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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料品 財閥이 세운 캘리포니아 ‘寶物섬’|新東亞

食料品 財閥이 세운 캘리포니아 ‘寶物섬’

노튼 사이먼 美術館

  • 최정표 |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jpchoi@konkuk.ac.kr

    入力 2015-12-28 18: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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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스앤젤레스 隣近 파사데나 美術館은 빚더미에 올랐다가 食料品 財閥 노튼 사이먼에 引受돼 只今의 威容을 갖췄다. 사이먼이 드가, 피사로 等 유럽 印象派 作品을 즐겨 蒐集한 德分에 이 美術館에 가면 유럽의 名作들을 鑑賞할 수 있다.
    식료품 재벌이 세운 캘리포니아 ‘보물섬’

    노튼 사이먼 美術館은 로스엔젤레스 北東쪽의 파사데나 市(市)에 있다.

    美國 캘리포니아 州 로스앤젤레스카운티에는 自治都市가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큰 都市가 로스앤젤레스(LA) 時이고, LA 時엔 80個가 넘는 自治市가 붙어 있는데, 그中 아홉 番째로 큰 都市가 파사데나(Pasadena)다. 이 都市는 LA市 北東쪽에 자리하며 人口는 14萬 名 程度다.
    파사데나 한복판에 寶物섬처럼 아름다운 노튼 사이먼 美術館(Norton Simon Museum)이 있다. 노튼 사이먼(1907~1993)의 個人 美術館인데, 本來 이름은 파사데나 美術館(Pasadena Art Museum)이다. 하지만 1970年代 初 野心 찬 擴張事業을 推進하다가 빚더미에 올라앉는 바람에 運命이 바뀌었다.
    노튼 사이먼은 캘리포니아에서 食料品 事業으로 財閥이 된 人物로, 1960年代 美國 最高의 美術品 蒐集家로도 名聲을 날렸다. 그는 4000點이 넘는 유럽 名作을 蒐集했는데, 이들 所藏品을 展示하고 保管할 空間이 마땅치 않아 苦悶이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카운티 美術館(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寄贈할 생각도 했다. 이때 아이디어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形便이 어려워진 파사데나 美術館을 引受하는 것이었다.
    1974年 사이먼은 負債뿐만 아니라 所藏品까지 모두 책임지는 條件으로 美術館을 引受하고, 이름을 只今과 같이 바꿔달았다. 그리고 300萬 달러 以上을 投入해 美術館을 補修하고 擴張했다.

    所藏品 價値 10億 달러 以上

    이 美術館에는 1萬1000餘 點의 作品이 所藏돼 있다. 世界的인 名品도 많다. 大部分 노튼 사이먼 財團(Norton Simon Foundation)과 노튼 사이먼 藝術財團(Norton Simon Art Foundation)으로부터 長期 賃借하는 形式으로 所藏하고 있다. 所藏品 中 展示된 作品은 900餘 點. 사이먼이 美術館을 引受한 以後로는 所藏品을 外部에 賃貸하지 않았는데, 2007年부터는 美術館을 널리 알리려는 次元에서 選別的으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等에서 巡廻 展示한다. 2009年에는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과도 相互交流 協定을 맺었다.
    이 美術館의 所藏品을 市價로 換算하면 10億 달러, 우리 돈으로 1兆1600億 원이 넘는다고 한다. 財閥이 아니고서야 焉敢生心 이런 美術館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美術館은 더 理想 사이먼 個人의 美術館이 아니라 公益財團이 運營하는 公益財産이다. 美術館의 年間 運營豫算은 約 200萬 달러로 觀覽料, 收益財産, 寄附金, 政府 補助金, 會員의 會費 等으로 充當된다. 美術館 建物은 파사데나 詩로부터 1年에 1달러를 내고 빌린 땅에 세워졌다(임대기한은 2050年까지). 美國에서 個人이 세운 公益 美術館이 어떻게 運營되는지 잘 보여주는 事例다.
    사이먼이 引受하기 前, 파사데나 美術館 時節에는 샌프란시스코는 勿論 隣近 샌디에이고를 包含해서도 唯一한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 museum)이었다. 1962年에는 美國 팝아트(Pop Art) 展示會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사이먼이 이 美術館을 引受한다는 것은 현대미술관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그는 地域社會로부터 많은 非難을 받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事實은, 사이먼의 主導로 1979年 LA에 새로운 現代美術館人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LA)李 만들어진 것이다. 結果的으로 파사데나 美術館도 維持되고 새로운 현대미술관度 세워진 셈이다. 로스앤젤레스 現代美術館은 1940年 以後 同時代 作品을 企劃 展示하며 젊은 作家를 發掘, 育成하는 데 焦點을 맞췄다.

    ‘壁 없는 美術館’ 導入

    노튼 사이먼은 오리건 州 出身으로 버클리 代를 다닌 인텔리 事業家다. 大學을 中退하고 일찍부터 事業에 뛰어들어 食料品 事業에서 大成功을 거뒀고, 美國 西部에서 가장 큰 食料品 會社인 헌트 푸드(Hunt Foods)를 일궜다. 以後 다른 事業에도 손을 대 엄청난 富를 蓄積했다.
    莫大한 財力을 바탕으로 主로 유럽 名品을 사들인 사이먼은 自身의 뛰어난 事業 手腕을 美術品 蒐集에도 活用했다. 美術館을 세우기 前까지 ‘壁 없는 美術館(Museum without Walls)’ 槪念을 導入해 自身의 所藏品을 全 世界 美術館에 貸與해 收益을 올리는 同時에 可能한 限 많은 사람이 名作을 鑑賞할 수 있게 했다. 美術館을 만든 以後부터는 對與 政策을 中斷하고 自體 展示에 集中했다.
    사이먼의 美術品 蒐集과 關聯해서는 에피소드가 많다. 그는 1972年 뉴욕의 한 딜러로부터 10世紀에 製作된 南印度의 同調各床을 90萬 달러에 購入했다. 그런데 印度 政府가 이 作品이 도난당해 海外로 密搬出된 것이라고 通報했다. 그러자 사이먼은 “지난 2年間 아시아 藝術品 購入에 1600萬 달러를 썼는데 大部分 密搬出된 것이었고, 銅彫刻上 亦是 不法 搬出物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뉴욕타임스 1973年 5月 12日子). 하지만 다음 날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엔 正反對 內容의 記事가 났다. 사이먼이 問題가 된 作品이 合法的으로 美國에 輸入된 것이라고 主張했다는 것이다. 迂餘曲折을 겪은 後 1976年 사이먼은 該當 作品을 印度에 돌려주기로 決定했다. 印度 政府는 返還받기 前 9年 동안 이 作品을 노튼 사이먼 美術館에 展示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는 直接 政治에 나서진 않았지만, 政界에서도 큰 힘을 發揮했다. 그의 反對와 妨害로 再選에서 脫落한 공화당 上院議員이 있을 程度다. 當時 캘리포니아 州知事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後날 사이먼을 비롯한 캘리포니아 財閥들의 後援으로 大統領에 當選될 수 있었다. 美國에서도 財閥의 힘은 莫强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事例다.
    사이먼은 아내와 離婚 後 1971年 할리우드 有名 女俳優 제니퍼 존스(1919~2009)와 再婚한다. 존스에겐 세 番째 結婚이었다. 존스는 1940, 50年代 할리우드 最高의 女俳優로 活躍했고 아카데미 女優主演賞度 받은 바 있다. 그가 主演으로 出演한 映畫 ‘모정’과 ‘武器여 잘 있거라’는 韓國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사이먼은 再婚 後 事業보다는 美術館 運營에 專念했고, 로스앤젤레스 地域의 여러 敎育機關에 任員으로 參與하며 社會奉仕 活動을 많이 했다. 그의 死後에는 제니퍼 존스가 美術館 運營을 專擔했다. 그는 美術館을 增·改築하며 美術館 全體를 새롭게 丹粧했다. 존스는 映畫 ‘로마의 休日’ 主人公인 그레고리 펙, NBC TV 有名 뉴스앵커 톰 브로코 等 有名人士들을 美術館 理事로 참여시켜 이들을 美術館 發展에 積極 活用하기도 했다.

    드가 作品 100點 넘게 所長

    식료품 재벌이 세운 캘리포니아 ‘보물섬’

    에드가르 드가의 ‘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1878~1881).

    노튼 사이먼 美術館에는 유럽 最高 作家들의 주옥같은 作品이 櫛比하다. 사이먼은 特히 렘브란트, 루벤스, 쿠르베, 드가, 로댕, 피사로를 좋아했기에 美術館에서는 이들의 作品을 어렵지 않게 發見할 수 있다. 사이먼의 眼目이 어느 水準인지 斟酌할 만하다.
    그는 印象派 畫家 드가(Edgar De Gas·1834~1917)를 類달리 좋아했다. 美術館에는 드가의 作品이 아주 많고, 傑作도 여러 點 눈에 띈다. 사이먼은 1955年부터 1983年까지 30年 가까이 드가 作品을 꾸준하게 購入했는데, 彫刻品이 87點이고 그림 等이 40餘 點이다. 決코 만만치 않은 價格이었을 텐데도 이렇게 많이 購入한 것을 보면, 드가 作品에 對한 愛情이 남달랐던 듯하다.
    드가는 舞姬들을 즐겨 그렸다. 女人의 누드도 많이 그렸다. 特히 沐浴하는 女人이나 沐浴을 갓 마친 女人을 畫幅에 담았다. 方今 沐浴을 끝낸 女人만큼 풋풋하고 아름다운 女人이 어디 있을까. 女人의 살 냄새와 비누 香氣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瞬間이다. 옛 大衆沐浴湯 時節, 막 沐浴을 마치고 발그스레한 얼굴로 沐浴湯 門을 나서는 젊은 女人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場面으로 남아 있다.
    ‘沐浴 後 몸을 말리는 女人(Woman Drying Herself After the Bath)’은 나의 想像을 그대로 描寫해준 고마운(?) 그림이다. 그런데 當時 유럽에서는 집에 浴室이 따로 없었던 模樣이다. 沐浴하는 곳에 寢臺가 있다. 寢室에 물을 떠다놓고 대야에 물을 부어 沐浴을 한 것 같다. 오른쪽에는 벗은 옷들이 걸려 있다. 沐浴을 하면서 門을 열어둔 것도 特異하다. 開放的인 時節이었거나, 집에 혼자만 있었던 模樣이다.
    드가는 舞姬가 춤추는 모습에 集中하다보니 자연스럽게 人體의 움직임에 關心이 생겼고, 그에 關해 많은 硏究를 했다. 그래서인지 人體의 筋肉과 움직임을 매우 力動的으로 表出한 彫刻 作品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直接 發表한 彫刻 作品은 오직 한 點뿐으로 ‘14歲의 舞姬 少女(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다(나머지 作品은 그의 死後 公開됐다). 이 作品은 美國 主要 美術館이 거의 다 所藏하고 있는데, 노튼 사이먼도 놓칠 理 없다.
    이 作品의 모델은 마리(Marie van Goethem). 1881年 6回 引上巴戰(展)에 처음 선보였는데, 매우 複雜한 評價를 받았다. 琉璃筒 속에 넣어 展示됐는데, 매우 醜하고 醫學用 複製品 같다는 酷評이 大部分이었다. 머리와 얼굴이 원시인 같다는 말도 나왔다. 드가와 마리의 關係에 對해서도 臆測과 論爭이 亂舞했다. 이 作品은 本來 왁스로 만들어졌다. 드가가 死亡한 後 夫人과 딸이 이 彫刻을 洞(銅)으로 鑄造하기로 하고, 1920年부터 오랜 期間에 걸쳐 여러 個의 桐 作品을 鑄造했다. 이렇게 해서 여러 美術館이 同一한 作品을 所藏하게 됐다. 리본과 스커트는 別途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美術館에 따라 제各各이다.
    식료품 재벌이 세운 캘리포니아 ‘보물섬’

    드가의 ‘Woman Drying Herself After the Bath’(1876~1977).


    ‘印象派 리더’ 피사로

    드가는 프랑스 파리의 比較的 裕福한 家庭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그림에 才能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辯護士가 되길 願했다. 그는 아버지 뜻대로 파리에서 法大에 進學했으나 熱心히 工夫하진 않았다. 21歲 때 當時 最高의 古典主義 畫家이던 앵그르를 만나고는 本格的으로 畫家의 길로 들어선다.
    1870年 보불戰爭이 터지자 30代 中盤이던 드가는 이 戰爭에 參戰했다가 눈을 다쳐 平生 어려움을 겪었다. 戰爭 後 美國 뉴올리언스에 暫時 滯留하다 1873年 파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始作된 印象派全義 創立 멤버였지만, 그 自身은 印象派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寫實主義者(realist)라고 불리길 願했다.
    드가는 隱遁의 삶을 살았다. 藝術家는 혼자 지내야 하고, 私生活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外觀上으로는 平穩한 人生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홀아비 厭世主義者’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保守的이고 變化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식료품 재벌이 세운 캘리포니아 ‘보물섬’

    노튼 사이먼 美術館의 庭園과 蓮못.

    사이먼은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의 作品도 매우 좋아했다. 美術館에서 내 視線을 사로잡은 것은 피사로의 ‘폰토스의 布稅 블루바드(The Bulevard Des Fosses, Poutoise)’. 피사로가 1866年부터 1883年까지 山 작은 마을 폰토스를 그린 風景畫다. 보자마자 피사로의 그림임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馬車와 사람이 평화롭게 配置된, 가을 무렵의 아름다운 프랑스 시골 마을.
    피사로는 ‘印象派의 리더’다. 1874年부터 1886年까지 열린 8番의 印象派展에 모두 參加한 唯一한 畫家다. 그는 後期 印象派로 分類되는 쇠라, 세잔, 고흐, 고갱과도 親하게 어울렸다. 54歲가 돼서도 쇠라와 시냐크로부터 새로운 繪畫技法人 點描法을 배우며 함께 作業할 程度로 熱情的이었다.
    그는 印象派 畫家 中 가장 年長者로서 멘토를 自處하며 많은 畫家를 物心兩面으로 支援했다. 特히 세잔에게는 精神的으로 많은 힘이 돼줬다. 세잔은 不過 9歲 位인 피사로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일컬었다.

    美術館에 나타난 나치 掠奪品

    피사로는 카리브 해의 버진아일랜드에서 나고 자랐다. 商人인 아버지는 프랑스 國籍의 포르투갈系 유대人, 어머니는 西印度諸島 原住民이었다. 피사로는 12歲때 工夫하러 프랑스에 왔고 이때부터 그림 工夫를 始作했다. 하지만 17歲가 되자 아버지는 그를 버진아일랜드의 貨物會社에 취직시켰다.
    피사로는 職場生活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結局 21歲 때 職場을 그만두고 베네수엘라에 가서 2年間 本格的으로 그림 授業을 받았다. 그리고 25歲가 되는 1855年 파리로 옮겨가 本格的으로 畫家의 길에 들어섰다. 마흔한 살 때는 어머니의 下人과 結婚했다. 葡萄밭 管理人의 딸이었다. 파리 近郊에 살면서 7名의 아이를 낳았고, 많은 風景畫를 그렸다.
    나치가 執權하면서 獨逸이 半(反)유대人 政策을 펴자 유대人들은 갖고 있던 名品들을 값싸게 處分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中 一部는 나치 權力者에게 不當하게 뺏겼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난 後 유대人들의 품을 떠난 名品들이 유럽과 美國의 여러 美術館에 나타나기 始作했는데, 이들 中 一部는 訴訟을 거쳐 元所有者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大部分은 美術館에 寄贈됐다. 이렇게 나치 時節에 사라진 作品은 65萬 點으로 推定된다.
    이런 事緣이 깃든 그림 中에는 1897年 피사로가 그린 名作 ‘비내린 午後의 세인트 오노레 距離’(1897)도 있다. 어떤 經路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作品은 現在 스페인 마드리드의 國營 美術館에 걸렸다. 元所有主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고, 그는 그림을 나치에게 不法的으로 강탈당했다는 것을 立證했다. 그러나 스페인 政府는 그림을 返還하라는 美國의 要求를 拒絶했다. 이 事件은 LA에서 訴訟이 進行됐고, 最近 LA聯邦法院은 그림을 돌려달라는 原稿 側에 敗訴 判決을 내렸다.
    피사로는 生存 當時에는 作品을 그다지 팔지 못했다. 그러나 最近에 와서 그의 作品은 100萬 달러를 쉽게 넘어선다. 2007年 뉴욕 크리스티 競賣에서는 4點 묶음이 1500萬 달러 가까이에 팔렸다. 單一 作品 中에서 2009年 뉴욕 소더비 競賣에서 700萬 달러를 上廻하는 價格에 팔린 作品도 나왔다.

    샤이어와 ‘푸른 4人坊’

    노튼 사이먼 美術館은 20世紀 初 現代 作家들의 作品도 豐富하게 所藏한다. 이는 渴카 샤이어(Galka Scheyer·1889~1945)라는, 獨逸 胎生의 한 女人 德分이다. 샤이어는 畫家이면서 美術賞이자 컬렉터였는데, ‘푸른 4人坊(the Blue Four)’라는 畫家 그룹을 積極 後援했다. 4人坊은 當時 尖端의 아방가르드 作家 派이닝거, 칸딘스키, 클레, 졸렌스키인데, 後날 모두 現代 美術史의 最高 巨物이 된다. 샤이어는 1915年 졸렌스키를 만났고, 1921年 졸렌스키의 紹介로 나머지 세 사람도 알게 됐다.
    샤이어는 1924年 푸른 4人坊을 美國에 처음 紹介했고, 1925年 뉴욕에서 이들의 展示會를 誘致, 積極 弘報했다. 以後에도 샤이어가 푸른 4人坊을 持續的으로 後援하자, 美國에서도 유럽의 모더니즘이 擴張돼나갔다.
    1930年 LA에 定着한 샤이어는 1945年 死亡 後 所藏品을 UCLA에 寄贈했는데, UCLA는 그의 要求 條件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1953年 푸른 4人坊과 다른 現代 作家들의 作品으로 構成된 450點의 샤이어 컬렉션이 一旦 파사데나 美術館에 맡겨졌다. 파사데나 美術館이 노튼 사이먼 美術館으로 바뀌고 1976年 사이먼이 샤이어의 要求 條件을 充足시키자 샤이어 컬렉션은 公式的으로 노튼 사이먼 美術館의 所藏品이 됐다. 이런 緣故로 졸렌스키의 ‘Blonde’, 클레의 ‘The Tree of House’, 派이닝거의 ‘The Tug’, 칸딘스키의 ‘Open Green’ 等을 노튼 사이먼 美術館에서 鑑賞할 수 있게 됐다.
    美術館은 아름다운 庭園에 둘러싸여 있다. 庭園에는 有名 彫刻作品들이 展示돼 있고, 자그마한 蓮못도 만들어져 있다. 已往 노튼 사이먼 美術館을 訪問할 計劃이라면 時間을 넉넉하게 割愛해 庭園도 천천히 거닐어보기를 推薦한다.

    崔 情 票
    식료품 재벌이 세운 캘리포니아 ‘보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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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年 慶南 河東 出生
    ● 美國 뉴욕주립대 博士(經濟學)
    ● 公正去來委員會 非常任委員, 建國大 상경大學長
    ● 著書 : ‘經濟民主化, 政治人에게 맡길 수 있을까’ ‘財閥들의 特別한 外道’ ‘韓國財閥社硏究’ ‘公正去來政策 虛와 실’ ‘韓國의 그림價格指數’ 等
    ● 現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經實聯 共同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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