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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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事件
날짜 1979年 10月 26日
時間 午後 7時 41分 ( KST )
位置 서울特別市 鍾路區 궁정동 安家
(現 靑雲孝子洞 無窮花동산)
結果 朴正熙 , 차지철 等 數十 名 死亡, 김재규 逮捕, 戒嚴令 發令
死亡者 警護室長 차지철 , 第9代 大統領 朴正熙 , 警護處長 정인형, 警護副處長 안재송, 大統領 警護官 김용섭, 大統領 運轉技士 金鎔泰, 警護員 數十名

10·26 事件 또는 朴正熙 大統領 被擊 事件 ( 韓國 漢字 : 朴正熙大統領被擊事件, 英語 : Assassination of Park Chung Hee ), 궁정동 事件 (宮井洞 事件)은 1979年 10月 26日 大韓民國 中央情報部 部長 김재규 박선호 , 박흥주 및 安家 警備員들과 함께 朴正熙 大統領 을 弑害하고, 차지철 警護室長, 정인형 大統領 警護處長, 안재송 大統領 警護副處長, 김용섭 大統領 警護官, 金鎔泰 大統領 警護室 車輛運行係長 等을 殺害한 事件이다. [1]

1979年 10月 26日 , 大統領 朴正熙는 揷橋川 防潮堤 竣工式과 KBS 唐津 送信所 開所式에 參席한 後 같은 날 저녁에 궁정동 安家에서 警護室長 차지철, 祕書室長 김계원 ,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와 함께 宴會를 가졌다. 宴會 中에 朴正熙는 김재규의 銃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國軍 서울 地球 病院으로 移送되었으나 移送 中 死亡하였다. 當時 朴正熙의 나이는 滿 61歲였다. [2]

김재규 는 事件 直後 自由民主化에 對한 熱望으로 違憲的으로 國會를 解散시켰던 朴正熙 大統領을 正義의 이름으로 處斷하였다고 主張하였으나, 權力 暗鬪 過程에서 김재규가 차지철 에 밀리는 狀況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衝動的으로 일으킨 犯行이라는 설, [3] 또는 1972年 維新政權 또는 宣布 直後부터 7年동안 장준하 와 함께 쿠데타를 準備해 왔다는 說이 있으며, [4] 朴正熙 政權의 核開發 推進과 박동선 코리아 게이트 事件 等으로 韓美 關係가 惡化되자 美國 政府가 김재규를 통해 朴正熙의 弑害를 隱密히 助長했다는 見解 또한 存在한다. [5]

事件의 背景 [ 編輯 ]

朴正熙의 政策 [ 編輯 ]

1970年 當時 한-美 關係의 側面에서 그리고 經濟的 側面에서 베트남 派兵을 통한 여러 가지 惠澤을 누리던 韓國 政府에게 닉슨 독트린 을 통한 美軍 撤收의 可能性은 큰 衝擊으로 다가왔다. [6]

1969年 7月 25日 , 닉슨이 괌에서 東아시아 同盟國들의 美軍備 負擔減縮 方針 을 發表한 直後, 8月 21日 韓國의 朴正熙 大統領은 샌프란시스코 에 있던 닉슨 大統領을 直接 찾아가 頂上會談을 갖는다. 이 會談에서 닉슨 大統領은 韓國은 軍事減縮에서 例外가 될 것이며, 萬若 駐韓美軍의 減縮 또는 撤收 計劃이 있을 境遇 事前에 韓國 政府에 그 日程을 알려주고 베트남에서의 平和協商에 對해서도 韓國 政府와 緊密히 協議하겠다고 約束한다. [7] 그러나 닉슨 大統領은 韓半島에 對한 政策을 再點檢한 끝에 駐韓美軍 1個 師團의 撤軍을 斷行하게 된다. [6] [8]

朴正熙 大統領은 1970年 6月 15日子 書信을 통해 防衛負擔이 韓國의 資源과 能力을 넘어서고 있다고 指摘하면서, 駐韓美軍 感君恩 北韓 의 全面的인 南侵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를 剛하게 反對하였다. 그는 抑止力의 弱化를 防止하기 위해 韓國軍 强化가 先行되어야 함을 力說하고 있다. 朴大統領은 防衛産業 育成, 韓國軍 增員, 駐韓美軍 中 海軍과 空軍 强化 必要性, 美國의 大韓防衛 意志를 强化시키는 外交的 保障 等에 關한 韓美 協議가 必要함을 指摘하였다. [8]

한·美間의 異見이 持續되자 1970年 8月 撤軍協商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그뉴 美 副統領이 서울을 訪問하여 朴大統領과 長時間 會談을 갖게 된다. 副統領의 韓國 訪問 브리핑 文件에는 朴正熙가 駐韓美軍 減軍 時期와 71年 봄 選擧 期間이 一致한다는 點에 對해 不安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美國이 防衛條約의 모든 義務를 지키되, 韓國이 要求하고 있는 有事時 自動介入은 許諾할 수 없음을 못 박고 있다. [8]

1972年 7月 4日 朴正熙 政府 中央情報部長 이후락 北韓 에 派遣해 7.4 南北 共同 聲明 을 祕密裏에 合意시키며 北韓軍 南侵 威脅을 막는 時間을 벌게 한다. 同時에 駐韓美軍 撤收를 强行하려는 美國 政府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努力을 持續하되, 實際로 美軍이 撤收했을 때를 對備하여 必死的으로 自主國防力을 大幅 增强시키기 始作한다. [9] 大韓民國의 核武器 開發 이 처음 試圖된 것도 이 때이다. [9] [10]

政策의 批判 [ 編輯 ]

허나 김재규 닉슨 독트린 에 抵抗하는 朴正熙 自主國防 政策 에 大暑 매우 懷疑的인 態度를 가지고 있었다. 10.26 暗殺事件 裁判 뒤 抗訴理由補充서 記錄에서 김재규는 大韓民國의 自主國防 實現에 對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評價하며 朴正熙의 政策을 批判하였다. [11] [12]

自主國防이 以上일는지는 몰라도 現實的으로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西獨 같은 나라도 集團安保를 强調하고 있는 터에 우리나라가 자주 國防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發想 自體가 우스운 것입니다. [11] [12]

1979年 當時 김재규 는 美國側과 緊密한 交流를 維持하고 있었고, 글라이스틴 駐韓美國大使 또한 김재규를 통해 靑瓦臺 權力層을 接觸할 수 있었다. 또한 當時 CIA 韓國支部長 로버트 브루스터 는 김재규와 種種 골프를 즐기며 密接한 關係를 維持했다고 밝혔다. [13]

1979年 6月 26日 카터 前 大統領의 訪韓 때도 朴正熙 大統領은 大大的인 歡迎 人波를 組織하고 晩餐을 여는 同時 美軍 問題를 言及하지 말아 달라는 美國 側의 付託에도 不拘하고 45分間 美軍 撤收의 不當性을 演說했었다. [14] 한便 김재규 카터 前 大統領의 訪韓 한달 前부터 글라이스틴 駐韓美國大使와 CIA 서울支部長 로버트 브루스터 와 자주 만나 美國人들 視角에서 본 韓國 經濟와 國內政治에 對한 意見을 들을 수 있었다. [11]

派閥 싸움 [ 編輯 ]

朴正熙 體制 當時 靑瓦臺에서는 中央情報部長 이후락 , 靑瓦臺 警護室長 박종규 , 保安司令官 김재규 같은 人物들을 軸으로 하는 權勢들이 存在했다. 김재규 의 라이벌인 陸軍防諜隊腸 윤필용 또한 1965年 5月 에는 원충연 쿠데타 謀議를 摘發하고, 1968年 1.21 事態 때는 間諜을 잡는 功을 세워 [15] 首警司令官으로 進級, 大統領의 信任을 얻게되었고, 朴正熙 는 이들 4名 側近을 適當히 競爭시키고 서로 牽制하게 하면서 權力을 管理했다. [16]

팽팽한 派閥展 中 自尊心이 剛했던 김재규 (陸士 期數 2期)가 乘勝長驅하던 後輩 윤필용 (陸士 期數 8期)에게 公開的으로 亡身을 當하는 事件이 터진다. 1971年 8月 윤필용 김재규 派閥이었던 首警司 內의 保安部隊가 自身의 電話를 盜聽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憲兵隊를 動員하여 首警司 營內의 保安隊 事務室을 閉鎖하고 道廳 테이프를 押收한다. 以後 김재규 는 한 달 뒤 保安司令官에서 解任되어 江原道 最前方 山골에 있던 3軍團長으로 左遷된 以後 軍을 떠난다. [17] 이 事件을 契機로 軍部 內에서 윤필용 의 位相은 더욱 높아졌으며, 몇年 뒤 1973年 그가 支援하던 全斗煥 , 손영길 , 김복동 , 최성택 , 等 하나회 核心이던 陸士 11期生들이 모두 將軍으로 進級하며 尹 司令官은‘하나회의 代父’라는 別名을 가지게 된다. 그 뒤로도 김형욱 中央情報部長, 강창성 保安司令官,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윤필용 司令官, 차지철 大統領警護室長, 서종철 國防部 長官의 派閥들은 持續的으로 對立하였다. [18]

1972年 10月 維新 宣言 以後에 派閥 싸움은 더욱 더 過熱되었고, 靑瓦臺 祕書室長 김정렴 을 除外한 朴正熙 周邊의 核心 側近들이 持續的으로 交替가 되었다. 特히 1973年 ‘윤필용 謀反事件’은 靑瓦臺 權力構圖에 큰 變化를 준 事件이었다. 그 해 4月 이후락 當時 中央情報部長과 술을 마시던 尹 司令官이 “ 朴正熙 大統領이 老衰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後繼者는 이후락 兄님이 해야 한다”고 發言해 問題가 됐다. 이로 인해 尹 司令官은 陸軍 普通軍法會議에서 8個 罪目으로 懲役 15年型과 罰金 2,000萬원, 追徵金 590萬원을 宣告받았다. [18] 이뿐만 아니라 손영길 准將 等 하나회 所屬 將星 3名을 包含한 將校 13名이 橫領과 受賂, 軍務離脫 等의 嫌疑로 懲役刑을 받았고 ‘윤필용派’로 分類된 將校 31名이 强制 豫編했다. 또 24名이 人事移動 指示를 받았고 160餘 名이 監視對象으로 分類됐다. 民間人으로 尹 司令官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 當時 한양대 總長 兼 大韓日報 社長이 拘束됐고 陸士 11基와 親하게 지내던 李源朝 第一銀行 次長은 解職됐다. [16]

내가 보기에 윤필용 事件은 이후락 中情部長을 牽制하려던 박종규(朴鐘圭) 警護室長이 尹 將軍의 私席 發言을 針小棒大(針小棒大)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 前 國家情報院長 李鍾贊 [19]

中央情報部長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 윤필용 이 잡혀가자 바로 名譽博士 學位를 받는다는 핑계로 臺灣 으로 빠져나갔다가 美國 으로 亡命해버렸다. 이후락 윤필용 事件으로 흔들린 立地를 挽回하기 위해 김대중 拉致 事件 에 積極 나섰다가 交替되었다. [16]

朴正熙 政權때 윤필용 事件 搜査를 擔當하며 不法 私組織 하나회 를 摘發했던 강창성 1980年 全斗煥 新軍部 에게 逮捕되어 拷問 搜査를 當하고 賂物 收受 嫌疑로 懲役살이를 하게 된다. [20] [21]

朴正熙의 警護室長이던 박종규 1974年 朝總聯 멤버이자 金日成 追從者였던 문세광 令夫人을 狙擊 한 事件의 責任을 지고 辭任하며 그 後任者로 차지철 이 들어왔고, 1971年 道廳事件 以後 軍을 떠나며 權勢를 잃었던 김재규 는 朴 大統領의 配慮로 湖南肥料 社長, 유정회 國會議員, 建設部長官을 歷任하며 政治權을 떠돌다 1976年 코리아게이트 事件 以後 更迭된 第7代 中央情報部長 신직수 의 뒤를 이어 같은해 12月 에 第8代 中央情報部長으로 任命되며 靑瓦臺 最側近 勢力으로 復歸하게 된다. [16] [17]

朴正熙 大統領에게 生活의 均衡을 잡게 한 건 陸 女史였다. 그분이 世上을 뜨자 大統領은 생각과 行動의 均衡에 금이 가기 始作했다. 分割하여 統治한다는 朴 大統領의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은 제대로 作動하지 않았다. 權力의 醜는 2人者 行世를 하는 차지철 警護室長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은 大統領의 信任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朴 大統領은 차지철과 김재규에 둘러싸였다. 祕書室長 김계원은 이들을 牽制하지도 調整하지도 못했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忠誠競爭은 언제 爆發할지 모르는 時限爆彈 같았다.
? 金鍾泌 證言錄, 2015年 8月 3日 中央日報 [22]

當時 김재규 에 對한 將校들의 輿論은 ‘自尊心이 剛하고 섬세하지 못해 情報業務를 다루기에 不足하며 卽興的, 豬突的이고 攻擊的인 性格으로 차분하지 못하다’는 否定的 評價가 支配的이었다. 이미 김재규 에게는 後輩 윤필용 의 部隊를 어설프게 盜聽하려다 들켰던 事例가 있었고, 朴正熙 도 當然히 이러한 輿論을 認知했으나 周邊에 人材가 없었다. 參考로 차지철 또한 김재규보다 8살 아래 後輩이다. 1973年 윤필용 將軍과 손영길 將軍의 ‘쿠데타 謀議 陰謀 事件’ 때문에 이후락 中情部長을 包含한 3名의 ‘忠臣’을 잃었고, 1974年에는 陸英修 女史 被殺事件 으로 박종규 警護室長도 떠났다. 그리고 이 事件 當時 軍內 優秀 將校 30餘 名과 中央情報部에서 30餘 名의 優秀 人材를 整理했기 때문에 中情部長으로 登用할 사람도 마땅찮았다. 따라서 當時 核心 情報를 다루는 사람들은 朴 大統領이 不得已 김재규 建設部長官을 中央情報部長에 임명한 것으로 봤다. [17]

張俊河의 쿠데타 企劃 [ 編輯 ]

10月 維新 으로 朴正熙 에게 反感이 있던 김재규 가 쿠데타를 7年間 準備해 왔으며 張俊河의 '8月 擧事' 計劃에도 參與했었다는 說이 存在한다. [3] [23]

장준하 의 '8月 擧事'는 1975年 光復 30周年이 되는 8月 15日에 맞춰 朴正熙 大統領 또는 維新 政權을 除去하려는 計劃이었으며 金大中 , 함석헌 , 홍남순 같은 여러 在野人士들 뿐만 아니라 軍部 同調 勢力까지 包含되었다고 傳해진다. [24] 實際로 2006年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가 進行한 調査 過程에서 1975年 7月 29日 金大中 前 大統領과 장준하 가 在野勢力을 糾合해 어떠한 擧事를 치를 것이라는 合意를 했던 事實이 밝혀진다. [25] 調査 面談에서 金 前 大統領은 7月에 張俊河와 密談을 했던 것, 維新體制 反對運動을 벌이는데 合意를 했던 것은 認定하였으나 쿠데타나 大統領 暗殺 計劃에 對해서는 言及하지 않았다. [26]

장준하 의 長男인 장호권 은 日曜新聞과의 인터뷰에서 "先親은 當時 '擧事'를 앞두고 在野人士 뿐만 아니라 軍 將星級 人士들과도 集中的인 물밑 接觸을 가졌으며, 거기에는 김재규 部長도 勿論 包含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27] 그는 "平素 先親은 金 部長을 '民主化 일을 같이 할 愛國軍人'이라고 評할 程度로 두 분은 意氣投合하는 關係"였으며 “金 部長은 先親과 69年頃 첫 對話를 가진 以後 자주 만나 뜻을 함께 해 왔고, 75年 8月 巨事日 直前까지도 꾸준히 接觸할 程度로 함께 해왔기 때문에 金 部長의 擧事 計劃이 先親의 뜻과 一致하는 대목이 있다”고 回顧했다. [27]

李富榮 統合민주당 最高委員 또한 김재규 의 暗殺 動機가 單純한 '偶發的 殺人'이 아니라 옛부터 장준하 와 交感했던 維新政權에 對한 反感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主張한다. [28]

74年末 張俊河 先生이 緊急措置 1號로 拘束됐다가 病保釋으로 풀려나 鍾路 化身 뒤에 있는 曺廣鉉 內科에 入院中이었다. 問安次 찾았더니 張先生은 軍 出身 中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當時 建設部長官人 김재규氏라고 했다. 張先生이 國會 國防委員 時節 麟蹄에 있는 3群團으로 國政監査를 나갔다가 軍團長이던 김재규氏를 만났는데, 張先生의 徹底한 監査를 보고 김재규氏가 感銘을 받아 尊敬하는 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그後 둘이 자주 만나 朴大統領의 無理한 維新體制에 對해 서로 憤怒를 表示하는 等 깊은 校監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이부영 前 민주당 最高委員 [28]

李富榮 最高委員의 이같은 主張은 문홍구 前 合參本部長의 證言을 통해 說得力 있게 뒷받침된다. 文氏는 維新 時代를 回顧하면서 "朴大統領이 70年代初 김재규 保安司令官을 시켜 張俊河氏를 懷柔하려 했으나 김재규가 장준하에게 말려들었다"는 要旨의 證言을 한 바 있다. [28]

10.26 事件 以後 열린 軍事裁判에서 김재규 스스로 "72年 維新憲法을 보면서 이는 明白한 獨裁 憲法이다, 이 憲法을 打倒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움텄다"며 1972年 10月 維新 宣布 以後 朴 大統領 暗殺을 여러 次例 企圖했다고 法廷에서 陳述하였다. 하지만 狀況이 如意치 않아 모두 無爲에 그쳤다는 것이 그의 主張이다. [27] [29] 工巧롭게도 김재규가 처음 反正의 마음을 품었다는 時期와 道廳事件 以後 左遷되어 軍을 떠났던 時期가 一致한다. 또한 김재규는 74年 9月 18日 建設部長官 辭令狀을 받으러 갈 때 바지주머니에 拳銃을 갖고 갔고, 75年 1月 27日頃 大統領의 建設部 初度巡視 때도 太極旗 밑에 拳銃을 숨기는 等 여러 次例 機會를 엿봤다고 主張한다. 偶然히도 장준하 의 '8月 擧事' 準備 時期와 一致하는 대목이다. [27] [29]

허나 72年부터 維新憲法을 打倒하려 했다는 김재규 의 主張은 1978年 金鍾泌 前 國務總理와 나누었던 對話 內容과는 사뭇 다르다. 2015年 8月 5日 < 中央日報 >에 機制된 '김종필 證言錄'에 依하면 1978年 2月 김재규는 김종필이 住居하던 서울 中區 청구동 을 찾아가 "朴正熙 大統領을 終身 大統領으로 모시는 任務에 모든 機能과 資源을 集中하기로 하였다"고 傳하며 달라진 中央情報部의 基本 任務에 抵觸되는 者는 團束 對象이 될 것이라고 警告한다. 이에 김종필이 "情報部의 基本 任務 變更이 朴 大統領의 指示냐"고 물으니 김재규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發想한 겁니다" 라고 答하였다고 回顧한다. [30]

事件의 進行 [ 編輯 ]

1979年 10月 26日 朴正熙 大統領은 執務室에서 主要 業務報告와 決裁를 마친 뒤 午前 10時 27分 警護室에서 準備해놓은 헬리콥터에 搭乘하여 午前 11時 頃 揷橋川 防潮堤 竣工式에 參席한 뒤 낮 12時 10分 다음 일停止이던 對北用 KBS 唐津 送信所 補强工事 竣工式에 到着한다. [31] [32]

開所行事가 끝난 午後 12時 45分 大統領 一行은 近處 都賈호텔 에서 가볍게 點心食事를 한 뒤 午後 1時 50分 다시 靑瓦臺 歸路에 오른다. [31] 移動 途中에 朴 大統領은 헬기 機長에게 "서울로 가기 前에 牙山灣 쪽으로 가서 顯忠祠 上空을 한 바퀴 돌아주게"라고 請하였고, 大統領의 平素 生活을 잘 알고 있던 一行들은 별다른 拒否感이 느껴지지 않는 自然스러운 指示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33]

午後 2時 32分, 靑瓦臺에 到着한 [31] 朴 大統領은 氣分 좋게 손을 흔들며 2號基를 타고 먼저 到着해 待機 中이던 隨行 祕書官들의 迎接을 받았다고 한다. [33]

午後 4時 10分 頃, 情報部 南山분청 本人 事務室에 있던 김재규 情報部長은 차지철 警護室長으로부터 午後 6時에 大統領을 모시고 서울 鍾路區 궁정동 靑瓦臺 敷地 內에 있는 中央情報部 所屬의 安家( 獨立運動家 염동진 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이자 只今의 靑雲孝子洞 無窮花동산 )에서 [34] 晩餐이 있을 것이라는 電話 連絡을 받는다. [35]

차지철 의 通報를 받은 直後 김재규 는 隨行祕書官이던 박흥주 大領과 함께 南山의 部長室을 出發하여 20分 뒤에 宮井洞의 情報部 安家에 到着한다. 김재규는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박선호 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報告를 받은 뒤 박흥주 와 윤병서 祕書를 데리고 2層 部長 執務室로 올라간다. [36] 2層으로 올라간 김재규 는 事務室 金庫에서 을 꺼내 實彈을 裝塡하고 故障有無를 確認한 뒤 徐가 뒤에 숨겨놓는다. [35] [37]

午後 4時 40分 頃, 김재규 는 1層 윤병서 儀典費서의 房에 있던 박흥주 에게 인터폰을 하여 鄭昇和 總長과 金廷燮 第2次長補에게 電話 連絡을 指示한 뒤 (김정섭은 不在中이라 追後 連絡하겠다고 傳한다) 같은 場所에서 午後 6時 30分 저녁 約束을 잡으며 일부러 大統領과의 晩餐 자리와 겹치게 한다. [35] 1979年 12月 10日 < 中央日報 > *記事에는 5時 30分 約束이었다고 記載되었지만 김재규의 다른 陳述書들과 박흥주 大領의 陳述까지 통틀어 比較한 結果 午後 6時 30분일 可能性이 더 높다. [37] [36]

午後 5時쯤 김재규 는 祕書들에게 라이터 주머니가 큰 洋服 바지을 要求하였고, 20分 뒤 저녁 6時 30分에 올 손님들을 위해 食事 3人分을 準備해달라 注文한다. 박흥주 大領은 이날 午後 짬을 내어 洋靴店에 들려 검은色 구두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36]

5時 10分 즈음 到着한 大統領 祕書室長 김계원 김재규 가 食堂에 들어가기 前 事務室에서 만나 對話를 나눈다. 김계원은 신민당이 정운갑 代行體制가 出帆하면 事態가 제대로 될 것이라고 言及했다고 傳해진다. 김재규는 김계원 室長에게 '그 親舊'를 해치우겠다고 言及했더니 金室長은 아무 말 없이 若干 肯定的인 表情을 지었다고 主張한다 [37]

저녁 6時 5分 즈음 到着한 朴正熙 차지철 이 궁정동 安家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宴會場이 있는 '나'洞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을 自身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朴正熙와 대면했다. [38]

한便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 는 하루 前 涉外해둔 모델 신재순 [39] 當日날 涉外한 歌手 심수봉 을 晩餐 場所로 데려와 警護官 待機室에서 保安 誓約書를 쓰게 했다. [40] 신재순이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차지철 이 '옆에 깡筒을 갖다 놓을터이니 거기에 부어버려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고 한다. [41]

그렇게 朴正熙 김재규 , 차지철 , 김계원 , 심수봉 , 신재순 과 함께 傳統 韓國式 晩餐 交子床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食事를 하였다.

以後 김재규는 궁정동 安家에 오자 마자 電話로 들어오라고 한 陸軍參謀總長 鄭昇和 와 中央情報部 第 2次長補 金廷燮 이 있는 '가'棟으로 들어가 저녁 7時 10分頃 그들에게 諒解를 求했다. 김재규는 다시 宴會場으로 갔고 門 앞에서 總 點檢을 하는 瞬間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銃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警護員 있는 廚房으로 내려갔다가 宴會場에 다시 들어온 時點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時 30分에 中央情報部長 隨行祕書 박흥주 와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 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 (大統領 警護處長)과 안재송 (大統領 警護副處長)을 處斷하고, 朴 大領(박흥주)은 警備員들과 함께 廚房의 警護員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革命이다!

다시 돌아온 時間이 저녁 7時 38分이었다. 심수봉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中이었다.

午後 2時 密談 [ 編輯 ]

1979年 10月 26日(事件 當日) 午後 2時頃 김재규가 大統領을 弑害하기 앞서 글라이스틴 駐韓 美國 大使 를 먼저 만났었다는 事實이 뒤늦게 드러났다. [42] 김재규와의 마지막 對話가 1979年 9月 26日이라고 公式的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大使의 主張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13] 朴 大統領이 暗殺되는 當日날 글라이스틴 臺詞가 김재규 를 무슨 理由로 만났는지, 무슨 對話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엇갈리는 證言들 [ 編輯 ]

2021年 11月 25日 大韓民國 行政안政府 大統領記錄官은 總 25,000餘件의 歷代 大統領 11名의 原文 記錄誌들을 公開하기로 決定한다. 다음날인 26日부터 公開된 記錄物들 中에는 그동안 一般에 公開되지 않았던 文件, 映像 等으로 國民的 關心과 學術的 價値가 높은 原文부터 優先視되며, 여기에는 1979年 10月 26日 朴正熙 大統領의 하루 日誌 또한 包含되어 있다. 過去 김계원 祕書室長의 證言들 中 靑瓦臺의 公式 儀典일지 記錄과 不一致하는 內容들이 發見되며 흥미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31] [32] [43]

김계원 祕書室長의 證言에 따르면 午前 會議 以後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朴正熙 大統領과 함께 揷橋川 防潮堤 竣工式을 가기 위해 當時 '權力의 第 2人者'라고 불리던 大統領 警護室長 차지철 에게 電話를 걸어 헬기에 同乘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고 證言한다. 그에 依하면 이때 차지철이 大統領이 탄 헬기에는 자리가 없다고 김재규의 헬기 童僧을 拒絶하며 2號基를 타라고 하였고, 氣分이 傷한 김재규가 揷橋川 防潮堤 竣工式場은 건너뛰고 朴 大統領의 다음 巡訪 일停止이던 對北用 KBS 唐津送信所 補强工事 竣工式까지 乘用車로 直接 現場에 내려가 뒤늦게 合流한다고 傳했다.

허나 김재규와 박흥주의 證言들에서는 애初 아침 헬리콥터 葛藤에 對한 言及이 없었으며, 김재규가 唐津送信所 竣工式까지 乘用車로 가서 大統領 一行과 合流했다는 內容 또한 存在하지 않는다. 金部長과 朴大領의 陳述書 둘 다 김재규가 南山 情報部長 事務室에서 執務를 보다가 차지철의 電話를 받고 궁정동으로 出發했다고 證言만 할 뿐이다. 또한 김재규가 唐津送信所 竣工式에 나타났다는 김계원의 證言은 行事 前날인 10月 25日, 突然 警護室로부터 連絡이 와서 “大統領은 豫定대로 參席하지만 情報部長이 빠지게 되었으니 放送社 側도 參席人員을 줄이라는 通報”가 왔으며, "金 部長이 唐津送信所 行事에 參席하기 위해 온갖 準備를 다 해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參席하지 말고 부마事態에 對備하라”는 連絡을 받자 冊床을 내리치며 憤慨했다는 것이다"라고 證言했던 최서영 前 코리아헤럴드 社長의 回顧와 正面으로 부딛히는 主張이다. [44] --

여기에다 김계원 祕書室長이 大統領 暗殺을 막기 위해 自身이 김재규 PPK 拳銃 을 손으로 쳐내며 故障을 내었다는 그의 主張 또한 다른 事件 證人들의 證言調書에서 言及되지 않는 等 엉뚱한 內容들이 相當히 많이 發見되고 있다.

事件 以後 提出된 김재규 의 抗訴理由補充書에 따르면 宴會場에서의 對話 中 政治와 經濟的인 問題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民衆의 大規模 騷擾에 自身이 適切히 對處하지 못했다는 理由로 朴 大統領에게 叱咤당했다고 主張한다. [45] 신재순 또한 最初 陳述調書에서는 차지철 室長이 김재규 部長을 刺戟하고 藥을 올리듯 막말을 했었다고 證言하였다. [41] 김재규는 朴正熙 大統領이 버럭 火를 내며 "앞으로 釜山 같은 事態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直接 發砲命令을 내리겠다"고 逆情을 내었으며, 이에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萬 名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隊員 100萬-200萬 名 程度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呼應을 하였다고 主張한다. [45]

다른 資料에 依하면 平素 新民黨 科 學生 示威, 勞動者 罷業을 더 確實하게 彈壓해야 한다고 主張했던 차지철이 宴會 자리에서 中央情報部의 지나치게 溫乾한 對應 탓에 混亂이 더욱 擴散됐다고 "反抗하는 者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發言을 했고, 이에 朴正熙가 同意하며 4.19 革命 곽영주 가 任意로 發砲했기 때문에 問題가 發生했지만 이番에는 發砲權者인 本人이 國家元首이기 때문에 아무 問題될게 없다고 答辯했다고 主張한다. [46]

허나 後날 신재순 심수봉 은 1979年 11月 6日 當時 全斗煥 이 戒嚴司 合搜部 本部長 資格으로 發表한 內容 中 宴會자리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火를 내거나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 甚한 意見 衝突이 있었다는 內容은 完全한 創作이라고 批判하며 처음부터 合同搜査本部 側에서 自身들에게 거짓 陳述을 强要했다고 主張한다. [47] [48] [49] [41]

심수봉은 차지철과 김재규가 言聲을 높이며 말다툼을 했다거나, 宴會자리에서 朴正熙가 火를 내며 學生 示威를 더 確實하게 彈壓하라는 要求를 했다던지 金永三 을 拘束起訴 하라는 對話는 없었으며, 宴會席에 들어갔던 때에 雰圍氣는 좋았고 宴會室과 가까웠던 警護官 待機室의 警護員들도 緊張이 풀린 狀態였다고 밝히며 1979年 記錄된 自身의 陳述調書 內容들 [39] 中 一部를 飜覆한다. [47]

그의 證言에 依하면 김재규가 宴會자리에서 차지철과 朴正熙 大統領에게 反論을 提起하며 말다툼을 벌였다는 內容은 合同搜査本部와 言論이 過度하게 김재규의 證言만을 定說로 받아들이면서 生成된 歪曲된 內容들이며, 合搜部 調査過程에서 신재순 氏와 함께 그 內容이 틀렸다는 事實을 몇 次例 指摘 했지만 結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主張한다. [48] [50] [51]

事件의 瞬間 [ 編輯 ]

1979年 10月 26日 저녁 7時 41分, 신재순 심수봉 의 伴奏에 맞춰 '사랑해 當身을'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中 밖에서 돌아온 김재규 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 라는 高喊과 함께 발터 PPK 를 꺼내 頭髮을 쏘았다. 첫발은 차지철 의 오른쪽 손목에 맞았으며 두番째는 朴正熙 의 가슴에 맞았다.

김재규가 일어서며 다시 한番 방아쇠를 당겼으나 銃이 激發 不良을 일으키며 故障이 나자 急하게 房 밖으로 나가버린다. 차지철은 '저사람 왜 저래'하며 손에서 피를 흘리며 化粧室쪽으로 나갔고 그 瞬間 方案 照明이 모두 꺼졌다. 신재순 은 朴 大統領에게 괜찮냐고 再次 確認했고 朴正熙는 괜찮다고 똑똑히 對答하였다. [52]

한便 처음 銃소리가 들리는 瞬間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 는 待機室에서 大統領 警護副處長 안재송 과 大統領 警護處長 정인형 을 次例로 쏘아 죽였고, 中央情報部長 隨行祕書 박흥주 亦是 警備員과 같이 廚房에 있던 警護員을 죽였다. 김재규는 宴會場을 빠져나가 1層 로비로 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나 김재규의 故障난 발터를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와 맞바꿔주고 周邊 探索을 繼續 하였다.

차지철이 化粧室에서 돌아와 朴 大統領의 安否를 묻자 그때도 朴正熙는 괜찮다고 또박또박 대꾸하였다. 차지철이 警護員을 부르려고 다시 나가자마자 朴正熙의 上體가 쓰러졌고 심수봉이 쓰러진 大統領을 부축하려 하자 크르륵 하며 가래끓는 소리를 내며 더 以上 對答이 없었다. [53]

갑자기 房의 불이 켜지고 車室長이 뒷걸음질을 치며 宴會場 房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바로 코앞에는 金部長이 拳銃을 겨누고 있었다. 차지철은 房 한쪽에 놓여있던 家口를 집어들고 김재규에게 突進했고 김재규는 뒤로 물러서면서 連달아 銃을 쏘았다 (藥 4發). 차지철은 肺와 腹部에 銃알이 박히며 퉁기듯 뒤로 나자빠졌다.

차지철을 쓰러뜨린 김재규는 食卓을 왼쪽으로 돌아 다가와 신재순의 무릎에 있던 朴正熙 後頭部에 銃을 대고 50cm 距離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오른쪽 귀 윗部分에서 들어간 銃알은 蜘蛛膜을 꿰뚫고서 朴正熙의 왼쪽 콧잔등 밑에 박혔다. 머리 銃傷은 致命傷이었다. 이어 朴大統領을 부축하던 심수봉을 向해서도 銃을 겨누었으나 [53] 銃알이 떨어져 쏠 수 없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제各其 다른 房으로 逃亡쳤다.

大統領 祕書室長 김계원 은 宴會場의 待機室에서 事件을 지켜봤다. 宴會가 열린 '나'東이 아닌 '가'棟에 있던 陸軍參謀總長 鄭昇和 와 中央情報部 第 2次長補 金廷燮 도 20餘 발의 銃소리를 듣고 疑訝하게 여겼다.

房밖 複道로 나오니 壁을 向해 등을 보이고 있는 김계원 祕書室長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閣下 괜찮으십니까? 却下,괜찮으세요?』 祕書室長의 목소리였다. 바로 옆房에 선듯 똑똑하게 들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첫番째 銃소리가 울리자마자 도망치듯 房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이었다. 그건 演劇이었다. 역겨웠다.
? 심수봉, <사랑밖엔 난 몰라>, 1994年 문예당 出版 [52]

몇時間 뒤 심수봉과 다시 再會한 신재순은 自身이 化粧室에 숨어 있었으며 車室長이 살아있길래 남효주 와 같이 부축하려다 심수봉이 있는 房으로 보내졌다고 하였다. 恐怖에 질려있던 심수봉과는 달리 신재순은 '누구누구와 짠 模樣이다', '누구누구가 사이가 좋지 않아 事件이 터졌다'며 그 狀況에 對해 나름대로 想像力을 펼치며 對話를 걸었다고 한다. 두 女性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銃소리가 連續的으로 들리며(약 7發) 確認事實이 進行되고 있었다.

約 20分 뒤인 10時 30分 頃 남효주와 박선호가 나타나 둘을 別채로 案內한 뒤 20萬원씩 건네주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祕密로 하고 連絡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指示한 뒤 일이 잘되면 像이 있을 것이라고 傳한 뒤 남효주가 내자호텔까지 車로 태워다 주었다. [52] 김재규는 鄭昇和 金廷燮 과 함께 陸軍本部 로 向한다. [37]

當時 政府의 公式 立場과 뉴스에서는 김계원이 朴正熙를 國軍서울지구병원 으로 싣고 가서 朴正熙를 살리고자 努力하였다고 알려져 왔지만, 2016年 在美言論人 안치용 의 寄稿에서 公開된 美國務部 解除 祕密文書들을 調査해 보면 다른 內容이 나온다. [54]

1979年 10月 27日 글라이스틴 駐韓美國大使가 國務部長官에게 報告한 'SE16336'全文에 따르면 '負傷을 當하지 않은 김계원은 朴大統領을 大統領 專用車에 태워 (晩餐場의) 7時 55分 近處에 있는 美國醫師가 運營하는 病院으로 옮겨졌다 (A nearby hospital run by an American doctor). 反面 國軍서울지구병원에 勤務하던 靑瓦臺 義務室長 김병수가 朴正熙의 銃傷 입은 死體를 보게 된 것은 처음 김재규가 拳銃을 發砲 한 뒤 2時間이 지나서였다. [55] 며칠 뒤 김병수는 西氷庫 分室에서 取調당하던 김재규의 健康을 檢診해준다.

김계원은 靑瓦臺로 들어와 최규하 國務總理에게 朴正熙의 狙擊犯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陸軍本部로 가서 鄭昇和 노재현 國防部 長官을 만나 거듭 犯人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命令을 받은 警備課長 이기주는 警備員 金兌原 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確認 射殺하였고 이미 絶命直前人 차지철 亦是 確認 射殺하였다.

김재규의 逮捕와 死刑 執行 [ 編輯 ]

裁判 中인 김재규

陸軍參謀總長 鄭昇和 는 陸軍本部 憲兵監 金鎭基 에게 김재규 逮捕 命令을 내렸고, 10月 27日 午前 0時 40分頃에 金鎭基가 김재규를 逮捕하자, 정승화는 保安司令官 全斗煥 을 불러 憲兵監 김진기 准將에게 김재규를 引繼받아 徹底히 調査하라고 指示하였다. 김재규는 1980年 軍法會議에서 內亂目的殺人, 內亂首魁未遂, 內亂重要任務從事未遂, 證據隱匿, 殺人 等이라는 罪目으로 死刑 宣告를 받았고 1980年 5月 24日 박선호 , 유성옥 , 이기주 , 金兌原 과 함께 서울拘置所 (1987年 以後 儀旺으로 移轉되어 只今의 西大門 刑務所 歷史觀 자리)에서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흥주 는 身分이 現役 軍人인 關係로 1980年 3月 6日 에 銃殺刑에 處해졌다.

辯護士의 도움을 받으면 家族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事件 調査官들의 威脅 때문에, [56] 1審 途中에 김재규는 辯護士 選任을 拒否하여 國選 辯護士가 選任되고 辯護士 없이 裁判을 進行하게 된다. [57] 被告人 김재규에 對하여 1, 2審에서 迅速하게 死刑宣告가 이루어졌지만 大法院 刑事3部에서 內亂目的 認定 與否를 두고 合意를 이루지 못하였고 結局 全員合議體에서 判斷을 하여 事件 發生 後 207日 만인 1980年 5月 20日에 열린 宣告公判에서 이영섭 裁判長은 김재규 被告人 等 7名에 對해 內亂目的을 認定하지 않아 原審判決의 破棄를 主張하는 少數意見(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等 6人)보다 "維新憲法 自體가 主權을 簒奪한 不法的인 犯法이거나 民主國家의 政治的 基本組織을 破壞한 것에 該當되어 그 自體가 內亂狀態라는 主張은 獨斷에 지나지 않으며 被告人들의 行爲는 內亂罪 의 成立要件인 暴動에 該當된다. 抵抗權 은 實定法에 根據가 없으므로 法官은 이를 裁判規範으로 援用할 수 없다"는 多數意見(이영섭, 주재황, 한환진, 안병수, 이일규, 나길조, 김영철, 유태흥 等 8人)을 받아들여 上告棄却을 決定했다. [58]

김재규의 辯論 [ 編輯 ]

1審 最後 辯論에서 김재규는 다음과 같이 主張했다.

저의 10月 26日 革命의 目的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番째가 自由民主主義를 回復하는 것이요, 두 番째는 이 나라 國民들의 보다 많은 犧牲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番째는 우리 나라를 赤化로부터 防止하는 것입니다. 네 番째는 血盟의 友邦인 美國과의 關係가 建國以來 가장 나쁜 狀態이므로 이 關係를 完全히 回復해서 敦篤한 關係를 가지고 國防을 爲始해서 外交 經濟까지 보다 積極的인 協力을 通해서 國益을 圖謀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番째로 國際的으로 우리가 獨裁 國家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國民과 國家가 國際 社會에서 名譽를 回復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革命의 目的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擧事를) 안 하면 틀림없이 駙馬 民主 抗爭 이 5大 都市로 擴大돼서 4·19보다 더 큰 事態가 일어날 것이다’고 判斷했다. 李承晩 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朴正熙는 絶對 물러날 性格이 아니라는 判斷을 했다. 김재규에 依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萬 名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萬~200萬 名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依하면 차지철은 그런 參謀가 옆에 있고 朴正熙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自己가 發砲 命令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直接 發砲 命令을 내리면 나를 銃殺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犧牲을 막기 爲해서 暗殺했다고 主張했다. [59]

暗殺 後 執權計劃 [ 編輯 ]

被疑者 訊問調書 內容 中 大統領만을 除去하고 現場에서 自殺하거나 外國으로 亡命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質問에 김재규는 "本人이 살아남아야만 大統領 除去 以後의 혼란된 政局의 主導權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本人의 構想대로 統治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같은 調査에서 大統領 弑害 後 主導權을 掌握할 適任者는 누구라고 생각했냐는 質問에 "適任者는 于先 本人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事態를 收拾한 後에 새 憲法에 依한 選擧를 實施하려고 한 바 大統領 出馬候補者는 일응 최규하 國務總理나 태완선 유정회 議長 等을 꼽을 수 있고 本人도 狀況에 따라서 出馬與否를 決定하려고 하였다"고 記錄된다. [35]

美國 背後說 [ 編輯 ]

美國政府의 祕密電文들이 部分公開 되면서 10·26 事態 며칠 前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CIA 韓國支部長 을 面談했다는 事實이 밝혀지며 美國이 朴正熙의 죽음에 介入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60] . 在美言論人 안치용 이 追加로 發見한 祕密文書에서 글라이스틴 大使가 10.26 事件 當日날 김재규를 만났던 事實을 숨겨왔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論難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54] 論難 以後 美 政府는 該當 文書들을 다시 非公開 處理하였다.

김재규는 軍事裁判에서 史上 最惡에 이른 韓美關係의 改善을 自身의 擧事의 한 理由로 들었지만 美國의 直接的인 介入은 否定했다. 駐韓美國大使 글라이스틴 은 김재규의 韓美 關係 發言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神經質的인 反應을 보였다. [60]

한便 김재규는 裁判 途中 '내 뒤에는 美國이 있다'는 發言을 했었다. [61] 또한 調査 過程에서 '或是 美國 側에서 무슨 連絡이 없느냐'고 搜査官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 [62] [63]

削除된 최규하-글라이스틴 面談專門

政權을 掌握한 直後 전두환이 美國側과 만나 某種의 默契를 締結했다는 疑惑 또한 存在한다. 1993年 末 美國이 公開 때 削除했던 祕密文書 專門 11項에는 "전두환은 '美國이 美國統制下에 있는 鄭昇和를 시켜서 나를 逮捕하려 함으로서 나를 힘든 立場에 處하게 한 事實을 發見했다'고 警告했다. 또 '美國이 朴大統領 弑害事件에 聯關돼 있으며 김재규의 刑量을 낮추려 한다는 所聞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으며 全氏 自身이 이 같은 所聞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는 部分이다. [54]

削除된 全斗煥-글라이스틴 面談專門

機密解除된 美 大使館 文書에 따르면 當時 非常戒嚴을 主導한 韓國 軍部勢力에 對해서는 "전두환이 中心的(central) 役割을 하는 것으로 斟酌된다"고 分析하는 反面, 최규하 大統領에 對해서는 "A helpless president"(無力한 大統領)이라는 表現을 썼던 것이 確認된다. 같은 文書에서 "전두환이 當時 相當히 重要한 리드를 하는 것 같은데 決定的 役割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봤다"는 대목에 關하여 5.18 眞相調査委員會에서는 "韓國에 全斗煥 個人뿐 아니라 전두환을 中心으로 한 集團的인 쿠데타 勢力이 存在한다고 判斷했던 것" 이라고 說明한다. [64]

또한 削除된 祕密文書 맨 마지막 12項에는 '브루스터가 同席했다'는 內容이 存在한다. 이날 만남은 글라이스틴 駐韓美國大使 로버트 브루스터 CIA 韓國支部長 , 全斗煥 ,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通譯者가 陪席한 것이다. [54] [65]

美國의 對應 [ 編輯 ]

韓美聯合司令部 副司令官 류병현 將軍은 10月 26日 子正 무렵에 駐韓 美國 大使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 를 찾아와 "朴 大統領에게 事故가 發生했다"고 報告했다. 當時 류병현 亦是 事態 把握이 안 된 狀態였으므로 더 以上의 說明은 不可能했다. 글라이스틴은 通信保安이 徹底한 電話線을 利用하기 위해 美國 大使館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 英語 : Zbigniew Brzezinski )와 國務部에 이 事實을 알렸다. [66]

1979年 11月 初 美國下院에서 朴正熙 暗殺에 關한 聽聞會를 가져야 한다는 主張이 提起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月 8日 國務部에 다음과 같은 專門을 보냈다. [13]

나는 聽聞會가 美國이 朴正熙 죽음을 共謀했다는 疑惑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共謀한 적이 없으며 朴 大統領을 批判했을 때도 그의 政府와 安保, 經濟 等의 問題에 對한 協力을 持續하겠다는 信號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이를 聽聞會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朴 大統領의 죽음에 關與했다는 疑惑을 더 增幅시키지 않을까 憂慮된다. 우리는 最善을 다해 公開的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事件의 餘波 [ 編輯 ]

大統領이 後送된 國軍首都病院은 保安司를 통하여 出入하도록 되어 있어서, 전두환 所長의 保安司는 大統領 死亡 2時間이 經過한 時點에서 第一 먼저 大統領의 死亡 事實을 病院長을 통해서 認知한 情報 機關이 된다. [67] 全斗煥 은 10·26 事件 搜査를 하기 위해 設置된 合同搜査本部 章에 오르면서 頭角을 나타내기 始作했다.

12月 12日 執務執行政治 假處分 申請이 취하되며 金永三 신민당 總裁는 法的 地位가 原狀回復된다. [68]

그後 軍部 內 派閥 葛藤으로 인해 [ 出處 必要 ] 전두환을 中心으로 하는 新軍部 勢力이 12·12 事態 를 일으켜 鄭昇和 를 迅速히 逮捕하고 軍部를 掌握했다. 新軍部 勢力은 國會議事堂 廢止로 民主化 輿論을 彈壓하고 5.17 쿠데타 를 일으켜 戒嚴軍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을 公式으로 鎭壓하고 政權을 掌握했다.

한便, 10·26 事件 目擊者 歌手 심수봉 1980年 歌手 活動을 금지당하다가 1984年 復歸하였고, 事件 目擊者 모델 신재순 은 美國으로 移民간 後 작은 食堂을 運營하고 있다.

處罰 [ 編輯 ]

박흥주 大領의 境遇는 그 身分이 現役 軍人이었던 關係로 軍事裁判이 丹心으로 끝나 다른 加擔者들보다 일찍 陸軍 矯導所 內에서 銃殺刑이 執行되었다.

裁判管轄과 裁判 獨立性 等 節次의 違法, 檢察訊問調書 等은 任意性이 없음에도 이를 認定한 違法, 國憲紊亂目的 與否에 對한 心理未盡, 殺人罪의 共同正犯 認定에 對한 法理誤解, 犯行中止 未遂를 障礙 未遂로 다룬 點, 抵抗權 行事로 正當防衛나 緊急避難에 該當되어 違法性 조각, 一部 被告人은 强要된 것으로 期待 可能性이 없어 責任 阻却事由에 該當되고 量刑不當을 上告理由로 提示한 上告審 事件이 大法院 刑事3部(裁判長 안병수 主審 유태흥 陪席 양병호 서윤홍 )에 配當되었으나 合意에 따라서 1980年 4月 10日 全員合議體(裁判長 이영섭 )에 넘겨져 4月 24日과 4月 28日에 合意를 하고선 1980年 5月 20日 上告審 宣告公判을 열고 "內亂罪는 目的犯으로서 目的犯 一般에 關한 原則이 適用되며 그 目的은 嚴格한 證明事項에 屬하고 直接的인 임을 요하나 結果發生의 希望, 意欲 임을 必要로 한다고는 볼 수 없고 또 確定的 認識 임을 요하지 아니하며 다만 未畢的 認識이 있으면 充分하다" [69] 고 하면서,

  • 김재규 (中央情報部長) - 內亂目的 殺人罪와 內亂首魁 未遂, 內亂重要任務從事未遂罪 等을 適用해 死刑을 宣告한 陸軍本部 戒嚴高等軍法會議가 宣告한 原審을 確定하고 1980年 5月 24日 絞首刑
  • 김계원 (大統領 祕書室長) - 殺人罪 無期懲役
  • 박흥주 (中央情報部長 隨行祕書, 陸軍 大領, 中尉 時節 김재규의 專屬副官) - 1980年 3月 6日 銃殺刑
  • 박선호 (中央情報部 儀典誇張이자 中學校 時節 김재규의 弟子) - 1980年 5月 24日 絞首刑
  • 유성옥 - 中央情報部 궁정동 安全家屋 運轉技士 - 1980年 5月 24日 絞首刑
  • 이기주 (궁정동 安全家屋 警備課長) - 1980年 5月 24日 絞首刑
  • 金兌原 (궁정동 安全家屋 警備員) - 1980年 5月 24日 絞首刑
  • 유석술 (궁정동 安全家屋 警備員) - 證據 隱匿罪 懲役刑 3年 [70]
  • 서영준 (궁정동 安全家屋 警備員) - 懲役刑

"自由民主主義 回復을 위해 自由民主主義를 가로막는 維新 政權의 犧牲은 避할 수 없었다"고 主張하는 被告人 김재규 의 主張과 裁判記錄을 檢討하여 大法院 判事 6名이 "內亂目的 殺人을 認定할 수 없다"는 少數意見을 提示했지만 上告棄却이 있은 以後 5名이 新軍部의 壓力에 辭表를 提出했고 辭表 提出을 拒否한 정태원은 强制 解任되었다 以後 先任者였던 양병호 가 1993年에 時事 週刊誌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0·26 事件에 對해 "民主主義 回復을 위해 狙擊할 수밖에 없었다는 主張을 뒤집을 證據는 發見되지 않았다."고 評價했다. [71]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김재규 被疑者의 救命 委員會에서는 代表的인 宗敎, 民主化 人士 數百名이 救命 運動을 벌인다. [72] 在野團體에서는 政治犯 을 너무 市井雜輩, 單純 殺人犯으로 다룬다고 剛하게 問題를 提起한다. [72]

李會昌 前 國務總理는 10·26 事件 大法院 判決에서 內亂이 아니라는 少數 意見을 낸 大法官 여섯 名이 新軍部에 依해 强制로 辭職 當한 것은 司法府 歷史의 汚辱이라고 本人은 여겨왔다고 하였다. [73]

김삼웅 대한매일 前 主筆은 그의 글에서 3ㆍ1運動 第61周年을 맞아 3月 2日 美國 뉴욕의 後羅城 韓人敎會에서 僑民들이 韓國 政府에 6個項을 要求하는 聲明을 發表했으며, 같은 時期에 美國에서는 多數의 韓人 學者, 宗敎人, 著名한 美國人들이 參與한 '김재규 部長과 關聯者 救命委員會'를 結成하여 處刑을 反對하는 內容의 大統領에 보내는 〈救命을 위한 請願〉을 發表했다고 한다. [74] 金 前 主筆의 글에서 33名 署名者 名單에는 안중식 (牧師), 에드 베이커 (하바드大學 法科大學 極東法律硏究所), 모린 R 버만 (人權國際聯盟 事務總長), 레오 베리 (新婦), 廢棄 빌링 (北美 韓國人權問題特委 議長), 로렌스 Y 브롤드 (新婦), 윌리엄 J 버틀러 (國際法曹協會 美國聯合會長), 차상달 (民權運動家), 조순승 (敎授), 최성일 (敎授), J 코헨 (하버드대 敎授), 아드라이 W 드윈 (辯護士, 뉴욕辯護士會 前 會長), 버나드 J 後라나겐 (位체스터 主敎), 토마스 J 컴블론 (디트로이트 補佐 主敎), 티모티 J 해링톤 (位체스터 補佐 主敎), 패리스 하비 (牧師), 그레고리 핸더슨 (前 美 國務省 韓國課長), 권병철 (敎授), 이상철 (敎授), 金巡警 (敎授), 벤자민 H 민 (敎授), U. T. Kim (敎授), 스티븐 페돈 (新婦), 김철순 (牧師), 유기천 (前 서울대 總長), 김상돈 (前 國會議員, 서울市長), 任官하 (敎授), 이정식 (敎授), 도날드 레이노드 (美國務省 前 韓國課長), 李在賢 (敎授), 윌리암 位플러 (美國敎會協議會 海外人權 國葬), 이재진 (敎授), 윤종근 (敎授)이 있다. [74]

김재규革命記念事業會 金聖泰 회장은 “醫師 김재규 10.26 義擧는 韓國판 킬링필드 를 막았던 擧事였으며, 釜馬抗爭 을 記憶하는 世代는 醫師 김재규 民主化 回復을 記念할 것”이라고 말했다. [75]

함세웅 神父는 "나는 김재규 部長의 決行 때문에 내가 監獄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습니다. 난 그분께 歷史的 빚을 지고 있다고 늘 생각합니다."라고 이 事件을 論했다. [72]

否定的 評價 [ 編輯 ]

言論 檢閱을 받기 前에 裁作 中이던 어느 新聞 紙面에서는 " 確信犯 이어서 死刑은 不適切하다."는 김재규의 辯論 유지의 첫 대목이 있었는데 新軍部 檢閱에서 통째로 報道가 禁止된다. [72]

事件 關聯者 名單 [ 編輯 ]

事件 現場에 있던 사람들 [ 編輯 ]

  • 朴正熙 - 大韓民國 大統領, 中央情報部長 김재규에게 銃을 맞아 시해당함.
  • 차지철 - 大統領 警護室長, 中央情報部長 김재규에게 銃을 맞고, 中庭 安家 警備員 김태원에게 確認 射殺당함.
  • 김재규 - 中央情報部長, 大統領 朴正熙와 大統領 警護室長 차지철을 궁정동 安家 宴會場에서 射殺함.
  • 김계원 - 大統領 祕書室長, 事件 目擊者.
  • 심수봉 - 歌手, 事件 目擊者.
  • 신재순 - 모델, 事件 目擊者. [76]

死亡者 [ 編輯 ]

  • 朴正熙 - 大韓民國 大統領, 中央情報部長 김재규에게 가슴과 머리를 拳銃에 맞고 시해당함.
  • 차지철 - 大統領 警護室長, 中央情報部長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安家 警備員 김태원에게 確認 射殺당함.
  • 정인형 - 大統領 警護處長,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에게 가슴을 拳銃에 맞고 살해당함.
  • 안재송 - 大統領 警護副處長,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에게 가슴을 拳銃에 맞고 살해당함.
  • 김용섭 - 大統領 警護官, 別館 食堂에서 中央情報部 隨行祕書 박흥주와 安家 警備員들에 依해 사살당함.
  • 金鎔泰 - 大統領 警護室 車輛運行係長, 別館 食堂에서 中央情報部 隨行祕書 박흥주와 安家 警備員들에 依해 사살당함.

生存者 [ 編輯 ]

事件 處理者들 [ 編輯 ]

事件 關聯 作品 [ 編輯 ]

기타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탁양현 (2020年 1月 31日). 《朴槿惠 文在寅 旣得權 國際政治》 . e퍼플. ISBN   979-11-6347-934-5 .  
  2. “Designersparty” (힌디어) . 2020年 4月 16日에 確認함 .  
  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年 10月,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78回 2004年 4月 4日 放送
  4. 오마이뉴스 - 장준하,김재규의 朴正熙 暗殺計劃 알았나?
  5. “고 朴正熙大統領逝去 第39周年” . 2020年 4月 16日에 確認함 .  
  6. 한겨레 - 닉슨, 朴正熙의 뒤통수를 치다
  7. 中央日報 - 朴-닉슨 共同聲明 專門
  8. 行政安全部 國家記錄院 - 駐韓美軍 減縮計劃
  9. 世界日報 - 韓國의 武器 이야기(15) 天字銃筒에서 K9 自走砲까지
  10. 中央日報 - [實錄 朴正熙時代 30.自慰에서 자주로]
  11. 조갑제닷컴 - 美國大使와 情報部長의 密談
  12. 조갑제닷컴 - 유고(16) - 김재규의 抗訴理由 補充서(1)
  13. 한겨례:온 - 5.18 民主化運動 戰後 韓國政治와 美國의 介入 2
  14. 朝鮮日報 - 카터 訪韓부터 12·12까지… 그 때 그 事件 뒤엔? (外交部 文書公開)
  15. 中央日報 - 김신조 "浸透組 能力 想像 超越, 숨을땐…"
  16. 朴正熙 죽음의 前兆 '윤필용 事件'
  17. 新東亞 - 라이벌 除去 失敗하자 8年 뒤 朱君(主君) 弑害
  18. 朴正熙 政權 軍實勢… ‘하나회 代父’ 불려 1973年 ‘謀反事件’에 連累되며 軍服 벗어
  19. 월간조선 -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李鍾贊 前 國家情報院長 (上)
  20. 헤럴드經濟 - 전두환에 反旗든 강창성 前 保安司令官 意識不明
  21. 中央日報 - 삶課追憶 '하나회와 惡緣' 이승에 두고 …
  22. “中央日報 - JP “김재규의 發作症, 朴 大統領은 몰랐다”, “차지철 그놈 죽여야” 金 部長 입에 달고 살아” . 2022年 4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4月 13日에 確認함 .  
  23. 《張俊河 評傳》 37쪽
  24. 《張俊河 評傳》 46쪽
  25. 韓國經濟 - "DJ-장준하, 75年 `反維新' 合意"..疑問詞위
  26. 東亞日報 - DJ“故張俊河氏와 특별한 얘기 없었다”
  27. 日曜新聞 - "張俊河-김재규 '擧事' 密約 했다"
  28. 시사저널 - 김재규는 왜'維新의 心臟'을 쏘았나
  29. 中央日報 - "10·26 前에도 3次例 暗殺 試圖했다" 김재규 그때 그 목소리
  30. “中央日報 - “朴 大統領 終身執權이 中庭 基本 任務” 김재규, 청구동 찾아가 壓迫” . 2022年 4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4月 13日에 確認함 .  
  31. 行政安全部 大統領記錄館 - 儀典일지(1979. 8.1~10.26)
  32. [1]
  33. 월간조선 - 김재규는 死刑場으로 끌려 나가다 내 房을 한참 바라보았다
  34. “朝鮮Pub - 10·26의 現場, 궁정동 無窮花동산...朴正熙 大統領이 숨진 곳엔 굽은 소나무” . 2021年 12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1年 12月 16日에 確認함 .  
  35. 조갑제닷컴 - 김재규 陳述書全文-朴正熙를 쏜 理由
  36. 조갑제닷컴 - 集中連載(1) 김재규 隨行祕書 박흥주 大領의 애잔한 삶과 죽음!
  37. 中央日報 - 김재규의 法廷陳述
  38. 이종하 (2016年 4月 22日). 《재미있게 읽는 그날의 歷史 10月 26日》 . 디오네. ISBN   979-11-5774-467-1 .  
  39. 조갑제닷컴 - 朴正熙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女人 신재순 證言
  40. 탁양현 (2020年 1月 31日). 《朴槿惠 文在寅 旣得權 國際政治》 . e퍼플. ISBN   979-11-6347-934-5 .  
  41. 中央日報 - J 스페셜 - 月曜인터뷰 신재순 "10·26 當時, 난 딸 둔 離婚女였다"
  42. 뉴데일리 - 김재규 關聯 美 祕密專門 모두 非公開...왜?
  43. 每日經濟 -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 무슨 일 있었을까
  44. 東亞日報 - 차지철 “警護헬기 무거워진다”며 遂行端緖 김재규 빼
  45. 東亞日報 - 차지철 "데모대 100萬~200萬名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46. 돈 오버道퍼 (2002年 7月 25日). 《두 個의 韓國: The Two Koreas》. 길산. 175~176쪽.  
  47.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5/30/2005053070205.html
  48. MBC - 朴正熙 弑害事件, 合同搜査本部 發表2
  49. https://www.ehistory.go.kr/page/view/audio.jsp?srcgbn=KV&mediaid=1000152&mediadtl=1000155&gbn=SD
  50. 中央日報 - 그때 그사람 심수봉氏 15年만에 回顧錄
  51. MBC - 歌手 심수봉氏, 朴大統領 弑害事件 搜査發表 一部 捏造 主張
  52. 中央日報 - 그때 그사람 심수봉氏 15年만에 回顧錄
  53. 朝鮮日報 - 그때 그사람 심수봉氏가 털어논 10.26 現場
  54. 시사저널 - [(在美言論人 安置勇氣고)미국무부 解除 祕密文書에서 드러난 朴正熙 弑害事件 疑惑들
  55. 中央日報 - [그땐 그랬지요]故 朴大統領 屍身檢案 김병수前國軍病院長
  56. “김재규 조카 "'家族 가만두지 않겠다' 脅迫에 外三寸, 辯護人 도움 抛棄 " . 뉴스1코리아. 2020年 5月 27日.  
  57. “‘김재규의 辯護人’ 안동일 辯護士의 作心 吐露” . 示唆IN. 2017年 8月 3日.  
  58. 김재규의 10·26 事件 (下)
  59. 김재규에게 ‘民主化 勳章’을 달아줄 것인가
  60. 「www.韓國現代史.com」(김진국, 민연, 2000) 229페이지
  61. 康俊晩 - 韓國現代史散策 1970年代篇 3卷 p.268)
  62. 金在洪, 누가 朴正熙를 容恕하였는가, 冊保稅, 2012.
  63. 京鄕新聞 - 疑惑과 眞實 - 한승헌의 裁判으로 본 現代史(32). 김재규의 10·26 事件
  64. [2]
  65. [3]
  66. 돈 오버道퍼 (2002年 7月 25日). 《두 個의 韓國: The Two Koreas》. 길산. 178쪽.  
  67.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回 "最初 發掘! 10·26과 全斗煥 - #2 '돼지꼬리' 報道管制 指針!" JTBC 2020-05-28
  68. “최규하 “總裁님, 어젯밤 죽을뻔 했시유” … 上氣된 목소리로 JP에게 하소연했다” . 中央日報. 2015年 9月 4日. 2022年 10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10月 16日에 確認함 .  
  69. 大法院
  70. 김재규가 使用한 銃을 묻은 證據隱匿 嫌疑로 懲役 3年을 宣告 받음, 「심수봉 "김재규" 미리計劃했는지 硬直돼 있었다」
  71. “김재규 裁判 擔當 大法院 判事 인터뷰” . 1993年 10月 14日 . 2020年 4月 16日에 確認함 .  
  72.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回 '極祕解除' 10.26과 全斗煥! JTBC 2019-05-28
  73. “‘김재규의 辯護人’ 안동일 辯護士의 作心 吐露” . 示唆IN. 2017年 8月 3日.  
  74. “[[김삼웅의 人物列傳] 朴正熙를 쏘다, 김재규將軍 評傳 / 60回] 國內言論에는 紹介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2020年 6月 22日.  
  75. “˝김재규 依據, 韓國판 킬링필드 막은 擧事˝” . 인터넷저널. 2012年 10月 28日.  
  76. 궁정동에 불려간 女子演藝人은 누구, 수고料는 얼마나 받았을까? 《TV리포트》2012年 2月 22日 윤상길 編輯委員
  77. “京畿 廣州 墓地서 追悼式” . 2020年 4月 16日에 確認함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