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金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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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金 事件
날짜 1987年 1月 3日
位置 英國領 홍콩
原因 윤태식과 김옥분(一名 수지 金) 間의 夫婦 싸움 途中에 일어남
參與者 윤태식
結果 윤태식이 自身의 아내였던 김옥분(一名 수지 金)을 殺害하고 越北하려고 했음.
死亡者 김옥분 (一名 수지 金)
調査 1. 事件 以後에 越北未遂犯을 大韓民國의 軍部 獨裁 政權에 依해 拉北被害者로 遁甲
2. 事件의 被疑者인 윤태식은 싱가포르 主宰 大韓民國 大使館에서 自身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工作員에게 拉致되었다가 脫出했으며 아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間諜이었다고 主張함
3. 事件의 被疑者인 윤태식은 2001年 11月 13日에 拘束되어 大韓民國 法院으로부터 殺人, 詐欺, 賂物供與 嫌疑에 對해 懲役 15年 6月을 宣告받음
김옥분
金玉分
出生 1952年
大韓民國 忠淸北道 忠州市
死亡 1987年 1月 3日 ( 1987-01-03 ) (35歲)
英國領 홍콩
死因 홍콩에서 自身의 男便인 윤태식과의 夫婦 싸움 途中에 살해당함
居住地 홍콩 (수지 金 事件 當時)
國籍 大韓民國
別稱 수지 金 (假名)
學歷 初等學校 卒業
職業 無職
配偶者 身元을 알 수 없는 홍콩人 男便 (離婚)
윤태식 (1986年에 김옥분과 結婚, 1987年에 홍콩에서 김옥분을 殺害한 뒤 自身의 犯罪 嫌疑를 감추기 위해 越北을 試圖했음.)
기타 홍콩에서 自身의 男便에게 殺害當한 以後에 越北未遂犯 에 依한 殺人被害者를 도리어 大韓民國의 軍部 獨裁 政權이 默認하면서 間諜으로 遁甲됨.
윤태식
尹泰植
出生 1958年(65–66歲)
大韓民國
國籍 大韓民國
職業 비디오 製作 및 流通 業體 職員, 벤처 事業家
罪名 홍콩에서 일어난 김옥분(一名 수지 金) 殺人 事件(+越北未遂)
刑量 懲役 15年 6月 (殺人, 詐欺, 賂物供與 嫌疑)
現況 2017年 4月 26日 滿期 出所
犯行期間 1987年 1月 3日
逮捕일자 2001年 11月 13日

수지 金 事件 大韓民國 企業體의 英國領 홍콩 駐在員이었던 윤태식(尹泰植)李 1987年 1月 3日 夫人 김옥분(金玉分, 一名 수지 金)을 홍콩에서 殺害하고 저지른 越北未遂事件이며 거기다 當時 第5共和國 政權은 이 情況을 알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女間諜 男便 拉北企圖事件’으로 造作했다. 이 事件은 過去 大韓民國 의 軍部 獨裁 政權이 政權 維持를 위해서 벌인 越北未遂犯을 默認으로 인한 思想 稀代의 國家暴力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윤태식은 以後 成功한 벤처 事業家로 變身해 패스21이라는 指紋認識 會社를 設立하고 政官界 人士에게 로비를 벌이다가 2001年 12月 一名 '윤태식 게이트'가 言論을 통해 드러나면서 모든 事實이 밝혀져 法의 處罰을 받았다.

事件 槪要 [ 編輯 ]

김옥분은 1952年 忠淸北道 忠州 에서 1男 6女 中에서 셋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初等學校를 卒業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實質的인 家長 노릇을 했다. 美8軍 에서 일하면서 日本人 觀光客들을 相對하다가 홍콩 사람과 結婚하여 홍콩 에서 살았다. 홍콩의 男便과 離婚한 後에 日本의 韓國系 술집에서 일하다가 또 다른 홍콩 사람과 暫時 結婚을 하기도 했으나 結局 離婚했다. '수지 金'은 大韓民國 밖에서 使用한 김옥분의 假名이었으며, 홍콩이나 日本 國籍을 取得한 것은 아니었다. 以後 홍콩에서 大韓民國 企業體 駐在員이었던 韓國人 윤태식을 만났고 1986年 에 結婚했다.

1958年生인 윤태식은 1986年 初 비디오 製作 및 流通 業體에 臨時職으로 就職하고 홍콩에서 비디오 版權을 얻어 國內에 流通시킬것을 提案하여 홍콩으로 發令받았다. [1] 中學校 1學年 中退學歷에 防衛兵 으로 兵役을 마쳤음에도, " 陸士 를 卒業하고 大尉로 豫編한 뒤 홍콩에서 學士 學位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해왔다. [2] 1986年 가을에 김옥분과 婚姻 申告를 하였으나 1987年 1月 3日 홍콩의 아파트에서 夫婦 싸움 끝에 아내 김옥분을 목졸라 殺害하고 주검을 寢臺 밑에 숨기고 이틀 뒤 싱가포르 主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大使館을 찾아가 亡命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大使館에서 미지근한 反應을 보이자 美國 大使館을 찾아갔고, 結局에는 大韓民國 大使館으로 보내졌다. 大韓民國 大使館에서 윤태식은 "北韓의 工作員에게 拉致되었다가 脫出했으며, 아내는 北韓의 間諜이었다"고 主張했다.

造作 및 隱蔽 [ 編輯 ]

윤태식을 面談한 이장춘 싱가포르 大使와 大韓民國 國家安全企劃部 現地駐在官은 그의 主張이 信憑性이 없다고 結論을 내렸다. 장세동 大韓民國 國家安全企劃部長은 現地意見을 받아들여 記者會見 保留를 指示했으나, 以後 마음을 바꿔 네 時間 만에 다시 强行하라고 指示했다. 그러나 이장춘 大使는 橫說竪說하는 윤태식이 記者會見을 해서는 안된다고 强力히 反對했다. 結局 싱가포르와 外交摩擦을 憂慮해 1987年 1月 8日 第3國인 泰國 방콕 에서 1車路 記者會見을 열고, 大韓民國으로 送還된 1987年 1月 9日 金浦空港에서 2車路 記者會見을 가졌다. (이장춘 大使는 싱가포르에서 記者會見을 進行하라는 本國의 指示를 따르지 않았다는 理由로 始末書를 쓰기도 했다.) 當時 大韓民國 言論들은 이 事件을 "北韓 女間諜이 美人計로 純眞한 男便을 꼬드겨 홍콩에서 越北시키려다가 男便이 가까스로 脫出한" 一種의 活劇처럼 報道했다.또 한 5共 政權 末期 特定 政治的 活用을 目的으로 윤태식으로 하여금 김대중이 北韓 高位 關係者들의 높은 關心을 받으며 支持를 받고 있는 것처럼 虛僞 造作 記者 會見을 하도록 하였다. [3] 生計를 위해 日本에 드나들다 홍콩에서 殺害된 술집 女從業員은 日本 朝總聯系 間諜團과 連累된 美貌의 女間諜으로 遁甲하였고 殺人犯은 '四肢(死地)에서 돌아온 反共鬪士'가 되었다. 1986年 가을부터 KBS 에서는 《南十字星》이라는 드라마 가 放映되었는데, 수지 金 事件 以後에는 아예 '수지 金'이라는 女間諜이 드라마 配役에 登場하기도 했다. [4]

只今까지는 反共, 反共해도 그 意味를 몰랐으나 우리가 왜 反共을 해야하는지를 切實하게 깨닫게 됐다.

? 윤태식의 歸國 인터뷰 [5]

윤태식은 곧바로 國家安全企劃部 南山分室로 連行되어 嚴重히 追窮을 받았으며, 結局 自身이 夫人을 殺害하였고 處罰을 避하기 위해 自進 越北 하려 했다고 自白했다. 그러나 國家安全企劃部는 윤태식이 이와 關聯해서 함부로 發說하지 말도록 했으며, 1991年 부터는 大韓民國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出國禁止를 시키기도 했다.

1987年 1月 26日 , 惡臭가 난다는 이웃집의 申告로 홍콩 警察이 김옥분의 아파트를 搜索했고 結局 寢臺 밑에서 屍體 김옥분의 주검을 發見했다. 홍콩 言論은 "수지 金은 北朝鮮 間諜이 아니다"라고 訂正報道를 했으나 大韓民國에는 이 消息이 제대로 傳達되지 않았다. 以後 홍콩 警察은 男便 윤태식이 김옥분을 殺害했을 것이라 推定하고 홍콩으로 불러서 調査하려 했으나 大韓民國 外務部 는 이에 應하지 않았다. 한便, 싱가포르 駐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大使館이 윤태식은 自進해서 大使館에 왔을 뿐 拉致祈禱는 없었다고 主張하자, 싱가포르 主宰 大韓民國 大使館도 拉北未遂는 事實이라고 反駁하기도 했다.

間諜으로 몰린 김옥분의 一家族은 風飛雹散나는 아픔을 겪었다. 一家族 中에서 세 名이 火病 調絃病 으로 世上을 떠났다. 김옥분의 女同生 네 名中 세 名은 間諜을 姊妹로 두었다는 社會的 指彈 때문에 離婚을 當했고, 조카는 따돌림 때문에 學校를 自退하기도 했다. 이와 反對로 아무런 處罰을 받지 않은 윤태식은 繼續해서 各種 詐欺 犯罪를 저질러 왔다. 映畫 配給 事業을 하다가 破産한 以後, 1994年 에는 放送社 PD 身分證을 僞造해서 信用카드 를 發給받아 數億 원을 쓴 嫌疑로 懲役刑을 宣告받고 1996年 7月에 出所했다. 以後에도 僞幣鑑識機, 中國事業進出 等의 名目으로 數千萬 원의 詐欺 行脚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經歷이 있는 윤태식이 어떻게 패스21이라는 指紋認識 시스템 벤처 會社를 設立했는가에 對해 强力한 疑惑이 남아있다. 特히, 殺人 事件을 調査했던 大韓民國 國家安全企劃部 가 패스21 指紋認識시스템의 技術試演會를 1998年 10月 國家安全企劃部에서 열기도 하는 等 國家安全企劃部가 윤태식을 特別히 管理한 것이 아닌가 하는 疑惑이 꾸준히 提起되었다. 윤태식 게이트가 드러난 以後에는 한나라黨 前現職 議員들과 새千年民主黨 議員들이 패스21의 株式을 保有하고 있음이 言論에 公開되기도 했다. 2000年 3月에는 김찬경 이 引受한 未來貯蓄銀行에 會長으로 推戴되어 拘束 直前까지 活動했다. [6] [7]

再調査 [ 編輯 ]

이 事件을 最初로 調査한 사람은 〈 新東亞 〉 이정훈 記者였다. 1995年 한 言論社 先輩에게 이 事件의 全貌를 귀띔받고 取材를 始作하였으나, 當時 勤務하던 〈 주간조선 〉(1995年)과 〈 시사저널 〉(1998年)에서 編輯部의 反對로 記事化하지 못했다. 結局 事件의 全貌가 2000年 1月 週刊東亞에 처음으로 報道되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2000年 2月 12日子 放送에서 深層的으로 다뤄졌다. 그렇지만 取材 事實을 눈치챈 윤태식은 法院에 放送 禁止 假處分 申請을 냈고, 그 結果 一部 內容을 削除한채 放映하라는 判決이 나와 實際 放送分에서는 윤태식의 이름이 文○○으로 가려졌고, 1987年 當時 新聞을 내보낸 場面에서도 이름 및 寫眞 等이 가려진 채로 放映되었다.

이 放送을 偶然히 알고 視聽하게 된 김옥분의 遺族들은 越北未遂 및 間諜 造作과는 別個로 殺人 嫌疑로 處罰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던 윤태식이 버젓이 벤처 事業家로 活動하고 있다는 事實을 알게 되자 憤怒하여 2000年 3月 9日 윤태식을 告訴했다. 以後 大韓民國 國家情報院 의 妨害 工作 等으로 인해 搜査가 遲遲不進했으나 2001年 5月 윤태식으로부터 1987年 當時 國家安全企劃部에서 있었던 일을 擔當 檢事가 陳述받아 國家安全企劃部의 隱蔽가 있었다는 情況이 捕捉되었고, 마침내 公訴時效를 50日 남겨둔 2001年 11月 13日 윤태식은 殺人 嫌疑로 拘束되었다. 그리고 11月 24日 SBS 에서는 《 그것이 알고 싶다 》를 통해 2000年 2月 當時 放送되지 못한 部分을 包含하여 수지 金 事件의 全貌를 詳細하게 다뤘다.

結果 [ 編輯 ]

2002年 5月 14日 法院은 '아내를 殺害한 뒤 주검을 숨기고, 拉北될 뻔했다가 脫出한 것처럼 거짓 記者會見을 여는 等 罪質이 나쁘다'며 '國家安全企劃部(現 國家情報院)와 더불어 遺族들에게 15年동안 씻을 수 없는 傷處를 입히고도 全혀 反省하는 幾微가 없어 重刑을 宣告받아 마땅하다'고 밝히고 윤태식에게 殺人, 詐欺, 賂物供與 嫌疑에 對해 懲役 18年을 宣告했다. [8] 그러나 윤태식이 아내 殺害後 越北을 試圖한 情況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隱蔽 및 造作을 主導했던 장세동 等 國家安全企劃部 關係者들에 對해서는, 2002年 6月 檢察은 職權濫用罪(公訴時效 5年)와 職務遺棄罪(公訴時效 3年)의 公訴時效 가 지났다는 理由로 '公訴權 없음' 處分을 내렸다.

이에 對해 遺族 10名은 같은 해 大韓民國 政府 와 윤태식을 相對로 108億 원의 損害賠償 請求訴訟을 냈고, 法院은 2003年 8月 14日 42億 원의 賠償 判決을 내렸다. 이 費用은 當時 類似訴訟과 比較했을 때 最高의 賠償 金額이었다. 大韓民國 에서 政府가 反人道的 犯罪를 저지른 公務員에게 求償權을 請求한 것은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과 關聯된 박처원 前 治安監 以後 두 番째였다. 國家情報院은 2003年 8月 21日 故人의 冥福을 빌며 事件造作에 對해 公式 謝過했다. 大韓民國 法務部 는 수지 金 事件의 抗訴를 抛棄함으로써 事件을 終結시켰고, 政府는 장세동 等 當時 國家安全企劃部 責任者에게 求償權 을 請求해 賠償額을 물리기로 決定했다. 장세동은 求償權에 依한 賠償額 支拂을 避하기 위해 8億 원臺의 빌라를 處分하기도 했다. 이 事件을 契機로 大韓民國 에서는 國家에 依한 反人倫的 犯罪에 對해서 公訴時效가 果然 必要한 것인지에 對해 큰 論難이 일었다.

事件 以後 [ 編輯 ]

懲役刑을 宣告받고 服役中인 윤태식이 2012年 이 事件과 關聯하여 屍身 鑑定을 맡았던 法醫學者 이정빈 檀國大學校 碩座敎授에게 脅迫 便紙를 보냈다는 事實이 채널A 를 통해 알려져 物議를 빚기도 했다. [9]

윤태식은 2017年 4月 26日 滿期 出所하여, 携帶폰 電子貨幣 事業을 새로 始作하였다. [10]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의 時事常識事前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에는 그가 前職 安企部 幹部였다는 內容이 있으나 이는 事實과 다르다.
  2. 나라 뒤흔든 '패스21' 윤태식은 누구? Archived 2014年 5月 3日 - 웨이백 머신 - 中央日報 2002年 1月 31日
  3. 김옥분 호스티스 生活 - 마카오 자주 出入 - 동아일보 1987年 1月 8日
  4. 安企部가 一一이 臺本 고쳤다 - 한겨레 21 第394號
  5. "살아 돌아온게 꿈만 같다." 京鄕新聞 1987年 1月 10日
  6. (인터뷰) 未來相互信用金庫 會長 윤태식 Archived 2014年 2月 1日 - 웨이백 머신 - 齊民日報 2000年 3月 8日
  7. 아내 ‘수지김’ 殺害한 윤태식 未來貯蓄 會長 지냈다 - 한겨레 2012年 5月 10日
  8. `수지김 殺害'윤태식氏 懲役 15年6月 - 聯合뉴스 2003年 2月 14日
  9. '수지김 事件' 犯人, 獄中서 脅迫 便紙 發送 , 채널A, 2012年 10月 31日
  10. “윤태식 “나는 永遠한 罪人, 수지 金과 그 家族들에게 죽어서도 謝罪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 《월간조선》. 2018年 2月 . 2018年 11月 5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