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규 葬禮鬪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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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葬禮鬪爭
勞動者 大鬪爭 의 一部
날짜 1987年 8月 8日 - 8月 28日
地域 大韓民國 巨濟市
原因 警察의 暴動的 示威鎭壓
種類 勞動爭議
示威 當事者
大宇造船 勞動者
主要 人物
會長 金宇中
社長 尹永碩
參與 人員
3千 餘名
12個 中隊 1千 5百 名
死傷者
1名 死亡
933名 連行
74名 拘束
不明

이석규 葬禮鬪爭 (李錫圭葬禮鬪爭)은 1987年 8月 大韓民國 巨濟島 에서 發生한 勞動爭議 이다.

大宇造船 은 1985年 以來로 2年 사이 3萬餘 名이던 勞動者가 1萬 6千 名으로 整理解雇되고 賃金이 凍結 狀態였기에 勞動者들의 不滿이 매우 높았다. 때문에 4月부터 4次例에 걸친 勞組 結成 試圖가 있었고, 1987年 7月 蔚山 현대엔진 勞組結成으로 始作된 勞動者 大鬪爭 이 全國的으로 擴散되자 大宇造船에서도 8月 8日 勞組結成을 要求하는 罷業 이 開始되었다. 8月 9日 勞組가 結成되었으나 이틀 뒤인 11日 勞組委員長이 會社에 懷柔를 當했다. 이에 勞動者들은 다시 새 勞組를 結成하고 14日부터 玉浦 , 長承浦 等地에서 街頭行進 을 벌였다.

8月 20日, 勞動者 5千 餘名이 連坐罷業 에 突入한 가운데 6次例 協商이 進行되었지만 모두 決裂되고 社側은 無期限 職場閉鎖 를 通報했다. 全國 各地에서 12個 中隊 1千 5百 名 兵力의 戰鬪警察 이 召集되어 巨濟島에 配置되었다. 8月 22日 1時 30分, 玉浦觀光호텔 앞에서 勞動者 3千 餘 明과 戰鬪警察 1千 5百 餘名이 對峙한 가운데 호텔에서 열린 마지막 協商이 決裂되었다. 勞動者들이 호텔 進入을 試圖하자 警察은 平和 示威를 保障하겠다고 나섰고, 이 말을 믿은 勞動者들이 오리걸음 行進으로 50 미터를 前進하자 3面을 包圍하고 있던 警察이 催淚彈 을 일제사격했다. 이때 臺組立部 외업半 所屬 勞動者 이석규 (李石圭, 1966年-1987年)가 催淚彈을 胸部에 直擊당했고, 이석규는 대우병원 으로 移送되던 途中인 午後 3時 30分 死亡했다.

이소선 , 盧武鉉 [1] , 李相洙 等이 巨濟島에 到着해 이석규의 葬禮를 "全國 民主勞動者葬"으로 하기 위한 葬禮準備위를 結成, 遺族으로부터 葬禮에 關한 모든 權限을 委任받았다. 公權力의 剖檢造作의 前例가 있기에( 박종철 事件 ) 勞動者들은 警察이 屍身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大宇病院 靈安室로 모여 靈安室 門을 鎔接 하고 24時間 지켰다. 8月 28日 午前 7時에 勞動者 地域住民 等 2萬 餘 名이 모인 가운데 永訣式이 進行되었고, 午後 3時에 勞動者 1千 5百名이 버스 28代에 나눠 타고 靈柩車 와 함께 망월동 墓地로 向했다. 그러나 車輛 行列이 高聲 三거리에 到着했을 때 警察은 靈柩車와 萬張差만 통과시키고 15톤 덤프트럭 으로 道路를 막은 뒤 屍身을 奪取해 갔다. 뒤이어 野山에 埋伏 中이던 戰警과 白骨團 이 버스 行列을 襲擊하여 搭乘者들을 毆打하고 連行했다. 警察은 遺族 3名만 車에 태우고 戰警버스 6臺로 護衛하여 南原郡 삼해面 관풍리의 先山 으로 向하여 午後 9時에 埋葬하였다. 本來 8月 28日 6時에 망월동에서 賣場을 進行하면서 全國的으로 追慕大會가 開催될 豫定이었지만 警察 5萬 餘名이 源泉封鎖하여 不發하였다.

8月 28日 하루동안 全國的으로 933名이 連行되고, 李相洙 · 盧武鉉 · 박용수 를 비롯한 74名이 拘束되었으며, 이소선 等 10餘 名이 手配되었다.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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