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 (195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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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 1958年 7月 28日 ~ 1991年 5月 6日 )는 大韓民國 의 勞動運動家이다. 1981年 大韓造船公社 에 入社하여 한진중공업 에서 10年間 勤務하며 한진중공업 勞組委員, 1990年 7月 한진중공업 勞組委員長, 9月 에는 勞動組合總聯合 釜山市支部 副委員長으로 選出되었고, 전노협 의 任員으로도 活動하였다. 1991年 大宇造船 勞組 示威에 參與했다가 拘束, 收監 途中 安企部 搜査官들에게 여러番 拷問當하였다. 1991年 5月 4日 故人은 疑問의 傷處를 입고 安養病院에 入院했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이틀 뒤 死亡했다. [1] 박창수의 死因은 拷問致死인지 安企部 職員에 依한 暗殺인지 正確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1958年 부산직할시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979年 釜山機械工高 를 卒業하고 工場 勞動者가 되었다가, 1981年 大韓造船公社 (現, HJ重工業)에 配管工으로 入社하였다. 以後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勤務하였다.

勞動運動 [ 編輯 ]

1987年 부터 한진중공업 내 勞動組合 活動 始作, 以後 3年 間 勞組, 會計監査로 選任되었으며, 1990年 7月 한진중공업 勞組委員長 選出 時, 93%의 壓倒的인 贊成으로 勞動組合 委員長 當選되었다. 그해 9月 勞動組合總聯合 釜山地域支部 副委員長으로 選出되었다. 以後 安企部 의 尾行, 內査를 當하기도 했다. 安企部 전노협 脫退 工作에도 全國勞動者의 連帶鬪爭을 이끄는 指導者로 活動하며 勞動示威 等을 主導하였다. 1991年 2月 大宇造船鬪爭支援連帶會議에 參席했다는 理由로 拘束, 서울구치소에 收監되고 한진중공업 에서도 解任되었다.

當時 安企部는 전노협(全國勞動者協議會)을 脫退하라고 烈士를 脅迫했다고 한다. [2] 이때 그는 安企部 脅迫에 "전노협이 나고 내가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脫退할 수 있단 말이냐"며 끝까지 抵抗했다고 傳한다. [2] 拘束될 當時 朴 烈士는 釜山 大韓造船公社(現 汗疹 重工業) 勞組 委員長이었다. [2]

拷問과 最後 [ 編輯 ]

1991年 2月 그는 安企部 로 移監되어 調査받았다. 그에게 安企部 의 特別補佐官(次官級) 崔O喜 等이 直接 拷問을 加했지만 그는 전노협 脫退를 拒否했고, 拷問은 繼續되었다.

5月 4日 監獄에서 전노협 脫退 勸告에 맞서다 부상당하고 京畿道 安養市 安養病院 에 入院되었다. 그가 入院한 뒤 正體不明의 젊은 男子들이 病室을 訪問하였다 한다. 5月 6日 4時 45分頃 安企部의 전노협 脫退 工作에 抵抗하다가 拷問致死당하였다. 當時 그의 나이 33歲였다.

事後 [ 編輯 ]

박창수가 갑자기 죽자 市中에는 拷問 致死 疑惑이 提起되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死亡하자 警察은 屍身을 奪取하기 위해 5月 7日 屍身이 安置된 安養病院에 白骨團과 前景 22個 中隊를 投入했다. 警察은 催淚彈을 퍼부으며 靈安室 壁을 부수고 들어와 그의 주검을 빼앗아갔다. [2] 警察은 强制로 剖檢을 實施한 뒤, 朴 烈士가 18미터 높이 病室에서 뛰어내려 '自殺'했다고 發表했다. [2] 以後 安企部 에서 拷問致死 事實을 隱蔽하기 위해 自殺로 僞裝했다는 疑惑이 提起되었다. 그해 6月 30日 梁山郡 솥발산 墓域에 安葬되었다.

論難과 疑惑 [ 編輯 ]

病院에 正體不明의 男子 出現 論難 [ 編輯 ]

1991年 5月 6日 새벽 4時 45分께 安養病院 마당에서 박창수는 屍身으로 發見되었다. [2] 그런데 그가 病院에 入院해 있을 5月 5日 ~ 5月 6日 正體不明의 젊은 男子들이 病院에 出入했다는 疑惑이 提起되었다. 그리고 그는 屍身으로 發見되었다. 安企部 要員이 矯導官 눈을 避해 朴 烈士를 데리고 나간 뒤 몇 時間 만에 일어난 일 이었다. [2]

그 當時 박창수는 서울拘置所 에 收監 中이었다. [2] 그러나 拷問 後遺症으로 安養病院 에 入院해 있는 狀態였다. 拘置所 內에서 고 강경대 烈士 他殺事件에 抗議하는 斷食鬪爭을 하던 中 原因 모를 負傷을 當해 安養病院에 入院해 있던 中이었다. [2]

自殺 僞裝 論難 [ 編輯 ]

金屬勞組 는 以後에도 박창수가 갑자기 죽었다며 他殺 疑惑을 여러番 提起한 바 있다. 金屬勞組 支部·支會는 2日 낸 資料를 통해 "安企部는 拘束된 박창수 烈士뿐만 아니라 勞動組合 幹部에게도 接近하여 '전노협을 脫退하면 박창수 委員長을 풀어 줄 수 있다'며 갖은 工作을 다했다"면서 "그러나 박창수 烈士는 '내가 전노협이다'며 國家 權力期間의 脅迫을 斷乎視 拒否하였다"고 說明했다. [1]

이들은 "박창수 委員長은 收監 中이던 安養矯導所에서 5月 4日 疑問의 傷處를 입고 安養病院에 入院하였고, 6日 死亡한 채 病院 마당에서 發見되었다"면서 "當時 政府는 悲觀 自殺이라고 發表했지만, 自殺할 사람이 링겔甁을 7層 屋上까지 가지고 간 것과 病院 全體의 窓門과 屋上으로 통하는 門은 病院 側에서 墜落을 防止하기 위해 쇠窓살과 열쇠로 잠근 狀態를 볼 때 到底히 自殺이라고 볼 수 없었다"고 說明했다. [1]

金屬勞組에 依하면 拷問致死가 아니라 安企部 職員이 病院에 入院中인 박창수를 殺害하고 自殺로 僞裝했을지 모른다는 疑惑을 提起하였다. 그 理由로 5月 6日 正體不明의 젊은 男子가 박창수가 入院한 安養病院 의 應急室 病棟에 나타난 點을 例로 들었다. 이들은 "病院에 入院하고 있을 當時 安企部 要員이 繼續的으로 接觸을 가졌고, 疑問死 當日 저녁에 身元 未詳의 젊은 怪靑年이 病室을 訪問한 事實과, 安企部 職員이 電話를 통해 繼續的으로 박창수 同志와 通話를 付託해온 點 等을 미루어 볼 때 전노협 脫退를 慫慂해 오던 安企部에 依해 殺害된 것이 분명했다"라고 덧붙였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參照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