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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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事件 (釜林事件, 英語 : Students’ Espionage Scandal in Busan )은 釜山 학림 事件 이다. '학림 事件'에서 '부림'이라는 名稱을 따왔다. 全斗煥·노태우의 新軍部 政權 初期인 1981年 9月 公安 當局이 社會科學 讀書모임을 하던 學生, 敎師, 會社員 等 22名을 不法書籍 읽기 및 共産主義 革命을 計劃했다는 理由로 起訴한 事件이다. 이 事件은 當時 釜山地檢 公安 責任者로 있던 檢事 崔炳國 이 指揮했고 搜査 檢事는 고영주 였다. 當時 김광일 辯護士와 함께 辯論을 맡았던 盧武鉉 辯護士가 人權辯護士의 길을 걷게 한 契機가 된 事件이다. [1]

事件 槪要 [ 編輯 ]

<中立性> 이 事件 關係者들은 " 令狀 없이 逮捕·拘束되어 對共分室 에서 짧게는 20日부터 길게는 長長 63日 동안 몽둥이 等에 依한 毆打와 '물 拷問', '통닭구이 顧問' 等 殺人的 拷問 을 통해 共産主義者 로 造作됐다. 讀書모임이 反國家團體의 讚揚活動으로 造作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親舊 開業式에 膳物을 들고 찾아간 것도, 忘年會를 한 것이 모두 顯著히 社會不安을 惹起시킬 憂慮가 있는 集會로 規定되어 處罰됐다"라고 主張했다.

當時 이 事件은 國家保安法 이 政權의 安保를 위한 道具로 쓰이는 實相을 赤裸裸하게 드러낸 代表的인 事例로 指目되어 盧武鉉 , 김광일 等이 無料 辯論에 나서기도 했다. 이 事件은 金永三 政府가 들어선 以後 ' 全斗煥 政權 初期 抵抗勢力에 對한 彈壓으로 造作된 事件'이란 政治的 免罪符를 받았으나, 法律的으로는 如前히 國家保安法 違反 事件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釜山地法은 2009 8月 에 被害者들에 對해 集會 및 示威에 關한 法律 違反 嫌疑는 免訴判決을, 戒嚴法 違反 嫌疑에 對해 無罪를 宣告했다. 또 2014年 2月 13日 國家保安法 違反에 對해서도 裁判部가 無罪를 宣告하였다. [2] [3]

被害者들의 陳述 [ 編輯 ]

《釜山民主運動史》에서 밝힌 當時 事件 被害者들의 現在의 陳述은 다음과 같다. [4]

  • 金 某 氏(33·商業) - 부림사건은 20餘名이 關聯된 釜山地域 最大의 國家保安法 組織事件으로 令狀없이 不法拘禁과 拷問 等으로 完璧하게 造作된 事件이다. 事件의 搜査責任者가 國民의 代表機關인 國會에서 일하는 것은 不適切 하다고 判斷해 總選 連帶에 落薦名單에 包含시켜달라는 意見書를 提出했다.
  • 安 某 氏(26·農協勤務) - 對共分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拷問을 當했다. 當時 崔炳國 檢事가 對共分室로 찾아와 搜査를 指揮하는 것을 直接 目擊했다. 當時 檢査가 關聯者들에게 3年에서 10年의 重刑을 求刑한 것으로 보면 事件 造作에 直接的인 責任이 있다. 當時 時代 狀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最小限 反省과 容恕를 求하는 것이 道理가 아닌가.
  • 崔 某 氏(當時 被害者 崔 某 氏 配偶者) - 當時 男便이 事件을 끝까지 否認하자 崔炳國 檢査는 "事件을 認定한다는 反省文을 쓰면 當身 男便만 빼주겠다"라고 懷柔했지만 뿌리쳤던 經驗이 있다. 崔 檢事가 事件 造作의 責任者이다.
  • 고 某 氏(26·敎師) - 關聯者들 中에는 裁判을 받기 위해 法院에 가서야 처음 相見禮를 한 사람들까지 있을 程度로 서로 거의 關係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警察은 우리 모두 그들의 脚本 속에 끼워 넣어 하나의 事件으로 만들어 냈다. 當時 몇 名이 茶房에 앉아 얘기 나눈 것까지 '反國家團體 鼓舞·讚揚'으로 몰아붙여 懲役 10年에서 3年까지 重刑을 求刑했다.

法院의 裁判 [ 編輯 ]

釜山大 校內 示威 主導 및 부림사건 關聯하여 3次 起訴者로 國家保安法違反, 執匙法違反, 戒嚴法違反으로 懲役10年이 求刑되었던 이호철 에 對해 釜山地法 第3刑事單獨 서석구 判事는 "政府施策을 批判했다고 하여 이를 擴大解釋하여 國家保安法 으로 다룰 수 없다"는 理由로 國家保安法違反에 對해 無罪로 보고 그外 法律違反만 認定하여 懲役1年을 宣告하고 이호철을 隱匿하고 逃走를 도와주었으며 集會 等에 參加한 釜山工大 3學年 정귀순에게 懲役8月 執行猶豫2年, 감前國民學校 敎師인 설경혜에 對해서는 설경혜의 오빠가 拘束돼 있고 確固한 信念으로 犯罪를 저지른 것이 아니고 感傷的이었다는 點을 認定하여 宣告猶豫하였다.

眞相糾明 [ 編輯 ]

釜山 地域 最大 公安 事件인 '부림사건'의 再審 請求人 5名에게 33年 만에 無罪 確定 判決이 내려졌다. 2014年 2月 13日 大法院 2部(主審 김창석 大法官)는 부림 事件의 有罪 判決에 對해 再審을 請求한 고호석 等 5名에게 無罪를 宣告한 原審을 確定했다.

지난 1981年 公安 當局이 社會科學 모임에 參與한 學生, 敎師, 會社員 等 22名을 令狀 없이 逮捕해 不法 監禁 및 拷問한 代表的 公安事件으로서 이들은 國家保安法 違反 等 嫌疑로 拘束됐으며 1982年 6月 고 某 氏 等 5名은 懲役 1年 6月 ~ 6年을 宣告받았다. 再審 請求를 審理한 釜山地法은 "被告人들이 搜査機關에 自白을 했으나 陳述書가 相當 期間 經過된 뒤에 作成된 點, 不法拘禁 期間이 오래돼 證據能力이 없고 被告人들의 行爲가 國家의 存立과 安全을 威脅했다고 볼 수 없다"며 國家保安法·戒嚴法 違反 嫌疑에 對해 無罪로 判決했다. 다만 執匙法 違反 嫌疑에 對해서는 이 事件 判決 以後 法이 改正되면서 犯罪로 볼 수 없게 됐다며 面所 判決했다. 그렇지만 2月 當時에는 많은 國民的 關心을 얻지 못해 아쉬움을 산 적이 있다.

부림 事件 判事 [ 編輯 ]

부림 事件의 無罪 判決 判事는 서석구 判事(現在는 辯護士로 活動)였다. 서석구 辯護士는 부림사건 1審 裁判長으로 國保法 無罪 判決 내렸던 張本人이었는데, 當時 破格的인 判決로 注目을 받았었다. 以後 運動圈 辯護를 맡아 運動圈 辯護士로 活動하던 서석구 辯護士는 1990年代 中盤부터 運動圈과 訣別하여 現在 韓美友好增進協議會 韓國本部 代表, 大韓民國守護 天主敎人모임 常任 代表 等 保守團體에서 活潑히 活動하고 있다. 5.18 北韓浸透說을 池萬元과 함께 主張하고 또한 5.18 光州民主化運動 의 記錄物이 유네스코 에 登錄되려고 하자 池萬元 과 함께 유네스코에 抗議하여 論難을 빚은 바 있다.

各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