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박종철이 顧問으로 夭折한 南營洞 對共分室 509號
날짜 1987年 1月 14日
位置 서울特別市 龍山區 南營洞 對共分室 509號
座標 北緯 37° 32′ 27″ 東經 126° 58′ 18″  /  北緯 37.540846° 東京 126.971757°  / 37.540846; 126.971757
結果 6月 抗爭 , 大韓民國의 民主化
死亡者 1名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朴鍾哲 拷問致死 事件)은 1987年 1月 14日 南營洞 對共分室 에서 大韓民國 警察 搜査官 들이 서울大學校 言語學科 學生 朴鍾哲 을 審問하던 中 물拷問으로 夭折에 이르게 한 事件이다. 이 事件을 契機로 聖公會 서울주교좌大聖堂 에서 集會가 始作되었고, 6月 抗爭 의 直接的인 導火線이 되었다고 評價받는다.

展開 [ 編輯 ]

拷問致死와 事件 隱蔽 [ 編輯 ]

事件 當時 朴鍾哲 學生은 서울大學校 人文大學 言語學科 在學生이었다. 1986年 청계被服勞組 合法化 要求 示威를 한 理由로 拘束되어 懲役을 宣告받은 바 있고, 出所 以後에도 學生 運動 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였다. 以後 1987年 1月 13日 子正頃 下宿집에서 治安本部 對共分室 搜査官 6名에게 連行되었다. [1] 當時 連行 名目은 大學文化硏究會 先輩이자 '民推委' 指導委員으로 手配받고 있었던 박종운 에 對한 情報를 把握하기 위한 것이었다.

取調室에 連行해간 公安 當局은 朴鍾哲에게 박종운 의 所在를 물었으나, 朴鍾哲은 順順히 對答하지 않았다. 이에 警察은 殘酷한 暴行과 電氣拷問, 물拷問 等을 加하였고, 朴鍾哲은 끝내 1987年 1月 14日 治安本部 對共搜査團 남영동 分室 509號 調査室에서 夭折했다. 11時 45分頃 중앙대 용산病院 醫師 오연상 이 現場에 到着해 檢診했을 當時 이미 숨져 있었다. [2] 警察은 14日 밤에 事件을 隱蔽하기 위해 化粧할 計劃이었으나, 催喚 部長檢事는 死體保存命令을 내렸다. 事件 指揮는 그날 밤 當直이었던 安商守 檢事가 맡았다.

事件 다음 날 1月 15日 午後 6時가 넘어 한양대 病院에서 剖檢이 實施되었다. 剖檢 結果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指 間 出血 痕跡과 사타구니,肺 等이 毁損되어 있었으며 腹部가 부풀어 있고 肺에서 水泡音 이 들렸다. 剖檢은 國立科學搜査硏究所 剖檢醫 황적준 博士, 漢陽大 박동호 敎授가 맡았다. 軍部와 警察의 脅迫과 懷柔를 물리치고 1月 17日 황적준 博士는 報告書를 作成했으며, 1年 뒤 剖檢 過程에서 받았던 警察의 懷柔와 脅迫을 받은 內容을 적은 日記帳을 言論에 公開하기도 하였다. [3] [4]

한便 박종철이 犧牲하며 救해냈던 先輩 박종운은 2000年 한나라黨 (現 國民의힘)에 入黨 後 極右 - 뉴라이트 系列로 變節하여 李明博 朴槿惠 를 支持하는 等 政治 行步를 걷게 되었다.

言論報道와 剖檢 [ 編輯 ]

1987年 1月 15日 中央日報에 揷入된 '警察에서 調査받던 大學生 쇼크死' 記事

朴鍾哲 學生의 腰絶 以後 中央日報 의 신성호 記者는 한 檢察 幹部가 “警察, 큰일 났어”라고 無心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端緖를 잡고, 1月 15日 ‘警察에서 調査받던 大學生 쇼크死’라는 2段 記事를 데스크로 내보냈고, 夕刊에 單身으로 실렸다. [5] 이 消息은 다른 國內 言論과 外國 言論에서도 引用되었고, 그날 KBS MBC 저녁뉴스에서도 單身으로 내보냈다. [6]

報道 다음 날인 1月 16日 강민창 當時 內務部 治安本部長과 박처원 治安監이 記者會見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冷水를 몇 컵 마신 後 審問을 始作, 박종철 君의 親舊의 素材를 묻던 中 冊床을 '탁' 치니 갑자기 ‘億’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附屬 病院으로 옮겼으나, 12時頃 夭折하였다”고 發表하였다. 그러나 東亞日報 는 當時 剖檢醫 醫師로 對共分室 509號室에 出入했던 오연상 으로부터 "事件現場에 물이 흥건한 것을 目擊했다"는 陳述을 確保하며, 拷問에 依한 腰絶 可能性을 처음으로 提起했다.

結局 記者會見 4日 만인 1月 19日 , 江 治安本部長은 다시 特別 記者會見을 열어 旣存의 立場을 뒤집고 "박종운 君의 素材를 묻는 審問에 答하지 않자 머리를 한 次例 暫時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繼續 陳述을 拒否하자 다시 집어넣는 過程에서 急所인 목 部位가 浴槽 턱에 눌려 窒息死했다"고 "苛酷行爲"로 因한 夭折을 是認하였다. [7] 以後 조한경과 강진규 等 拷問 警察官 2名을 事件 主導者로 指目해 拘束, 事件을 縮小하였다. 그리고 剖檢을 거친 박종운 君의 屍身은 家族 許諾도 없이 辟除 火葬터에서 屍身을 火葬하는 等 證據湮滅을 試圖했다.

事件 收拾을 위해 內務部長官에 任命된 정호용 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拷問이 있었다는 事實을 否認했는데, 그는 光州 民主化 運動 當時 特戰司令官 으로 民衆 虐殺의 責任者 中 하나로 指目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亦是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天主敎 司祭團의 暴露 [ 編輯 ]

事件 主導者로 拘束된 警察 두 名은 서울남부구치소 에 收監됐다. 當時 安諭 拘置所 보안계장은 이들을 接하는 過程에서 그들 外에 追加로 警察官 3名이 顧問에 關與하였고, 警察은 이를 組織的으로 隱蔽하려 한다는 情況을 捕捉했다. 안 係長은 마침 收監 中이었던 李富榮 當時 전민련 常任議長에게 그 事實을 傳達하였고, 이 氏는 쪽紙에 追加 關與 隱蔽 事實을 적은 뒤 서로 親分이 있었던 한재동 矯導官을 통해 外部에 傳達토록 하였다. [8] 該當 쪽紙는 天主敎 正義具現 全國司祭團 김승훈 神父와 함세웅 神父에게까지 傳達되었다. [9]

1987年 5月 18日 , 光州民主化運動 7周忌 追悼미사 途中 김승훈 神父가 박종철 拷問致死事件의 眞相이 造作되었음을 暴露하였다. 對共警察의 代父라는 治安本部 5次長 박처원 의 主導 아래 모두 5名이 加擔한 拷問致死事件을 單 2名만이 拷問에 加擔한 것으로 꾸미고, 銃대를 멘 2名에게는 巨額의 돈을 주었다는 事實을 새롭게 밝혔다. [10] 暴露 다음 날 統一民主黨 에서는 黨 次元에서 眞相調査를 벌이겠다고 밝혔고, [11] 아버지 박정기 氏는 明確한 眞相糾明과 國家를 相對로 한 損害賠償 訴訟을 代行 해 달라는 陳情書를 大韓辯協 側에 傳達하였다. [12]

기타 [ 編輯 ]

  • 當時 警察이 朴鍾哲을 拷問致死 하면서 까지 所在를 밝히려 했던 張本人 박종운 은, 以後 한나라黨 地區黨 委員長을 지냈고 國會議員 選擧에도 出馬하여 論難이 일었다. [13]
  • 搜査를 指揮했던 신창언 檢査는 以後 民自黨 (現 未來統合黨 의 前身)의 推薦으로 憲法裁判官 을 지냈다. [14]
  • 擔當 檢事였던 박상옥 은 2015年 朴槿惠 政權에서 大法官 候補者로 指名되었다. 當時 박상옥 檢事는 事件이 縮小, 隱蔽된 事實을 알고도 搜査를 擴大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論難을 빚었다. [15]
  • 擔當 檢事였던 安商守 는 한나라당 黨 代表를 歷任했으며, 現 昌原市長 으로 選出되었다. 안상수는 搜査 當時 事件 隱蔽에 加擔한 것으로 알려져 論難이 일었다. [16] [17]
  • 2019年 6月 2日 日曜日 午後에 放送된 SBS 藝能 프로그램 《런닝맨》에서는 이날 放送 內容 中 전소민 이 사레 들린 기침을 하자 ‘1番을 탁 찍으니 億 事例 들림’이라는 內容의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을 戱畫化하는 字幕이 揷入돼 論難을 자아냈다.

같이 보기 [ 編輯 ]

  • 1987 》 - 2017年 開封한 映畫.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을 素材로 삼았다.

各州 [ 編輯 ]

  1. “고 박종철烈士 25周忌 追慕祭...(슬픔)” .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2011年 12月 29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물拷問 報道… 내 生涯 이런 新聞을 다 보는구나 했다”” . 東亞日報. 2020年 3月 3日.  
  3. “剖檢 통해 드러난 古文辭…警察은 懷柔·脅迫 / 박정기” . 한겨레. 2011年 12月 21日.  
  4. “曺國 “安商守가 박종철 拷問隱蔽 막았다? 事實 아냐”” . 한겨레. 2012年 1月 13日.  
  5. 警察에서 調査받던 大學生 쇼크死 - 中央日報 (1987年 1月 15日)
  6. 治安本部 公安事件과 關聯 박종철 君 숨져 外 - KBS 9時 뉴스 (1987年 1月 15日)
  7. <朴鍾哲 拷問致死 事件> 서울대學生 박종철君 苛酷行爲로 숨져 - KBS 뉴스 9 (1987年 1月 19日)
  8. “25年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事件 暴露 主役들” . 오마이뉴스 . 2018年 1月 2日 . 2018年 7月 13日에 確認함 .  
  9. “朴鍾哲 事件 1億 주고 덮으려해 憤怒가 치밀어…” . 中央日報. 2012年 1月 31日.  
  10. 한홍구 (2001年 5月 22日).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 《한겨레21》 (第360號) . 2007年 12月 9日에 確認함 .  
  11. 民主黨서도 調査키로 "朴鐘哲君事件은 造作됐다"
  12. 숨진 過程 眞相糾明 賠償訴訟代行 鎭靜 - 東亞日報
  13. 공희정 記者 (2000年 2月 29日). “박종운氏 인터뷰 2--"정형근 議員 박종철 烈士 拷問殺人 隱蔽工作 加擔했으면 法的 處罰 받아야 " . 《오마이뉴스》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14. 최고운 記者 (2015年 2月 6日). “[取材파일] '박종철 顧問' 事件의 末端 檢事는 大法官이 될 수 있을까?” . 《SBS뉴스》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15. 나혜윤 記者 (2015年 2月 5日). “박상옥 候補者, ‘박종철 顧問警官 共犯’ 알고도 默殺” . 《告發뉴스》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16. 天官율 記者 (2011年 3月 7日). “박종철記念事業會 “安商守 돈은 안 받아”” . 《示唆IN》.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17. 이지은 記者 (2011年 3月 4日). “民主烈士 利用해 弘報 ‘낯뜨거운 安商守’” . 《한겨레》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