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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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곤
出生 1955年 2月 24日
慶尙南道 釜山市 초량동
死亡 1982年 4月 27日
慶尙南道 宜寧郡 궁류면 평촌리
血液型 B型 [1]
罪名 大量殺人
現況 死亡
被害者 數 97名
死亡者 數 62名
負傷者 數 35名

우범곤 (禹範坤, 1955年 2月 24日 ~ 1982年 4月 27日 )은 90名을 連續으로 殺害 或은 負傷을 입히고 自殺한 前 大韓民國의 警察官이자 犯罪者이다. 우범곤은 亞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 2011年 노르웨이 테러 를 저질러 記錄을 更新할 때까지 世界에서 가장 많은 大量殺人을 저지른 銃器殺人犯이었다. [2]

生涯 [ 編輯 ]

慶尙南道 釜山 出身으로 아버지도 警察官이었다. 海兵 服務 中 特等射手로 뽑히기도 [3] 했던 우범곤은 巡警으로 任用된 後 1980年 12月 23日부터 1981年 12月 31日까지 靑瓦臺 를 警護하는 101警備團 에서 勤務한 적이 있었지만, 別名이 "미친 虎狼이"일 程度로 注射 가 좋지 않아 人事 過程에서 業務 不適格者로 判定됨으로써 第101警備團 勤務에서 탈락하여 1982年 3月 慶南 宜寧 宮類 支署 로 發令 받았고, 同居人과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다. [4] 當時 警察은 平素 술버릇이 나빴던 우범곤이 同居人과 말다툼을 벌인 뒤 興奮 狀態에서 偶發的인 犯行을 저지른 것으로 結論지었다. [5]

銃器 亂射 事件 [ 編輯 ]

1982年 4月 26日, 그날 우범곤은 夜間 勤務를 위해 낮 12時頃에 집으로 들어와 點心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渦中에 同居女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 를 손바닥으로 잡기 위해 쳤는데 못잡아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契機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火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午後 4時頃 支署로 간 뒤, 저녁 7時 半頃에 술에 醉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술에 完全히 醉한 狀態에서 同居女부터 코피가 날 程度로 주먹으로 暴行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同居女의 親戚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親戚 언니도 두들겨 패서 亂暴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洞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事件의 顚末을 들어본 洞네 사람들이 同居女를 斗頓했으며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가서 宮類支署 뒤에 武器庫를 열어서 M2 카빈 2자루 實彈 144發, 手榴彈 8個 等을 奪取했다. 溫泉接待하러 술을 마시러가서 宮類支署長 허창순 警査 一行이 없었기 때문에 우범곤을 막지 못했다.

洞네 이웃 住民 한 名이 우범곤을 말리다가 銃殺 當했고 이에 이 사람의 아들이 支署로 간 우범곤을 쫓아가서 "위아래도 없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支署로 向해 支署에 配屬된 陸軍 防衛兵들과 燒酒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同居女의 男동생이 와서 警察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暴發해 카빈총을 裝塡했고 挽留하는 防衛兵에게 銃으로 攻擊했지만 射殺하지 못했다.그 以後 우범곤의 犯行 過程은 다음과 같다.

4月 26日 21:40 支署를 나와 大邱에서 表具舍를 하는 26歲 男子에게 發砲, 이를 始作으로 궁류면 토곡리 在來市場으로 달려가 照準 射擊. 場을 보러온 마을 住民 3名을 銃殺했다.

21:45 마을의 通信을 遮斷하기 위해 宮類郵遞局으로 가서 女性 交換員 2名과 宿直 中이던 集配員 1名을 銃殺했다. 그러나 銃傷을 입어 死境을 헤매던 24살의 女性 交換員 全貌 氏가 숨지기 直前, 마을 里長 집의 行政電話와 宜寧郵遞局 間의 코드를 連結했던 德分에 住民이 22時 34分에 申告할 수 있었다.

22:00 압곡리 梅實部落으로 가서 10餘 分間 銃器를 마구 亂射하였고, 住民 4名과 隣近 마을의 2名을 銃殺하였다.

22:10 운계리 市場으로 달려가 住民 7名을 殺害. 甚至於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手榴彈 을 投擲하기도 했다.

22:50 평촌리의 한 喪家집에 亂入. “非常이 걸렸다”고 말하고는 問喪을 한다는 핑계로 賻儀金 3千 원(오늘날의 4萬 원 假量)을 내고 問喪客들과 어울려 10餘 分間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여기서 問題의 主事가 또 發動해 갑자기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을 했다. 보다 못한 상주의 姨從四寸이 나서서 "警察이면 警察이지, 喪家집에서 버릇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꾸짖자 이에 激忿, 銃器를 亂射, 尙州 一家族 等 12名을 銃殺하였다. 以後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銃을 亂射하여 이곳에서만 無慮 23名을 銃殺했다.

4月 27日 새벽 5:35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알고 지내던 住民의 民家에 侵入했다. 그는 一家族 5名을 깨운 뒤 갖고 있던 手榴彈 2發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本人을 包含해 4名이 爆死했다.

우범곤의 犯行 中 가장 惡質的인 點은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無差別로 殺害했다는 것으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안 죽은 게 있어?"라고 말하고선 되돌아 가 그대로 아기를 銃殺해버리는 蠻行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우범곤이 銃器를 亂射하고 다니는 동안 한 택시 技士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빨리 불 꺼요, 只今 불 안 끄면 다 죽어요"라며 危險을 알렸고, 택시 技士의 말대로 불을 끄고 조용한 집들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택시 技士는 안타깝게도 結局 우범곤에게 총살당한 屍身으로 發見되었고, 불끄고 조용한 狀態로 몰래 大門을 살짝 열고 우범곤을 본사람도 있다고 한다.

勤務地를 無斷離脫해 마을 有力者로부터 溫泉接待 後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宮類支署長 허창순 警査 一行은 밤 22時 50分頃 길에서 만난 住民에게 自初至終이 담긴 申告를 받지만 無視하고 宮類支署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武器를 奪取해 銃擊을 벌이고 있다는 報告를 듣자 銃擊 現場에 自己가 없어서 多幸이라는 말을 하며 逃避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支署長 一行은 武器庫로 向해 各自 武器를 챙기고 出動은 했으나 우범곤 巡警이 移動한 反對 方向으로 出動하는 醜態를 부렸으며 宮類支署 맞은便에 面事務所가 있기에 여기에 放送을 했다면 우범곤 巡警의 犧牲者를 줄일 수 있었다. 結局 이렇게 宮類支署 警察들이 逃走 하며 職務를 제대로 遂行하지 않음으로써 狀況은 더 惡化되었고 事件 以後 이들은 職務 遺棄罪로 處罰을 받았다.

한便 마을에 살던 宜寧郡 民防衛課 公務員의 事件 報告를 받고 宜寧警察署 警務課長 신현기와 保安課長 김영석 麾下 戰鬪警察巡警 30名이 子正 무렵 到着했으나 우범곤의 所在를 把握하기는커녕 어두컴컴한 시골길에서 갑자기 被擊 當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을 初入 다리 밑 等 곳곳에 숨어있었다. 後에 警察은 이를 埋伏 이었다고 辨明했으나 輿論이 惡化되는 結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住民 殺傷이 進行 中인데 警察은 現場에 進入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더구나 埋伏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當時 管轄 責任者인 宜寧警察署長 최재윤 警正(1982年 當時 57歲)은 다음날 釜山에서 署長會議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釜山으로 移動하여 勤務地를 보고 없이 無斷離脫한 狀態였다. 報告를 받고 復歸하여 犯行 地域에 이르는 다리에 到着한 것은 다음날 새벽 1時 20分이 되어서였다. 現場에 到着한 宜寧署長은 警察들을 糾合하여 犯人 搜索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死傷者를 目擊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宮類支署로 逃亡쳤다.

支署에 到着한 宜寧警察署腸은 우범곤이 많은 實彈을 가져갔다는 報告를 받자 더더욱 두려움에 빠져 支署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支署에서 마을 스피커로 警報를 發令해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豫備軍을 動員하거나 宜寧서 麾下 隣近 支署에 警察 支援을 指示하지도 않고 但只 內務部에 狀況 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取하지 않았다.

이는 支署에 待機하고 있던 警務課長과 保安課長度 마찬가지로, 萬若 이들이 밤 22時 24分에 처음 申告를 接受한 卽時 警報 放送을 發令하였다면 적어도 犧牲者가 折半 줄었을 수도 있었다.

새벽 2時에는 住民 2名이 목숨을 걸고 山을 넘어와 큰일이 났다며 마을에 있던 宜寧 警察들에게 出動을 재촉하였으나 署長은 날이 어두워 視野가 確保가 되지 않는다는 理由로 이것도 拒否하였다. 새벽 4時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機動隊가 宮類에 到着하였으나 結局 事件은 우범곤의 自爆으로 終了되었으니 要約하면 警察力의 介入이나 沮止가 없었으며 이 事件 當時 警察은 單 한 발도 쏘지 못했다. 그렇게 住民 殺傷이 進行되었고 束手無策으로 事件은 終了됐다.

事件으로 인하여 無慮 62名의 住民들이 死亡했고, 35名의 負傷者도 發生했다. 6名의 犧牲者는 病院에 옮겨져 治療를 받다가 銃傷이 惡化되어서 死亡했다.

첫番째 犧牲者인 靑年과 郵遞局에서 被殺된 電話交換員 은 未婚으로 死亡한 것이 悲痛하게 여겨져 遺族들끼리 合意下에 靈魂結婚式을 올려주기도 했다. 犯行이 일어났던 宜寧 궁류면에는 4月 26~27日 祭祀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2000年代 中盤頃에 宜寧警察署에서 戰鬪警察로 服務했다는 한 네티즌의 證言에 따르면 마을 住民 하나가 술만 마시면 警察署를 찾아와 恨풀이를 하다 가곤 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우범곤에게 家族을 모두 잃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被害가 커진 原因 [ 編輯 ]

이날은 班常會를 하느라 마을 住民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紀綱 解弛로 인해 警察의 勤務地 無斷離脫이 蔓延했는데, 宮類支署의 다른 警察官 3名도 班常會에 參席하려고 勤務地를 無斷離脫한 狀態였으며 支署長 亦是 마을 維持의 溫泉 接待를 받으러 支署를 無斷離脫한 狀態였다. 支署는 다른 勤務者 없이 텅 비어 있는 狀態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武器庫에서 多量의 火氣를 容易하게 奪取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職業이 警察이었으며 事件 當時에도 勤務服을 着用하고 있었던 것도 影響을 미쳤다. 그 때문에 住民들은 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疑心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門을 열어주었다. 더구나 當時는 武裝共匪가 심심치 않게 出沒하던 時代였으므로 住民들은 銃소리를 武裝共匪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警察인 우범곤이 小銃과 手榴彈으로 武裝했어도 共匪掃蕩 作戰을 遂行 中인 것으로 認識했다. 또한 우범곤이 海兵隊에서 特等射手 로 뽑힐정도로 射擊 솜씨가 좋았다는 것 때문에 被害가 더 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全斗煥 政權은 地域 住民들의 民心 離叛을 막기 위해 전두환 大統領이 直接 宜寧郡을 찾아 住民들에게 謝過와 報償을 約束하는 한便, 國家 次元의 對策委員會를 열어 大大的인 補償을 實施했다. 事件이 일어난 宜寧郡 等 西部 慶尙南道 地域은 TK와 함께 大韓民國 第5共和國과 與黨인 民主正義黨의 核心 支持 基盤이었으므로, 全斗煥이 아무리 間選制로 當選된 大統領이지만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遺族들에게는 大學登錄金 및 醫療費 支援 方案이 이루어졌고 궁류면에 對한 인프라 構築 事業 亦是 政府의 大大的인 支援을 받으며 始作되었다.

먼저 의령읍~정곡면 間 11km 國道를 새로 包裝한 뒤 群島였던 宜寧~宮類 間 12km 道路를 地方道路로 昇格해 慶尙南道 豫算으로 새로 包裝했다. 또한 마을 안길 包裝, 橋梁 假說, 住宅 改良, 農路 改善 等 總 12個 部門 環境改善 및 生産基盤 施設 事業이 進行되었고, 평촌마을 윗쪽에 碧溪貯水池 및 步가 設置돼 궁류면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住民들의 折半 以上이 궁류면을 떠나 다른 地域으로 移徙를 갔다.

當時 宜寧警察署長 최재윤에 對한 大法院 公判에서는 刑法 職務遺棄 關聯 重要 判例로 "...職務遺棄罪가 成立하려면 主觀的으로는 職務를 버린다는 認識과 客觀的으로는 職務 또는 職場을 벗어나는 行爲가 있어야 하고 다만 職務執行에 關하여 怠慢, 奔忙, 錯覺 等 一身上 또는 客觀的 事情으로 어떤 不當한 結果를 招來한 境遇에는 刑法上의 職務遺棄罪는 成立하지 않는다. 그 措置가 다만 適切하지 못하였다는 司正만으로는 刑法上 職務遺棄罪가 成立할 수 없는 것"으로 結局 職務遺棄罪는 불成立되었다. 그리고 罷免處理되었던 것도 懲戒 節次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無效가 됐다.

餘波 [ 編輯 ]

이 事件으로 當時 內務部 長官이었던 서정화 가 自進 辭退하고, 後任으로 盧泰愚 內務部 長官으로 任命되면서 政治界에 入門하게 되었다. [6] 그리고 事件 當時 勤務地를 離脫했던 宜寧署長 等 3名의 警察官과 防衛兵 3名이 拘束됐다.

한便 當時 宜寧警察署 腸은 職務遺棄罪 로 起訴되었으나 當時 法院 은 主觀的으로 職務를 버린다는 認識이 없고 客觀的으로는 職務 또는 職場을 벗어나는 行爲가 없다고 보고 無罪를 宣告했다.

當時 搜査本部는 犯人 우범곤의 手法이 너무 殘忍해 一般人과 腦組織이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내기 위해 國立科學搜査硏究所 에 屍身을 보내 腦細胞 檢査를 하려 했으나 檢事가 不可能해 이를 抛棄함으로써 永久未濟事件으로 남게 됐다. [7] 우범곤 事件 以前에는 中學校 卒業해도 警察 公務員이 될수 있었지만 以後 警察公務員 任用規定이 改正되어 警察公務員 應試者에 對해 高等學校 卒業 以上부터라는 學歷 制限 規定이 制定되었으며, 人適性 檢査와 前科 等 科事實 有無에 對한ㆍ조회가 始作되었다.

이 事件以前에는 警察公務員 任用規定이 中卒이었으며 글字 도 모르는 老人 順境도 있었다. 事件以後부터 警察公務員 任用規定에 對해 高卒 以上 부터라는 學歷 制限 規定이 制定되었으며, 人適性 檢査와 前科 等 科事實 有無에 對한 照會가 始作되었다. 그런데 事實 우범곤은 專門大 中退 學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學歷 制限이 예전부터 있었다 해도 充分히 應試할수 있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042700209210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4-27&officeId=00020&pageNo=10&printNo=18634&publishType=00020
  2. “Norway massacre 'work of a madman ' . breakingNEWS.ie. 2011年 7月 23日.  
  3. 한홍구 우범곤 宜寧 銃器 亂射 事件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韓國現代史이야기》, 2009年 3月 31日 作成, 2011年 7月 4日 確認
  4. 東亞日報 , 1982年 4月 28日,7面
  5. 京鄕新聞 , 1982年 4月 27日,11面
  6. 노태우는 이것을 始發點으로 政治를 始作하여 大統領 까지 올라가게 된다.
  7. “우순경 腦解剖抛棄, 細胞以上 밝히려다” . 京鄕新聞. 1982年 4月 29日 . 2011年 1月 27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