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成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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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成煥
兪成煥
出生 1931年 8月 20日 ( 1931-08-20 )
日帝 强占期 慶尙北道 星州郡 가천면
死亡 2018年 7月 24日 ( 2018-07-24 ) (86歲)
大邱廣域市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本館 機械
學歷 高麗大學校
陸軍步兵學校 修了
經歷 星州高等學校 敎師
第3代 慶尙北道議員
社會大衆黨 行政特報委員
統一社會黨 行政特報委員
民主回復 국민회의 行政特報委員
民主正義黨 行政特報委員
新民黨 中央常務委員
民主한국당 黨務委員
국민신당 副總裁
새정치국민회의 黨務委員
열린우리당 特任行政委員 兼 特任拷問
大統合民主新黨 特任拷問
配偶者 남영자
子女 膝下 1女 유현주
軍服務 陸軍大尉 全域
宗敎 無宗敎
議員 選手 2
議員 臺數 12·14
正當 無所屬
地域區 大邱 中區·西區

兪成煥 (兪成煥, 1931年 8月 20日 ~ 2018年 7月 24日 )은 大韓民國 政治가 이다.

生涯 [ 編輯 ]

社會大衆黨 推薦으로 第3代 慶尙北道 道議會 議員으로 當選된 以後 統合社會黨에 入黨하여 活動하다가 民主回復 국민회의 慶北支部 事務局長을 역입하였다. 野圈 突風이 불었던 1985年 2月 12日 第12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新民黨 所屬의 國會議員으로 大邱에서 當選된 兪成煥은 1986年 10月 8日부터 12日까지 自身의 서울 서초구 방배동 自宅에서 第131回 定期國會 本會議 開院할 때 使用할 對政府 質問 原稿를 作成함에 있어 "「이 나라의 國是는 反共이 아니라 統一이어야한다」「오늘날의 强大國들의 韓半島 現象固着 政策에 많은 사람들이 憂慮를 하고 있다」「분단국에 있어서의 統一 또는 民族이라는 用語는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昇華되어야한다」「통일이나 民族이라는 用語는 共産主義나 資本主義보다 그 위에 있어야한다」고 主張하였다. 또한, 仁川騷擾事件에 對하여 「이는 獨占財閥 爲主의 經濟政策과 民衆收奪에 對한 民衆의 悽絶한 生存權 鬪爭」이며「한반도 分斷과 强大國의 現象固着政策에 對한 民衆의 自發的 自主的 統一鬪爭이었다」고 하면서 三民理念에 對해 「學生運動의 本質은 反外勢 民族自主와 反獨裁 民主化 및 民衆生存權 鬪爭으로 集約된다 이것을 줄여서 三民理念이라고 하는데 搜査當局은 三民理念을 容共左傾이라고 몰아붙여 容共造作에 血眼이 되어 있다」고 하는 等으로 北傀의 宣傳煽動 및 統一戰線戰術에 符合하는 內容을 記載하였다. 그리고 祕書 양순석으로 하여금 13日 13時30分頃 國會議事堂 記者室에서 複寫된 位 原稿 30餘部를 30餘名의 記者들에게 配布하게 함으로써 反國家團體인 北韓共産集團을 이롭게 하는 內容을 담은 原稿를 事前流出하는 方法으로 反國家團體에 同調했다"는 嫌疑에 對해 "이것은 民族統一만 될 수 있다면 共産化 統一도 無妨하다"는 趣旨로서 結局 反共政策을 抛棄할 것을 主張한 것이지만 우리의 最高價値와 燐鹽은 憲法이 定한 바와 같이 自由民主主義體制이고 아무리 統一이나 民族이 重要하다고 하더라도 反共을 抛棄한 채 우리의 生存을 抛棄하는 自由民主主義가 否定된 統一은 到底히 容納될 수 없다는 것이 全體 國民의 合意된 것이다"며 "反共政策은 統一의 前提가 되어야 하고 그 統一은 自由民主主義 體制가 根本이 되는 統一이어야 할 것이다"고 할 수 있고 5.3 仁川騷擾事件은 자민투, 민민투 等 急進左傾勢力이 都心地를 占據하고 "仁川을 解放區로", "鐵處地 怨讐 米帝와 그 앞잡이 깡牌的 反動政權의 心臟部에 解放의 칼을 꽂자"는 等의 容共口號를 외치면서 破壞, 放火, 拉致 等의 極烈한 暴力行使로 民衆蜂起 를 誘發하여 自由民主主義 體制를 顚覆하려던 集團 所要事件임에도 이를 "民衆收奪에 對한 民衆의 悽絶한 生存權 鬪爭이며 强大國의 韓半島 現象固着化 政策에 對한 民衆의 自發的인 自主的 統一鬪爭"이라고 한 것은 北韓共産集團이 "仁川事態野 말로 파쇼都堂에 對한 大衆的 憤怒의 爆發"이고 "反美口號를 내건 大衆의 蹶起"라는 等으로 宣傳하는 것과 符合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現體制를 民衆收奪體制라고 하고 美國이 2個의 韓國造作策動으로 民族의 永久分裂을 劃策하고 있다는 北의 誹謗宣傳과 一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해 11月14日 拘束起訴돼 서울地檢 公安部 정민수 檢事가 서울刑事地法 合意14部(裁判長 박영무) 審理로 열린 1審에 結審公判에서 "이 事件은 國會議員의 身分을 가진 被告人이 急進左傾勢力의 主張을 그대로 容認함으로써 一部 不純勢力의 體制否定的 主張과 左傾汚染現象을 及其也 國民으 代表機構에까지 波及시킨 事件이었다"면서 兪成煥의 行爲는 "우리 社會의 思想的 混亂을 加重시키고 左傾 警戒心을 이완시킨 重大한 犯罪"며 "統一이나 民族이라는 用語는 共産主義나 資本主義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는 原告의 趣旨는 文脈上 統一만 될 수 있다면 共産主義 까지도 受容할 수 있다는 意味"라고 主張하면서 懲役3年 資格停止3年을 求刑하였다. 이때, 傍聽客에서 辱說과 揶揄가 쏟아지고 목요상 , 강기욱 , 조승형 , 신기하 , 태윤기 , 이태영 , 紅令旗 辯護士 等 7名이 이 事件은 유성환 議員이 平素 國會 內에서 對政府 强勁發言을 해온데 對한 政治的 報復이라고 主張하면서 "民族統一이 우리나라의 國試라는 것은 누구도 否認할 수 없다"는 等의 內容으로 네時間에 걸쳐 辯論을 하며 無罪主張을 하고 유성환 議員도 1時間10分에 걸친 最後陳述을 통해 "나는 北傀가 南侵해오면 當場이라도 銃을 들고 나가 싸울 反共主義者다. 國家保安法이 反政府人士들에 對한 彈壓道具로 쓰여서는 안된다"고 말했으나 1987年 4月 13日 열린 宣告公判에서 懲役 1年, 資格停止 1年을 宣告받았고 1987年 6月18日 抗訴審 1次公判을 마친뒤 그동안 擔當 裁判部가 세番이나 바뀌었음에도「반공이 果然 國試인지 與否와 統一槪念에 對한 硏究가 進行中」이라는 理由로 4年5個月 동안 速行되지 않다가 1991年 10月 31日 서울高法刑事5部(裁判長 權光重部長判事) 審理로 公判을 열고 유성환 議員에 對한 求刑을 마친 뒤 統一槪念等에 關한 法院의 視角을 整理, 오는 11月初에 宣告하였다. 抗訴審 法院은 公訴事實이 國會議員 免責特權 範圍 내라고 하면서 公訴棄却 判決했고 大法院은 이를 確定하였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60年 地方 選擧 3代 道議員 慶尙北道 社會大衆黨
0%
1978年 總選 10代 國會議員 慶北 龜尾市·軍威郡·星州郡·善山郡·漆谷郡 無所屬 14,028票
7.66%
5位 落選
1985年 總選 12代 國會議員 大邱 中區·西區 宸翰민주당 121,629票
36.4%
1位 初選
1988年 總選 13代 國會議員 大邱 西區 乙 統一民主黨 30,575票
34.69%
2位 落選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全國區 民主自由黨 7,923,718票
38.5%
全國區 37番 再選, 承繼
1996年 總選 15代 國會議員 大邱 中區 신한국당 17,079票
32.23%
2位 落選
1998年 地方 選擧 12代 市場 大邱廣域市 국민신당 58,243票
7.35%
3位 落選 民選 2期

家族 關係 [ 編輯 ]

  • 配偶者 : 남영자
    • 딸 : 유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