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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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李泳禧
作家 情報
出生 1929年 12月 2日 ( 1929-12-02 )
日帝强占期 平安北道 雲山郡 북진면
死亡 2010年 12月 5日 ( 2010-12-05 ) (81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中浪區 面牧洞 녹색병원
國籍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 日本語 , 英語 , 中國語
職業 言論人, 大學 敎授, 社會運動家
學歷 京城公立工業學校
國立海洋大學校 航海學과 學事
1952年 陸軍步兵學校 卒業
1953年 陸軍工兵學校 卒業
1956年 國防大學校 行政學社 1期
1961年 美國 노스웨스턴 大學校 大學院 言論學 碩士
宗敎 없음( 無神論 )
筆名 號(號)는 향사(鄕史)
닉네임 思想의 恩師
活動期間 1950年 ~ 2010年
장르 著述
父母 리근國(簿), 최희저(某)
配偶者 윤영자
子女 이건일 (아들) , 이미정(딸), 이건석(아들), 이경록 이경서 이경민(孫子), 오지혜 오지우 이소연 이민서(孫女)
署名

이영희 (李泳禧, 1929年 12月 2日 ~ 2010年 12月 5日 )는 大韓民國 言論人 · 敎授 · 社會運動家 이다.

履歷 [ 編輯 ]

平安北道 雲山 북진면에서 出生하였으며, 本貫은 平昌 . 國立海洋大學校(現 한국해양대학교) 를 나온 그는 慶尙北道 安東公立中學校 에서 英語敎師로 勤務 中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1950年 陸軍 甲從事官 隸下 國軍 通譯將校로 自願 入隊하여 陸軍 所謂 任官하였고 陸軍 少領 階級에 이를 때까지 服務하였다. 1957年 1月 28日 을 期하여, 大韓民國 陸軍 少領 豫編 後 言論人으로 活動하면서 1957年 에서 1964年 까지 合同通信 外信部 記者, 1964年 에서 1971年 까지 朝鮮日報 合同通信 外信部長을 各各 連任했다.

1960年 美國 노스웨스턴 大學校 大學院 新聞學科에서 碩士課程 硏修 修了하였고, 1972年 以後 한양대학교 文理大學 敎授 兼 中國問題硏究所 硏究敎授로 在職하였다. 한양대학교 敎授로 在職 中 朴正熙 政權 에 依해 1976年 解職되어 1980年 3月 復職됐으나, 그 해 여름 全斗煥 政權 에 依해 다시 解職되었다가 1984年 에 復職, 軍事政權 期間동안 4番 解職, 5次例 拘束을 當했다. 1987年 美國 캘리포니아 大學校 버클리 의 正式 副敎授로 招聘되어 '平和와 葛藤' 特別講座를 講義하였고, 1995年 한양대학교 敎授職에서 停年退任하였다. 2000年代 後半부터 肝硬化 로 鬪病, 2010年 12月 5日 死亡하였다. [1]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리영희가 태어난 平安北道 雲山郡

리영희는 1929年 12月 2日 平安北道 雲山郡 북진면에서 出生하여 다섯 살 되는 해에 朔州郡 으로 移徙하여 외남면 대관동에서 成長하였다. [2] 아버지 리근國(李根國)은 영림서 (營林署) 職員이었고 어머니 최희저(崔晞姐)는 地主의 딸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平安北道 雲山이나 朔州는 中央政府에서 멀리 떨어진 邊方이라 늘 疏外되어 있었는데, 金鑛이 있는 地域이라 舊韓末부터 日帝 强占期까지 外勢의 收奪에 시달려야만 했다. [2] 리영희는 5歲부터 14歲까지 10年 동안 朔州에 살았는데, 그에게 있어 朔州郡 대관동은 마음의 故鄕이었다. 幼稚園 2年을 마치고 小學校 에 進學하였을 當時 中日戰爭 이 始作되어, 敎科 過程은 展示(戰時) 色彩가 짙어지고 中國 戰線에 나가 있는 日本軍에게 慰問便紙를 쓰는 일이 잦아졌다. 當時 어린 리영희는 別 생각 없이 日本語 를 國語로 알고 學校 工夫에 熱中하였고, 創氏改名 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3]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1944年 , 小學校를 卒業한 리영희는 新義州師範學校(新義州 師範學校)와 京城公立工業學校 (京城公立工業學校) 두 군데 모두 合格하였는데, 아버지와 6學年 擔任 日本人 敎師가 내린 決定에 따라 京城公立工業學校 電氣科에 進學하였다. 리영희의 서울 留學生活은 고달팠다. 日帝 末期여서 食糧은 配給制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고, 滿洲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 깻묵 이나 강냉이 粥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4] 學業은 3學年을 끝으로 一切 中斷되고 4學年부터는 戰時動員體制 에 따라 勞動에 動員되었다. 學費와 下宿費를 합친 서울 生活費가 한달에 40원假量 들었는데, 아버지의 月給은 고작 90원 程度여서 故鄕집에서는 늘 리영희의 柳學費 때문에 힘겨워했고, 리영희 自身은 父母가 그리 어렵게 마련하여 보내준 學費를 내고 工夫는커녕 勞動에 動員되는 日常이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5]

母校 京城公立工業學校 (現 서울工業高等學校)

靑年期 [ 編輯 ]

光復 後 [ 編輯 ]

날마다 되풀이되는 勤勞動員과 배고픔으로 窒息할 것 같은 狀況을 脫皮하고자 父母에게 故鄕에 가게 해달라는 便紙를 보냈는데 ‘父親 危篤’이라는 電報가 왔고, 擔任 敎師의 歸省 許可를 받아 1945年 8月 10日 故鄕집으로 돌아갔다. 當時 家族이 있던 平安北道 昌城郡 청산면은 깊은 山골마을이라 리영희는 8月 16日 에야 日帝의 敗亡과 朝鮮의 獨立 消息을 듣게 되었다. [6]

여기는 對官보다 훨씬 山골이어서 住民들은 從前 消息을 全혀 몰랐어요. 그런데 16日 아침부터 마을 끝에 있는 警察官 駐在所에서 巡査들이 부리나케 들락날락하고, 뭔가 불태우는 煙氣가 피어오르기 始作한 거요. 그제야 住民들은 무슨 큰일이나 난 것을 直感하고 派出所로 몰려갔어. 그제야 日本이 敗亡하고 解放이 됐다는 것을 알았어요. [7]

當時 17歲였던 리영희는 3年餘 동안 서울 留學을 하면서 精神的으로 많이 成長하고, 時代狀況을 어느 程度 把握하고 있었지만 日帝가 그렇게 빨리 敗亡할 줄은 몰랐었다. 新聞이나 放送의 報道, 著名人士들의 講演이 마치 日本이 戰爭에서 乘勝長驅하는 것처럼 하였던 理由에서였다. 故鄕에 머물던 리영희는 날마다 小學校 校庭에서 열리는 解放 祝賀모임에 參席하였고, 當時의 리영희는 民族解放이나 獨立國家 建設이라는 것보다는 굶주리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고, 勤勞動員이 아닌 工夫하는 學校로 돌아갈 수 있다는 希望에 부풀어 있었다. [8]

學校들이 다시 門을 연다는 消息을 듣고 光復이 되던 해 11月 다시 上京하였다. 光復이 되고 美軍政 體制 가 樹立되면서 學校가 美國式으로 編制되어 6年制가 된 高等學校 5學年에 編入하였고, 解放政局에서 리영희는 社會가 돌아가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서 憤怒의 挫折을 겪었다. 親日勢力이 淸算되기는커녕 더욱 得勢하면서 解放 뒤 政治地形이 바뀌게 되고 獨裁·獨占體制가 이루어진 것에 리영희는 두고두고 憤怒와 慨歎을 삭이지 못했다. [9]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1946年 봄 다시 故鄕으로 내려갔다. 故鄕에서 리영희는 中學校 學生모임을 만들어 새로운 時代의 使命과 役割 等에 關한 討論과 集會를 열었고, 한글 夜學을 始作하여 루소 의 《에밀》, 존 스튜어트 밀 의 《自由論》 等을 읽었다. 리영희의 아버지는 日帝 强占期의 公務員이었음에도 不拘하고, 쫓겨나지 않았는데 이는 새로 생긴 人民委員會로부터 그 分野의 行政院 및 技術者 養成을 委囑받고 現職에 머물도록 措處된 것이었다. 이는 리영희의 아버지가 平素 住民들로부터 좋은 評判을 받았던 理由에서였다. [10]

海洋大學校 在學 時節 [ 編輯 ]

美軍政에 줄을 댄 親日派, 機會主義者가 날뛰는 社會에서 아무런 緣故도 없는 18歲의 리영희가 맨손으로 살아가기에 서울은 殺伐했다. 그러던 中 1946年 學費가 免除되고 宿食을 비롯한 經費 一切를 國家에서 負擔하다는 國立海洋大學 (現 한국해양대학교) 創設 新入生 募集公告를 보게 되었고, 이에 應試하여 같은 해 7月 入學하였다. 마음먹은 工夫를 더하고 싶었지만 登錄金 마련은 고사하고 하루 生活하기도 힘겨운 터에 찬밥 더운밥 가릴 處地가 아니었다. [11]

信託 統治 反對 運動

海洋大學에 몸담고 있는 동안 解放政局은 信託統治 問題로 더욱 어수선해졌다. 當時 群山 에서 學校生活을 하던 리영희는 信託 統治 反對 運動 에서 反託 運動에 나서면서 大衆演說을 하기도 했으나, 學生 身分인 關係로 찬·반탁 鬪爭이나 情勢의 흐름에 깊이 關心을 가질 餘裕가 없었다. [12]

그러던 中, 學校로부터 釜山 에서 石炭을 싣고 仁川 으로 運搬하라는 命令을 받고 이를 施行 中에 釜山에서 重武裝한 國軍 1個 大隊를 싣고 麗水港으로 航海했는데, 배가 新市街地 쪽으로 接近 하자 陸地로부터 銃擊을 받았다. 이른바 麗水·順天 事件 을 偶然히 겪게 된 것이다. [12]

敎職 生活 [ 編輯 ]

1950年 3月 國立海洋大學 을 卒業하여 앞길을 窮理하던 中 親舊 父親이 校長으로 있는 慶尙北道 安東郡 所在 安東公立中學校 英語敎師로 就職하였다. [13]

國軍 將校 生活 [ 編輯 ]

韓國 戰爭과 通譯將校 入隊 [ 編輯 ]

韓國 戰爭 이 일어나자 리영희가 在職하던 學校도 門을 닫았고, 家族과 함께 安東 을 떠나 大邱 에 到着하여 敎育區廳에 들렸을 때 ‘유엔軍 連絡將校團 募集’ 公告文을 보고 特히 英語敎師를 優待한다는 內容에 망설임 없이 連絡將校 募集에 應했다. 韓國 戰爭 으로 한 瞬間에 英語敎師에서 陸軍 將校候補生이 된 리영희는 國軍의 反擊으로 戰線이 北上하는 中 任官되어 步兵 第11師團 第9聯隊에 配屬되었다. 리영희가 屬한 第11師團은 智異山 討伐作戰에 投入되었는데 1950年 늦가을까지 俗離山 一帶의 人民軍 敗殘兵 掃蕩作戰을 벌였다. [14]

召集된 國民防衛軍

1951年 1月 , 國民防衛軍 事件 發生 當時 國軍 通譯將校로 지내면서 이 事件을 直接 接하고 目擊하면서 國軍 首腦部 大多數가 日本軍 이나 滿洲軍 出身들로 構成되어 있는 것에 憤慨해왔던 터라 憤怒와 憎惡의 感情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한낱 通譯將校의 處地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後날 리영희는 “李承晩政權과 支配的 人間들, 그 體制 理念의 赤裸裸한 證據였다”고 回顧하였다. [15] 리영희가 지켜본 國軍의 行態는 아무리 急造된 部隊이고 戰時體制라고 해도 不淨腐敗와 人命 輕視, 暴力, 兵務行政의 亂脈相, 勢力家 子弟들의 前方에서 後方 專屬 等 總體的 非理였다.

그 當時 徹底하게 腐敗했던 우리 軍隊에서 指揮官級 將校면, 그것이 尉官이든 領官이든 國家가 規定한 月給 以外에 不正行爲로써 經濟生活이 可能했지요. 簡單한 例로 自己 部隊 補給品人 쌀을 兵士들에게 支給하지 않고 橫領하여 着服하는 일이 흔히 있었어, 내가 勤務했던 陸軍 印刷工創意 커다란 倉庫에는 印刷用 종이가 가득 차 있었어. 公娼 所屬 參謀將校들은 이 종이를 내다 팔아서 生活하고 술 마시고 흥청댔어요. [16]

以後 같은 해 2月 居昌 良民 虐殺 事件 이 自身이 屬한 部隊가 恣行했다는 事實을 알게되면서 戰爭에 對한 懷疑感과 國軍 高位幹部들의 不淨腐敗에 憤怒를 가지게 되어 第1共和國 政府 體制에 對하여 剛한 嫌惡感을 느꼈다고 回顧하였다.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人間抹殺의 犯罪가 ‘共匪’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正當化 될 수 있는가 하는 疑問이 그 後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狂信(狂信) 思想과 휴머니즘에 對한 蔑視를 깨쳐야겠다는 强烈한 使命感 같은 것을 느낀 契機가 되었다. [17]

居昌 良民 虐殺 事件 은 國內·外에 큰 波紋을 불러왔다. 國內 言論은 徹底히 統制되어 報道가 되지 않았지만 外信에 大大的으로 暴露되었다. [18]

戰爭 後 將校 生活 [ 編輯 ]

1953年 7月 27日 休戰 協定으로 戰鬪는 멈췄다. 戰爭이 끝나면서 將校들은 大體로 3~4年이면 除隊하였지만, 通譯將校와 法務將校·醫務將校·通信將校는 特殊 分野의 資格을 갖춘 將校가 모자란 關係로 3年 半을 더 服務해야 했다. 後方으로 轉入하기 前 제11단장에게서 功勞은성勳章을 받았지만, 當時의 不實한 兵士管理로 인하여 軍 經歷部에서 漏落되었다. 適性에 맞지 않은 軍 生活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義務 服務 期間을 채워야하는 關係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中에 1955年 坡平 尹氏(坡平尹氏) 윤영자와 結婚하였다. [19]

言論人 活動 [ 編輯 ]

7年 間의 軍 生活을 보내고 除隊를 앞둔 1957年 偶然히 집 化粧室에서 新聞 밑바닥의 言論社 記者募集 廣告를 보고는 通譯將校를 하며 닦아온 英語 實力을 基盤으로 合同通信社 採用試驗에 合格하였는데, 當時 應試生 273名 中 5名을 採用하는데 리영희는 꼴찌로 合格하였고 合格者 앞 4名 모두 서울大學校 大學院 政治學科 出身이었다. [20] 合同通信에서 첫 發令 部署는 外信部였는데 이는 英語 는 勿論 프랑스語 에도 能한 까닭이었다. 外信部에서의 그의 主要 關心事는 베트남 의 民族解放 鬪爭, 中國 共産黨 의 革命 戰爭, 아프리카 가나 의 社會主義 指導者 은크루마 의 反白人 植民地鬪爭,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쿠바 革命鬪爭 等의 帝國·植民主義 國家들이 支配하는 舊秩序에 對抗하는 各 大陸 人民의 現象打破 運動이었다. [21]

李承晩 政權 時節 [ 編輯 ]

李承晩 政權 1956年 情·副統領 選擧에서 조봉암 의 躍進에 威脅을 느끼고 이를 除去하고자 進步的인 月刊誌 《 中央政治 》 11月號를 發賣禁止하고, 曺奉巖 等 進步黨 幹部들을 檢擧하는 等 이와 함께 言論人들에 對한 懷柔와 彈壓 工作을 恣行하면서 權力과 癒着한 腐敗 言論人과 氣魄을 喪失한 記者를 크게 늘게 하였다. 이 當時 《合同通信》의 記者들은 大部分 깨어 있는 言論人들이었고, 리영희度 이 같은 會社 雰圍氣를 타고 記者의 程度(正道)를 걸었다. 그러다보니 얼마 안되는 記者 月給에 늘 生活이 窮乏하고 쪼들렸는데, 서울에서도 가장 月貰가 싼 邊두리인 東大門區 제기동 미나리밭 기운데에 두 칸 傳貰집을 얻어 어렵게 살았다. 그러던 中 아이가 아파 病院費를 마련하기 위하여 救한 副業이 國軍聯合參謀部 에서 ‘一日 國際情勢 分析報告’를 作成하는 일이었다. [22]

내 生活이 말할 수 없이 어려웠어요. 只今은 한국외국어대學科 경희대학교가 들어서고 번듯한 住宅街가 되었지만, 내가 이문동으로 移徙 갔을 때에는 집도 드문드문 있었고, 只今의 慶熙大學校 뒤에 山이 그대로 있을 때였어. 내가 새로 얻은 房 두個에는 부엌이 따로 없어서, 새벽 4時에 出勤해야 하는 男便을 위해 新婚의 아내가 그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서 아침밥을 짓느라 말할 수 없는 苦生을 했어요. 이런 가난 속에서 父母 모시고 妻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아파 病院에 入院했는데 不幸하게도 끝내 살지 못했어. 이런 貧困이다보니까 病院費를 대기 위해서, 그때까지 副業으로 하던 飜譯 일에 보태어 또 하나 半固定的인 副業을 하게 된 거지. 그것이 國軍聯合參謀部에서 ‘一日 國際情勢 分析報告’를 作成하는 것이었어. [23]

日帝의 民族 抹殺 政策 이 絶頂이던 時節 學窓時節을 보내고, 光復 後에도 글쓰기에 關한 正規 敎育을 한 番도 받아보지 못했으며, 1950年代 의 7年間은 通譯將校 노릇을 하느라 母國語와 떨어져 있었던 리영희가 猝地에 記者가 되어 記事를 쓰려니 한 番도 써보지 않은 한글 文章이 제대로 나올 理가 없었다. 이에 그는 나이 30歲가 다 되어 初等學校와 中·高等學校 國語 敎科書를 購入하여 남몰래 獨學하여 맞춤法과 글쓰는 法을 익혔다. [24]

李承晩 政權 의 暴惡相을 지켜보면서 그저 通信社 外信部 일이나 熱心히 하며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던 리영희는 國內 言論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外信을 통해 敢行하는 길을 摸索했는데 그러던 中 찾은 길이 美國 의 《 워싱턴 포스트 》( The Washington Post )에 寄稿하는 것이었다. [25] 1959年 부터 1961年 까지 '서울通信員'이라는 匿名으로 活動하였는데 리영희는 美國 에 原稿를 보낼 때 任期를 마치고 美國으로 돌아가는 美軍 將校들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 美國에 갈 때 이를 付託하면서, 美國에 到着하면 郵遞筒에 넣어달라며 美國 郵票를 붙였다. 4·19 革命 으로 李承晩 政權 이 무너진 後부터 《워싱턴 포스트》에는 그의 實名으로 칼럼이 오르게 되었다. 1959年 ‘풀브라이트 奬學計劃’의 一員으로 選拔되어 풀브라이트 奬學生으로 美國으로 건너가, 노스웨스턴 大學校 에서 新文學 硏修를 받았다. [26]

4·19 革命 時期 [ 編輯 ]

4·19 革命

美國 硏修를 마치고 歸國한 리영희는 政權 交替를 希望하였으나, 조병옥 의 突然한 死亡과 3·15 不正選擧 를 지켜보았고, 4·19 革命 이 勃發하자 펜을 놓고 서슴없이 示威隊列에 加擔하였다. [27]

나는 4.19 前後의 事件들을 남의 일처럼 傍觀하거나 無關心하게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1960年 4月, 李承晩 政權이 鄭·副統領 選擧 不正投票 組織에 抗議하는 抗議데모가 全國에서 일어나고 戒嚴令이 發動됐어요. 4月 12日인가? 編輯局에서 記事를 作成하고 있는데, 을지로네거리를 지나가는 데모대의 喊聲소리가 들려왔어. 合同通信 社屋이 바로 거기였으니까, 나는 펜대를 놓고 뛰어나갔지. (中略) 그렇게 난 4.19의 現場 속에서 살았어요. [28]

리영희의 革命 參與는 連日 繼續되었다. 4月 19日 光化門 에서 景武臺 로 突進할 때도 그 속에 끼었는데, 記者로서 取材를 하려는 目的이 아니라 그 自身이 學生들의 反獨裁鬪爭 熱氣에 一體化되어 있었다. 낮에는 示威에 參與하고 밤에는 學生들의 示威와 韓國의 實情을 알리는 評論을 作成하여 《워싱턴 포스트》에 보냈고, 이에 《워싱턴 포스트》가 特派員을 보내자 리영희는 그와 同行하여 取材를 도왔다. [29]

4·19 革命 이 民衆의 勝利로 기울기 始作하자, 4月 25日 全國 27個 大學 敎授 258名이 時局宣言을 發表하고 示威를 하였는데, 이에 對해 리영희는 批判的이었다. 敎授들이 李承晩 이 이미 失權한 事實을 알고서야 뒤늦게 나섰고, 學生들이 차려놓은 밥床에 뒤늦게 슬쩍 숟가락만 얹어놓았다고 생각했던 理由에서였다. [30]

5·16 軍士政變 時期 [ 編輯 ]

5·16 軍士政變 當時 朴正熙

1961年 5月 16日 朴正熙 를 비롯한 叛亂軍이 쿠데타 를 일으켜 場面 內閣 을 전복시켰다. 이에 5·16 軍士政變 은 言論人으로서의 리영희에게는 靑天霹靂이고 가시밭길의 始作이었다. “改革과 肅正의 對象이어야 할 軍隊가 무엇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다니, 言語道斷입니다. 쿠데타라니? 到底히 正當化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서 軍隊의 政權 奪取에 反對해야 합니다.”라며 外信部 記者들 앞에서 이런 發言을 하며 言論社 檢閱과 監視를 위해 찾아온 쿠데타 軍人들을 門前에서 쫓아버리기도 하였고, [31] 5.16 軍事政變 에 反對하는 글을 美國 의 《뉴 퍼블릭》에 寄稿하였다. 朴正熙 는 政權掌握이 確固해지자 訪美(訪美) 길에 올랐다. 리영희는 이를 두고 “政權을 세운 朴正熙가 마치 옛날 王朝時代에 世子冊封이나 王位繼承의 允許를 얻고 朝貢을 바치기 위해서 上典의 나라 中國을 찾아가는 꼴로, 케네디 美國 大統領을 謁見하기 爲해서”라고 指摘했다. [32] 그런데 運命의 女神은 짓궂은 것인지 리영희는 朴正熙의 訪美 取材 記者로 指名되었다. 軍政 當局은 《合同通信》 編輯局長에게 李承晩 政權과 민주당 政權에서 不正·腐敗·墮落에 連累되지 않은 記者를 選定해 보내라고 했는데 이에 리영희를 指名했던 것이었다. 美國 에 건너간 記者들은 朴正熙 · 케네디 會談을 軍事·經濟援助와 함께 朴正熙를 韓國의 權力者로 公式 承認한 것처럼 大大的으로 報道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짓 記事였고, 이에 對한 實體를 알고싶던 리영희는 寄稿를 통하여 사귀게 된 《 워싱턴 포스트 》의 主筆과 編輯局長의 도움으로 케네디가 한 發言을 昭詳하게 알게 되었다. 特種記事였던 것이다. [33]

케네디는 朴正熙에게 早速한 時日 內에 공정한 選擧를 통한 民政으로 移讓할 것, 民政移讓에 앞서는 軍의 政治 關與 禁止와 原隊復歸, 그때까지 모든 經濟援助의 執行 延期, 軍事援助의 暫定的 凍結, 朴正熙가 第1次 經濟計劃으로 要求한 工業化 計劃 自願 23億 달러 要求의 白紙化, 早速한 한·日會談 再開를 통하여 短時日 內의 韓日 國交正常化 實現, 베트남事態에 對한 南韓의 協力 等을 要求한 거예요. 그 中에서도 早速한 民政移讓, 君의 原隊復歸, 그리고 가장 重要한 條件은 韓日會談 再開를 통한 早速한 한·日 國交正常化 實現이었어요. [34]

歸國 後, 朴正熙는 景武臺 에서 軍 實力者들과 訪美外交 成功 祝賀파티를 巨創하게 열었는데, 다른 遂行記者들은 다 招請하면서 리영희만 除外하였고, 當時 歪曲된 記事를 썼던 記者들은 그 뒤 國會議員, 副總理, 國會議長으로 出世街道를 달렸다. [35] 리영희가 이러한 眞實된 記事를 쓰고도 無事할 수 있었던 것은 記事 內容이 美國과 關聯되었기 때문이었다. 美國 政府에 命줄을 대고 있는 軍事政權이 리영희를 拘束했다가는 오히려 波長을 불러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36]

朴正熙 政權 時節 [ 編輯 ]

리영희는 29歲 때인 1957年 부터 1963年 까지 外信 記者 生活을 하였고, [37] 1963年 여름 부터 政治部로 옮겨 中央廳 外務部 를 出入하였다. 1961年 大韓民國은 洪水로 인하여 食糧이 바닥나고 民心이 洶洶해 있었으나, 美國 政府는 議會에서 통과시킨 臺(對)韓國 食糧 援助를 해가 바뀌도록 執行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狀況에 理由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리영희는 駐韓 美國大使館 問情官 그레고리 핸더슨과의 面談에서 特種을 건지게 되는데, ‘朴正熙가 케네디와 約束한 民政移讓을 지키지 않아서 美國 政府가 食糧 援助 執行을 保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사화하여 朴正熙 政權은 勿論이고 케네디 政府도 큰 衝擊을 받게 되었다. [38]

1964年 10月 리영희는 《 朝鮮日報 》 外信部로 職場을 옮겼다.

敎授 生活 [ 編輯 ]

한양대학교

리영희는 1972年 1月 한양대학교 新聞放送學科 助敎授로 敎壇에 섰다. 新聞社 在職 時節 2年 동안 漢陽大學校 新聞放送學科에 出講한 적이 있었는데, 腸龍(張龍) 敎授가 停年退任하면서 그를 推薦한 것이다. 敎授로 在職하면서 오히려 言論社의 갇힌 領域을 벗어남으로써 보다 넓고 자유로운 空間에서 活動할 수 있게 되었다. 《轉換時代의 論理》에 실린 大部分의 評論이 敎授時節 쓴 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앞으로 國際情勢에 큰 變數가 될 中國 問題 硏究에 沒頭하는 한便 國際 앰네스티 韓國支部 結成에 參與하여 人權運動에 나섰다. 그가 1960年代 베트남 硏究에 專念했다면, 1970年代 에는 中國 問題에 보다 많은 關心과 硏究를 集中했다. [39]

1987年 에는 美國 캘리포니아 버클리 大學 에서 交換敎授로 韓國史를 講義하였다. 以後 한겨레新聞 의 理事 및 論說委員으로 일했다. 1989年에는 한겨레新聞 의 訪北取材를 企劃했다는 理由로 다시 國家保安法에 依해 服役하였으나, 特赦로 赦免復權에 되어 釋放되었다.

末年 [ 編輯 ]

1995年 한양대학교 를 停年退任 할 當時 20年의 敎授 生活에도 두 次例의 强制解職 때문에 退職年金을 처음에는 받지 못하였으나, 以後 學校側의 配慮로 年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丹齋(丹齋) 신채호 (申采浩)를 기리는 ‘丹齋學術賞’을 받았다. [40] 그리고 國民의 政府 時節 ‘ 햇볕政策 ’으로 南·北 間 和解協力 雰圍氣가 감돌면서 1998年 11月 10日 꿈에도 그리던 故鄕 訪問에 나섰다. [41] 北韓 에서 歸還한 그 해 11月 《스핑크스의 코》를 出刊하였다. [42]

獨裁政權과 싸우다가 拷問을 當하거나 獄苦를 치른 民主人士들은 大部分 老後에 몇 가지씩 疾病을 앓는데, 리영희의 境遇 40餘 年 동안 硏究와 執筆에 정신의 津을 빼고, 아홉 番의 連行, 다섯 番의 起訴 또는 起訴猶豫 , 總 1012日 동안의 懲役살이를 하느라 肉身이 많이 傷했다. [43] 72歲가 되던 2000年 리영희는 ‘萬海賞’을 受賞하였는데, [44] 그 기쁨도 暫時 11月 16日 腦出血 로 쓰러졌다. 氣管支炎이 있고 心臟 까지 좋지 않아 2002年 겨울 에는 泰國 으로 療養을 가기도 했다. [45] 執拗한 努力으로 健康을 꽤 回復한 리영희는 2005年 文學評論家 임헌영 과의 對話 形式으로 自敍傳인 《對話》를 펴냈다. [46] 《對話》는 많은 媒體와 機關으로부터 올해의 冊으로 選定되었다. [47] [48]

2006年 한국기자협회로부터 ‘記者의 魂 賞’을 受賞하였고, [49] 2007年 한겨레 》가 制定한 ‘한겨레 統一文學賞’을 授與받았으며, 2008年 에는 金大中 前 大統領의 業績을 기리고 5·18 정신의 學術的 繼承을 위해 2007年 전남대학교 에서 制定한 ‘金大中 學術賞’을 받았다. [50] 뒤늦게 賞福이 터진 것이다. [51] 2009年 7月 李明博 政府 의 統治行態와 關聯하여 “지난 1年 半 동안 李明博 統治時代는 非人間的, 物質主義的, 反人權的 파시즘 時代의 初期에 들어섰다” [52] 고 警告했던 리영희는 言論社 인터뷰에서 더욱 날을 세워 李明博 의 獨走와 反民主 行態를 攻駁했다.

李承晩 政府 以後, 過去 民族利益을 배반하고 支配的 外勢에 忠誠을 다했던 勢力과 個人이 旣得權과 生存權을 保存하려는 本能的인 鬪爭, 自己防禦의 方法으로 ‘反共’이란 걸 擇했단 말이지. 제 利益에 符合하지 않으면 容共으로 몰아서 어떤 人間的 價値도 拒否했어요. 拒否할 뿐 아니라 抹殺할 相對로 봐왔고, 내가 只今이 파쇼의 初期 段階라고 한 것도 그런 勢力이 社會를 支配해나갈 때를 말하는 거예요. 거기에다 좀 더 知能的이고 現代的인 方法論을 갖춘 政治勢力이 登場했지. 過去 전두환 時代까지는 暴力的인 方法으로 이룩하려고 한 것을 只今 이 政權과 그 政權을 擁護·支持하는 勢力은 아주 뛰어난 現代的 技術科學·社會科學的 頭腦를 갖고 좀 더 부드럽고 보기 좋게 겉치레하고 있어요. 露骨的인 暴力이 아니라 그 暴力의 外貌를 온갖 現代的인 單語로 겉치레하는 것이지. [53]

死亡과 事後 [ 編輯 ]

리영희의 墓 ( 國立 5·18 民主 墓地 )

2010年 3月 病患으로 다시 쓰러진 리영희는 肝硬化 增稅에, 腎臟 機能마저 弱해져 復讐가 차는 症狀이 나타났고, [54] [55] 結局 2010年 12月 5日 0時 30分 頃, 肝硬化 가 惡化되어 死亡하였다. 享年 82歲였다. 殯所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病院에 마련되었고, [1] 葬禮는 民主社會張으로 치러졌으며, 國立 5·18 民主 墓地 에 安葬되었다. [56]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社會批評家이자 社會民主主義를 土臺로 한 社會運動家, 言論人이었던 리영희는 1970~80年代 運動圈 大學生과 進步勢力 사이에서 ‘思想의 恩師’였다. [57] 大韓民國 에서 ‘實踐하는 知性’,‘進步勢力의 巨木’으로 불리며 言論人으로서 大韓民國 民主化 運動에 많은 寄與를 했다는 評價를 받았으며, [58] 康俊晩 은 ‘리영희는 左右(左右) 理念을 뛰어넘는 韓國 社會의 所重한 知的 資産’이라고 評했다. [59] 柳時敏 은 自身의 著書인 《靑春의 讀書》에서 知識人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對하여 리영희가 眞實, 眞理, 끝없는 省察, 그리고 認識과 삶을 一致시키려는 信念과 志操, 眞理를 위해 苦難을 甘受하는 容器와 더불어 산다고 말하며, 리영희 先生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60] 反共을 第1의 國是로 삼던 時節 禁忌視 되던 김산이나 中國 革命 그리고 베트남 戰爭等을 探求했고, 이것이 運動圈에게 큰 影響을 주었다는 點에서 肯定的인 評價를 내리기도 한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한便 李寧熙의 否定的인 面으로는 다음 事項들을 이야기 한다. 이영희가《8억인과의 對話》에서 中國의 文化大革命 을 지나치게 美化하였다고 批判하는 同時에, 그의 著書가 오히려 '北韓猛과 市場猛'이라는 致命的인 誤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居昌 良民虐殺은 非難 하면서도 前後 毛澤東 政府의 文化大革命에서의 肅淸 犧牲者에 對한 言及을 回避한다는 批判을 받기도 한다. [61]

賞勳 [ 編輯 ]

學歷 [ 編輯 ]

著書 [ 編輯 ]

  • 《8億人과의 對話》. 창작과비평사. 1977年 10月 1日. ISBN 2006335000027.
  • 《分斷을 넘어서》. 한길사. 1984年 10月 1日. ISBN   8935656925 .
  • 《10億人의 나라》. 두레. 1985年 1月 1日. ISBN 2001792000016.
  • 《베트남戰爭》. 두레. 1985年 7月 1日. ISBN 2001792000351.
  • 《逆說의 辨證》. 한길사. 1987年 3月 1日. ISBN   8935656933 .
  • 《逆情(나의 靑年時代)》. 한길사. 1988年 3月 1日. ISBN   8935656941 .
  • 《反核:核危機의 構造와 韓半島》. 創批(창작과비평사). 1988年 8月 1日. ISBN   8936410865 .
  • 《西大門刑務所》. 열화당. 1988年 10月 1日. ISBN   8930105238 .
  • 《偶像과 理性》. 한길사. 1990年 8月 1日. ISBN   8935656909 .
  • 《自由人 自由인》. 한길사. 1990年 9月 1日. ISBN   893565695X .
  • 《人間萬事 塞翁之馬》. 범우사. 1991年 7月 1日. ISBN   8908061010 .
  • 《국가선진화를위한 改革課題 20》. 길벗. 1994年 2月 6日. ISBN   8975605035 .
  • 《知識人의 世界》. 東녘. 1998年 3月 20日. ISBN   8972973890 .
  • 《스핑크스의 코》. 까치. 1998年 11月 5日. ISBN   8972912123 .
  • 《轉換時代의 論理》. 創作과 批評史. 1999年 1月 20日. ISBN   8936410040 .
  • 《半世紀의 神話 (休戰線 南·北에는 天使도 惡魔도 없다)》. 삼인. 1999年 1月 31日. ISBN   8987519287 .
  • 《洞窟 속의 獨白》. 羅南. 2000年 1月 31日. ISBN   893003750X .
  • 《새는 左右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001年 12月 17日. ISBN   8935656968 .
  • 《對話》. 한길사. 2005年 3月 10日. ISBN   8935655546 .
  • 《21世紀 아침의 思索》. 한길사. 2006年 8月 30日. ISBN   893565700X .
  • 《80年代 國際情勢와 韓半島》. 한길사. 2006年 8月 30日. ISBN   8935656917 .
  • 《21世紀 첫 十年의 韓國(우리時代 希望을 찾는 7人의 發言錄)》. 撤收와영희. 2008年 5月 10日. ISBN   9788995833889 .
  • 《希望》. 한길사. 2011年 1月 14日. ISBN   9788935661732 .

各州 [ 編輯 ]

  1. ' 實踐하는 知性人' 리영희, 持病 肝硬化로 他界‥哀悼물결” . 서울新聞. 2010年 12月 5日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49쪽. ISBN   978-89-93854-26-8 .  
  3.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62쪽. ISBN   978-89-93854-26-8 .  
  4.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68~69쪽. ISBN   978-89-93854-26-8 .  
  5.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70~71쪽. ISBN   978-89-93854-26-8 .  
  6.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75쪽. ISBN   978-89-93854-26-8 .  
  7.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67쪽. ISBN   8935655546 .  
  8.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77쪽. ISBN   978-89-93854-26-8 .  
  9.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81쪽. ISBN   8935655546 .  
  10.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78쪽. ISBN   978-89-93854-26-8 .  
  11.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85쪽. ISBN   978-89-93854-26-8 .  
  12.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88쪽. ISBN   978-89-93854-26-8 .  
  13.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92쪽. ISBN   978-89-93854-26-8 .  
  14.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97~98쪽. ISBN   978-89-93854-26-8 .  
  15. “國民防衛軍 事件 職權調査” . 京鄕新聞. 2010年 12月 5日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16.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158쪽. ISBN   8935655546 .  
  17.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分斷을 넘어서》. 한길사. 274~275쪽. ISBN   8935656925 .  
  18.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02쪽. ISBN   978-89-93854-26-8 .  
  19.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04~112쪽. ISBN   978-89-93854-26-8 .  
  20.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20쪽. ISBN   978-89-93854-26-8 .  
  21.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24~125쪽. ISBN   978-89-93854-26-8 .  
  22.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28쪽. ISBN   978-89-93854-26-8 .  
  23.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196쪽. ISBN   8935655546 .  
  24.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31~132쪽. ISBN   978-89-93854-26-8 .  
  25.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34쪽. ISBN   978-89-93854-26-8 .  
  26.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38쪽. ISBN   978-89-93854-26-8 .  
  27.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50쪽. ISBN   978-89-93854-26-8 .  
  28.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249~250쪽. ISBN   8935655546 .  
  29.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50~154쪽. ISBN   978-89-93854-26-8 .  
  30.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58쪽. ISBN   978-89-93854-26-8 .  
  31.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76~178쪽. ISBN   978-89-93854-26-8 .  
  32. 리영희 (2005年 3月 10日). 《對話》. 한길사. 275쪽. ISBN   8935655546 .  
  33.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84~187쪽. ISBN   978-89-93854-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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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86쪽. ISBN   978-89-93854-26-8 .  
  36.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87쪽. ISBN   978-89-93854-26-8 .  
  37.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93쪽. ISBN   978-89-93854-26-8 .  
  38.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194~196쪽. ISBN   978-89-93854-26-8 .  
  39.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262~266쪽. ISBN   978-89-93854-26-8 .  
  40.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485쪽. ISBN   978-89-93854-26-8 .  
  41.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503쪽. ISBN   978-89-93854-26-8 .  
  42.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506쪽. ISBN   978-89-93854-26-8 .  
  43.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517~518쪽. ISBN   978-89-93854-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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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김삼웅 (2010年 12月 10日). 《리영희 評傳》. 冊保稅. 552쪽. ISBN   978-89-93854-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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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趙顯娥 記者 (2010年 12月 5日). “리영희 先生 ‘民主社會腸’ 치른다…광주 5·18 國立墓地 安葬” . 한겨레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57. 한윤정 記者 (2010年 12月 5日). “리영희, ‘偶像’을 깨고 떠나다” . 京鄕新聞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58. 김민지 記者 (2010年 12月 5日). “他界 리영희는 누구? 進步勢力의 代父, 實踐하는 知性” . 示唆서울. 2011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59. 한승동 記者 (2006年 11月 15日). “(康俊晩 寄稿) 리영희 批判에 되묻는다” . 한겨레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60. 柳時敏 (2009年 10月 27日). 《靑春의 讀書》. 熊進知識하우스. ISBN   9788901101569 .  
  61. 정진수 記者 (2006年 11月 9日). " 리영희가 우리 社會 市場猛·北韓猛 만들어 " . 한겨레 . 2012年 3月 4日에 確認함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