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滅門之禍 子息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堂堂하라”|신동아

새 連載 | 朝鮮의 아버지들

滅門之禍 子息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堂堂하라”

流配地 丁若鏞의 ‘치마幅 訓戒’

  • 백승종 |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16-01-12 10:19:33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丁若鏞은 正祖의 寵兒였지만, 正祖가 昇遐하자 天主敎 問題로 집안이 沒落한다. 그는 流配地에서 아내의 낡은 치마幅을 잘라 만든 書帖에 20代 두 아들에게 보내는 敎訓을 적었다. 家族이 危機에 處할수록 더욱 서로를 配慮하고 堂堂한 態度를 잃지 말라는 當付. 21世紀에도 如前히 살아 있는 가르침이다.
    氣勢 좋게 잘나가다가도 갑자기 脈없이 꺾이는 것. 예나 只今이나 人生은 그럴 수가 있다. 그럴 때 危機에 빠진 家長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朝鮮 後期에도 한瞬間에 끝없이 墜落한 이름난 사내가 있었다. 茶山 丁若鏞(丁若鏞·1762~1836), 오늘날 韓國人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바로 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丁若鏞은 正祖의 寵兒였다. 그러나 正祖가 昇遐하자 天主敎 問題 때문에 그의 온 집안이 沒落했다. 將來가 有望했던 丁若鏞은 西南海岸 康津의 配所(配所, 귀양地)로 쫓겨났다. 그는 18年 동안 그곳에서 가난과 孤獨을 벗하며 늙어갔다. 하지만 丁若鏞의 푸른 뜻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流配地에서 學問을 갈고닦아 混濁한 世上을 救濟할 뜻을 세웠다.
    丁若鏞에게는 멀리 京畿道 洋酒 마재에 두고 온 家族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子息들을 向한 그리움에 시달리며 便紙를 쓰고 또 썼다. 아버지 丁若鏞이 絶海孤島의 벼랑 끝에 선 切迫한 心情으로 家族에게 보낸 便紙 가운데 ‘下皮첩’이 있다. 거기에는 두 아들에게 주는 一種의 家計(家戒), 卽 敎訓이 記錄돼 있다. 이 글은 바로 그에 關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世紀는 歷史上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安全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다. 현대는 丁若鏞이 살던 朝鮮 後期보다 훨씬 危險하고 不安定하다. 强要된 退職, 事故, 疾病 等 日常的 危機가 삶을 짓누른다. 平凡한 市民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버지 정약용’에게 同病相憐(同病相憐)의 感情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의 淸高한 氣槪와 毅然함을 떠올리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노을빛 치마의 가르침

    지난 10月 中旬, 國立民俗博物館은 丁若鏞의 貴重한 遺物 한 點을 言論에 公開했다. ‘下皮첩’(寶物 第1683-2號)李 그것이다.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千里 먼 길에 애틋한 마음 傳해왔네. 오랜 歲月에 붉은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書帖으로 꾸며, 子息들 일깨우는 글句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1810年 初가을이었다. 罪人 丁若鏞은 이미 10年째 流配生活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釋放될 兆朕은 거의 없어, 流配는 어느덧 期約 모를 일이 되고 말았다. 아내와 子息들을 向한 그리움과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 무렵 아내 洪氏 夫人이 보낸 낡은 치마가 康津의 流配地에 到着했다. 시집올 때 아내가 입은 활옷, 곧 結婚禮服이었다. 다紅치마 5幅이었다.
    丁若鏞은 아내의 情을 가슴에 새기며 한 가지 決心을 했다. 이태 前에 修理한 茶山草堂의 동암(東菴)에서였다. 그는 낡은 치마幅을 자르고 中國産 종이를 오려붙여 雅淡한 書帖 하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이 書帖을 自身과 洪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주려고 했다.
    當時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은 28歲, 둘째아들 정학유(丁學遊·1786~1855)는 25歲였다. 그들에게 줄 書帖은 ‘下皮첩’이라 했다. ‘붉은 노을빛(霞) 치마(?)로 된 書帖(帖)’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특별한 方式으로 아내와의 사랑을 追憶했고, 아들들에 對한 自身의 訓戒에 애틋함을 더했다.
    丁若鏞의 文集을 仔細히 살펴보면 ‘下皮첩’의 製作 經緯를 仔細히 記錄한 글 하나가 發見된다. ‘下皮妾에 擠陷’(‘茶山詩文集’, 第14卷)이다. 讀者의 心琴을 울리는 그 글의 一部를 옮겨본다.

    나는 이것(아내의 활옷)을 잘라내어 조그만 諜者(帖子)를 만들고, 붓끝이 가는 대로 訓戒하는 말을 써 두 아들에게 傳해주었다. 後날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兩親 父母의 손때 묻은 자취를 바라보면 그리운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 아닌가.



    ‘下皮첩’은 이렇게 誕生했고, 그 집안의 家寶가 돼 代代로 傳해졌다. 書帖에 담긴 丁若鏞의 가르침은 길이 後孫들의 삶을 이끄는 指標가 됐다. 그러나 1950年 여름, 6·25戰爭이 일어나는 바람에 書帖은 안타깝게도 紛失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2005年, 廢紙 蒐集으로 生計를 잇는 어느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發見돼 世上을 놀라게 했다.



    짧은 봄날

    天主敎 彈壓이 本格化하기 前까지만 해도 丁若鏞의 家族들은 남부러운 줄 몰랐다. 그의 집안은 ‘男인’을 代表하는 名門家였다. 祖上 代代로 弘文館의 榮譽로운 벼슬을 거듭해 ‘8代 玉堂(玉堂, 弘文館) 집안’이란 名聲이 藉藉했다.
    英祖 때는 한동안 調停에서 排除되는 等 困境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正祖가 卽位하자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正祖는 蕩平策을 힘써 推進해, 老論 爲主의 調整에 一部 南人 學者를 登用함으로써 새로운 氣風을 造成했다. 正祖는 南人의 領袖 蔡濟恭을 登用해 後날 領議政에 임명하기도 했다. 靑年學者 李家煥 等 南人의 젊은 再사도 여럿 拔擢했다. 丁若鏞도 그中 하나였다.
    1783年 丁若鏞은 進士試에 合格했고, 6年 뒤인 1789年에는 文科에 及第했다. 그러자 正祖는 丁若鏞에게 命令해 華城 行次를 위해 漢江에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또 그를 ‘抄啓文臣(抄啓文臣, 大臣들이 推薦한 有望한 靑年 管理)’으로 뽑아 當代의 才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朝廷의 班列에 서게 했다. 結果的으로 丁若鏞은 三社의 華麗한 벼슬을 두루 歷任한다. 京畿道 暗行御史에 拔擢돼 相當한 業績을 남기기도 했다.
    正祖는 丁若鏞의 재주를 아꼈다. 親喪(親喪)을 當해 벼슬을 떠나 있던 그에게 火星 收縮(修築)에 必要한 여러 道具와 機械를 設計하도록 命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事實이다. 後날 丁若鏞은 그때의 事情을 이렇게 述懷했다.

    龍(=정약용)이 이에 基中價圖說(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滑車(滑車)와 苦輪(鼓輪)은 작은 힘을 利用해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城을 짓는 일이 끝나자 住商(=正祖)께서 말씀하셨다. ‘多幸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萬 兩의 費用을 줄였다.’
    -정약용, ‘自讚墓誌銘’


    丁若鏞이 屬한 南人은 朝廷의 少數派였다. 그럼에도 正祖의 庇護가 있었기에 그의 昇進은 남달랐다. 30代 젊은 나이에 丁若鏞은 兵曹參知(正3品)와 刑曹參議(正3品)라는 高位職을 歷任했다. 이런 趨勢가 繼續된다면 아마도 數年 뒤에는 政丞 判書로 登用될 展望이 뚜렷했다. 1780, 90年代의 젊은 丁若鏞과 否認 풍산 洪氏, 그리고 어린 두 아들에게는 人生의 봄날이 限껏 펼쳐졌다.



    겨울 내 건너듯 했건만…

    그러나 正祖가 쓰러지자(1800년) 天主敎 問題가 크게 불거졌다. 이미 1790年代에도 두어 次例 是非가 일어나긴 했다. 그래도 그때는 正祖의 積極的인 保護 德에 別로 打擊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事情이 달라졌다. 丁若鏞이 ‘與猶堂(與猶堂)’이란 號를 使用하게 된 背景이 그것이다. 與猶堂은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 조심스럽게 산다는 뜻이다. 丁若鏞은 政治的 危機가 다가옴을 直感하고 이런 號를 지어 스스로 警戒했지만, 다가오는 火를 避하지는 못했다.
    朝廷에서 西學(西學) 卽, 天主敎 信仰을 本格的으로 彈壓하게 된 데는 當時 內外의 環境 變化가 作用했다. 18世紀 初中盤, 이웃나라 中國에서도 몇 次例 ‘敎案(敎案)’ 곧 天主敎와 關聯된 事件이 일어나 多數의 犧牲者가 發生했다. 1724年 雍正帝는 中國人에 對한 天主敎의 宣敎禁止令을 내렸다. 自然히 中國의 天主敎歲는 萎縮됐다.
    雪上加霜으로 1742年 로마 敎皇 베네딕트 14世는 祖上 崇拜를 包含한 一切의 偶像 崇拜를 禁止했다. 以後 中國과 韓國의 天主敎 信者들은 祖上의 祭祀를 廢止할 뿐만 아니라 祠堂에 모신 位牌도 받들 수 없게 됐다.
    中國에서 天主敎가 前代未聞의 危機에 빠진 18世紀 後半, 朝鮮 社會에 天主敎가 들어왔다. 後代人의 觀點에서 보면, 朝鮮에서도 곧 天主敎 問題가 發生할 것은 自明한 事實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當代 韓國의 天主敎 信者들은 그런 情勢 變化를 눈치채지 못했다.
    草創期 韓國 天主敎會에서 指導的 活動을 遂行한 것은 정약용 집안 사람들이었다. 1784年 1月 丁若鏞의 字形 이승훈은 使臣行次를 따라 北京에 가서 韓國人으로서는 最初로 洗禮를 받고 돌아왔다. 그 影響으로 丁若鏞의 兄 丁若鍾은 天主敎 神學을 集中的으로 硏究해 朝鮮을 代表하는 神學者가 됐다. 丁若鏞의 또 다른 兄인 정약전度 天主敎 信者였고, 丁若鏞 自身도 例外가 아니었다. 그들과 親密한 李蘗, 李家煥, 權哲身 等 서울의 南人 學者들도 마찬가지였다.



    保護者는 떠나고…

    朝廷에서 丁若鏞의 天主敎 信仰이 問題 된 것은 1791年의 ‘珍山事件’ 때가 처음이다. 南人 學者 尹持忠과 權尙然이 信仰上의 理由로 位牌와 神主를 불사르고 祭祀를 廢止한 事實이 發覺됐다. 그러자 朝廷에 進出한 天主敎 信者들에 對한 攻擊이 始作됐다. 以後 朝廷에서는 天主敎 問題가 여러 次例 提起된다. 1795年, 結局 丁若鏞은 朝廷에서 쫓겨나 금정察訪(忠南 靑陽)으로 左遷됐다. 하지만 正祖가 積極的으로 감싸준 德分에 그해 겨울 다시 調整으로 復歸할 수 있었다. 그는 刑曹參議에 이어 右副承旨, 左副承旨가 돼 貞操를 側近에서 모셨다. 그럼에도 그의 信仰 問題에 對한 反對派의 攻擊은 줄어들지 않았다.
    1797年 身邊의 危機를 느낀 丁若鏞은, ‘自明疏’라는 一種의 反省文을 國王에게 提出했다. 젊은 時節 한때나마 天主敎 信仰에 빠져든 잘못을 告白하고 容恕를 빌었다. “冊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기며 빠져들었습니다.”(‘자찬묘지명’) 正祖는 그에게 쏟아지는 批判이 줄어들기를 希望하며, 이番에는 그를 黃海道 谷山都護府使로 보냈다. 이태 뒤 天主敎에 關한 朝廷의 論難이 사그라지자 正祖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는 途中에 同副承旨에 除授하고, 都城에 들어오자 刑曹參議에 除授했다.’(‘자찬묘지명’) 丁若鏞의 天主敎 信仰 問題는 이런 式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1800年 正祖가 昇遐하고 나이 어린 純祖가 卽位하자 事情이 一變했다. 王朝의 傳統에 따라 英祖의 繼妃 定順王后가 攝政을 맡았다. 王后 一派는 天主敎 問題를 크게 일으켜 反對派를 모두 除去하고 自身들이 權力을 獨占할 計劃을 꾸몄다. 1801年 辛酉迫害가 일어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정약용 三兄弟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存亡의 岐路에 섰다. 犧牲者 中에는 老論과 북인도 一部 包含됐지만, 大部分은 正祖가 重用한 ‘男인 信西派’, 곧 男인 出身 天主敎 信者들이었다.
     
    (定約)用의 兄 藥典·藥種 및 이기양 ·권철신·烏石忠·홍낙민·김건순·김백순 等이 모두 次例로 獄에 들어갔다. 그런데 (問題의) 文書들 가운데는 도리어 (定約)用의 陋名을 밝게 벗길 만한 證據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丁若鏞에게는) 刑틀을 벗기고 義禁府 안에서 自由를 얻었다.
    -‘自讚墓誌銘’



    두 아들에게 주는 家戒

    搜査가 本格化하자 丁若鏞이 天主敎와는 無關하다는 事實이 드러났다. 그는 無罪放免될 可能性이 컸다. 多數의 代身은 丁若鏞의 無罪를 主張했다. 그러나 代身 徐龍輔가 그의 有罪를 强力히 固執하자 逆風이 불었다. 서용보는 일찍이 丁若鏞이 京畿道 暗行御史 時節에 自身의 罪狀을 摘發한 事實 때문에 깊은 怨恨을 품었다.
    結局 서용보의 主張대로 丁若鏞은 重한 罰을 받았다. 그는 競技도 기장현으로, 그의 重刑 丁若銓은 全羅道 薪智島로 流配됐다. 또 다른 兄 丁若鍾은 여러 敎友와 함께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해에는 ‘黃嗣永 帛書事件’까지 일어나 患亂이 겹쳤다. 黃嗣永은 丁若鏞의 조카사위인데, 그는 요행히 迫害를 벗어난 天主敎會의 젊은 指導者였다. 黃嗣永은 辛酉迫害 事件의 慘酷한 顚末을 記錄해 北京의 天主敎會에 報告할 作定이었다. 그는 이 機會를 빌려 敎皇廳에 請願하기를, 重武裝한 艦隊를 朝鮮에 派遣해 信仰의 自由를 얻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內容이 담긴 極祕文書가 國境에서 官憲에게 摘發되고 말았다. 이로써 天主敎에 對한 彈壓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정약용 집안은 焦土化했다. 그야말로 ‘廢族’ 身世가 돼버렸다. 慶尙道 長期로 流配된 丁若鏞은 다시 붙들려가 酷毒한 問招를 當하고 이番에는 全羅道 康津으로 내쳐졌다.
    한 해, 두 해 丁若鏞의 流配生活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0年째가 됐다. 그는 곧 풀려나리라는 期待를 접지 않을 수 없었다. 1801年 그가 멀리 流配를 떠나올 때만 해도 큰아들 정학연은 19歲, 둘째 丁學游는 16歲에 不過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들은 28歲, 25歲의 靑年이 됐다. 流配地의 아버지는 그들의 成長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걱정 또한 많았다. 이 아이들은 將次 어찌될 것인가. 아비가 날마다 부지런히 訓導해도 不足한 點이 많을 텐데, 滅門의 禍를 當해 가난과 한숨 속에서 긴 歲月을 보내고 있으니….
    千里 먼 길에 거듭 便紙를 보내 타이른다 한들, 果然 子息들에게 무슨 效果가 있을지 아버지는 念慮했다. 苦悶 끝에 아버지는 特段의 措置를 決心했다. 丁若鏞이 ‘下皮첩’을 만든 背景이 그러했다.??? ?
    나는 아직 ‘下皮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確認할 機會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內容이 적혀 있는지는 안다. 書帖이 製作되던 그해 가을, 아버지 丁若鏞이 동암(東庵)에서 쓴 ‘두 아들에게 주는 家計(家戒)’를 ‘茶山詩文集’에서 發見했는데, 이는 言論報道를 통해 내가 確認할 수 있었던 ‘下皮첩’의 內容과 一致한다. 常識的으로 봐도 그렇다. 같은 時間, 같은 場所에서 아버지가 子息들에게 내려준 訓戒의 內容이 크게 다를 理가 없다.


    “玉돌로 步答하라”

    ‘家計(家戒)’에서 丁若鏞은 長成한 두 아들에게 于先 ‘孝悌(孝悌)’에 힘쓸 것을 申申當付했다. ‘論語’에도 記錄돼 있듯, 孝悌는 人(仁)을 行하는 根本이다. ‘孝’는 父母님에 對한 사랑의 實踐이요, ‘第’는 同氣間의 사랑을 나타낸다. 要컨대 家族共同體 構成員들 間의 사랑을 말한다.
    ‘家計’에서 丁若鏞은 ‘孝悌’의 槪念을 좀 더 擴張된 것으로 봤다. 그는 滅門地境에 빠진 鄭氏 一家 全體를 孝悌의 對象으로 設定했다. 그는 4寸 또는 6寸까지 包含하는 親族共同體의 解體를 막고 結束을 다지라고 아들들에게 注文했다. 辛酉迫害로 風飛雹散이 된 그의 집안이었다. 모두가 벼슬을 잃고 世上의 外面을 받아, “가난이 極甚해졌기에 한두 말의 穀食”을 理由로 親戚들이 서로 “다투고 끔찍한 말까지 일삼아” “怨讐가 되기 쉬운 狀況”이었다. 아버지 丁若鏞은 그 點을 걱정했다.
    家門의 解體 危機를 어떻게 克服할 것인가. 아버지는 이렇게 注文했다. “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이쪽에서는 玉돌로 步答하라.” 우리가 마음을 넉넉히 써야만 “모두가 感動하고 기뻐하며 저절로 和睦한 家門이 된다.” 危機에 處한 鄭氏 一家로서는 于先 “문호(門戶)를 保存”하는 것, 家族共同體의 結束을 다지는 것이 時急한 問題였다. 아버지가 이 點을 가장 强調한 것은 偶然이 아니었다.
    이어서 아버지는 絶對 首都圈을 떠나지 말라고 付託했다.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서울에 살 자리를 마련하라.” 그 理由는 簡單했다. “文化(文華)의 眼目(眼目)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只今은 내 이름이 罪人 名簿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시골집에 숨어 지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未來에는 서울에서 가까운 十 里 以內에 살라. 家勢가 衰落하여 都城 안에 들어갈 形便이 못 되면, 近郊에 터를 잡고 과일나무를 심고 菜蔬를 가꾸며 生計를 維持하라. 그리하여 財産이 좀 모이면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라.

    이 가운데 實學者 정약용다운 말이 包含돼 있다. 形便이 힘들면 서울 近郊에서 果樹며 菜蔬를 栽培해서 生計를 꾸리라고 했다. 丁若鏞은 近郊 園藝農業의 經濟的 可能性을 確信했고, 그래서 아들들이 商業的 農業에 從事하기를 勸한 것이다. 19世紀 初盤, 서울은 人口가 膨脹하고 있었다. 自然히 近郊에 살며 園藝로 재미를 보는 農民이 적지 않았다. 丁若鏞은 아들들이 園藝 農事를 잘 지으면 生計를 維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富者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서울·脂肪의 文化的 隔差

    丁若鏞의 訓戒 中에는 우리가 선뜻 納得하기 어려운 點도 있다. 그가 아들들에게 ‘首都圈 死守’를 注文했다는 點이다. 問題의 核心은 서울과 地方의 懸隔한 文化的 水準 差異였다. 이것이 아버지 丁若鏞을 괴롭히는 懸案이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잠깐의 憤怒를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내려가버린다면, 結局 代代로 卑賤한 無識꾼이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 丁若鏞은 官職生活을 통해, 그리고 流配地에서의 經驗을 통해 地方의 落後된 文化生活에 絶望했다. 그것은 個人의 努力으로는 到底히 克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子息들에게 首都圈을 絶對로 떠나지 말라고 當付했다.


    그로부터 200年이 지난 21世紀까지도 이런 問題點은 改善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市民이 子女 敎育 때문에 값비싼 首都圈 居住를 抛棄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아버지 丁若鏞은 언제나 明朗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라고 注文했다. “沒落하여 버림받은 집안 사람들은 世上이 太平해도 늘 걱정이 많다.” 그들 當事者뿐만 아니라 “親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 世上의 버림을 받아 벼슬길이 막혀 怨望하고 지내는 部類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絶望感이 깊으면 도리어 再起의 機會를 永永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付託했다. “眞心으로 너희에게 當付하거니와 늘 심기(心氣)를 和平하게 가져라.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堂堂하여라.” 늘 進取的이고 肯定的인 態度. 이것이야말로 處地를 反轉시키는 열쇠다. ‘廢族’이 되어 어깨가 축 처진 家族에게 丁若鏞은 이런 忠告를 보냈다.
    아버지의 訓戒가 말에 그칠 뿐이라면 무슨 所用이 있겠는가. 아버지 丁若鏞은 流配라는 刑罰을 하늘이 주신 機會로 삼았다. “少時적에는 學問에 뜻을 두었으나, 지난 20年 동안 世上맛에 빠져 先王(先王)의 가르침을 잊고 지냈다. 이제 마침 餘暇를 얻었도다!”(‘자찬묘지명’) 그는 流配地에서 困境을 이기고 學問에 精進해 500卷이 넘는 著述을 남겼다. 後世는 그에게 ‘實學思想의 集大成者’라는 稱號를 바쳤다.



    ‘흙수저’ 물고 再起하다

    큰아들 정학연度 一家를 이뤄, 19世紀의 大學者 阮堂 金正喜의 벗이 됐다. 초의선사를 金正喜에게 紹介한 이가 바로 그다. 丁若鏞의 長孫 정대림度 學問에 힘써 護軍(護軍, 正四品 벼슬)이 됐고, 그 아들 정문섭度 司憲府 地平을 지냈다. 丁若鏞의 둘째아들 정학유度 父親의 實事求是(實事求是) 精神을 이어 ‘農家月令歌’를 지었다. 丁學游의 큰아들 정대무는 北靑縣監이 됐는데, 그를 包含한 三兄弟는 穩健開化派의 領袖 雲養 김윤식과도 交遊했다.
    1910年, 이 나라는 民衆의 悲願 속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들의 成就가 우리의 마음에 洽足하지는 못하다. 그러할지라도 아버지 丁若鏞의 가르침이 歲月의 모진 風波에도 代代로 이어져 滅門之禍에서 스스로 벗어난 것은 큰 多幸이다. 當時 丁若鏞의 子息들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흙수저’를 물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긴 德分에 再起할 수 있었다.
    家族이 危機狀況에 빠질수록 더욱 더 서로 配慮하고, 家族의 文化的 水準을 높이기 위해 努力하며, 堂堂한 態度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 丁若鏞의 付託. 이것은 21世紀에도 如前히 살아 있는 가르침일 것이다. ?

    ● ‘아버지 정약용’의 가르침
    - 配慮하고 讓步해 家族解體를 막아라.
    - 서울에서 가까운 10里 以內에 살며 높은 文化 水準을 維持하라.
    - 늘 심기(心氣)를 和平하게 하고 進取的인 態度를 가져라.

    百 勝 種



    ● 1957年 全北 全州 出生
    ● 獨逸 튀빙겐대 哲學博士
    ● 서강대 史學科 敎授, 獨逸 튀빙겐대 韓國 및 中國學과 敎授, 獨逸 막스플랑크 歷史硏究所 招聘敎授, 프랑스 國立高等社會科學院 招聘敎授
    ● 現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 著書 : ‘백승종의 逆說’ ‘마흔 歷史를 알아야할 時間’ ‘禁書, 時代를 읽다’ ‘正朝와 不良선비 강이천’ 等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