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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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事件
大韓民國의 勞動運動 의 一部
날짜 1979年 8月 9日 ~ 11日
地域 서울特別市 麻浦區 新民黨 黨舍
原因 YH貿易 廢業에 對한 抗議
種類 籠城
結果 警察의 籠城 場所 解散
示威 當事者
YH貿易 勞動者
新民黨
主要 人物
參與 人員
1~2千名
死傷者
1名( 김경숙 )

YH 事件 은 假髮輸出業體인 YH 貿易의 女性 生産職 勞動者들이 會社廢業措置에 抗議하여 野黨인 新民黨 黨舍에서 籠城 示威를 벌인 事件이다. 1979年 8月 9日 부터 8月 11日 사이에 벌어졌으며 警察 이 强制 解散하는 過程에서 勞動者( 김경숙 ) 1名이 墜落死하였다. 이 死亡 事件에 對해 警察은 投身 自殺로 造作했으나 <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의 調査 結果 警察의 强制 鎭壓 過程에서 墜落死한 것으로 밝혀졌다. [1] 이 事件은 後에 김영삼 議員 除名 波動 , 駙馬民衆抗爭 , 10·26 事態 로 이어지는 朴正熙 政權 終末의 導火線이 되었다.

發端 [ 編輯 ]

1970年代 初 輸出 順位 15位로 大韓民國 最大의 假髮 輸出業體였던 <YH 貿易>은 1970年代 中盤부터 輸出 鈍化, 業主의 資金 流用, 無理한 企業 擴張 等으로 深刻한 經營難에 빠져들어 1979年 3月 廢業을 公告했다. <YH 貿易>의 社長 장용호는 會社의 財産을 整理하고 美國으로 떠났다. 1975年 設立되어 積極的인 活動을 展開해 온 勞動組合은 이에 會社 正常化 方案을 採擇, <YH 貿易>을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方面으로 努力하였으나, 會社側과 政府 當局이 始終 無誠意한 態度를 보이자 4月 13日 부터 長期 籠城에 들어갔다.

신민당과 金永三 [ 編輯 ]

勞動者 172名은 8月 9日부터 都市産業宣敎會 의 斡旋으로 社會的 波及效果가 큰 서울特別市 麻浦區 新民黨 黨舍에서 籠城을 敢行했다. 黨 總裁 金永三 은 이들을 慰勞하면서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黨舍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勞動者들을 안심시켰다.

8月 9日 부터 8月 10日 까지 김영삼과 新民黨 議員들은 新民黨 黨舍 周邊을 巡察하며 警察 情報課, 保安課에서 나온 刑事들을 發見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로 차고 따귀를 치며 警告를 하였다. 8月 11日 새벽 警察 新民黨 에 最後通牒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市警 警務局長이 黨舍에 電話를 걸어 總裁를 바꾸라고 黨職者에게 要求했지만 金永三 은 건방지다며 電話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作戰指揮에 나선 麻布警察署 情報課長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女工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

이에 警察은 신민당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治安상의 理由를 들어 8月 11日 새벽 2時頃 1千-2千餘名을 投入, 20餘分 만에 强制解散시켰다. 新民黨 議員, 黨職者들이 몸싸움을 벌였지만 力不足이었고 YH貿易 勞動者들은 모두 强制連行되었다. 警察은 連行過程에서 建物屋上에 올라간 勞動者들 中 김경숙 (當時 21歲)李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으나 墜落하여 死亡했다고 造作 發表했고 金永三 警察 에 依해 上島洞 집으로 强制로 끌려나갔다. 女性 勞動者 10餘名, 신민당員 30餘名, 取材記者 12名이 負傷을 입었다. 新民黨 김경숙 의 墜落死가 强制解散 途中에 發生했다고 主張하였으나, 警察 은 ' 警察 新民黨 進入과 無關하다'고 發表하였다.

後暴風 [ 編輯 ]

8月 17日 警察은 이 事件과 關聯하여 主動者로서 이 會社 勞組幹部를 拘束하였으며, 背後操縱者로 都市産業宣敎會 所屬 인명진 (印明鎭) 牧師 等 7名도 拘束하였다. 이 事件은 1970年代 의 一帶 女性 勞動者들의 勞動運動으로서, 事件 直後 野黨 및 여러 民主化運動 勢力이 共同前線을 形成, 反維新鬪爭에 나서는 契機가 되어 10·26 事態 의 導火線이 되었다.

社長 [ 編輯 ]

<YH 貿易>의 社長 장용호는 제4대 中央情報部長 김형욱 科 親舊였고 이 事件 以後 美國으로 떠나, 뉴욕韓人會腸을 歷任하였다. 自身의 이름을 딴 <YH 貿易>은 日當을 220원 支拂하였는데 이는 커피 한 盞 값에 該當했다 [2] . 김영삼이 大統領이 된 時期에는 뉴욕韓人會長으로서 靑瓦臺에서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는 靑瓦臺에서 김영삼이 自身을 不淨腐敗의 張本人이라 한 點에 對하여 抗議하였고, 김영삼이 그에 對해 謝過하였다고 主張하였다. 그는 事件 以後에도 美國에 大型빌딩을 包含하여 적어도 3個 以上의 不動産을 保有하고 있었다. 言論 報道에 따르면 그가 美國으로 빼돌린 金額은 當時 돈으로 15億 원으로 推定된다 [3] . 육영수 와 親分이 있었고, 子女들은 하버드와 스탠포드 出身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1. 진주원. (김경숙 烈士 37周忌)“社長이 어린 女工들을 버렸습니다” . 女性新聞. 2016年 8月 11日.
  2. 커밍스, 브루스. 《브루스 커밍스의 韓國近現代史》. 創批出版社. 536쪽.  
  3. “YH事件 장용호 社長- 김영삼 大統領 만나” . 《조선닷컴》. 2014年 1月 13日 . 2015年 10月 1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