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平 一家族 生埋葬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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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 一家族 生埋葬 事件 (楊平一家族生埋葬事件)은 1990年 11月 9日 에 京畿道 楊平郡 청운면 갈운리 國道 6號線 [1] 에서 親戚 結婚式에 參席하기 위해 지나가던 乘用車를 拉致하여 金品과 車를 强奪하고 搭乘者 全員을 生埋葬하여 殺害한 事件이다.

事件 槪要 [ 編輯 ]

이 事件의 犯人들인 이성준 (當時 30歲, 前科 8犯), 오태환 (當時 32歲, 前科 5犯), 윤용필 (當時 31歲, 前科 6犯) 男子 3名과 主犯 이성준 의 愛人 심혜숙 (當時 22歲)等 4人組로 犯罪 團體를 構成한 狀態에서 저질러진 이 事件은 살아 있는 被害者를 고스란히 흙 속에 파묻는 極惡 無道함을 보여줌으로써 大韓民國 社會를 驚愕하게 만들었고, 處罰에 對한 强勁論도 活性化시켰다.

1次 犯罪 [ 編輯 ]

이들의 犯罪 行脚은 江陵 新婚夫婦 强盜 事件부터 始作되었다. 1990年 10月 28日 午後에 仁川 에서 로얄 프린스 렌터카를 빌린 後 바로 江陵 鏡浦臺 로 出發하였고, 旅館에서 하루를 보낸 後 旅行 經費와 遊興費를 마련하기 위하여 强盜를 저지르기로 作定하였고, 때마침 記念寫眞 撮影 中이던 新婚夫婦를 拉致해 暴行, 結縛한 後 乘用車로 拉致하였다.

이들은 被害者들 中 한 名을 新郞 所有의 엑셀 乘用車에도 나눠 태우고 現場에서 9km 떨어진 支店에서 現金과 手票 等을 强奪한 後 新婚夫婦를 소나무에 묶어놓은 채 逃走하였다.

犯行 後 主犯 이성준 과 愛人 심혜숙 은 被害者 新郞 所有의 엑셀 乘用車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다 仁川 市內에서 交通事故를 일으켰고, 事故 被害를 當한 택시技士와 出動한 警察官에게 凶器를 휘두르면서 抵抗하며 逃走하였다.

搜査에 着手하게 된 警察은 事故를 낸 엑셀 乘用車가 盜難 車輛임을 밝혀냈으며, 그 車 안에서 發見된 오태환 의 愛人(當時 20歲) 名義로 된 預金通帳 및 가스銃 等을 發見하였다.

2次 犯罪 [ 編輯 ]

1990年 11月 7日 , 이들은 2次 犯罪를 저지르기로 作定한다. 지난 番( 江陵 新婚夫婦 强盜 事件)처럼 被害者를 살려주게 되면 自身의 犯罪 行脚이 綻露나게 되어 追跡당할 것을 念頭에 두고 두 番째 犯罪 計劃에서는 被害者를 殺害하고 徹底히 暗埋葬을 하여 숨기기로 한 後 犯行에 着手하기에 이른다.

事件 當日 午後 1時쯤 國道 6號線을 지나가던 被害者들의 쏘나타 乘用車를 自身들의 렌터카로 가로막아 拉致한 뒤 現金 等을 强奪한 後 被害者들을 暴行하면서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트렁크에 가두었고, 이 中 5살의 女子 어린이는 犯人들과 함께 있었던 심혜숙 이 안은 채 被害者의 車輛 뒷 座席에 타고 갔다. 뒤이어 犯人들은 被害者 家族들을 生埋葬할 陰謀로 前날 民泊을 했던 곳에서 두 자루의 삽을 빌린 後 싸리봉 隣近 山기슭에서 被害者들을 次例로 굴러 떨어지게 暴行하고는 그대로 돌과 흙 等으로 生埋葬했다. 이 中에서 犯人 오태환 은 被害者와 함께 가던 女子 어린이를 발가벗기고 1m 깊이로 판 구덩이 옆에 무릎을 꿇게 한 狀態에서 그대로 生埋葬해 숨지게 했다.

犯行을 저지르고 난 後 日當은 被害者의 差 等 2臺에 나눠 탄 채로 京畿道 安養市 로 逃走하여 하루를 머무르면서 智異山 으로 逃避하기로 論議한 後 大田廣域市 로 逃走하기에 이르렀다. 또 犯人들은 智異山 으로 갈 때 심혜숙 의 親舊(當時 21歲)에게도 함께 놀러 가자고 提議하기에 이르렀다.

檢擧 過程 [ 編輯 ]

하지만 심혜숙 의 親舊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行動에 疑心을 느껴 警察署에 申告하기에 이른다. 結局 事件을 接受받은 大田東部警察署가 搜査에 着手하였고, 事件이 發生한 하루 뒤인 10日 낮 1時 20分頃 바로 犯人의 所在 把握에 成功하여 一黨들이 나눠 타고 있던 乘用車들을 發見, 바로 空砲彈과 實彈 等을 使用하여 오태환 심혜숙 을 檢擧하였다.

한便 被殺者의 乘用車를 自己 마음대로 타고 다니던 主犯 이성준 윤용필 은 警察官이 發射한 實彈에 負傷을 입은 狀態에서 茶를 억지로 타고 가다가 5重 追突事故를 낸다. 뒤이어 狙擊 警察官의 實彈 1發이 被害者의 車輛 타이어에 맞아 펑크가 나면서 車를 버리고 逃走했다. 結局 逃走했던 犯人 中 윤용필 은 銃傷을 입은 狀態에서 다음날인 11日 밤 8時 30分쯤에 서울 永登浦區 道琳1洞의 親舊 집에서 住民의 提報를 받고 出動한 警察官에 檢擧되었다. 하지만 가슴에 銃傷을 입고 逃走한 主犯 이성준 은 12日 午前 9時 40分쯤에 大田廣域市 東區 가오동의 한 아파트 屋上에서 死亡한 채로 發見되었다.

搜査 過程 [ 編輯 ]

1次 犯罪에서 被害를 當한 新郞 所有의 엑셀 乘用車에서 發見된 證據物을 통해 犯人 오태환 等 一黨들의 存在를 確認하였고, 오태환 의 愛人 素材를 計座 情報로 알아낸 後 緣故地가 大戰 임을 알아내어 이 一帶 警察署와도 共助搜査에 着手하기에 이른다. 犯人을 모두 檢擧한 後 證據物을 蒐集하는 過程에서 흙에 汚染된 버선을 發見한 警察官의 集中 取調에 結局 犯人들은 生埋葬 事件을 저질렀음을 自白하기에 이르렀다.

事件 餘波 [ 編輯 ]

當時 剖檢 執刀醫가 發表한 內容에 따르면 被殺者들은 모두 呼吸器에 흙 等이 甚하게 들어가고 窒息死한 狀態였으며, 警察 調査結果 살해당한 어린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哀願했음에도 不拘하고 一黨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돌덩이를 굴리고 흙을 덮어 生埋葬했다는 事實이 드러나면서 言論에 報道되자 事件 搜査를 맡은 警察官과 國民들은 크게 衝擊을 받아 憤慨하였고, 서울特別市 淸凉里 衛生病院 에서 擧行된 死亡者의 永訣式이 進行되던 11月 14日 에는 市民들도 함께 參席하여 當時 現場을 取材하던 放送 記者나 PD 等을 통하여 다양한 意見을 揭示하였고, 被害者의 遺骸와 遺族을 태운 靈柩車는 '엄마!하고 한 番만 불러다오' 等의 슬픈 文句를 담은 懸垂幕을 건 채 葬地로 向했다.

한便 이番 事件을 解決한 大戰東部警察署 刑事陣은 事件 處理의 功勞를 認定받아 1階級 特進을 받았으며 盧泰愚 政權 當時 施行된 犯罪와의 戰爭 餘波로 裁判은 迅速하게 進行되어 結局 犯人 3名에게는 1990年 12月 4日 모두 死刑이 求刑되었고, 1991年 3月 5日 에 法院에서 死刑이 宣告되었다. 1992年 12月 29日 윤용필 , 1994年 10月 6日 오태환 의 死刑이 執行되었고, 심혜숙 은 이듬해 열린 抗訴審에서 10年型으로 減刑되어 8年 服役 後 1998年 假釋放 되었다가 2003年 7月 癌으로 死亡했다.

最近 論難 [ 編輯 ]

事件이 發生한 지 22餘 年이 지난 2012年 2月 24日 한겨레新聞 에 當時 심혜숙 의 辯護를 맡았던 김형태 辯護士가 " 楊平 生埋葬事件 스물하나 女子는 그렇게 무너져갔다 "는 寄稿를 통해 事件 關聯 글을 揭示하였다.

言論 報道 [ 編輯 ]

各州 [ 編輯 ]

  1. 現在는 道路名住所 基準 청운면 京江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