整版社 僞造紙幣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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整版社 僞造紙幣 事件 (精版社 僞造紙幣 事件)은 1946年 5月 서울 에서 일어난 僞幣 犯罪 摘發 事件으로, 政治的인 波長이 커서 南韓 共産主義 運動 勢力과 美軍政 의 正面 衝突을 불러오는 結果를 낳았다. 朝鮮共産黨 의 黨員인 銀行 職員이 이관술 의 指揮下에 10萬 원의 僞造紙幣를 만들다가 夜間巡察中이던 軍政廳 首都警察에 依해 摘發되었다. [ 出處 必要 ] 이 事件으로 韓國 天主敎會는 美軍政으로부터 정판사를 拂下받고 矮小한 敎勢에도 不拘하고 中央日刊紙人 京鄕新聞 을 創刊하게 된다. [1]

經過 [ 編輯 ]

1945年 再建된 朝鮮共産黨 소공동 整版社 (精版社)가 位置한 建物에 入住하여 機關紙 《 解放日報 》를 發行하기 始作했다. 整版社 또는 朝鮮정판사는 박낙종 (朴洛鍾)李 社長으로, 日帝 强占期 朝鮮銀行 의 紙幣를 印刷하던 印刷所였다. 當時 《解放日報》의 社長은 권오직 , 編輯人 兼 週間은 조일명 이었다.

1946年 5月 15日 首都警察廳 廳長인 장택상 은 '朝鮮共産黨 人士들이 정판사에서 約 1千 2百萬원 어치의 僞造 紙幣를 찍어 流逋한 事實이 드러났으며, 關聯者들을 逮捕했다'고 公式 發表했다. [2] [3] 朝鮮共産黨의 活動 資金 마련과 南韓 經濟의 攪亂을 同時에 追求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警察의 主張이었고, 朝鮮共産黨은 造作 事件이라며 嫌疑를 否認했다. [4]

搜査 結果에 따르면 이 事件의 主犯은 朝鮮共産黨 財政部長人 이관술 과 《解放日報》 社長 권오직이고, 이들의 指示로 鄭判事 社長 박낙종 , 庶務課長 송言畢 이 僞造 紙幣를 印刷해 流通시켰다. 朝鮮共産黨 黨員이며 日帝 强占期 부터 鄭判事 職員이었던 김창선 이 紙幣 印刷版을 미리 훔쳐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권오직은 38線 以北으로 달아났고, 이관술은 逮捕되어 無期懲役 을 宣告 받았다. [5]

影響 [ 編輯 ]

이 事件으로 정판사는 左右理念對立當時 右派 路線을 걷던 天主敎會 에 拂下되어 이름을 바꾸고 《 京鄕新聞 》을 印刷하게 되었다. 《解放日報》는 武器停刊 措置로 폐간당하는 受侮를 當하게 되었으며 朝鮮共産黨은 黨舍 押收 搜索을 받은 뒤 入住해 있던 建物에서 쫓겨났다. 朝鮮共産黨이 이 事件이 捏造되었다고 主張, 美軍政에 强勁한 反美 攻勢로서 맞서면서 兩側의 葛藤이 高調되었고, 朝鮮共産黨 總祕書 박헌영 이 서둘러 越北하는 契機가 되었다.

造作 疑惑과 論難 [ 編輯 ]

이 事件의 重要한 證據는 被告人들의 自白이었는데, 이관술 을 비롯한 이들은 警察과 檢察에서 陳述이 拷問때문이었다며 裁判 過程에서 被疑 事實을 飜覆했다. [6] 以外에 唯一한 證據로 確保된 것은 萬원券 僞造紙幣 2張이었다. 그러나, 當時에는 僞造紙幣 事件이 많아서 이를 證據로 삼기에는 不足했고, 當時 共産黨이 돈이 窮乏했다는 資料도 없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1946年 11月 23日 宣告公判에서 有罪가 認定되었고, 이관술 은 終身刑을 받았다가 [6] 韓國戰爭 勃發 以後 處刑되었다. [7] 이 事件을 둘러싼 疑惑은 以後 共産黨의 活動이 不法化되면서 더以上 풀리지 않게 되었다. [6]

그러나 이 事件이 造作이라면 當時 朝鮮共産黨은 偶然히 그 建物에 入住했는데, 들어가서 보니 거기에 紙幣 印刷施設이 있었을 뿐이고, 그것을 全혀 活用한 적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런 氣가 막힌 偶然이 實際로 일어났을 可能性은 없다. 그 建物에 入住한 動機 自體가 그러한 施設의 存在를 事前에 알고 活用할 目的이었던 것이다. [8] 事件 當時 朝鮮共産黨員으로 機關紙 解放日報의 政治部 首席記者로 있었던 박갑동(朴甲東, 1919~ ) 은 著書 《박헌영(朴憲永) - 그 一代記를 통한 現代史의 再照明》에서 當時 資金難에 시달려 活動費 調達에 隘路를 겪던 朝鮮共産黨이 筋擇(近澤) 빌딩에 紙幣 印刷施設이 있다는 것을 事前에 알고 그 建物을 接受했다고 하였다. [9]

當時 裁判도 異例的으로 여러 次例 公判을 거쳤고, 心理도 充分히 했으므로 事件 自體가 造作이었을 可能性은 없다 이처럼 鄭判事 僞造 紙幣事件은 當時 急速度錄 번져가던 朝鮮共産黨의 발목을 휘어잡은 決定的인 事件이라고 할 수 있다. 朝鮮共産黨(남로당) 박헌영의 指示로 始作된 僞造紙幣事件은 市場經濟를 驕悍 혼란시키고 남로당의 活動費로 使用하였다.  1946年 9月6日 박헌영을 비롯한 朝鮮 共産黨 幹部 이강국 이주하가 逮捕令을 發付받게 된다. 같은날 美軍政廳은 3個 左翼新聞 朝鮮人民補, 中央新聞, 現代日報를 폐간시키고 新聞社 幹部들을 逮捕하였다. 이때 박헌영은 以北으로 脫出할 計劃을 세우고 地下로 潛入했다가 北韓으로 들어갔다. [10] 말해지는 듯하나, 最新 硏究에 따르면 當時 裁判에 關해 "現在 남아있는 여러 資料를 比較 檢討한 結果 鄭判事 ‘僞幣’ 事件은 여러 가지 疑惑이 많을 뿐 아니라 檢事의 論告 및 裁判部의 判決에서도 여러 가지 決定的인 矛盾點들이 發見"되었으며, "이 事件은 美軍政이 朝鮮共産黨을 彈壓하기 위해 造作한 事件이며, 被告들은 最小限 檢査 側의 公訴 提起 事實에 對해서만큼은 無罪라는 結論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參考할 수 있겠다. [11]

各州 [ 編輯 ]

  1. 강인철《韓國天主敎의 歷史社會學》(한신대學校 出版部, P 149)
  2. 정판사僞幣事件 眞相發表 조선일보, 東亞日報, 서울新聞 1946年 5月 16日
    紙幣僞造事件 眞相全貌, 公報度(公報都)서 正式發表 東亞日報 1946年 5月 16日子 2面
  3. 公報部, 정판사僞造紙幣事件의 本山인 朝鮮共産黨 本部建物 筋擇빌딩 一部閉鎖에 對한 發表 朝鮮日報 1946年 5月 20日
  4. 朝貢, 公報部의 정판사僞造紙幣事件發表에 對해 聲明 發表 中央新聞 1946年 5月 17日
  5. 정판사僞幣事件 言渡公判 東亞日報, 朝鮮日報 1946年 11月 29日
    大法院 정판사僞幣事件 被告의 上告를 棄却 서울新聞, 東亞日報 1947年 4月 11日, 1947年 4月 13日
  6. 한상철,이영복 共著 (2011年 3月 25日). 〈p125〉. 《내가 쓰는 韓國 近現代史》. 서울: 우리교육. ISBN   978-89-8040-940-2 .  
  7. https://news.v.daum.net/v/20150402162905756
  8. 朝貢 看板 近澤빌딩 本部建物에 내걸림 自由新聞 1945年 11月 24日
  9. 《박헌영(朴憲永)- 그 一代記를 통한 現代史의 再照明》 Archived 2017年 4月 27日 - 웨이백 머신 (서울, 人間事, 1983) p.121 / 冊 內容 紹介
  10. (민병돈 칼럼) 박헌영과 朝鮮정판사 僞造紙幣事件 The AsiaN August 24, 2015
  11. 임, 성욱 (2015年 2月). 《美軍政期 朝鮮정판사 '僞造紙幣' 事件 硏究》 . 學位論文(博士)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 韓國學科.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