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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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 (Koreagate)는 1976年에 일어난 政治 스캔들로, 大韓民國 中央情報部 박동선 을 통해 美國 政治人들에게 賂物을 건네 美國 政府에 影響을 끼친 事件이었다. [1] [2] [3] [4]

1975年 美國 議會에서는 大韓民國 政府가 美 議會에 影響을 미치기 위한 活動들이 暴露되기 始作하였다. 1975年 6月 도널드 M. 프레이저 議員에 依한 下院의 韓國에 對한 人權聽聞會에서 全 中央情報部 要員이었던 이재현이 "韓國의 中央情報部가 但只 美國 內에서 半寒波(反韓派)에 對한 人權彈壓만 하는 것이 아니라 美國 內에서 反朴正熙 輿論과 活動을 撫摩하기 위해 大規模 懷柔, 買收, 脅迫, 工作을 벌이고 있다"는 事實을 暴露하였다. [5]

美國 議會 國際關係委員會는 韓國 中央情報部가 美國 內에서 活動하는 것을 調査하기 始作하였고 1976年 美國 言論에 依해서 公開되었다. 1976年 10月 24日子 워싱턴 포스트는 朴正熙 大統領의 指示로 박동선과 韓國의 中央情報部 等이 美國 國會議員과 公職者들에게 議會 內에 親한(親韓) 雰圍氣를 造成하기 위해 1970年代 들어 每年 50萬 달러에서 1百萬 달러에 이르는 現金을 包含한 賂物을 뿌렸다고 報道했다. 코리아게이트 事件으로도 알려진 이 박동선 로비事件은 人權問題와 함께 韓美關係에 致命的인 事件이 되었다. [6]

코리아 게이트 事件이 韓國의 이미지에 입힌 傷處는 매우 致命的이었다. 當時 美國人들은 ‘어글리 코리안’이란 말을 서슴지 않게 使用하였고, 甚至於 워싱턴 駐在 韓國 特派員들도 中央情報部의 끄나풀이 아니냐는 誤解를 받을 程度였다.

이 事件은 카터 大統領의 駐韓美軍 撤收政策을 促進시켰고, 韓美關係는 最惡의 狀況으로 들어섰다. 韓國政府가 박동선을 통해서 로비를 始作하게 된 動機는 單純한 것이다. 美國 行政府가 駐韓美軍 撤收를 始作하면서 韓國軍 現代化 計劃을 위한 軍事援助는 議會의 豫算 承認이 있어야 可能하다는 態度를 取하자 韓國 政府는 美國 議會를 說得하는 方式을 擇한 것이다. [7]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Chae. J. Lee dynamics of adjustment, p. 95.
  2. Lee koreagate investigations, p. 95.
  3. Koreagate on Capitol Hill Time, p. 2.
  4. R. Boettcher Gifts of Deceit .
  5. 문창극, 《韓美葛藤의 解剖》, 羅南, 1994, 250쪽
  6. 제임스 度커티, 로버트 팔츠그라프 共著, 《美國의 外交政策社》, 이수형 옮김, 한울, 1997, 443쪽
  7. 오관치, 차영구, 황동준 共著, 《韓美軍事協力關係의 發展과 展望》, 歲警査,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