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第3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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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大韓民國

1962年 ~ 1972年
國家 愛國歌
수도 서울特別市
政治
政治體制 大統領制 共和國
大統領 朴正熙
立法府 大韓民國 國會
歷史
 ? 國民投票
? 10月 維新
1962年 12月 17日
1972年 10月 17日
지리
面積 100,210 km 2 (108位)
內水面 比率 0.3 %
人文
公用語 韓國語
人口
1970年 어림 3190萬名
經濟
通話 大韓民國 원

大韓民國 第3共和國 (大韓民國第三共和國)은 1961年 5·16 軍士政變 에 依한 軍政 아래에서 1962年 12月 17日 에 實施된 國民 投票 로 恐怖, 施行된 憲法 에 따라 設立한 大韓民國 의 세 番째 共和 憲政 體制이다. 이 憲法에 따라 이듬해 10月 15日 에 實施된 第5代 大統領 選擧 에서 國民의 直接 選擧 朴正熙 가 大統領에 選出되었고, 1963年 12月 17日 第3共和國이 正式 出帆하였다. 第3共和國은 1972年 10月 17日 憲法을 改正하여 維新體制 로 變更하면서 끝났다.

朴正熙 政府 는 第1次 經濟 開發 5個年 計劃 을 推進하였으며, 京釜高速道路 를 비롯한 道路 港灣 , 空港 等의 社會 間接 資本 도 擴充하여 全國이 一日生活圈에 들어갔다. 또, 干拓 事業과 作物의 品種 改良으로 食糧 生産도 增大되었다. 이 過程에서 大韓民國 내 資本의 蓄積이 이루어져 外國 資本에 依存하던 資本 構造가 어느 程度 改善되었으나, 資本 集中이 深化되어 少數의 財閥 들이 生産 所得 에서 支配的인 位置를 차지하게 되었고, 大韓民國 內 産業의 輸出 依存度가 深化되며, 民主主義가 抑壓되는 等 큰 問題點들이 나타났다.

1970年代 에 들어서는 産業化 로 인해 크게 늘어난 工場 勞動者 들의 權益 保護를 위한 勞動 運動이 活潑해지기 始作하였다. 政府 의 强勁한 彈壓에도 不拘하고, 賃金 引上, 勞動 條件 改善, 企業家의 經營 合理化와 勞動者에 對한 人格的 待遇 等을 主張하는 勞動運動이 全國的으로 擴散되었다.

한便, 第3共和國은 反共主義 를 國家 政策으로 내걸고 反共主義 敎育을 强化하고, 能率과 實質을 重視하는 機能 養成 敎育에 重點을 두었다. 이런 狀況에서 敎育 自治制는 名目上으로만 存在하고, 敎育의 中央 集權化와 官僚的 統制는 繼續되었다. 1968年 에 發表한 國民敎育憲章 은 이 時期 敎育의 方向을 提示한 것이었다.

成立 背景 [ 編輯 ]

第2共和國 內閣制 를 廢棄하고 莫强한 大統領 中心制 를 採擇하였다. 大統領은 國民 投票로 直接 選出되었다. 朴正熙는 1963年 , 1967年 大統領 選擧 에서 大統領에 當選되었다.

1969年 第6次 改憲 國民 投票 를 통해 通過시켜 3選의 基盤을 만들었다. 朴正熙는 1971年 大統領 選擧 에서도 金大中 을 이기고, 大統領에 當選되었다.

政治 [ 編輯 ]

1965年 韓日國交正常化 를 推進하였다. 野黨 은 反對했고 學生들도 反對示威를 일으켰지만, 6月에 日本 과 몇몇 條約 및 協定을 締結했다. 1965年 韓日協定 締結 等을 통해 國家 기틀을 다질 資金을 마련했다. 6·3 抗爭 이 일어나 武力으로 鎭壓했다.

1966年 9月 22日 國會에서 韓國肥料株式會社 사카린 密輸 한 일로 對政府 質問 中 國會議員 김두한 國務委員 들에게 미리 準備한 人糞 을 投擲한 國會 汚物投擲事件 이 있었다.

1967年 朴正熙 윤보선 等을 꺾고 再選 에 成功하여 第6代 大統領이 된다. 1967年 6月 8日 第7代 總選 을 통해 各 地域區에서 小選擧區制를 통한 直接選擧로 131名을 選出하였다. 政黨別 得票率에 따라 選出한 44名의 全國區를 包含하여 大韓民國 第7代 國會議員은 모두 175名이다.

1972年 朴正熙 의 指示로 이후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派遣되어 金日成 과 만나 自主, 平和, 民族大團結의 3代 統一 原則 制定하였다. 1972年 7月 4日 7·4 南北 共同 聲明 을 發表하였다. [1] 이는 國際的 데탕트 雰圍氣와 駐韓美軍 撤收宣言, 軍備競爭 縮小를 위해 制定되었으나 以後 統一論議를 통해 南北 兩側이 自國 權力基盤 强化를 위해 利用되었다.

經濟 [ 編輯 ]

第2共和國 政府에서부터 計劃되었던 5個年 計劃안이 第3共和國 政府로 넘어오면서 經濟開發 5個年 計劃案 이 修正되어 本格的으로 實施되었다.

이 時期에는 主로 輕工業 爲主 中心의 輸出 主導型 戰略이었다. 이러한 戰略으로 輸出産業이 크게 育成되었고, 社會間接資本 이 擴充되었다. 1964年 8月 食糧增産 7個年計劃 發表하여 1965年 부터 施行하였다. [1] 1967年 12月 農漁村開發公社 를 創立하였고 1969年 2月 農業機械化 8個年 計劃을 確定하고 그해 11月 1日 農漁村近代化促進法이 承認되었다. [1] 國土 綜合 開發 計劃 等을 實施하고 食糧 增産 計劃 品種 改良 等을 試圖하여 經濟 浮揚을 試圖하였다. 1968年에 京釜高速國道 를 着工하여 1970年에 完全開通하였다. 이 時期에 貨幣를 환화 에서 원貨 로 바꾸었다. 1970年 輸出 10億 달러를 達成하였다.

같은해 8月 21日 關稅廳 을 開廳하였으며 1971年 10月 25日 內需 龍 生産業體에서도 輸出 을 義務化할 것을 指示하였다. [1] 1972年 第3次 經濟開發 5個年計劃을 實施하였고 1月 27日 第3次 人力開發 5個年 計劃을 確定하였다. 2月 9日 에는 綠色革命을 推進, 統一벼 를 開發하였으며 의 國內 自體生産 및 完全 自給自足은 1976年에 達成한다. 1972年 8月 3日 企業社債 凍結 等 緊急 命令을 發表하였다. [1]

社會 [ 編輯 ]

1963年 4月 17日 勤勞者의 날 制定에 關한 法律을 만들었다. [1] 1970年 4月 에는 새마을 運動 을 提唱, 始作하였다. [1] 1971年 12月 25日 서울의 대연각호텔에서 큰 火災 가 發生하여 167名의 死亡者가 發生하였다.

文化 [ 編輯 ]

1963年 8月 8日 國史敎育 統一方案을 宣布하였다. 1968年 안호상 , 박종홍 等 學者들을 招聘하여 國民敎育憲章 을 制定 頒布하게 하여 새로운 時代를 여는 바람직한 韓國印象, 國籍 있는 敎育의 展開를 强調하였고 이는 國民敎育化되었으나, 金永三 政府 超人 1994年 에 廢棄되었다. 朴正熙는 政治의 最優先 課題를 敎育에 두었으며, 科學技術敎育의 振興을 目的으로 實業界學校 奬勵와 1973年 부터 大德硏究團地 造成事業을 推進하였다. 1978年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을 設立 하여 韓國學 및 韓國文化 硏究의 本山을 造成하였다. [1]

外交 [ 編輯 ]

許政 過渡政權을 이은 第2共和國 의 場面 內閣의 外交目標는 事實上 履行되지 못한 채 5·16 軍士政變 을 맞았다. 當時 軍事政府 의 革命公約에 나타난 外交政策 部分을 보면 過去의 政策과는 다른 一面의 要素를 發見할 수 있다. 軍事政府는 經濟力의 增强과 反共決意의 鞏固化에 依한 國土統一의 目標達成을 强調하고 있다. 이와 같은 軍事政府의 外交政策은 1963年에 5·16 軍士政變의 主體였던 朴正熙 가 大統領이 됨으로써 더욱 뚜렷이 浮刻되었다. 第3共和國은 다음과 같은 外交政策의 目標를 履行하려고 하였다: (1) 積極的인 多變外交(多邊外交)를 志向하여 中立路線(中立路線)을 標榜하고 있는 國家와의 外交關係 樹立을 目標로 하였다. 美國은 쿠데타로 執權한 朴正熙를 不信하였으나, 베트남 參戰 決定은 이러한 美國의 視角을 緩和시켜 주었다. 美國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駐韓 美軍을 減縮하였고 韓國은 自主國防을 위하여 對美 一邊倒를 脫皮하려는 努力을 기울였다. 1971年부터 非敵性(非敵性) 共産國家와의 通商關係 許容을 宣言하고 할슈타인 原則을 全面 廢止하였다. (2) 經濟外交(經濟外交)의 强化를 目標로 하여, 韓國은 西歐 帝國과의 友好·親善關係를 維持·强化하는 데 努力하는 한便, 經濟開發 計劃의 成就를 위한 經濟外交를 積極 推進하여 各國과의 資本協力 및 技術協力 關係를 加一層 强化하고 通商關係를 增進시키는 데 努力하였다. 特히 西歐國家 中 獨逸 聯邦共和國과의 關係가 가장 中心이 되었다. 韓國 政府는 아르헨티나의 땅을 사들여 海外農業投資를 하였으나 成功的이지는 못했다. (3) 韓國은 美國의 壓力과 經濟開發의 資金 充當이라는 動機로, 國內 野黨과 大學生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日本과의 國交를 正常化하였다. (4) 또한, 地域安全 防衛體制를 念頭에 둔 아시아·太平洋理事會의 創設을 主導하였으나, 會員國들의 反對로 文化 및 經濟協力機構에 머물렀다. 이러한 一連의 努力은 韓國의 外交政策을 現實化시키는 한便 韓國外交의 方向轉換에 기틀을 提供했던 것이다. 特히 韓國의 立場에서 본다면, 1960年代와 1970年代의 初盤은 世界政治의 激變期였다. 따라서 韓國 外交政策의 試鍊期이기도 한 것이다. [2]

第3共和國 政府는 12月 21日 西獨 에 鑛夫 1陣 123名을 派遣하는 것 [1] 을 始作으로 技術勤勞者 派遣을 통한 일자리 創出 事業을 推進하였다. 이는 1960年 여름, 第2共和國 政府의 代表團(代表: 백영훈 )이 西獨의 經濟部 勞動局長을 만나 3000萬 USD의 借款을 빌리는 條件으로 派遣하는 것이었다. [3] 以後 프랑스 , 獨逸 等地에 鑛夫, 醫師, 看護員이 派遣되었고 西南아시아 에는 建設技術者들이 派遣되었다. 韓國 看護師와 鑛夫들의 숨은 努力으로 1961年 末 獨逸 言論에서는 韓國의 看護師와 鑛夫들을 '살아있는 天使'로 描寫하였다.

韓美 關係 [ 編輯 ]

朴正熙 는 執權 初 美國 으로부터 承認받지 못하였고, 圓滿하지 못한 關係를 形成했다. 軍事 政變 初期부터 共産主義 자 라는 疑惑을 받았고 이 疑惑은 1960年 臺 내내 朴正熙를 國內外에서 괴롭혔다. 1962年 以後 美國 政府의 政變 承認을 얻어내기는 하였지만 美國과의 關係는 友好的이지 못하였다. 美國은 軍事政府가 들어선 뒤에도 朴正熙를 承認하지 않고 政權交替 意志를 分明히 表現하였으나 朴正熙가 第5代 大統領 選擧 에서 大統領에 當選된 뒤인 1964年 , 第3共和國 政府가 베트남 戰爭 을 支援하겠다고 約束하자 美國은 一旦 朴政權을 向後 10年 以上 支持하겠다고 하여 政權交替 醫師를 保留하기도 하였다. [4] 한便 美國 文書에는 워싱턴 의 人士들이 朴正熙를 把握하기 위해 정일권 을 美國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 에서 만났던 內容이 收錄되어 있다. [5]

朴正熙 大統領은 1965年 5月 16日 午後 隨行員들을 帶同하고 린든 존슨 美國 大統領 이 보내준 大統領 專用機를 타고 美國을 訪問하였다. [6] 出發前 金浦空港에서의 人事에서 자주, 自立을 强調하였다. [6] 1965年 5月 17日 韓美頂上會談을 한 뒤 5月 18日 美國 巡訪을 하였다. [6] 1965年 5月 22日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鐵鋼會社를 訪問하여 軍政 時節에 綜合製鐵工場 建設을 試圖하다가 挫折한 그는 工場內部를 돌아보았다. [6] 22日 午前 10時 20分에 피츠버그 空港에서 플로리다 州의 宇宙基地人 케이프 케네디에 到着하여 로켓發射 試驗을 參觀하고 돌아왔다. [6]

1968年 初부터 韓國 政府는 美國의 軍事支援에 繼續 依存함에 對한 限界를 認識하여 自主國防을 强調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駐韓美軍 撤收를 위한 協商要請을 頑强히 拒否한 韓國 政府는 1975年까지는 駐韓美軍 電力이 維持돼야 한다고 主張했으나 닉슨 行政府는 韓國軍 現代化 支援을 條件으로 1971年 6月까지 駐韓美軍 地上軍 1個 師團 兵力 約 2萬名을 撤收시켰고 以後 人權政策을 道德外交의 核心으로 내세운 카터 行政府는 이를 駐韓美軍 撤收와 연계시키면서 朴正熙 政府를 壓迫했다. [7]

베트남 戰爭 으로 加速化된 美國內의 輿論과 1960年代에 世界 到處에서 派生된 變化는 世界構造의 漸進的인 變貌를 惹起시켰다. 이러한 國際的인 權力構造의 變化에 適應하기 위한 美國의 닉슨 독트린 (1969年 7月 25日)은 東北아시아의 安保問題에 對한 見解差를 드러냈다. 美國은 韓國의 反對와 韓國軍의 베트남 派兵 에도 不拘하고 駐韓 美軍 兵力 中 2個 師團을 減縮시키고(1960년대부터 1971年), 非武裝地帶 (DMZ)의 境界 地域에 配置되었던 前方 美軍師團을 後方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一連의 움직임은 韓國으로 하여금 韓國의 安保는 韓國 自體의 힘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同時에 韓國의 對美一邊倒(對美一邊倒) 政策을 再檢討하게 만들었다. [2]

韓日 關係 [ 編輯 ]

韓國과 日本은 1951年부터 1965年 韓日基本條約(또는 韓日協定)李 妥結되기까지 14年間 總 7次例에 걸쳐 會談 을 進行해왔다. 第3共和國 政府는 第1次 經濟開發計劃이 失敗하고나서 經濟開發 을 하는데 支援資金을 充當하려는 目的과 李承晩 政權 時節부터 日本과 外交關係를 다시 再開하라는 美國 의 壓力으로 인하여, 日本 과의 遲遲不進하던 會談을 1961年 겨울부터 다시 推進하였다. 美國은 協商의 進展을 위해 獨島의 共同所有를 提案하기도 하였다.

이에 對하여, 日本 의 謝罪가 없이 韓日外交를 再開하려는 것에 大槪 1965年 野黨에서는 屈辱外交라 主張하였고, 장택상 , 윤보선 , 許政 , 박순천 , 함석헌 等 野黨 指導者들은 屈辱外交 反對라는 名目으로 示威를 하였다. 市內 곳곳에서는 學生, 民間 示威隊와 警察, 軍人 사이에서 激烈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事件은 以後 ' 6.3 學生運動 '으로 불렸다. [8] 이때 政府에선 非常戒嚴令 을 發表後 大學에 休校令이 내려지고, 言論檢閱, 集會禁止, 令狀 없이 逮捕 拘禁 等이 이루어졌다. 한便, 이 事件으로 韓日會談을 推進해오던 공화당 議長 金鍾泌 이 辭任하였다. 野黨과 學生運動圈에서는 日本의 謝罪 없는 韓日協商은 屈辱外交라며 示威를 벌였고, 條約 調印 以後에도 示威가 激化되자 政府는 衛戍令을 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野黨과 國民들의 反撥이 거센 가운데, 한-日 兩國의 國交關係에 關한 條約 이 調印되고(1965년 6月 22日), 批准書가 交換(12月 18日)됨으로써, 韓日 兩國의 政府는 修交를 하였다. 兩國은 또한 "日本에 居住하는 大韓民國 國民의 地位 및 待遇에 關한 協定", "漁業에 關한 協定", "財産과 請求權(請求權)에 關한 問題의 解決과 經濟協力에 關한 協定", "文化財 및 文化協定에 關한 協定"을 締結하였다. 兩國 間의 修交로 兩國의 臺詞가 交叉 任命되고, 日本의 長官級 人士가 韓國을 公式 訪問하였다.

이 條約들로 韓國은 日本으로부터 받은 對日 請求權 資金이 適切했는지 論難이 있어 왔다. 韓日協定 過程에서도 補償金 8億 달러라는 補償金을 놓고도 적은 額數라는 批判이 있었다. 韓日 修交의 條件으로 李承晩 은 20億 달러를 要求했고, 場面 은 28億 5千萬 달러를 要求했다. 필리핀은 14億 달러를 받았다. 한便 北韓은 繼續해서 日本에게 過去事 賠償金을 要求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全혀 合意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9] 그러나 條約을 통해 받은 對日 請求權 資金은 後日 韓國 經濟를 跳躍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只今까지도 慰安婦 및 日帝에 依해 徵兵 或은 徵用당한 사람들에 對한 補償은 適切치 않았다는 主張이 있다. 請求權問題와 같이 漁業問題 , 文化財 返還問題도 韓國側의 지나친 讓步가 國內에서 크게 論難이 되었다. 現在, 日本 側에서는 韓日 協定을 통해 모든 補償을 마쳤다는 公式 立場을 表明 中이다. 이에 對해 慰安婦 被害者들은 現在까지 駐韓 日本 大使館 앞에서 示威를 繼續하고 있다. 한便 日本 外務省이 2013年에 市民團體에 公開한 韓日 國交 正常化 關聯 日本 外交 極祕 文書에 따르면 日本은 韓國에 郵便 貯金과 有價證券, 未支給 賃金, 年金 等 植民地 支配視 法律關係를 前提로 한 돈만 計算한 것으로 드러났다. 强制 動員에 對한 謝罪나 賠償은 計算에 넣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10]

韓中 關係 [ 編輯 ]

第3共和國은 表面的으로는 中華民國 과의 關係를 維持했으나, 中華人民共和國 側의 態度 變化가 感知되기 始作했다. 하지만 中華人民共和國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의 關係를 當時에는 더 重要視 했기 때문에 그러나 政府 次元의 接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시아 및 太平洋과의 關係 [ 編輯 ]

韓國이 아시아·太平洋 帝國과 現實的으로 緊密한 關係를 갖게 된 것은 1960年代 以後 그것도 特히 第3共和國 政府가 들어서고난 뒤부터였다. 當時 韓國은 國際政治의 多元化(多元化)와 中國 周邊에서의 새로운 國際緊張의 造成이라는 情勢變化에 能動的으로 對處하기 위한 '새時代外交의 基本座標'의 하나로, 아시아 反共體制의 强化와 地域內 諸般 協力의 增進을 통해 追求해 나갈 것을 定하였다. 從來 陣營外交(陣營外交)의 테두리 안에서 垂直關係에 있었던 韓國의 外交는 多元的 世界 안에서의 水平關係로 轉換되는 가운데 國家目標를 達成하기 위한 外交基盤을 擴張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 동안 韓國은 베트남 戰爭 派兵 (1964年~1973年), 한·일 國交正常化(1965年) 等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關係를 넓혀나가는 한便 反共 戰線의 構築을 强化하기 위한 東南亞 外交政策을 推進해 왔다. [2]

韓國은 이미 1960年代의 國際 力學構造 變化에 對備하여 1966年 아시아 太平洋 理事會 를 中心으로 地域協力에 努力하였다. 이동원 이 外務部 長官으로 在職하던 時期에 韓國의 先驅的인 外交努力이 結實을 보아 1966年 6月 14日부터 16日까지 서울에서 第1次 閣僚會議를 開催한 結果 創設된 '아시아·太平洋理事會'(ASPAC)는 大韓民國 , 오스트레일리아 , 中華民國 , 日本 , 말레이시아 , 뉴질랜드 , 필리핀 , 타이 , 베트남 共和國 等 9個國을 會員國으로 하고 라오스 , 인도네시아 를 옵저버로 하여 發展하여 왔다. 그 當時 韓國은 이 地域機構가 包括的인 役割을 擔當하도록 意圖하여, 會員國 相互間의 紐帶와 結束을 强化하고, 政治·經濟·社會·文化 等 諸分野에서 協力을 增進함으로써 自由·平和 그리고 새로운 아시아·太平洋 共同社會(共同社會)를 建設할 것을 構想하였다. [11] 따라서 韓國은 이 機構 自體를 地域安全 防衛體制로 誘導하려고 努力했으나 日本·말레이시아·뉴질랜드 기타 會員國의 反對로 文化 및 經濟協力機構로 滿足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이 時期에 大韓民國은 이란 · 요르단 · 이스라엘 · 사우디아라비아 (1962年), 몰디브 (1967年)와 修交하였다. 朴正熙 大統領은 1966年 2月 7日, 말레이시아 를 訪問하여 이스마일 나시루딘(Ismail Nasiruddin of Terengganu) 國王 및 툰쿠 압둘 라만 總理 等과 歡談하였고, [12] 같은 해 10月에는 필리핀 을 韓國 大統領으로서는 처음으로 訪問하였다. [13] :367

韓獨 關係 [ 編輯 ]

공화당 政府는 西歐 帝國과의 友好·親善關係를 維持·强化하는 데 努力하는 한便, 經濟開發 計劃의 成就를 위한 經濟外交를 積極 推進하여 各國과의 資本協力 및 技術協力 關係를 加一層 强化하고 通商關係를 增進시키는 데 努力하였다. 特히 西歐國家 中 獨逸 聯邦共和國과의 關係가 가장 中心이 되었다. 獨逸 聯邦共和國과는 1961年 3月 18日 한·獨 技術援助協定을 締結한 것을 비롯하여, 同年 12月 13日에는 한·獨 借款協定, 1962年 3月 15日 韓·獨 經濟協力議定書, 1963年 2月 14日 한·獨 經濟顧問團 設置에 關한 協定 等이 締結되어 經濟協力 關係가 强化되었다. 1964年 12月 6日에는 獨逸 大統領의 招請을 받아 朴大統領이 獨逸을 公式 訪問하였다. 에르하르트 首相을 面談할 때, 그는 朴正熙의 손을 잡고 韓國에 支援을 約束했다. [14] 이것은 韓國의 國家 元首로서는 最初의 유럽 訪問으로서, 이 訪問을 통한 兩國 頂上會談에서는 한·獨 兩國間에 友好와 協助를 增進시키고, 國土가 分斷된 共同運命體로서의 紐帶意識을 再確認하고, 共同目標의 成就를 위해서 同一步調를 取한다는 데 合意를 보았다. 또한 防毒 中인 12月 7日에는 한·獨 經濟協力協定이 締結되어 1億 5,900萬 마르크 規模의 借款을 供與(供與)받았다. 朴 大統領의 訪問 中, 에르하르트는 '라인江의 奇跡'을 例로 들며 高速道路와 製鐵産業, 自動車産業, 精油産業, 造船産業 等을 할 것과 '韓·日協定'을 맺을 것도 諮問하였다. [15] 1965年에는 MRO次官 1,500萬 마르크, 通信施設의 擴張을 위한 財政借款(財政借款) 1,900萬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獨 實務者 會談을 서울에서 開催하여 兩國經濟關係의 全般을 協議하였다. 1966年에는 효성물산 나일론紗(絲) 工場次官 832萬 마르크와 嶺南火力發電 次官 8,800萬 마르크가 導入되었다. 1967年 3月 2日에는 朴大統領의 招請으로 뤼브케 西獨 大統領 이 訪韓(訪韓), 3月 6日 國土統一을 위한 緊密한 協力, 韓國의 第2次 經濟開發 5個年 計劃에 對한 支援, 獨逸 企業의 對韓投資(對韓投資) 奬勵, 第2嶺南火力 發電所·酪農(酪農) 示範農場·釜山職業學校·괴테會館의 設立 等에 最善의 努力을 傾注할 것 等을 內容으로 하는 共同聲明이 發表되었다. 그 後 1970年 2月 18日에는 한·獨 鑛夫協定, 5月 15日에는 한·獨 文化協定이 締結되고, 이어 다음날 釜山 職業訓鍊所 設置에 關한 協定이 締結되는 等 兩國의 經濟協力關係는 美國 및 日本에 다음가는 密接한 關係를 가지게 되었다. [16]

기타 西유럽과의 關係 [ 編輯 ]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의 經濟協力 關係와 友好關係度 繼續 强化되어, 이탈리아·프랑스와의 漁業協定을 통한 漁船의 導入, 팔당 水力發電을 위한 프랑스와의 借款契約이 1964年 11月에 正式으로 調印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와는 1961年 3月 7日 한·李 特許權 및 商標權(商標權) 相互 保護協定, 1962年 1月 15日 韓·李 經濟協力議定書, 1965年 3月 9日 한·李 貿易協定 等이 締結되었다. 프랑스와도 1961年 2月 1日 한·佛 商標·相互(商號) 登錄에 關한 協定을 비롯하여, 1962年 5月 25日 한·佛 關稅協定 等이 締結되었다. 英國도 經濟協力을 통하여 韓國의 經濟發展에 많은 寄與를 하였으며, 韓國과의 사이에 鐵道信號施設의 導入을 위한 借款契約을 하였다. [16] 그리고, 벨기에 · 그리스 · 네덜란드 · 포르투갈 (1961年), 아이슬란드 · 스위스 · 룩셈부르크 (1962年)과 오스트리아 · 바티칸 時局 (1963年), 몰타 (1965年)와의 修交가 이루어졌다.

베트남 戰爭 派兵 [ 編輯 ]

大韓民國 은 美國의 要請 等에 따라 行해진 大韓民國 最初로 國軍 海外 派兵으로 1964年 에 베트남에 軍隊를 派兵했다. 傳貰가 熾烈해지기 始作한 1965年 부터 휴接協定이 調印된 1973年 까지 派兵하였고 1965年 後方支援部隊 派兵을 始作으로 陸軍 猛虎部隊와 海兵 청룡부대가 派兵되었고, 1966年 에는 '브라운 覺書'의 調印으로 白馬部隊가 追加 派兵되어 베트남參戰 8年間 總 31萬 2,853名의 兵力이 派遣되었다. 外貨獲得 等 많은 經濟的 利益과 戰鬪 經驗을 얻은 反面 그 代價로 수많은 前死傷者와 枯葉劑 被害를 낳았다. 베트남 戰爭 派兵은 韓國 經濟의 活路를 트고 君을 現代化하는 데 寄與하였다는 肯定的인 評價와 함께 베트남 派兵이 國軍의 목숨을 擔保로 한 美國의 傭兵일 뿐이었다는 批判과 함께 베트남에서 恣行한 國軍의 過誤等 批判이 提起되고 있다. [17]

共産圈과의 關係 [ 編輯 ]

共産圈 帝國(諸國)은 韓國의 國際를 否定하는 立場을 取해 왔기 때문에 韓國과 共産國家와의 關係는 完全 斷絶 狀態를 持續해왔다. 1970年代에 들어와 韓國이 北韓을 凌駕하는 經濟力과 國力을 갖게 되면서 多變外交를 共産圈에까지 擴大하려는 政策을 取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實質的인 多變外交의 始發點이 된 것은 非敵性(非敵性) 共産國家와의 通商關係를 許容하겠다는 1971年 봄의 朴正熙 大統領의 發言으로서, 이를 契機로 政府는 對共産圈 關係改善方針을 세우고서 유고슬라비아 와 직접的인 通商關係를 樹立하려고 試圖하였다. 政府는 國交樹立의 基本原則으로 삼고 있던 할슈타인 原則을 全面 廢止한 것으로 1971年 8月 7日 알려졌다. 政府高位 消息通은 "할슈타인 原則은 東西和解를 摸索하고 있는 現 國際 鳥類에서는 非現實的인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미 우리의 外交原則이 아니기 때문에 廢止宣言을 하거나 發表할 性質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政府의 이같은 할슈타인 原則廢止方針은 "우리에 敵對行爲를 取하지 않는 어느 國家와도 修交할 態勢를 갖추고 있다."는 1971年 8月 6日 김종필 國務總理의 國會 發言이 이를 充分히 뒷받침하고 있다. [18] 南北赤十字會談(1972年)의 進展 및 7·4 南北 共同 聲明 (1972年)의 發表는 이러한 政府 方針에 보다 積極性을 띠게 만들었다.

김용식 外務長官이 7月 8日 國會의 對政府 質問에 對한 答辯을 통해 蘇聯·中國·東歐 國家와 通商을 包含한 關係 改善을 希望한다고 發言한 것은 그러한 證據라 할 수 있다. 金鍾泌 國務總理 亦是 7月 18日 國會에 對한 書面答辯에서 中立國과 非敵性 共産國家와의 接近은 政府의 多變安保外交라는 基本方針에 따라서 取하고 있는 措處이며, 段階的으로 交流를 試圖하되 終局에 가서는 外交關係까지 擴大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便, 할슈타인原則을 盲目的으로 固守하지 않고 伸縮性 있게 狀況 變動의 推移에 따라 運用한다는 政府方針을 提示하였다. 特히 김종필 國務總理는 8月 11日 訪美(訪美) 中 『뉴욕 타임스』 記者와의 인터뷰에서 萬一 中國과 蘇聯이 韓國에 敵對的인 政策을 버리고 韓國의 主權을 認定한다면 이들과의 關係도 樹立할 用意가 있다고 말하여, 韓國의 對共産圈 外交街 原則論的인 데서 相對的인 것으로 變化되어 가고 있으며 適性國家의 槪念이 固着的(固着的)인 것에서 伸縮性 있는 槪念으로 變更되고 있음을 明白히 하였다. 要컨대 韓國의 對共産圈 外交方針은 朴正熙 大統領이 1972年 9月 2日에 行한 施政演說에서 밝혔듯이 柔軟性 있고 自主的인 實利外交(實利外交)를 追求한다는 原則下에 이데올로기를 超越하여 非敵性 共産國家와의 通商交流로부터 始作, 漸次 그 接觸의 幅을 넓혀가는 方向으로 나아가고 있다. 韓國政府가 이러한 方針을 取하게 된 것은 國際的인 多元化傾向 속에서 從來의 閉鎖的인 臺共産國 對決政策을 取하기 힘든 狀況이 展開되고 있기 때문에 韓國도 內政不干涉(內政不干涉)·相互主權尊重 原則下에 國家的 實利를 追求하려는 現實主義的 政策을 志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더욱 重要한 것은 南北接觸을 통한 北韓과의 政治·社會·經濟의 比較에서 우리가 絶對的 優位를 占하고 있다는 것이 證明됨으로써 國際的인 問題에 積極的인 態度를 取하면 醉할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自身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南北赤十字會談 第2次 서울本會談 等을 통해서 韓國人의 反共意識이 確固不動하다는 것이 證明됨으로써 共産國家와의 接觸에서 생겨날지도 모를 副作用에 對한 憂慮가 漸次 사라지게 된다는 것 等이 그 原因이 되고 있다. [19]

1972年 8月 訪美 中이던 김종필 總理가 第2次 南北赤十字會談 (1972年 9月 13日, 서울)에 共産圈의 記者 入國을 許容한다고 밝혔고, 이어 非政治的인 經濟交流에서 柔軟性을 나타내기 始作했다. 1970年 12月 改正된 貿易去來法에 따라 對共産圈 交易을 從來의 間接去來에서 直接去來로 전환시키고자 試圖해 왔는데 그 結果 每年 去來額이 增加해 갔다. 뿐만 아니라 交通部 訓令 第386號 1條에 規定되어 있는 外國船舶에 對한 出入港(出入港) 規定 中 北韓·中國·越盟·쿠바 等 敵對國家로 가는 배의 入港禁止 部分 中 쿠바 를 解除했다. 또 韓國 船舶의 共産國 寄港問題와 多國籍 企業 從事者의 共産國家 上陸 問題도 新築政策을 適用토록 했다. [20]

中立國과의 關係 [ 編輯 ]

이 時期는 冷戰의 終結에 따른 平和共存의 흐름이나 아시아·아프리카의 新生國들의 大擧 UN 加入과 더불어 在來의 國際政治 權力構造의 多元化 趨勢를 背景으로 하는 UN과 韓半島 안팎에서 南北韓의 UN同時 招請 論爭과 南北地位의 競爭的인 對決에 汨沒한 時節이다. '두 個의 韓國館'을 누르고 唯一 合法性을 固守하는데 있어 그 많은 第3勢力과의 새로운 關係와 支持票가 緊要해서 伸縮性 있는 臺中立國 接近이 積極的으로 試圖되었다. 大韓民國은 自由友邦과의 善隣增進 및 紐帶强化에 못지 않는 中立國과의 親善紐帶冊을 圖謀함으로써 中立國 軍(群) 속의 支持勢力을 늘여 나갔다. 그러나 이 時期에 와서는 南北韓을 나누어 보는 中立國의 處地에도 相當한 性格이 깃들이기 始作하여 中立的 立場에서 大韓民國만을 支持하는 나라도 있고 그들 中 뒤어어 北韓에도 接近하려는 나라도 있으며, 또한 그런가 하면 처음으로 南北韓을 同時에 對等하게 注目하려는 나라도 있어 對北(對北) 二重接近을 牽制하려는 할슈타인 原則이 適用되기도 했다. 이 時期에 展開된 多角的이고도 能動的인 臺中立國 外交의 主要內容은 첫째 中立國의 承認·外交網의 擴張·親善使節團의 派遣·招請外交의 强化 等을 통한 正常的 外交次元의 摸索, 둘째 中立國과의 通商關係 促進을 통한 實際的인 利害關係의 擴大와 셋째 文化交流 및 技術協力을 통한 相互理解의 增進과 協力提携의 圖謀 等이었다. '두 個의 韓國'에 뜻을 둔 北韓側도 經濟的 文化的인 臺中立國 關係의 擴大와 各 中立國內의 共産勢力과 提携하는 所謂 人民外交를 통해서 反西方的인 連帶形成과 國際的 地位의 向上에 온갖 方便을 動員하였다. 그래서 UN 內外나 中立國 內外에서는 南北韓間의 競爭的인 總力外交가 集約的으로 進行되는 樣相을 엿보이기도 했다. 이 時期는 第3共和國이 誕生하고 中國의 地位가 向上되어가는 1964年 秒를 中間으로 해서 그 前半은 姑息的인 孤立外交街 漸次로 止揚되어가는 時期이고 그 後半은 多角的인 積極外交가 더욱 實質的이고도 競爭的인 方式으로 熾烈하게 展開된 時期이다. [21]

아르헨티나와의 關係 [ 編輯 ]

朴正熙는 아르헨티나 와 外交를 始作했으며 넓은 아르헨티나의 國土를 活用하기 위해 1971年 에 國家豫算을 들여 아르헨티나에 땅을 購入한 뒤 國民들 中 一部를 嚴選하여 大韓民國 政府에서 購買한 아르헨티나 땅으로 보내 農事를 짓도록 했다. [22] 그러나 大韓民國과 아르헨티나의 氣候가 完全히 다른 데다가 아르헨티나 政府로부터 購入한 相當數의 땅이 荒蕪地였으므로 派遣된 大韓民國의 農夫들은 適應을 하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의 各 地域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朴正熙가 購入한 아르헨티나의 땅 中 산 하비에르는 農業에 적합한 땅으로 後날 朴正熙는 산 하비에르에 한해서 아르헨티나로 派遣된 農民들에게 所有權을 移轉시켜줬다. 朴正熙로부터 始作된 아르헨티나와의 外交關係는 現在도 敦篤해지는 趨勢이며 現在 大韓民國과 아르헨티나는 相互 비자免除 協定을 할 程度로 準友邦國이 되어 있다.

國防 [ 編輯 ]

朴正熙 는 執權 初期부터 自主國防 政策을 推進하였다. 朴正熙는 "美軍이 우리의 國防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國民들이 가지고 있는 한 示威에 따른 安保上의 不安에 對해서는 責任있게 判斷하지 않고 함부로 行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自主國防을 하지 못하면 眞正한 獨立國家度, 責任 있는 國民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23] 1962年 5月 5日 海洋警察을 發足하고 1968年 1月에는 機動打擊隊를 創設, 1968年 4月에는 鄕土 豫備軍을 創設하였다. 1965年 4月 3日 超音速 戰鬪機를 導入하였으며, 東海岸 等에 基地를 設置하였다. 1969年 1月 7個 市郡의 高校生과 大學生에 軍事 敎鍊訓鍊 實施를 示範的으로 定하였고, 71年 12月 全國에서 첫 民防空訓鍊을 實施하였다.

敎育 [ 編輯 ]

第1次 義務敎育施設擴充 5個年 計劃(1962年 ~ 1967年), 第2次 義務敎育施設擴充 5個年 計劃(1967年~1971年) 等을 樹立 推進하였다. 1963年 6月 26日 私立學校法을 公布하여 私立學校 運營의 基準을 세웠다. [1]

1968年 國民敎育憲章 을 宣布하였고, 1970年 3月 長期綜合敎育計劃試案을 마련 發表하였다. 이 안에 依하면 1986年까지 義務敎育 擴大를 段階的으로 實施하고, 義務敎育을 9年으로 延長하는 것과, 敎育稅를 新設하는 條項이 包含되었다. [1]

그런가 하면 1964年 1月 4日 市道 單位 敎育自治制를 實施하여 市道 敎育廳에 敎育行政權을 委任하기도 했다. 1968年 7月 15日 71年까지 中學入試試驗을 廢止하는 等 入試改革案을 發表한 反面 10月 14日 大學校 入試 豫備考査制를 1969年부터 實施하게 하였다. [1] 또한 國公立中學校增設 7個年 計劃과 高等學校機關擴充計劃을 推進하였고 1969年 11月에는 工場 勤勞者들을 위한 금성사 等 7個 大企業體에 會社 內에 理工系 實業學校 附設을 指示하였다. [1]

1976年 5月 20日 에는 國費 奬學生을 選拔하여 留學보내는 制度를 新設하였고, 1976年 7月에는 一般 零細 企業體들이 山집海 있는 工團 勤勞者를 위해 夜間中學 開設을 指示하였다. [1]

內閣 構成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記念事業會 .
  2. 글로벌百科 外交 .
  3. 오창규 (2006年 12月 12日).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文化日報. 1960年 여름. [...] 그리고 3000萬달러 借款을 內諾 받는다. 그가 바로 朴正熙 大統領의 獨逸語 通譯官이자 1次 經濟發展 5個年計劃을 立案한 백영훈 敎授다. [...] 次官 擔保안인 鑛夫 5000名과 看護師 2000名 派遣書類였다.  
  4. 강원용 2004 , 1쪽.
  5. 강원용 2004 , 5쪽.
  6. 조갑제 2009 .
  7. 朴正熙 自國中心主義, 美世界戰略과 衝突 - 김대중, 北核問題 놓고 視角差 ‘理念 葛藤’ - munhwa.com
  8. 6.3 事態 의 主動者로 拘束되었던 人物 中에는 高麗大學校 의 總學生會長이자 17代 大統領을 지내게 되는 李明博 等도 있었다.
  9.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609027
  10. 日, 韓日請求權 計算時 徵用 賠償 考慮 안 해 YTN 2013年 2月 20日子
  11.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아스팍을 통한 地域協力
  12. “朴大統領, 말聯國王과 歡談” . 京鄕新聞. 1966年 2月 8日. 이에 앞서 7日下午「이스마일?나시루딘?샤」國王과 王妃, 「라만」首相 等 「말레이지아」政府要人과 僑胞들의 뜨거운 歡迎속에 「콸러룸푸르」에 到着...  
  13. 양승윤, 《필리핀》 韓國外國語大學校出版部(2003)
  14. 오창규 (2006年 12月 12日).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文化日報. 1961年 末.…그리고 그해 12月 朴正熙 大統領은 獨逸 國賓訪問 招請을 받았다. 總理가 된 에르하르트는 朴 大統領의 손을 잡고 支援을 約束했다.  
  15. 오창규 (2006年 12月 12日).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文化日報. 한발 더 나아가 '라인江의 奇跡'을 例로 들며 京釜高速道路와 製鐵産業, 自動車産業, 精油産業, 造船産業 等을 할 것을 注文했다.  
  16.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第3共和國의 對西歐 外交
  17. 김수행, 《朴正熙 體制의 成立과 展開 및 沒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18. “할슈타인原則 廢棄” . 京鄕新聞. 1971年 8月 7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對共産圈 外交方針
  20.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共産國家와의 交流
  21.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第1期
  22. “mk 뉴스 - 海外農業投資 失敗 또 안하려면?” . 2014年 7月 3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3月 12日에 確認함 .  
  23. [朴正熙의 生涯]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9)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參考 文獻 및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