汝矣島廣場 車輛疾走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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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出生 1970年
死亡 1997年 12月 30日 (28歲)
大田矯導所
職業 無職
罪名 殺人
刑量 死刑
犯行動機 視力障礙로 인한 社會의 不滿

汝矣島廣場 車輛疾走 事件 (汝矣島廣場車輛疾走事件)은 1991年 10月 19日 , 視力障礙를 앓던 20代 男子가 훔친 車輛을 몰고 서울特別市 永登浦區 汝矣島廣場 (只今의 汝矣島公園 )으로 突進, 疾走하여 23名의 死傷者(死亡 2名, 負傷 21名)를 낸 事件이다.

事件 槪要 [ 編輯 ]

犯人 김용제(當時 21歲)는 視力이 나쁘다는 理由로 職場에서 해고당한 것에 對해 怏心을 품고 自身이 勤務했던 某 洋襪工場 社長이 運轉하는 大宇自動車(現 韓國지엠 )의 르망 펜타파이브로 推定되는 프라이드 乘用車를 훔친 뒤, 1991年 10月 19日 서울 汝矣島廣場 에 車를 몰고 나온 直後, 午後 4時 35分 警 그곳에 나와있는 市民들을 向해 時速 100km로 突進했다. 이 事故로 自轉車를 타고 놀던 윤신재(當時 6歲) [1] 와 지현일(當時 12歲) 等 2名이 목숨을 잃었고, 김신중(當時 15歲) 等 21名이 重輕傷을 입었다. 김용제는 車가 멈춘 直後 밖으로 나와 女中生 1名을 凶器로 威脅, 人質劇을 벌이다 市民들에게 格鬪 끝에 붙잡혔다.

事件 經緯 및 顚末 [ 編輯 ]

警察 調査에서 김용제는 "視力이 나쁘다는 理由로 일하는 職場마다 頻繁히 쫓겨나 周圍 사람들이 自身을 無視하고 冷待하는 것 같아서 社會에 復讐하고 죽고 싶었다", '自身은 언제나 입에 풀漆하기도 바쁜데 남들은 好衣好食하고 幸福해하는 現實에 挫折, 犯行을 決心했다"라고 陳述했다. 實際 김용제는 中國집 配達員, 나이트클럽 에서 人事하는 웨이터, 工場 職工等으로 일했는데 弱視때문에 職場마다 解雇되고 말았다. 김용제의 車輛疾走로, 귀엽게 세발自轉車를 타고 놀다가 죽임당한 여섯살 어린이의 할머니 한 분이 孫子와 며느리를 思考와 마음의 病으로 잃은 苦痛을 克服하고 容恕했다. 할머니는 “恐怖에 떨고 있는 溶劑의 모습을 보곤, 어처구니 없는 悲劇을 저지르게 한 責任은 全的으로 우리 社會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생각했다. 視力이 나쁜 김용제를 配慮해서 眼鏡을 맞추고, 金壽煥 樞機卿과 함께 善處를 要求했다. 김용제는 1992年 6月 , 大法院 에서 最終 死刑 確定 判決을 받았고, 5年 6個月 뒤인 1997年 12月 30日 死刑이 執行되어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大選 政局으로 인한 經濟 危機에서 비롯되는 社會的 不安感에 便乘한 凶惡犯들의 發露를 事前에 處斷하기 위한 意圖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事件 以後 汝矣島 自轉車 廣場은 閉鎖 後, 汝矣島 公園으로 탈바꿈하였다.

이 事件의 張本人인 김용제는 金永三 政府 時節 歷史的 史料에 記錄된 韓國의 마지막 死刑囚 中 하나이므로, 宗敎 團體 一角에선, 金永三 政府 의 마지막 死刑 執行은 政權 交替期의 어수선한 社會的 雰圍氣를 틈타 이루어진 無謀한 人命 殺傷 行爲로 非難하여, 死刑制度에 對한 再檢討가 必要하다고 主張하면서, 이듬해인 1998年 김대중 政府 出帆 以後, 單 한 次例도 死刑 執行이 이루어지지 않아 國際 人權 團體인 엠네스티는 韓國을 東아시아 國家 中에 實質的 死刑 廢止國으로 分類한 바 있다. [2] [3] [4]

類似 事件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