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仁川 事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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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仁川事態(5.3 仁川民衆抗爭) 1986年 5月 3日 大韓民國 의 在野 및 學生 運動圈 勢力이 國民憲法制定과 憲法制定民衆會議 召集을 要求하는 示威를 벌였던 民主化運動의 一員이다.

經過 [ 編輯 ]

宸翰민주당 1986年 2月 12日 直選制 改憲을 위한 1000萬 名 署名 運動을 開始하였는데, 初期에는 制度圈 野黨인 신한민주당과 金永三 , 金大中 이 主導하는 民主化推進協議會 가 中心이 되었으나, 30萬이 雲集한 光州 大會에서는 宸翰민주당 側의 自制要求에도 不拘하고 '光州虐殺 責任者處罰' 口號가 나타났고, 10萬名이 모인 大邱 大會에서는 在野運動 團體인 민통련 의 獨自的 플래카드들이 登場하고 新民黨과는 別途의 群衆大會가 進行되는 모습을 보이기 始作했다.

그러자 4月 29日 , 金大中 民推協 共同 議長이 少數 學生의 過激한 主張을 支持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다음날 靑瓦臺 領袖會談에서 李珉雨 宸翰민주당 總裁가 左翼 學生들을 斷乎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發言을 하여 急進的인 勢力과 斷絶하겠다는 意思를 밝혔다.

이러한 立場 表明에 憤慨한 在野와 運動圈 勢力은, 5月 3日 宸翰민주당 改憲推進委員會 仁川 京畿 支部 結成大會가 열릴 豫定이던 인천시민회관에서 大會 始作 前부터 激烈한 示威를 벌였고, 이에 따른 警察 投入으로 大會는 黨指導部가 代會長으로 立場하지도 못한 채 霧散되었다.

1萬餘 名의 示威隊는 道路를 掌握하고 散發的인 示威를 하다가 午後가 되면서 스크럼을 짜고 火焰甁 을 던지며 警察 과 衝突하였다. 示威隊는 宸翰민주당 의 覺醒을 要求하고 二元執政(二元執政) 改憲 反對를 외치며 國民憲法制定과 憲法制定民衆會議를 召集할 것을 主張하였다.

이 事態로 319名이 連行되었고 129名이 拘束되었으며, 김영삼, 김대중 中心의 制度圈 野黨과 在野 및 學生 運動圈 勢力의 共助는 1987年 4月에서야 回復될 수 있었다.

12代 總選 以後 急浮上한 新民黨을 거북해하던 민정당은 이 事件 以後로 갑자기 "暴力的인 左傾 急進 勢力의 擴散을 막기 위한 保守 大聯合"을 主張하며 新民黨을 비롯한 野黨들과 大統合을 推進하기 始作했다. 勿論 當時에는 野黨들로부터 呼應이 없어 成事되지 않았으나, 民主正義黨은 第6共和國 出帆 뒤로도 꾸준히 保守 大聯合을 主張, 結局 1990年 3黨 合黨이 일어나며 保守 大聯合은 現實化된다. [1]

各州 [ 編輯 ]

  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19年 5月 1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