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太白石炭博物館 에 展示된 사북事件 案內板

사북 事件 (舍北事件) 또는 사북炭鑛 勞動抗爭 (舍北炭鑛勞動抗爭, 英語 : Sabuk Coal Mine Labor Struggle )은 1980年 4月 21日 江原道 旌善郡 사북읍 에 位置한 動員炭座 사북鑛業所에서 勞使間의 極甚한 葛藤이 發端이 되어 일어난 勞動運動, 民主化運動이다.

背景 [ 編輯 ]

1980年 動員炭座는 國內 最大의 民營炭鑛이었다. 全國 採炭量의 9%, 下請 炭鑛까지 包含하면 11%를 차지했다. 그러나 當時 炭鑛의 狀況은 매우 劣惡했다. 坑道 埋沒事故가 頻繁하게 일어났고 塵肺症 에 시달리는 鑛夫가 許多했다. 높은 勞動 强度 때문에 都市 勞動者에 비해서는 賃金을 더 받았으나 그조차도 當時 最低 生計費에 미치지 못하는 月平均 15萬 5千원이었다. [1]

政府는 70年代에 일어난 오일쇼크 의 餘波를 克服하기 위해서 石炭産業 育成政策을 實施하고 있었다. 빠른 産業 育成을 目標로 하니 勞動者의 生活을 더욱 疲弊해져 갔다. 이러한 狀況에서 勞動者들이 爭議하게 된 發端은 御用勞組였다. 當時 動員炭座의 御用勞組는 前科者와 不良輩 出身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社側의 입맛에 맞게 行動했으며, 勞組 支部長으로 이재기를 選出했다. [2]

展開 [ 編輯 ]

1980年 4月 16日 勞使紛糾가 일어났고 18日부터 勞動者들은 賃金引上과 御用勞組 支部長의 辭退를 要求했다. 그러나 社側은 이들의 要求를 듣지 않고 警察을 개입시켰다. 警察은 御用勞組와 會社 側을 斗頓하며 偏頗的으로 行動했다. 이러한 狀況에 御用勞組 支部長 이재기가 逃亡을 치자 事態는 急물살을 탄다.

4月 21日 勞動者와 그들의 家族 6,000餘 名이 示威를 벌였다. 그 過程에서 勞動者가 警察車에 치이는 等 流血 事態가 벌어졌다. 結局 炭鑛 勞動者들의 不滿은 極에 達해 1980年 4月 21日부터 24日까지 4日 동안 사북읍 市街地를 占據하고 示威를 벌였다. 公權力이 無力化되고 警察과의 流血事態가 일어났다. 警察署가 占領 되었으며 逃亡친 이재기 支部長을 追跡하려 그의 아내에게 暴力을 行使하기도 했다. 그러나 秩序를 維持하려는 努力도 어느程度 隨伴되었다. [3]

24日 盧·사·政 代表가 合意에 到達했다. 與野政治人들이 現場을 다녀가고 事態가 平和的으로 收拾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事態가 鎭靜되자 當時 戒嚴司令部는 合意를 깨고 事件 關聯者와 그들의 家族 81名을 軍法會議에 送致하였다. 戒嚴司令部는 이들에게 모진 拷問과 毆打, 性拷問 等을 加하며 自白을 要求했다. 이 過程에서 被害者들은 遺産 과 深刻한 身體的, 精神的 後遺症을 얻고 2~3年間 監獄生活을 했다. 以後 眞相糾明을 통해 밝혀진 事實에 따르면, 調査 前에 미리 主動者 名單을 作成해 ‘짜맞추기 搜査’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事件 以後 [ 編輯 ]

사북事態以後 1980年 10月 全斗煥 前 大統領이 사북鑛業所에 訪問해서 劣惡한 鑛夫들의 處遇改善하겠다고 約束을 했다. [4] 그러나 사북鑛業所 鑛夫들의 抗爭은 1987年 6月 民主抗爭 과 7月 勞動者 大鬪爭 의 起爆劑 役割을 했다.

하지만, 1980年代 石油 供給過剩 餘波로 國際油價 暴落 및 國民所得 向上으로 煉炭 消費量이 減少하자, 1987年 10月 13日 政府는 石炭産業合理化 對策을 發表했다. 그 結果, 大規模 構造調整으로 零細炭鑛들이 廢鑛되었고 사북鑛業所는 2004年 10月 23日 公式的으로 門을 닫았다. [5]

1993年 2月 金永三 政府 에 이어 김대중 政府 로 이어지자 本格的으로 사북 事態의 眞相糾明 要求가 나왔다. [6] 2005年 國務總理 所屬 民主化運動 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審議委員會는 사북事件 當時 抗爭指導部였던 이원갑 氏와 神經 氏 等 2名의 名譽回復 申請을 받아들여 民主化運動 關聯 認定者로 確定ㆍ發表하였다. [7] 또 2008年 4月 眞實ㆍ和解를 위한 過去史 整理委員會는 當時 連行ㆍ拘禁된 關聯者와 家族들에게 行해진 人權侵害와 苛酷行爲에 對해 國家의 謝過를 勸告하였다.

그리고 2015年 2月 서울高法 刑事6部(裁判長 김상환)는 사북抗爭을 主導했다는 理由로 各各 懲役 2年에 執行猶豫 3年과 懲役 2年을 宣告받았던 이원갑 氏와 神經 氏의 再審에서 無罪를 宣告했다.

各州 [ 編輯 ]

  1. ' 사북抗爭' 歷史的 再評價 서둘러야” . 《오마이뉴스》. 2002年 6月 5日.  
  2. “民主化運動 오픈 아카이브” . 2021年 4月 22日에 確認함 .  
  3. 박태균 서울대 國際大學院 敎授 (2010年 4月 23日). “[그때 오늘] 사북 炭鑛 勞使紛糾 流血事態로 번지다” . 《中央日報》.  
  4. “大統領 江原道 視察” . 《大韓뉴스》. 1980年 10月 8日.  
  5. “<80年 사북事態 現場 사북鑛業所 歷史속으로>” . 《聯合뉴스》. 2004年 10月 22日.  
  6. 배연호 記者 (2001年 9月 11日). “사북事態 被害者 "名譽回復하겠다 " . 《聯合뉴스》.  
  7. 변영주 記者 (2005年 8月 17日). ““暴徒의 汚名 벗어 마음 후련”… 사북勞動抗爭 主役 이원갑氏” . 《國民日報》.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