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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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作家 情報
出生 1943年 1月 4日 ( 1943-01-04 ) (81歲)
滿洲國 지린省 신징
國籍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職業 小說家 , 作家
筆名 兒名(兒名)은 황수영 (黃壽暎)
活動期間 1962年 ~ 現在
장르 小說
受賞 2004年 第8回 萬海對象
2008年 第3回 로얄 살루트 마크 오브 리스펙트上
主要 作品
《장길산》
《武器의 그늘》
《손님》

황석영 (黃晳暎, 1943年 1月 4日 [A] ~)은 大韓民國 小說家 이다.

1962年 《立席附近(立石附近)》으로 思想界 의 新人文學賞에 入選하며 登壇하였고 1970年 《탑(塔)》李 朝鮮日報 에 當選되며 文壇에서 活動하였다. [2] 1989年 訪北하여 歸國하지 못하고 9月頃에 베를린藝術院 招請 作家로 獨逸 에서 夫人, 아들과 함께 定着하여 生活해왔는데 與圈 滿了 時限인 1992年 2月이 臨迫해 獨逸 內의 合法的인 滯留에 問題가 생기면서 1991年 11月 14日 獨逸을 떠나 居處를 美國 뉴욕으로 옮겼다. 1993年 歸國 以後 訪北 事件으로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拘束되어 無期懲役을 求刑받고 法院에 依해 懲役 7年型을 宣告 받았다가 1998年 赦免 釋放되었다. 檢察이 無期懲役을 求刑瑕疵 北韓은 官營 中央通信을 통해 『그의 訪北과 海外活動은 純粹 作家로서의 使命感과 함께 統一을 志向하는 民族의 한 成員으로서의 義務感에서 出發한 것』이기에 『어떤 境遇에도 決코 罪가 될 수 없다』고 主張하면서 황석영이 北韓에 買收되어 密入北하여 北으로부터 25萬 달러의 工作費를 받았다는 當局의 發表에 對해서 『作家로서 同族이 살고 있는 共和國 北半部를 다녀갔을 뿐이고 우리는 그를 同胞 作家로서 對해주었을 따름』이라며 이를 『터무니없이 捏造된 搜査結果』라며 "황석영을 卽刻 釋放하라"고 하였다 [3] 황석영의 夫人은 1994年 5月 19日부터 22日에 每日 午後 8時 뉴욕의 댄스 시어터 워크숍(DTW)의 베시 쉔베르크劇場에서 1973年 前衛舞踊家 홍신자에 이어 韓國人으로 두番째로 人間文化財인 이매방, 이동안, 金叔滋 先生 等으로부터 師事한 僧舞와 煞풀이, 太平舞를 獨舞로 선보이는 <굿춤> 데뷔公演을 한 바가 있는 按舞家 金命洙이다. [4]

황석영은 民衆 歷史小說로 불리는 《장길산》을 통해 民衆의 健康한 生命力에 注目했으며, 《한씨연대기》와 《삼포 가는 길》等을 통해 産業化 時代의 時代精神과 勞動者와 都市 貧民의 世界를 文學的으로 代辯했다. 主要 作品으로는 《장길산》, 《 삼포 가는 길 》, 《손님》, 《오래된 庭園》, 《심청》等이 있다. [5]

황석영 釋放對策委員會(共同議長 신경림 等 4名)은 1993年 9月 25日 황석영文學祭 開催에 맞춰 황석영의 訪北과 그 以後 國外에서의 活動, 歸國, 그리고 投獄으로 이어지는 行步를 통해 南北分斷의 矛盾을 證言하여 第1部 <사람이 살고 있었네>: 北에서 만난 文人과 勞動者, 農民, 學生들을 비롯해 北韓社會 곳곳에 對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訪北記 2部 <統一을 위해 文學의 길을 걷다보면 어디나 曺國이었네>: 訪北과 關聯한 인터뷰를 모음 3部 <分斷時代 統一作家 황석영>: 訪北移轉인 80年代 發表한 短篇 <골짜기>와 <熱愛> 수록 4部 北의 招請狀과 合意書, 映畫契約서, 歸國聲明書, 모두 陳述書 等 訪北關聯 資料를 엮은 「황석영 北韓 訪問期- 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사회사刊)를 發刊했다. [6]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1943年 1月 4日 滿洲 長春 에서 태어나 1945年 光復 後에 平壤 外家로 왔다. 本名은 황수영이다. 1947年 越南하여 永登浦 에 定着, 1950年 永登浦國民學校 에 入學했으나 韓國 戰爭 으로 避難地를 轉轉했다. 1956年 경복중學校 , 1959年 경복고등학교 에 入學했다. 東國大學校 印度哲學科를 中退했으나, 나중에 名譽學士를 받았다. 高校 在學 中 靑少年 雜誌인 《學院(學園)》의 學院文學賞에 短篇小說 《八字令》이 當選되었다.

文段 初期 活動 [ 編輯 ]

1960年 경복고등학교 在學 中, 4·19 革命 때 함께 했던 안종길이 警察의 銃彈에 死亡하여, 그는 親舊들과 함께 안종길의 遺稿 詩集을 發刊했다. 1961年 全國高校文藝 懸賞公募에 《出獄日》이 當選되었고, 1962年 봄 高等學校에 自退書를 내고 南道 地方을 放浪하다 같은 해 10月 집으로 돌아왔고 11月 思想界 新人文學賞에 《 立席附近 》이 當選되며 登壇하였다.

檢定考試 를 거쳐 1964年 숭실대학교 在學 中, 韓日會談 反對示威에 參加하였다가, 영등포警察署 留置場 에서 만난 제2한강교 建設勞動者와 남도로 내려갔다. 이 時期에 日傭 勞動 等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七北의 장춘사(長春寺)에서 入山했다. 東來 범어사를 거쳐 금강원에서 行者 노릇을 하다가 어머니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갔다. 1966年 大學에서 除籍된 뒤 海兵隊 에 自願入隊해 靑龍部隊 第2陣으로 베트남 戰爭 에 參戰했다. 後날 그가 쓴 長篇小說인 《武器의 그늘》에는 當時의 經驗이 그대로 녹아 있다. 參戰 以後 1969年 5月 軍에서 除隊했다. 1970年 朝鮮日報 新春文藝에 戱曲 《歡迎의 돛》과, 베트남戰의 經驗을 素材로 한 短篇小說《탑》이 當選됐다. 이때부터 황수영 代身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使用했는데, 女性的인 이름과 '황수영 時節의 事緣들이 싫어' 바꾸었다고 한다.

1970年 부터 《 돌아온 사람 》, 《 客地 》, 《 삼포 가는 길 》 等의 寫實主義 中·短篇을 續續 發表했다. 이때 東國大學校 印度哲學科를 中退하였으나, 2000年 學校로부터 名譽卒業狀을 받는다. 1974年 7月부터는 韓國日報 에 大河小說 《장길산》을 連載하기 始作했다. 이 連載는 1984年 7月까지 繼續됐다.

1980年代 以後 [ 編輯 ]

1989年 3月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朝鮮文學藝術總同盟'의 招請으로 訪北하여 訪北 期間 동안 平壤 에서 金日成 과 만났다. 以後 歸國하지 못하고 獨逸藝術원 招請作家로서 1991年 11月까지 獨逸 베를린 에 滯留했다. 이때 北韓 訪問期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 新東亞 》와 《 創作과 批評 》에 揭載했다.

한便 그는 國軍保安司令部 의 査察對象 中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政府 로부터 감시당했는데, 1990年 10月 4日 午後6時40分쯤 외국어대 在學 中 民學투련 出身이었던, 脫營兵 윤석양 二兵의 暴露에 依해 밝혀졌다. [7] 윤석양 은 脫營後 서울市 연지동 基督敎會館 7層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 人權委員會 事務室에서 「良心宣言」을 통해 脫營當時 保安司에서 갖고나온 動向把握對象者 個人索引表 신상철, 이들 內容이 入力된 컴퓨터디스킷을 公開했다. [7]

1993年 4月 27日 午前 6時25分 아시아나항공便으로 歸國했을 때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懲役 7年型을 宣告받았다. 서울 拘置所에 收監中日 때 美國펜클럽 等 全世界的인 救命運動이 있은 가운데 [8] 時報 미쯔가즈(芝生瑞和) 等 日本펜클럽 傘下 投獄作家委員會 副委員長 2名이 1993年 7月 5日 訪韓하여 황석영의 釋放運動을 벌였다. 訪韓 期間동안 作家會議 신경림 議長과 김남주 詩人, 김덕수 韓國펜클럽 會長, 辯護人團 한승헌 等을 만나 황석영이 拘束된 經緯와 安企部 搜査結果 發表의 眞僞 等을 把握하고 1993年 7月 8日 午前 황석영의 面會를 要求했으나 當局이 `上部의 指示`라는 理由로 거부되었다. 1998年 3月에 金大中 한테 特別 赦免되면서 그의 小說 《장길산》, 《客地》, 《오래된 庭園》, 《武器의 그늘》, 《韓氏 年代記》, 《삼포 가는 길》, 《손님》 等이 美國 , 프랑스 , 中國 , 日本 , 中華民國 等에 出刊되었고 英國 , 獨逸 , 스페인 에서도 곧 出刊되었다. [1]

2000年代 以後 [ 編輯 ]

2009年 5月 13日 李明博 大統領과 함께 中央아시아 巡訪에 參加했다. 그는 自身이 李明博 政府를 "中道實用 政府"로 評價한다고 말했으며, 李明博 政府 의 國政運營에 協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9] 또한 그는 龍山 慘事 와 關聯, "現 政府의 失策이라고 본다."고 말했지만, "海外에 나가 살면서 光州事態 가 우리만 있는 줄 알았다."며 "70年代 英國 對處 政府 當時 示威 群衆에 發砲해서 30-40名의 鑛夫가 죽었다."고 指摘한 뒤 "그런 過程을 겪으면서 社會가 가는 것이다."라고 自身의 意見을 말하며 論難에 휩싸였다. [9] 이런 行步에 對해 保守 論客인 박효종 서울大學校 敎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歲月의 흐름에 따라 理念이나 價値觀의 變化를 겪을 수 있다. 황석영 氏의 發言을 놓고 變節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不適切하다."고 말했다. [10] 反面에 進步 性向의 손호철 서강대학교 敎授는 "自身의 行動을 正當化하기 위해서 MB 政府를 中道라고 規定하는 건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批判했다. [10]

以後 황석영은 2009年 6月 7日 , 한겨레 新聞을 통해 李明博 政府 支持를 한달도 안돼 撤回했다. 이에 對해 황석영은 " 李明博 政府 의 內容이라는 게 내가 살아왔던 것과 다르지만 南北關係를 변화시키는 데 一助하는 役割을 하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訪北, 亡命을 거쳐 1998年 監獄을 나온 뒤 《바리데기》,《개밥바라기 별》,《江南몽》,《낯익은 世上》으로 이어지는 作品들이 自身의 後半期 文學이라 말하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自己 變貌ㆍ變身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2年 '登壇 50周年'을 맞이하는 所感에 對해서는 "現在에서 가까운 記憶들은 지워버리고 自己가 남겨야 할 記憶을 간추리고 再整理하듯 晩年文學은 根源과 出發로 돌아가 여러 關係를 整理하고 큰 線에서 整理해야 한다."고 말했다. [11]

2012年 登壇 50周年을 맞아 낸 小說《여울물 소리》出刊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올해 七旬이나 앞으로 10年은 더 우리 社會에 必要한 發言을 繼續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改憲을 통한 權力 分散, 經濟民主化, 北方政策 等 세가지 目標를 이루고 싶다며 特히 李明博 政府 에 期待했던 '北方政策'을 宿願事業으로 꼽았다. 몽골부터 카자흐스탄까지 北方 國家들과의 經濟協力과 文化交流를 이룸으로써 韓半島 平和의 기틀을 닦는다는 게 그가 主張하는 '北方政策'의 骨子다. 이를 爲해 2009年 李明博 과 中央아시아 巡訪에 同行했다가 많은 批判에 시달렸던 그는 그間 長篇을 發表하면서 政治와 距離를 두며 元老作家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2012年 大選을 契機로 野圈候補를 支持하며 野圈 大選 候補인 文在寅 候補와 安哲秀 候補의 單一化 過程에 關與하기도 했다. [12]

評價와 批判 [ 編輯 ]

評價 [ 編輯 ]

그의 小說은 1970年代 初盤 以後의 社會的 狀況에 對해 銳利하면서도 客觀的인 視線과 剛한 問題意識을 보여주는 點이 特徵이다. 維新政權 開發 優先 政策 科 産業化·近代化의 跛行的 展開 等이 황석영의 透徹한 時代意識과 맞부딪침으로써 그의 小說을 더욱 問題的인 作品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特히, 《 客地 》, 《 삼포 가는 길 》은 都市化와 産業化 優先의 開發政策이 惹起한 離農現象과 農村의 崩壞現象 等 當時 社會的 矛盾의 核心을 꿰뚫고 있는 作品이다. 實際 《 삼포 가는 길 》에서 故鄕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故鄕인 삼포마저 産業化되었다는 消息을 듣고 主人公 영달이 발길을 돌리는 結末은 産業化로 인해 安息할 故鄕마저 잃어버린 勞動者들의 삶을 象徵한다.

그가 1980年代 에 發表한 長篇小說 《 장길산 》은 支配層 中心의 史觀이 두드러지는 旣存의 歷史小說이 지닌 根本的인 限界를 뛰어 넘어서 홍명희 의 《 임꺽정 》 以後에 斷絶된 民衆的 英雄像을 小說 속에서 다시 復活시킨 作品이다. 民衆의 恨을 歷史變革의 힘으로 승화시킨 그의 小說은 根本的으로는 '歷史意識'의 바로세우기에서부터 出發하며 男性的인 투박한 '힘'李 두드러지는 强한 文體로서 小說 全體의 이야기를 迫眞感 있게 展開시키고 있다.

《客地》, 《 삼포 가는 길 》의 結末 部分에서 쉽게 確認할 수 있듯이 그의 小說은 暗鬱한 現實 속에서도 未來와 人間에 對한 希望을 抛棄하지 않는 强靭한 性格의 '人間'에 焦點을 맞춘다. 마치 풀뿌리의 끈질긴 生命力처럼 苦痛과 試鍊을 견디고 未來를 向한 剛한 鬪爭 意欲과 生命力을 發散하는 '人物'의 浮刻은 그의 小說의 뛰어난 魅力이자 讀者들을 끌어들이는 魔力이다. 現實參與派로 政治思想的으로 社會民主(사민主義)的 進步主義者로 分類된다.

以外 履歷 [ 編輯 ]

作品 [ 編輯 ]

長篇小說 [ 編輯 ]

短篇小說集 [ 編輯 ]

戱曲 [ 編輯 ]

非小說 [ 編輯 ]

飜譯小說 [ 編輯 ]

短篇選 編輯 [ 編輯 ]

受賞 [ 編輯 ]

  • 2004年 第8回 萬海對象 文學賞 [13]
  • 2004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올해의 藝術賞 [14]
  • 2008年 第3回 마크 오브 리스펙트上

論難 [ 編輯 ]

황석영은 民主化 運動, 訪北, 國家保安法 違反 收監 等 '進步 路線'을 걸어오다 2009年 5月 15日 北方定策에 對해 期待가 된다며 李明博 과 中央아시아 巡訪 同行 및 支持 發言으로 論難에 휘말리게 된다. 以後 한달이 안돼 2009年 6月 7日 , 李明博 政府 의 對北 强勁政策에 對해 失望했다며 支持를 撤回했고 다시 批判者로 돌아서서 進步人士로 活動하고 있다. [15]

光州 民主化 運動 發言 論難 [ 編輯 ]

1985年, 1980年 5月 光州 民主化 運動의 記錄物인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를 出刊했던 만큼 [16] 2009年 李明博 과 巡訪을 다녀와 現 政權을 支持한다며 光州 民主化 運動을 '光州事態'라고 發言한 것과 關聯해 論難이 일며 黃 作家의 블로그에 失望글이 가득 올라오기도 했다. [17] 황석영은 '光州가 바로 나의 文學'이라며 西歐에서도 그런 猖披한 일이 있더라는 것을 말하려던 것이라고 解明했다. [18] 以後 李明博 政府 에 失望을 했다며 支持를 撤回하고 進步人士로 活動한 황석영은 2013年 1月 5日 光州를 訪問해 힐링 사인會를 열며 '湖南은 韓國 民主化의 中心'이라 評했다. [19]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
  1. 1943年 12月 14日 出生했다는 記錄도 있다. [1]
參照
  1. 황석영, 《客地 : 重短篇全集1》, 創批, pp.331-335. 作家 年譜.
  2. “네이버 知識百科 現代文學人 황석영” . 國語國文學資料事前.  
  3. [1]
  4. [2]
  5. 구인환 엮음. “네이버 知識百科 高校生을 위한 文學 用語辭典” . 신원문화사 . 2006年 11月 5日에 確認함 .  
  6. [3]
  7. 天主敎人權委員會 (1990年 10月 5日). “保安司, 著名人士 1300名 査察” . 《活動뉴스》 (天主敎人權委員會). 2012年 2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8. [4]
  9. 황정욱 심인성 記者 (2009年 5月 13日). “<황석영 "進步, 古典的 理論 틀로는 안돼">” . 《聯合뉴스》.  
  10. 宋光浩 記者 (2009年 5月 15日). “<學界로 번진 황석영 '變節' 論難>” . 《聯合뉴스》.  
  11. 里長 임일영 記者 (2011年 6月 2日). “첫 轉作 長篇小說 '낯익은 世上'낸 황석영” . 서울新聞.  
  12. 한윤정 記者 (2012年 11月 25日). “황석영 新作 長篇小說, 女性 눈으로 男性이 만든 '近代의 弱點' 돌아봤다” . 京鄕新聞. 2013年 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5月 26日에 確認함 .  
  13. 김한수 (2009年 8月 10日). “[2009 萬海祝典] 만델라·달라이 라마·임권택… 國境·宗敎·分野 網羅한 '큰 별'들” . 朝鮮日報 . 2023年 3月 18日에 確認함 .  
  14. [5]
  15. 임미나 記者 (2011年 6月 1日). “황석영, 南北關係 一助하겠단 생각 如前” . 聯合뉴스.  
  16. 황석영 (1985年 5月 1日).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 (副題 : 光州 5月 民衆抗爭의 記錄)》. 풀빛出版. ISBN   9788974741440 .  
  17. 박소연 記者 (2009年 5月 15日). ' 光州事態' 發言에 황석영 블로그 亂離법석” . 아시아經濟.  
  18. 박소연 記者 (2009年 5月 18日). “황석영 '讀者와의 만남'서 誤解 풀까?” . 아시아經濟.  
  19. 배상현 記者 (2013年 1月 5日). “황석영 "湖南은 韓國 民主化의 中心 " .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