라.

    濾胞가 劉備를 동생으로 여겼다는 것도 事實이다. 濾胞는 劉備를 만나자 매우 반가워했다. “나와 그대는 모두 변변치 못한 邊方 出身이오.” 그러고는 ‘劉備를 帳幕 안에 있는 夫人의 寢臺에 앉히고 아내에게 술盞을 따르게 하고는 동생으로 삼았다.’

    濾胞의 이와 같은 奇行(?)은 중원의 禮法으로는 매우 無禮하게 비쳤지만, 北方의 風習으로는 엄청난 親近感을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濾胞가 劉備에게 邊方 出身으로서의 同質感을 强調한 것도 邊方에 對한 중원의 싸늘한 視線에 서러웠는데, 같은 邊方의 武裝을 만나 반가웠던 때문이리라. 다만 亦是 北方 出身인 劉備가 濾胞의 態度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 모두가 呂布 個人의 奇行이었던 듯하다. 같은 北方이라도 劉備의 허베이省과 濾胞의 內몽골 風習이 크게 다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칭기즈칸, 高貴한 王의 이름

    濾胞는 曹操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豪言壯談했다. “名工이 步兵을 거느리고 나 濾胞로 하여금 騎兵을 거느리게 한다면 天下를 쉽게 平定할 수 있을 것이오.”

    曹操도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濾胞의 舞踊은 뛰어났다. 曹操는 背信을 일삼은 呂布 個人은 處斷했지만, 呂布 麾下의 장수인 匠料·將牌 等은 重用했다. 위나라 騎兵이 三國 最强이었던 것도 烏桓·선비 等 北方 遊牧民의 騎兵을 雇用했기 때문이다.

    秦나라가 三國을 統一할 때까지는 이들 北方 遊牧民들을 잘 制御했다. 그러나 內部에서 八王의 亂이 일어나고 北方에 對한 統制力을 잃자 곧 5號16國時代가 열렸다. 韓華(漢化)韓 선비족의 數·糖이 中國을 統一했고, 唐太宗 李世民은 北方 遊牧民들에게서 ‘千加한(天可汗·칸 中의 칸)’이라는 稱號를 얻었다. 唐나라 以後 宋나라가 중원을 統一했지만, 北方의 主導權만큼은 遊牧帝國人 遼나라에 고스란히 내어주어야 했다.

    몽골 高原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小部族이 角逐戰을 벌였다. 遊牧帝國 遼나라, 金나라는 遊牧民들이 한番 結集하면 걷잡을 수 없도록 剛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요·금은 群小 遊牧民 集團이 成長하는 것을 妨害했다. 한 勢力이 제법 커지면 다른 小部族을 키워서 그 勢力을 없앴고, 이 部族이 다시 커지면 또 다른 部族을 키워 없애버렸다. 이런 過程이 反復되니 몽골의 모든 部族이 저마다 複雜하게 얽히고설킨 怨恨 關係를 맺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도 한창 떠오르는 有望株였으나 敵對 部族에게 毒殺됐다. 몽골은 쇠로 된 말 橙子 하나만 있어도 富者라 할 만큼 가난한 地域이었는데, 칭기즈칸 不足은 그中에서도 더욱 가난했다. 칭기즈칸 一家를 먹여 살리기 힘들었던 不足은 一家의 財産을 빼앗고 밖으로 내쫓았다. 칭기즈칸 一家는 遊牧民의 生計手段인 家畜 한 마리 없이, 허허벌판에서 들쥐를 잡아먹으며 延命했다.

    後날 ‘世界 最大의 征服者’라는 稱號를 얻은 칭기즈칸은 意外로 ‘타고난 英雄’이 아니었다. 어릴 때에는 몽골人 最高의 親舊인 개를 무서워했고, 활쏘기나 힘은 동생보다 못했으며, 用兵術은 義兄弟 자무카만 못했다.

    滋茂카가 傭兵의 天才 曹操 같았다면, 칭기즈칸은 仁德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劉備와 같았다. 칭기즈칸은 自身이 배반당할지라도 相對를 배반하지 않았다. 利益에 흔들리지 않고 大義名分을 따랐다. 칭기즈칸을 이긴 者들은 작은 利益을 얻었지만, 칭기즈칸 自身은 敗北하면서도 몽골人들의 마음을 샀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沒落해 逃亡 다니는 狀況에서도 끝끝내 다시 일어섰고, 그의 周邊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칭기즈칸은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苦難과 失敗 속에서 배운 敎訓을 잊지 않았다. 者무카에게 慘敗를 當한 칭기즈칸은 最後의 決戰에서 壓勝을 거뒀다. 結果的으로 戰術의 鬼才 滋茂카는 칭기즈칸을 ‘戰爭의 神’으로 만들어준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草原의 激戰 속에서 大器晩成의 英雄으로 成長한 칭기즈칸을 막을 者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몽골 말들의 발굽은 어디든 간다. 하늘을 오르기도 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고 몽골人들이 自負할 만큼 몽골의 말은 卓越했다. 몽골人들은 어떤가? “閑暇할 때 한족은 이를 잡고, 우리는 칼을 간다”고 할 만큼 거친 勇士들이다. 게다가 칭기즈칸을 깊이 欽慕한 몽골의 勇士들은 盟誓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뛰어난 勇士와 뛰어난 말, 그리고 이 모두를 糾合하는 大英雄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몽골軍은 中國, 中東, 東유럽 一帶를 휩쓸었다. 中國人들은 몽골軍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고 두려워했고, 英文學의 아버지 제프리 草書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노래했다. “이 高貴한 王의 이름은 칭기즈칸이었으니, 그는 當代에 큰 名聲을 떨쳐 어느 地域 어느 곳에도 萬事에 그렇게 뛰어난 君主는 없었다”.


    神이 손가락을 여럿 주신 理由

    그러나 몽골이 世界帝國으로 發展한 것은 但只 軍事力 때문만은 아니었다. 몽골은 商業을 振興하고 열린 姿勢로 여러 文化와 民族을 受容했다.

    우구데이칸은 商人이 부르는 값의 두 倍를 주며 商品을 사들였고, ‘商人이 얼마를 要求하든 거기에 10%를 얹어 사겠다’고 布告했다. 몽골帝國의 首都 商道(上都)는 一攫千金이 保障되는 땅, 따라서 商人에게는 天國과도 같은 땅이었다. 곧 상도는 유럽 商人들에게 ‘再나두(Xanadu·이상향)’로 불렸다.

    몽골의 慣用的 姿勢는 宗敎 受容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럽에서 온 宣敎師가 天主敎의 絶對性을 主張하자, 뭉케칸은 宗敎大會를 열었다. 對決을 좋아하는 몽골人들은 宗敎大會를 씨름大會처럼 進行했다. 天主敎 이슬람敎 佛敎 代表들을 뽑아 選手團과 審判團을 構成했고, 各自 自身이 믿는 宗敎의 優秀性에 對해 論證하면 審判團이 第一 優秀한 論證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選手들은 馬乳酒를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처음에는 제법 論理的으로 흘러갔지만, 選手들은 곧 술에 잔뜩 醉했다. 天主敎徒가 목청 높여 讚頌歌를 부르기 始作하자, 이슬람敎徒는 코란을 큰소리로 暗誦했다. 佛敎徒는 冥想에 빠져 ‘고요함으로 激烈함을 制壓(以靜制動)’하고자 했다.

    結局 大會는 最終 勝者 없이 모두 비긴 것으로 끝났다. 뭉케칸은 말했다. “神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하나의 宗敎만을 固執하지 않고, 여러 思想과 宗敎를 모두 認定하는 寬容의 姿勢였다.

    칭기즈칸의 孫子 쿠빌라이는 南宋을 征服하고 隊員(大元)의 建國을 宣布했다. 天下에서 ‘으뜸[元]’가고, 偉大한 ‘始作[元]’을 여는 ‘텡그리[乾元]’의 나라라는 뜻이다.

    ‘元士 地理誌’는 말한다. “封建李 變하여 郡縣이 된 以後로, 天下를 가진 者 가운데 한·數·黨·宋 等이 强盛하였다. 그러나 그 江域의 넓이는 모두 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韓銀 북적(北狄·匈奴)에 괴로움을 當하였고, 數는 東이(東夷·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며, 黨은 西戎(西戎·위구르) 때문에 患亂을 겪었고, 宋의 걱정거리는 언제나 西北에 있었다. 그러나 원은 朔漠(朔漠)에서 일어나 西域을 倂合하고 西夏를 平定하였으며, 餘震을 滅하고 高麗를 迅速시켰고 南朝(南朝·大理國)를 平定하고 마침내 江南(江南·南宋)을 떨어뜨려 天下가 하나가 되었다.”



    分割된 몽골

    後날 몽골을 몰아내고 明나라를 세운 朱元璋도 몽골이 中國의 主人이었음을 是認했다. “몽골이 비록 오랑캐이긴 하나 100年 동안이나 中國을 支配했으니, 짐과 卿들의 父母는 모두 그들에 기대어 자란 것이다.” 明나라는 中國 傳統의 天命思想에 立脚해, 元나라를 正統 王朝로 認定하고 그 千名이 明나라에 繼承되었다고 主張했다.

    또한 淸太宗 홍타이지는 1632年 몽골의 릭單칸을 擊破하고 칭기즈칸의 玉璽를 손에 넣은 뒤 淸나라가 大元帝國의 正統性을 이어받았음을 闡明했다. 몽골과 關聯 없는 한족의 明나라도, 滿洲族의 淸나라도 모두 元나라의 後繼者임을 自處했다. 그만큼 世界帝國 元나라의 位相은 누구도 否認할 수 없을 程度로 높았다.

    한便 北方으로 쫓겨 간 몽골族은 如前히 强力했다. 軍事的 才能이 卓越했던 明나라 永樂帝도 여섯 番이나 大大的으로 몽골 遠征에 나섰지만 끝내 몽골을 完全히 制壓하지 못했다. 그 後孫 정통제는 50萬 名을 거느리고 遠征에 나섰지만, 몽골의 一介 不足인 오이라트에게 捕虜로 잡히는 恥辱을 當했다. 淸나라가 滿洲 一帶를 掌握하고 山海關을 넘을 때에도 몽골 騎兵은 重要한 파트너였다.

    淸나라가 中國을 統一하고 한 동안 潛潛하던 몽골 高原에 또 하나의 英雄이 登場해 旋風을 일으켰다. 準가르 不足의 指導者 갈단은 廣闊한 草原을 掌握하고 淸나라를 威脅하는 敗者로 떠올랐다. 康熙帝는 세 次例나 몸소 親庭(1696~1697)韓 끝에 結局 갈단을 處置했다.

    康熙帝는 一生一大의 宿題를 끝낸 氣分으로 말했다. “2年 동안 나는 세 次例나 親政을 하면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은 沙漠을 건넜고, 荒凉하고 사람도 없는 벌판에서 하루걸러 食事를 했다. … 끊임없는 移動과 苦難이 이 같은 偉業을 이끌어낸 것이며, 갈단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일을 決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族의 生命力은 실로 질겼다. 乾隆帝 때 準가르는 中央아시아와 伸長性 一帶를 威脅하는 勢力으로 자랐다. 乾隆帝는 한 地域을 占領할 때마다 住民을 沒殺하는 超强手를 두었고, 後날 自身의 十전무공(十全武功·乾隆帝의 10代 遠征) 中 準가르 撲滅을 으뜸 功勞로 꼽았다.

    近代的 帝國人 淸나라와 러시아는 몽골의 活動 領域을 크게 蠶食해갔다. 結局 20世紀에 이르러 몽골은 몽골국(외몽골)과 內몽골로 分割된다. 몽골국은 蘇聯의 衛星國家가 되었고, 內몽골은 中國의 네이멍구自治區가 되었다. 한때 自身이 支配했던 勢力에 兩分된 것이다.

    言語는 集團的 正體性과 共感帶의 基礎다. 蘇聯은 몽골語를 抑壓하고 키릴 文字와 러시아語 使用을 强要한 反面, 中國은 몽골語 使用을 許可하며 네이멍구自治區의 言語와 文化를 尊重하는 척했다. 그러나 몽골을 近代 社會로 改造하려 한 點은 兩國 모두 마찬가지였다.


    自然의 ‘復讐’

    新中國이 出帆했을 때 再建을 위해 建築 資材나 工場 設備 等을 옮기는 動力 需要가 높았다. 그러나 自動車가 不足했다. 이에 政府는 몽골의 말을 運送 動力으로 利用하기 위해 몽골에 말을 大大的으로 키우도록 했다.

    草原은 매우 脆弱한 땅이다. 遊牧民들은 家畜이 풀을 먹어도 뿌리까지 먹지 않도록 牧草地를 옮겨가며 草原을 細心히 保護해왔다. 그러나 定着 農耕 社會인 中國은 遊牧民들의 牧草地에 울타리를 두르고 定着生活을 强要했다. 더욱이 ‘科學的인 生産方式’으로 每年 몇 퍼센트씩 生産量을 向上시키도록 目標値를 割當했다. 自然의 運行에 맞추어 풀이 잘 자랄 때는 家畜을 늘리고, 못 자랄 때는 家畜을 줄인 傳統的 遊牧 方式과 相剋되는 措置였다. 草原은 곧 荒廢해져 沙漠이 되었다.

    政府는 家畜을 해치는 늑대를 草原의 敵으로 規定하고 大大的으로 사냥했다. 처음에는 늑대가 줄어들어 家畜 生産量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天敵이 사라지자 쥐와 토끼, 가젤 等이 폭증해 草原의 풀을 죄다 뜯어먹었다. 結局 草原은 沙漠이 되었고, 家畜 亦是 前보다 더 키우기 힘들어졌다. 한족 移住民들은 草原을 開墾해 農地로 만들었다. 그러나 물이 不足하고 地力이 弱한 땅에서 農事가 잘될 理 없었다. 開墾 農地 亦是 곧 沙漠이 되었다. 世上萬事는 돌고 도는 것. 破壞者 베이징도 自然의 復讐를 避할 수 없었다. 몽골의 沙漠은 베이징에 都市 全體를 뒤덮는 黃沙를 보냈다.

    腸룽의 小說 ‘늑대 토템’은 文化大革命 時代에 한족이 어떻게 內몽골을 蠶食해가는지, 어떻게 몽골 草原이 破壞되어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主人公은 트랙터가 草原을 갈아엎고 農地로 開墾하는 모습을 보며 想念에 잠긴다.

    “트랙터 時代가 옴으로써 풀을 生命처럼 여기는 民族과 풀을 除去해야 살아남는 民族 間의 깊은 葛藤이 結局 어떤 結末을 맺게 될지 눈에 뻔히 보였다. 東南쪽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農耕 바람이 마침내 西北의 遊牧 바람을 壓倒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結局 西北쪽에서 黃沙라는 巨大한 暴風이 일어나게 되면 東南쪽 모두를 덮어버리고 말 테지….”

    몽골이 中國의 한 主로 編入된 지 於焉 70年. 몽골은 이제 完全히 變했다. 한족이 內몽골 人口(藥 2500萬 名)의 80%를 차지하고, 몽골族(藥 400萬 名)은 ‘少數民族’이 되어버렸다. 內몽골 博物館 廣場에는 ‘民族團結補正(民族團結寶鼎)’이 놓여 있다. 韓族, 몽골族 區分 없이 ‘中華民族’으로 團結하자는 趣旨에서 세운 象徵物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은 遊牧民의 象徵인 말이 아니라 중원의 象徵인 靑銅솥[鼎]이다. 한족과 몽골族의 逆關係를 克明하게 보여준다. 네이멍구自治區는 家畜 生産基地이자 鑛業基地가 되었다. 草原의 生態系는 破壞되어 이제는 온갖 動物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곳곳에 밭이 들어섰고, 風車와 太陽電池가 櫛比하게 놓여 있다.



    少數民族 된 몽골人

    遊牧民은 定着生活을 한다. 게르는 體驗龍 觀光商品이 되었다. 아니, 게르조차 穩全하지 않다. 稀罕한 데서 飛上한 創造力을 發揮하는 中國人은 콘크리트 게르를 지었다. 旣往 內몽골까지 왔으니 게르 體驗은 하고 싶지만 現代 建築物의 便利함은 抛棄하고 싶지 않은, 矛盾된 欲望이 찾아낸 奇妙한 妥協策이다. 旅行書 論理 플래닛 記者가 만난 몽골人은 內몽골의 變化를 한 마디로 表現했다. “사람은 늘고, 家畜은 줄었어요.”

    遊牧民들도 21世紀 속에 살고 있다. 말 代身 오토바이를 타고 羊을 친다. SNS로 家畜을 賣買한다. 어린 少女는 素朴한 꿈을 꾼다. “女性 事業家로 成功해서 TV, 冷藏庫, 次, 아파트를 사고 싶어요.”

    한족과 몽골族 區分 없이 같은 꿈을 꾸니 이제 같은 民族이 된 것일까? 中國 政府는 內몽골의 經濟를 발전시키고 人民의 삶의 質을 向上시킨 것을 自身의 公的이라 자랑한다. 內몽골 經濟 發展은 石炭 天然가스 稀土類 等 內몽골의 豐富한 資源 德分이다. 그러나 그 資源은 大體로 內몽골 外部의 經濟 發展에 쓰이고, 鑛業 開發과 關聯한 權利는 大部分 한족이 차지한다. 몽골族 遊牧民은 公害, 汚染, 環境 破壞로 인해 生計를 威脅받는다. 少數民族 自治區 中에서는 꽤 安定되고 民族 統合이 꽤 進行된 內몽골이지만, 民族 葛藤으로부터 完全히 自由로울 수 없는 理由다.

    2011年 5月 10日 몽골 遊牧民 메르겐은 20餘 名의 同僚와 함께 石炭 트럭이 牧草地에 闌入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트럭에 치여 150m나 끌려간 끝에 죽었다. 不過 닷새 後, 한 炭鑛의 한족 勞動者가 炭鑛 公害에 抗議하던 몽골 遊牧民 옌원룽을 지게車로 故意로 쳐서 죽였다. 연달아 일어난 事件으로 數千 名이 示威에 나서는 等 內몽골 雰圍氣가 惡化되자 후진타오 政府는 事件의 主犯인 두 名의 한족 勞動者를 迅速하게 死刑시켰다. 그러나 겨우 넉 달 뒤인 10月, 石油 트럭이 牧草地에 闌入하는 것을 막으려던 몽골 遊牧民이 죽는 事件이 또 일어났다.

    草原은 荒廢化되고 沙漠은 넓어져간다. 黃沙가 베이징을 덮치자, 放牧地를 草原으로 돌리고[退牧還草], 農地를 草原으로 돌리는[退耕還草] 프로젝트를 開始했지만, 草原의 復元力은 限없이 弱하다. 企業들은 內몽골 資源을 캐내는 데 血眼이 돼 있을 뿐, 그 뒤處理에는 無關心하다. 어느새 絶對 多數를 차지한 한족은 ‘少數民族’ 몽골族을 尊重하지 않는다. 몽골族 亦是 現代 文明의 洗禮를 받아 牧歌的 生活 代身 都市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돈벌이에 熱中하지만 쉽지는 않다.

    亂麻처럼 얽힌 宿題가 內몽골을 짓누른다. 劣惡한 環境을 딛고 世界帝國을 만들었던 몽골의 榮光을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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