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國敎職員勞動組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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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國敎職員勞動組合
全國敎職員勞動組合
標語 民族 民主 人間化 敎育
設立 1989年 5月 28日
前身 民主敎育推進 全國敎師協議會
組合員 5萬餘名 (2015年)
國家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委員長 전희영
加盟組織 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
本部位置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京畿大로 82, 4層, 6層 (忠正路驛街, 鑛山빌딩)
http://www.eduhope.net

全國敎職員勞動組合 (全國敎職員勞動組合, 略稱 全敎組 )은 1989年 5月 28日 創立된 誘致, 初等, 中等 敎員을 構成員으로 하고 全國 17個 支部로 이루어진 大韓民國 의 全國 單位 單一 敎師 勞動組合 이다. 1987年 出帆한 全國敎師協議會 를 母體로 하여 1989年 5月 28日 創立되었다.

1989年부터 전교협이 敎員勞組建設을 推進하였는데, 當時 大統領 盧泰愚 는 對國民 談話로 敎員의 勞組結成은 不法임을 宣言하고 彈壓하였다.정부의 彈壓과 妨害에도 結局 전교조가 結成되었다. 以後 大韓民國 政府는 敎育公務員과 私立敎員의 勞動組合 結成을 不法으로 보고 加入 組合員 1490名을 解職하였다.

1993年 1419名(71名은 未申請)李 復職을 申請하여 1305名이 任用됐으며 任用豫定者가 23名, 任用除外者가 91名이다. 復職申請者 中에서 敎育委員, 基礎 및 廣域議員으로 活動 中인 11名, 訴訟 關聯 8名, 遊學이나 身柄, 手配 및 起訴中止 等의 事由로 面談을 延期한 4名 等 任用豫定者 23名은 該當事由가 消滅되었을 때 全員 復職했다. 復職申請者中 任用이 除外된 敎師는 91名으로 面接不應 35名 硏修不應 18名 전교조活動繼續 17名 國家保安法 및 一般刑事法違反等 法廷缺格事由 4名 面談過程中 전교조活動 意思表示 14名 面接內容確認拒否 2名 死亡 1名이다. [1]

解職者 復職은 되었으나 合法化는 되지 않은 狀況에서 1999年 1月 6日 敎員의 勞動組合 設立 및 運營 等에 關한 法律 이 國會를 通過하면서 合法化되었다. 2013年 10月 24日에 組合 側이 解職者를 組合員으로 認定하는 規約을 고치라는 是正命令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雇傭勞動部는 24日 전교조에 '法外勞組'를 通報하였고, 2016年 1月 21日 全國敎職員勞動組合(全敎組)李 雇傭勞動部를 相對로 낸 ‘法外勞組 通報 處分’取消 訴訟에서 서울高法 行政7部(裁判長 황병하 部長判事)가 全敎組 敗訴 判決을 함에 따라 전교조는 法外勞組가 되었다.

그러나 2020年 9月 3日 大法院은 "法外勞組 通報 條項이 담긴 施行令은 勞動3卷을 本質的으로 侵害했기 無效"라며 破棄還送 判決을 냈으며, 다음 날인 9月 4日 勞動部가 전교조에 對한 法外勞組 通報를 取消하면서 法的 地位가 回復되었다. [2]

設立 背景 [ 編輯 ]

敎師 勞組 結成 움직임 [ 編輯 ]

1960年 3月 15日 3.15 不正選擧에 對한 敎授와 中等學校 敎師들의 糾彈 集會 中 敎職員의 理解를 代辯할 集團의 必要性이 提起되었다. 1960年 4月 29日 大邱 의 여러 中等學校 代表 約 60名이 中等敎員勞組를 結成한 것을 筆頭로 國民學校 敎員들의 勞組도 結成되어 나가다가 5月 22日 에는 서울 에서 全國의 敎員 들의 勞組 도 結成되어 나가다가 5月 22日에는 서울에서 全國의 敎員 代表 200餘 名이 參席한 가운데 '全國敎員勞組聯盟'(全國敎員勞組聯盟)李 組織되었다. 새로 組織된 이 聯盟은 從來의 '대한교련'(大韓敎聯)을 卽時 解體하고 聯盟을 唯一한 全國敎員組織으로 政府가 公式的으로 承認해줄 것을 要求했다. [3] [4] 敎員勞組가 全國的인 規模로 擴散되어 나가자 許政 過渡政府는 至極히 批判的인 立場을 取하였다. [4]

許政 은 " 敎育公務員 은 法에 依하여 一般 公務員 과 같은 資格을 가지며 公務員 政治 에 干與할 수 없고 敎育者(公務員)는 一般勞動者와는 區別되므로 各自가 스스로의 待接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敎員勞組의 不當性을 指摘했다. [4] [5] 그는 또한 "다른 一般公務員보다는 敎育者들의 生活保障面이 優先되어 있고 社會的으로 스승의 待接을 받고 있는데 鬪爭에 依해서만 그들이 權益을 擁護하려는 方法에는 納得이 가지 않는다"라는 論理를 폈다. [4] [5]

許政 1948年 에도 公務員 勞動組合 結成을 强力 反對한 바 있다. 1949年 에는 交通部長官 許政 과 社會部長官 전진한 사이에 公務員 勞動組合 加入 問題로 是非가 벌어졌다. [6] 그는 公務員 의 勞動組合 加入 主張을 一蹴했다. 허정은 公務員이 勞動組合에 加入할 必要가 없다고 했고, 전진한 은 公務員도 加入해야 된다는 主張으로 맞섰다. (장택상에 依하면) '이 때문에 連續으로 3日間 國務會議가 벌어졌는데, 하루는 전진한 이 怒發大發해 가지고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自退해 버렸다. 周圍 사람들이 그렇게 挽留했건만 結局 전진한은 長官職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 [6] '는 것이다. 전진한 은 公務員도 一種의 勞動者로 看做했으나, 許政 公務員 은 國家의 公僕이므로 勞動者가 될 수 없다고 一蹴했다.

第2共和國 出帆 直後 1961年 1月 國務總理 場面 은 公務員 및 敎師 勞動組合 設立 推進運動을 不法으로 規定하고 關聯者들을 파면, 解任시켰다. 以後 軍事 政權 出帆 以後 敎職員 勞動組合 推進은 公務員 勞組 推進과 함께 不法으로 看做되었다.

敎育民主化運動 [ 編輯 ]

敎育界 內에서의 獨裁에 對한 反撥은 이미 朴正熙 政權 末期에서부터 있었고, 1980年代에는 一線 敎師들에 依해 民主的인 敎育을 위한 運動이 있어왔다. 全斗煥 政權은 1985年 이른바 民衆敎育誌 事件 을 造作하여 政府에 批判的인 敎師를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彈壓하였다. 그러나 敎師들의 敎育民主化運動은 繼續되었다. 1986年 5月 10日 YMCA 中等敎育者協會가 第1回 敎師의 날을 開催한 자리에서 全國에서 600餘 名의 一線 敎師가 署名한 敎育民主化宣言門이 發表되었다. 이일로 數十名의 敎師가 拘束되었다. [7]

1987年 · · 高等學校 의 平敎師들이 民族, 民主, 人間化 敎育을 理念으로 하는 참敎育의 實踐을 위해 全國敎師協議會 를 構成하였다. 전교협은 創立 1年 만에 全國 平敎師의 10%에 達하는 3萬名의 會員이 加入하였다. [8] 韓國敎總 의 前身인 대한교련은 一線 敎師들의 참敎育 實踐을 "學生들을 理念化 시킨다"고 非難하였다. [ 出處 必要 ]

敎員의 勞動權 [ 編輯 ]

전교조의 嚆矢는 4·19 革命 直後인 1960年 5月 22日 結成된 韓國敎員勞動組合이다. 敎員勞組는 平敎師의 勞動權 保障과 御用인 대한교련의 解體를 主張하며 大大的인 脫退運動을 벌였다. 그 結果 8萬2千名 線이던 大寒老鍊의 會員數는 5萬餘名으로 줄고 敎員勞組의 組合員數는 4萬名에 達했다. 그러나 5·16 軍士 政變 으로 執權한 朴正熙 는 敎員勞組를 强制 解散하였다. 以後 第3共和國 은 敎員과 公務員의 勞動組合 結成을 禁止하였고 [9] 이는 1990年代 末까지 이어졌다. 5·16 以後 唯一한 合法的인 敎員團體가 된 대한교련은 最小限의 名分과 實利에 安住하는 官邊團體라는 批判을 받았다. [10]

1987年 國會는 "6級以下의 公務員은 勞動組合에 加入하거나 이를 組織할 수 있고 團體交涉을 할 수 있다"는 內容을 骨子로 하는 勞動組合法 改正案을 통과시켰다. 이는 勞動組合을 準備하고 있던 전교협이 合法的인 勞動組合을 結成할 수 있는 法的 根據를 마련하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當時 盧泰愚 大統領은 이 法案에 對한 拒否權 을 行使하였다. 전교협은 이를 非民主的인 決定으로 糾彈하며 勞動組合 結成을 强行하기로 決意하였고 政府와의 衝突이 不可避하게 되었다. [11]

創立 [ 編輯 ]

歷代 獨裁政權은 自身을 合理化하고 維持하기 위하여 敎育을 惡用하여 왔다. 그 結果 우리의 敎育은 學生들을 共同體的인 삶을 實踐하는 主體的인 人間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利己的이고 順應的인 人間으로 만듦으로써 民族과 歷史앞에서 제 구실을 잃어 버렸다. 苛酷한 入試競爭敎育에 찌들은 學生들은 길 잃은 어린 羊처럼 헤매고 있으며, 學父母는 出世志向的인 敎育으로 인해 自己 子女만을 생각하는 偏狹한 家族利己主義를 强要 받았다.
 
— 創立宣言文 中에서, 1989年 5月 28日 [12]

以後 오종렬 等을 中心으로 敎員勞組 組織運動이 推進되었다.

創立과 懲戒 [ 編輯 ]

1989年 5月 22日 盧泰愚 大統領의 執權 期間 全敎組는 延世大學校 에서 創立大會를 열었다. 이때 學校는 이미 戰鬪警察 에 依해 封鎖되어 있었으며 創立式 直後 暴力的인 鎭壓으로 많은 參加者들이 다쳤다. 이날 參加하였던 敎師들은 全員 警察에 連行되었다. [13] 5月 22日 저녁 盧泰愚 大統領 은 對國民 談話를 통해 敎師 勞組는 不法이라 闡明하고 解散 및 團束을 闡明하였다.

1989年 7月 3日 전교조가 創立된 以後 脫退를 勸誘하던 敎育部 의 前身인 當時 문교부 (長官 정원식 )는 전교조 組合員의 解職을 決定하였다. 문교부는 이날 會議에서 初中等敎師 6,165名과 大學敎授 204名이 懲戒 對象者라고 밝혔다. [14]

1990年 11月 26日 이로 因해 自進 脫退를 拒否해온 1,465名의 敎師들이 解職되었다. 이들 中 116名은 罷免, 970名은 解任하고, 379名은 職權 免職을 하였다. 이들 中 55名은 拘束되었다가 풀려났다. [11] 大部分의 活動的인 組合員이 解雇된 가운데 전교조는 非合法 勞動組合으로서 活動하였다. 이때 解雇된 敎師들 中에는 都鍾煥 , 安度眩 詩人이 包含되어 있었다.

1993年 10月 28日 金永三 大統領의 執權 1年次이던 이날까지 전교조 復職 申請을 받아서 95%가 復職되었다. 1490名 中 1424名이 復職을 申請하고, 66名이 復職 申請을 拒否했다.

合法化 [ 編輯 ]

1997年 勞使政委員會 는 勞使和合의 一環으로 전교조의 合法化를 合意하였다. 1999年 1月 6日 敎員의 勞動組合 設立 및 運營 等에 關한 法律 이 國會에서 議決되어 全敎組는 合法的인 勞動組合이 되었다. 전교조가 合法化 될 수 있었던데는 크게 두가지 理由가 있다. 첫째, 1998年부터 國民의 政府가 始作되었다는 것과 둘째, 敎師와 公務員의 結社의 自由와 團體交涉權 等 勞使關係 法規를 國際的 基準에 符合토록 改正할 것을 條件으로 經濟開發協力機構(OECD) 加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6年 當時 김영삼 大統領으로서는 OECD 加入이 國家의 宿命이자 또 個人의 使命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當時 OECD 勞動組合諮問委員會(TUAC)와 많은 國家들이 韓國은 敎師와 公務員의 團結權을 가로막고 第3者 介入을 禁止하는 勞動後進國이라며 加入을 反對했다. OECD 加入을 위해 김영삼 大統領은 "結社의 自由와 團體交涉權 等 勞使關係 法規를 國際的 基準에 符合토록 改正할 것을 確約한다"는 外務部長官 名義 書翰을 OECD에 보냈다. 그래서 OECD는 韓國을 特別勞動監視國으로 指定해 韓國政府의 約束履行 狀況을 監視하여 理事會에 報告하는 것을 條件으로 加入을 最終 承認했던 것이다. 그 後, 韓國은 1999年 全敎組 合法化와 2004年 公務員勞組法 制定 以後 2007年에야 特別勞動監視國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組織 [ 編輯 ]

전교조의 最高 議決機構는 代議員大會이며 常時的인 議決은 中央委員會를 통해 이루어진다. 實際 事業의 執行은 中央執行委員會가 맡는다. 委員長은 各種 會議를 召集하고 議長이 된다. [15]

下位 組織으로 各級 學校別 委員會가 있으며 廣域自治團體 別로 支部가 基礎自治團體 別로 支會가 組織되어 있다. 各級 學校에는 分會가 있다.

加入率 [ 編輯 ]

2008年 4月 現在 全體 敎師의 18.2%가 加入하고 있으며, 東亞日報 自體調査로 地域別로는 全南 35.3%, 光州 31.8%, 慶南 26.8%, 忠南 23.3%, 全北 22.4%, 蔚山 21.8%, 慶北 21.2%, 서울 15.5%, 京畿 11.1%로 나타났다.

[16] 2010年 5月 現在는 全體 敎師의 15%가 加入하고 있다. 地域別로는 光州 32%, 全南 35%, 慶南.濟州 22%의 巡이며, 한나라黨 정두언 議員은 전교조 加入率이 높은 地域일 수록 修能成績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發表했다. [17] [18]

主要 活動 [ 編輯 ]

全敎組는 創立 當時부터 民族, 民主, 人間化 敎育을 理念으로하는 참敎育을 主唱하였다. 이에 따라 各級 學校別 敎科別 참敎育 實踐 活動을 하고 있다. [19] 또한 敎員을 對象으로 하는 勞動組合으로서 敎育科學技術部 와 團體交涉을 통해 敎員의 權益 向上을 圖謀하고 있다.

참敎育 實踐 事業 [ 編輯 ]

전교조의 참敎育 實踐 活動은 創立 理念인 民族, 民主, 人間化 敎育을 土臺로 各級 學校別 敎科別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위해 定期的인 참敎育 實踐 大會를 열고 있다. 가장 最近의 참敎育 實踐 大會는 2010年 1月 한신대학교에서 열렸다. [19]

전교조의 참敎育 實踐 事業 가운데 出版으로 이어진 事業으로는 全國歷史敎師모임의 《살아있는 韓國史 敎科書》 [20] 와 《살아있는 世界史 敎科書》 [21] , 그리고 日本 敎員勞組와 共同으로 製作한 韓日 歷史 共同敎科書인 《朝鮮通信使》 [22] 等이 있다. 全敎組에서는 어린이出版社인 우리敎育을 꾸리고 있는데 農學者 김순권 等의 우리時代 참 知識人들의 이야기를 冊으로 만들었다.

團體交涉 [ 編輯 ]

大韓民國 에서 敎員의 團體交涉은 各 廣域地方自治團體 의 敎育廳을 使用者로 하고 敎員勞動組合人 전교조와 韓國敎員勞動組合이 共同 代表團을 構成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實際 團體 交涉은 원활하지 않아 가장 最近의 團體 交涉은 2005年 3月 30日 로 效力이 喪失된 狀態이다. 2010年 初 交涉窓口 單一化와 關聯한 法律 條項이 廢止됨에 따라 전교조는 豫備交涉을 申請하였다. 한便, 2010年 3月 24日 勞動部 가 敎育科學技術部와 전교조 사이의 旣存 團體協約 가운데 33.5%가 不合理하다는 意見을 내놓아 團體交涉 進行의 難航이 豫想되고 있다. [23] 이에 對해 전교조는 勞動部의 分析은 잘못된 法理에 따른 不當한 干涉이라 論評을 내놓았다. [24]

참敎育上 [ 編輯 ]

全敎組는 1990年 5月 10日 第5回 敎師의 날 을 맞아 그날을 包含한 一週日間을 참敎育 週間으로 定하고, 組合員으로 참敎育 實踐에 앞장서 온 분들에게 그 뜻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參校思想을 制定했다.

1995年 부터는 施賞 對象을 敎師에서 “참敎育 實現과 敎育發展에 寄與한 各界 人士 및 團體”로 넓히고 賞의 이름도 《참敎育上》으로 바꾸어 每年 施賞하고 있다.

連帶 [ 編輯 ]

전교조의 上級 團體는 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 이다. 또한 國際的인 連帶를 위해 國際敎育聯盟(EI) [25] 에 加入되어 있다. EI는 韓國敎員團體總聯合會 亦是 加入되어 있는 團體이다.

時期別 事案 [ 編輯 ]

NEIS 反對 運動 [ 編輯 ]

2002年 大韓民國 政府는 敎育行政情報시스템 (NEIS)을 學校에 導入하였다. 開通 當時 이 시스템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統合되어 過度한 個人 情報의 蒐集과 蒐集된 學生 情報의 流出 可能性 等의 問題가 提起되었다. 敎育行政情報시스템은 전교조를 비롯한 市民團體의 反撥로 인해 2006年부터 高等學校는 單獨 學校單位로 初等學校와 中學校는 20個 以下의 學校 그룹 單位로 運營되게 되었다. 2010年 敎育科學技術部는 이를 다시 市道 敎育廳單位로 統合하겠다는 計劃을 發表하였다. [26]

押收搜索 論難 [ 編輯 ]

2009年 7月 3日 檢察과 警察이 全敎組 本部와 支部 事務室을 異例的으로 電擊 押收搜索했다. 이에 對해 "搜査當局의 迅速하고 前防衛에 걸친 搜査 着手는 時局宣言에 參與한 전교조 所屬 敎員들에 對한 敎育科學技術部의 重懲戒 方針이 發表됐을 때 이미 어느 程度 豫告됐다." 時局宣言을 推進한다는 狀況이 搜査 速度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時局宣言이 擴散되는 只今때에 公務員 組織에 擴散 兆朕을 보인 時局宣言 바람을 早期에 遮斷하겠다는 것이 政府目的"이라며 批判받기도한다. [27]

時局宣言 [ 編輯 ]

2009年 6月 전교조 所屬 敎師들이 時局宣言을 發表한 以後 敎育科學技術部는 이를 公務員의 政治的 中立違反으로 告發하였다. 以後 進行된 裁判에서 一部 地方法院에서는 無罪로, 다른 地方法院에서는 有罪로 判決하였다. [28]

名單 公開 論難 [ 編輯 ]

한나라黨 조전혁 議員이 敎育科學技術部에 전교조 加入 敎師의 名單을 提出할 것을 要請하자 전교조는 이를 個人 身上의 過度한 公開라 批判하였으나 2010年 3月 26日 서울中央地方法院은 전교조 加入 敎師들의 名單을 敎科部가 蒐集하여 조전혁 議員에게 提出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전교조의 假處分 申請을 棄却하였다. [29] 한便, 2010年 4月 15日 서울南部地方法院은 "敎育關聯機關의 情報公開에 關한 特例法에 따르면 學校別 敎員團體 및 勞動組合 加入者 數는 公示하도록 하고 있지만, 名單 公開를 許容하는 法律 條項은 없다"는 理由를 들어 전교조 組合員 名單 公開는 許容될 수 없다고 判決하였다. [30] 4月 27日 法院은 "名單 公開 强行視 間接强制 이행금으로 하루 3千萬원씩 전교조에 支給하라"고 判決하였다.

조전혁은 이에 不服하고 2010年 4月 19日 부터 自身의 누리집에 敎祖 團體(韓國교총, 전교조, 韓國敎員, 自由敎育聯合, 大寒敎祖) 等에 所屬된 敎員(幼稚園,初等,中,高等學校,特殊學校 * 公立/私立 包含 等) 名單 22萬名 (以下 全敎組 6萬名)假量 各 組合員의 在職 學校名과 失明, 擔當敎科 項目等을 大衆에 公開하였으며, [31] 다른 한나라당 議員 9名(진수희, 金鎔泰, 金孝在, 박준선, 張濟元, 정두언, 鄭鎭奭, 鄭泰根, 車明進)도 加勢하였다. [32] [33]

2010年 5月 3日 조전혁은 履行强制金을 버틸 수 없고 貴族勞組에 바칠 수 없다며 名單을 누리집에서 削除했다. 2010年 5月 13日 조전혁은 全敎組 名單 公開 論難을 公論化하고 힘을 싣고자 서울 청계광장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했으나, 演藝人도 豫想했던 수많은 人波도 나타나지 않아 정두언 議員이 代身 歌手役割을 했다. [34] 2010年 7月 13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事務室을 直接 찾아가 돼지 貯金筒을 칼로 쪼개어 480萬원을 냈다. [35]

2011年 2月 15日 서울高等法院은 全國敎職員勞動組合 및 所屬 組合員 16名이 "敎員勞組 加入者 實名 公開時 하루 8500萬원씩 賠償하라"며 조전혁 한나라당 議員을 相對로 낸 間接强制 抗告審에서 "전교조 組合員 名單 公開時 1日 2,000萬원의 賠償金을 支給하라"고 判決했다. [36]

一部 敎師 민주노동당 加入 論難 [ 編輯 ]

2010年 5月 23日 敎育科學技術部 (長官 안병만 )와 全國 市·道 敎育廳은 6月 2日 地方選擧를 앞두고 민주노동당 에 加入한 嫌疑로 起訴된 全國敎職員勞動組合 敎師 134名을 全員 罷免·解任하기로 決定했다. [37] 이에 對해, 2011年 1月 26日 서울中央地方法院은 少額의 政治資金 後援에 對해서는 政治資金法 違反을 認定해 30萬원에서 50萬원의 罰金刑을 賦課하였다. 한便, 민주노동당의 加入 與否에 對해서는 單純한 後援은 加入으로 볼 수 없고 入黨한 敎師라 할지라도 脫退後 3年이 지나 公訴時效가 消滅되었다는 理由로 無罪를 宣告하였다. [38] [39]

2012年 1月 30日 서울중앙지법 刑事 22部 判決에서 민주노동당에 加入하고 後援金을 낸 全敎組 敎師와 公務員 97名에게 有罪가 宣告됐다. [40]

2012年 12月 5日 政黨 後援과 關聯해 解任·正直 等 重懲戒를 받은 全國敎職員勞動組合 仁川支部 敎師 7名에 對해 大法院이 懲戒를 取消하라고 最終 判決했다. [41]

學校暴力 學生을 學生簿 記載 反對 [ 編輯 ]

2012年 9月 4日 全敎組 는 學校暴力 學生을 學生簿 記載하는 것에 反對하며 李周浩 敎育部長官을 告發하였다. [42]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1~2月 一般國民과 學父母 各 500名, 敎員 1千100名, 學生 1千名을 對象으로 한 調査 結果, 校長·校監의 86.6%, 學父母의 81.2%, 敎師의 79.9%, 一般國民의 78.2%, 學生의 68.9%가 學生簿 記載가 도움이 된다고 答했다고 한다.

전교조에 對한 彈壓 [ 編輯 ]

전교조에 對한 彈壓은 繼續되어 MB 政府에서 相當數 敎師가 解職되었다. 團體協約에 따라 地域敎育廳 單位 一齊考査 代身 正常授業을 했다는 理由로 講院의 4名 敎師를 비롯해 全國的으로 數十 名의 敎師가 一齊考査 拒否로 解職되었다. 또한 MB 政府의 政策轉換을 要求한 時局宣言에 同參했다는 理由로 전교조 指導部가 무더기로 解任, 停職, 減俸 等의 懲戒를 받았다. 이들 中 相當數는 訴訟을 통해 復職했으나 如前히 一部 敎師는 復職되지 못하고 있다. 2012年 4月 14日子 조선일보는 仁川의 한 初等學校에서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의 어록인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來日을 위한 오늘을 살자”를 級訓으로 使用했다고 報道했다. [43] 그러나 該當 敎師는 勿論, 學校 側에서도 '00初等學校에는 級訓이 없다'고 밝혔고, 該當 記事를 쓴 記者는 直接 보지도 않고 쓴 것으로 보인다. [44] 그럼에도 不拘하고 檢察은 該當 敎師를 비롯한 전교조 組合員 4名을 不拘束 起訴했다. 이들의 嫌疑는 '利敵團體 構成'이나, 以前까지 '利敵團體 構成' 嫌疑로 不拘束 起訴한 例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敎師의 勞動組合 加入情報 非公開 事件 [ 編輯 ]

敎師의 勞動組合 加入情報 非公開 事件은 重要 大韓民國 憲法裁判所 判例이다.

事實關係 [ 編輯 ]

請求人 學父母團體는 敎員들이 勞動組合에 加入하였는지 알고자 情報公開請求를 하였고 거부되자 敎員의 個人情報 公開를 禁止하고 있는 敎育關聯機關情報公開法 이 請求人들의 알권리 等을 侵害한다며 憲法訴願審判을 請求하였다 [45] .

批判 [ 編輯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創立 以後 只今까지 持續的인 批判을 받아왔다. 參與政府 時節에는 이라크 戰爭 , 韓美 FTA 와 같은 時局 事案과 差等 成果給制, 敎員評價制의 導入을 놓고 當時 政府 與黨과 葛藤을 빚으며 批判을 받았으며, 李明博 政府 以後 敎科學習診斷評價 全國 實施, 無償給食 全面擴大 等의 事案으로 인해 여러 團體와 言論으로부터 批判을 받고 있다.

  • 批判勢力은 전교조 結成 當時 "敎員은 勞動者가 아니다"며 勞動組合 結成 自體를 不法이라고 主張했다. 그러나 1989年 當時에도 世界的으로 敎員勞組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는 狀況이었고, 現在는 敎員勞組가 더욱 늘어났다.
  • 世界日報 2008年 5月 記事를 통해 全敎組 敎師가 만든 '잠 좀자자', '試驗이제 그만' 文句가 생긴 배지를 學生들에게 나눠주었고, 6月에도 '李明博 OUT'이라는 포스터를 學生들에게 配布해 反政府認識을 學生들에게 주입시켰다고 批判했다. [46]
  • 강원대학교 經濟學 敎授 김진영은 文化日報 의 칼럼을 통해 2009年 6月 18日 전교조 所屬 敎師들이 德壽宮 大漢門 앞에 모여 "6月 民主抗爭의 所重한 價値를 기리는 時局 宣言"을 하자 이를 同期도 內容도 不純한 政治的 要求라 批判하였다. [47]
  • 2008年 保守主義 인터넷 言論인 뉴데일리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가 전교조의 協助로 노무현 政府 時節 政府 支援金으로 運動圈에서 많이 불리는 民衆歌謠 를 製作해 어린이집·幼稚園과 初等學校에 配布한 것을 親北反美 活動이라고 報道하였다. [48] 이 音盤에는 金敏基 의 〈 千里길 〉, 〈 고무줄 〉, 〈 四季 〉等과 70年代에 流行하였던 〈흔들리지 않게〉, 〈하나의 故鄕〉 等 80年代 以後 示威 現場에서 많이 불렸던 노래와 윤민석 大韓民國 憲法 第1條 가 들어있다. 그러나 김민기의 '沙溪' 等은 人氣 그룹 거북이가 리메이크해 부르는 等 大衆的으로 친숙한 노래이기도 했다.
  • 東亞日報 는 2004年 1月 大韓民國 陸軍士官學校 에서 가(假)입교생을 相對로 한 意識調査 結果 250餘 名의 加入敎生 가운데 34%가 우리의 主敵(主敵)을 美國을 꼽았고 北韓을 든 應答者는 33%였다는 結果를 전교조의 原因으로 報道하였다. [49]
  • 保守를 標榜하는 인터넷媒體 獨立新聞 은“전교조는 私敎育 組長의 元兇”“平等敎育으로 인한 副作用은 學生들의 學歷低下는 勿論 私敎育費 急增, 家庭經濟 破綻, 庶民 苦痛을 加重시키고 있다.”며 批判했다. 그러나 平等敎育 때문에, 전교조 때문에 私敎育이 助長되었다는 根據를 提示하지는 못했다. [50]
  • 未來韓國國民聯合(共同代表 朴 近·以下 未來韓國)은 이날 ‘우리 아이들 누가 망치고 있나?’라는 團體 創立記念 討論會에서 “左派 敎育監의 全面 體別禁止로 敎師가 無力化되고 學校 混亂이 持續化되고 있다”면서 “이제는 이런 전교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51]
  • 隔週刊誌 未來韓國 은 2011年 3月부터 '전교조를 解剖한다'는 題目으로 5回에 걸쳐 전교조의 思想的 左偏向과 內部의 非理를 告發하는 記事를 실었다. [52]
  • 2010年 1月 19日 韓國勞動硏究院 이 主催한 "敎員勞使關係 評價와 發展方案" 討論會에서 인천대학교 經濟學 敎授 이인제는 전교조에 加入한 敎師가 많은 學校일수록 學生들의 大學修學能力試驗 成績이 떨어진다는 硏究 結果를 發表했다. 이에 對해 가톨릭대 성기선 敎育學科 敎授는 "學校나 敎師의 影響을 제대로 把握하려면 入學 當時 成績이 卒業 때까지 어떻게 變하는지를 追跡해야 한다. 方法論的으로 問題가 있다."고 批判했다. 다른 많은 媒體에서는 敎員勞組 또는 特定 敎員團體 加入敎師가 많은 學校나 地域이기 때문에 修能 成績이 달라진다는 것은 敎育結果에 미치는 變因이 宏壯히 많다는 點에서 論理的으로 誤謬라는 指摘이 學界의 支配的인 立場이다. [53] 全敎組는 '全國에서 高校 學業成就度가 가장 높은 光州市는 全敎組 敎師 比率이 가장 높은 點', '敎員團體 會員 1人當 서울大 合格者 數도 全敎組(0.11名)가 敎總(0.04名)보다 많은 點' 等을 들며 反駁했다.
  • 2010年 大韓民國 第5回 地方 選擧 에서 無償給食이 主要 爭點이 되는 가운데 뉴데일리 等에서는 이를 전교조式 左派敎育이라 批判하고 있고 [54] , 京鄕新聞 에서는 오히려 전교조가 아무런 立場도 發表하지 않고 있다고 전교조의 責任을 묻고 있다. [55] 한便, 示唆IN 은 慶南敎育廳의 無償給食 事例를 들어 地域 懸案이 選擧를 맞아 理念 論爭으로 變質되고 있다고 報道하였다. [56]
  • 保守 改新敎 團體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에서는 2013年 한기총新聞 1面에 法外勞組化에 對해 "法과 原則에 따른 從北勢力 屈服"이라고 煽動記事를 실었으며, 資料寫眞으로 "勞動者에서 敎師로 돌아오라"라고 적힌 懸垂幕을 넣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從北勢力이 아니라 民主勞總 을 上位團體로 하고 民主主義 敎育을 目的으로 하는 敎員勞組이며, 敎師는 學生들을 가르치는 勞動을 하여 經濟的 代價를 받는 勞動者 이다.

參與政府와의 葛藤 [ 編輯 ]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參與政府 가 敎員成果給第, 學生의 情報集積을 담은 NEIS 導入 等의 政策을 推進하자 參與 政府와 葛藤을 빚었다. 葛藤은 전교조 出身의 김진경 當時 大統領 敎育文化祕書官이 전교조를 "敎育發展에 妨害가 되는 勢力"이라 批判하면서 極에 達했다.

이명박政府와의 葛藤 [ 編輯 ]

  • 2009年 敎育科學技術部 가 全國의 初·中學生을 相對로 한 敎科學習 診斷評價를 施行하자 전교조는 이를 拒否하고 試驗 當日 學生들에게 試驗을 拒否하도록 勸告하고 體驗學習을 勸奬하였다고 서울 8名, 江原 4名 等의 敎師를 解任했다. 그러나 解職된 모든 敎師가 解任이 不當하다는 大法院 確定判決(審理不續行)로 復職했다.
  • 2010年 5月 23日 敎育科學技術部 (長官 안병만 )와 全國 市·道 敎育廳은 6月 2日 地方選擧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에 加入한 嫌疑로 起訴된 全國敎職員勞動組合 敎師 134名을 全員 罷免·解任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大部分의 關聯者가 面所~罰金 50萬 원의 判決을 받았다. 法院은 政黨加入 嫌疑를 認定하지 않았고, 政治資金法 關聯해서만 一部 有罪를 認定했다. 相當數 關聯者는 法律 改正 以前 少額 政黨後援金을 合法的으로 내고 稅額控除까지 받았으나, 法律 改正으로 政黨에 對한 後援金 納付가 禁止된 것으로 몰라 移替를 解止하지 못해 情狀을 參酌받았다.

全敎組 法外勞組 論難 [ 編輯 ]

지난 2013.9.23日 雇傭部는 '勞組關係法 施行令 9兆 2項'에 따라 "전교조 解職者 9名을 勞組活動에서 除外하지 않으면 한 달 後 法外勞組임을 通報하겠다"고 전교조에 豫告했다 [57]

이에 全敎組는 10.16日~18日 組合員 總投票를 實施하고 改正을 拒否했다. 이에 따라 雇傭勞動部는 10.24日 전교조에 ‘勞動組合으로 보지 아니함’을 公式 通報했다. 이로써 全敎組는 1999年 7月 合法化이래 14年 만에 法律上 勞動組合의 地位를 잃고 法外勞組가 됐다. [58]

이러한 雇傭勞動部의 法外勞組 指定에 對해 전교조는 "法外勞組化는 98年 勞使政을 通한 社會的 合意에 對한 破棄"라며 "國際的 約束 違反이자 團結權과 結社의 自由를 否定하는 憲法 蹂躪 行爲"라고 糾彈하고 서울行政法院에서 "法外勞組의 效力을 停止해달라"며 政府를 相對로 서울行政法院에서 訴訟을 進行 中이다. [59] 2014年 6月 19日 서울行政法院 行政13部(裁判長 반정우)는 전교조가 雇傭勞動部를 相對로 낸 法外勞組 通報 處分 取消 訴訟에서 原告 敗訴 判決했다.(1심) [60]

全敎組는 解職者를 敎員勞組에 加入할 수 없게 한 法條項人 敎員勞組法 第2條에 對하여 法院에 違憲法律審判을 申請했다. 法院이 9月 19日 憲法裁判所에 違憲法律審判을 提請하면서 一旦 법내勞組가 되었다. 裁判部는 學生들의 敎育權이 私立學校 敎員의 團結權을 否認할 根據는 될 수 없고, 敎員勞組를 學校別이나 財團별이 아닌 戰國과 市道 單位로 設立하도록 되어 있는 敎員勞組法 條項에 따르면 전교조를 産別勞組로 볼 수 있는데 다른 産別勞組와 다르게 敎員勞組만 解職者를 加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過剩禁止原則 違反과 差別의 素地가 있다고 보았다. 裁判은 憲法裁判所가 違憲法律審判에 對한 決定을 내릴때까지 中斷될 豫定이다.

그러나 憲法裁判所는 2015年 5月 28日 敎員勞組는 産別勞組 性格이 있더라도 敎員의 特性上 解職者를 加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立法自律의 領域에 屬하는 것으로 差別이 아니라고 決定했다. 法院에서는 法的으로 組合員이 될 수 없는 組合員이 몇名 加入했다는 理由로 勞組 全體를 法外勞組化하는 것이 正當한지에 對해 裁判을 할 豫定이다. 憲法裁判所는 解職敎師가 包含돼 있다 해서 반드시 法外勞組를 通報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判斷을 내렸기 때문이다. 2015年 7月 열린 裁判에서 전교조 側은 全體 6萬名의 組合員中 解職敎師는 6名에 不過하고 執行部가 아니어서 勞組에 影響을 미치지 않는다는 立場, 雇傭勞動部는 전교조에서 解職敎師들이 重責을 맡고 있다는 立場을 밝혔다. [61] 한便, 違憲法律審判提請을 前提로 全敎組 法外勞組 通報 處分에 對한 效力停止를 한 高等法院의 決定을 憲法裁判 合憲 決定 以後 大法院이 破棄하면서 전교조는 다시 法外勞組가 됐다. 그러나 서울高法에서 '如前히 勞組法 여러 條項에 다툴 餘地가 있는 爭點이 相當數 남아있고, 申請人은 回復하기 어려운 損害가 있다'며 抗訴審 宣告때까지 法外勞組 通告의 效力을 停止해 全敎組는 다시 合法勞組가 되었다. [62] [63]

그러나 서울高法에서 또다시 敗訴 判決을 내려 法外勞組가 되었다. [64]

하지만 大法院에서 1審과 2審의 判決을 뒤집고 破棄 還送 判決을 내렸으며 [65] [66] , 다음 날 勞動部가 通報를 取消함에 따라 地位를 回復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1]
  2.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608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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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韓國現代政治史의 理解 오명호 지음 | 오름 | 1999) 21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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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勞動3卷 否定"…'法外勞組' 전교조의 앞날은
  58. <社說> 전교조의 法外勞組化와 韓國敎總
  59. 全敎組·市民社會 “團結權 否定하는 憲法 蹂躪 行爲”
  60. 全敎組, 15年 만에 다시 ‘法外 勞組’로 , 한겨레 , 신소영 記者, 2014年 6月 19日
  61. 憲裁 決定 後 첫 裁判…전교조·勞動部 모두 '憲裁 決定' 根據로 뉴스1
  62. 法院, 全敎組 法外勞組 通報 效力停止..合法 地位 維持(綜合) , 聯合뉴스
  63. ‘全敎組 法外勞組’ 大法院 決定 뒤집은 裁判長은 누구? , 한겨레
  64. 2審도 "全敎組, 法外勞組 通報 正當"…法的 地位 또 喪失(2報)
  65. 이혜리 (2020年 9月 3日). ““전교조 ‘法外勞組 通報’는 違法”…6年10個月 만에 ‘正常化 길’” . 《京鄕新聞》 . 2021年 5月 12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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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