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水·順天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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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順 事件

1948年 10月 , 旅順 叛亂 事件 當時 叛亂軍의 情報要員으로 活動하다 逮捕되는 女盟員들.
날짜 1948年 10月 19日 ~ 1948年 10月 27日
場所
全羅南道 東部 一帶
結果 大韓民國 國軍 의 勝利, 叛亂 鎭壓
交戰國

대한민국 大韓民國 第1共和國

남조선로동당

  • 陸軍 14聯隊
指揮官
李承晩
송호성
원용덕
金白一
白善燁
정일권
백인엽
송석하
김창룡
김지회  
지창수  
兵力
10,000餘 名 2,000餘 名
被害 規模
軍人 約 180名
警察 74名
不明
民間人(警察 除外)
大略 3,384名(行方不明 825名 包含)

麗水·順天 事件 (麗水順天事件) 또는 旅順 叛亂 事件 (麗順事件)은 1948年 10月 19日 부터 10月 27日 까지 當時 全羅南道 麗水市 에 駐屯하고 있던 14聯隊의 軍人 2,000餘 名이 中位 김지회 , 上司 지창수 남로당 系列 軍人을 中心으로 濟州 4·3 事件 鎭壓 命令을 拒否하고 武裝 叛亂을 일으켜 이를 鎭壓하는 過程에서 全羅南道 東部 地域의 많은 民間人이 犧牲된 事件을 말한다.

이 事件으로 叛亂軍에 依해 警察 74名을 包含해 約 150名의 民間人이 살해당했고, [1] 政府側 鎭壓 軍警에 依해 2,500餘 名의 民間人이 殺害당했다. [2] [3] [4] 李承晩 政府 樹立 2個月 만에 일어난 이 事件을 契機로 李承晩 은 鐵拳 統治와 反共主義 路線을 强化하였다.

事件의 進行 [ 編輯 ]

背景 [ 編輯 ]

1948年 南朝鮮國防警備隊 ( 大韓民國 國軍 의 前身)는 募兵制였고, 다양한 方法으로 入隊 時 身元照會를 하는 只今과 달리 身元照會가 허술했기 때문에 警察 의 彈壓을 받았던 左翼 系列과 親日 地主에 反感을 품은 小作農, 貧困 勞動者의 子息들이 身分上의 保護를 받기 위해 入隊하는 境遇가 많았다. 建軍 初期 美軍政 은 軍人이 政治 敵 見解를 갖는 것에 對해서도 全혀 制裁를 加하지 않고, 完全한 思想의 自由를 保障하고 있었다. 남로당 에서 을 掌握하기 위해 일부러 僞裝入隊시킨 要員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郡內에서 많은 同調者를 包攝했다. 여기에 當時 軍과 警察은 國家主導權을 놓고 武裝衝突을 벌일 程度로 매우 關係가 좋지 않았다.

이 事件은 當時 麗水 에 駐屯 中이었던 國防警備隊 第14聯隊에서 濟州 4·3 事件 을 鎭壓하기 위하여 1個 大隊 規模의 軍人들을 派遣하기로 한 것이 發端이 되었다. 이 事件의 가장 큰 背景은 濟州道民衆抗爭의 鎭壓을 위해 濟州에 出動하라는 上部의 命令을 받은 麗水 第14聯隊가 同胞 虐殺은 할 수 없다는 報道文을 發表하고 濟州 派兵을 拒否하면서 發生했다. 이 事件은 남로당 의 指令 없이 突發的으로 일어난 軍人叛亂事件으로 始作되었으며, 남로당은 事件이 일어나자 적잖이 唐慌하였으나 結局 承認할 수 밖에 없었다.

14聯隊의 叛亂과 鎭壓 [ 編輯 ]

  • 1948年 10月 19日  : 麗水에 駐屯 中이었던 國防警備隊 14聯隊의 一部 軍人들이 武裝叛亂을 일으키고, 警察과 많은 右翼 人士들을 殺害했다. 이 過程에서 麗水警察署長과 査察係 職員 10名, 한민당 麗水支部長, 大同靑年團 麗水地區委員長, 警察署後援會長 等과 그 家族을 包含해 70餘 名이 殺害당했다. 叛亂軍은 麗水를 占領한 後 순천시로 移動해 中尉 홍순석 이 指揮하는 14聯隊 2個 中隊 兵力과 結託해 順天을 掌握하고는 殺人, 掠奪, 放火 等을 저질렀다.
  • 10月 21日  : 叛亂軍이 筏橋, 寶城, 高興, 光陽, 求禮를 거쳐 10月 22日에는 谷城 까지 占領하였다. 이에 李承晩 政府는 10月 21日 麗水, 順天 地域에 戒嚴令 을 宣布하고, 송호성 准將을 總司令官에 임명해 10個 大隊 兵力을 이끌게 하고는 鎭壓을 命令하였다.
  • 10月 22日  : 鎭壓軍이 午後 3時에 順天 攻擊을 始作하였다. 叛亂軍의 主力은 光陽 및 隣近 山岳地帶로 後退하기 始作했다.
  • 10月 23日  : 鎭壓軍이 午前에 順天을 掌握하였다. 鎭壓軍은 順天 掌握 直後 一瀉千里로 光陽 一帶의 叛亂軍 主力을 殲滅하고, 麗水를 奪還하기 위한 2段階 作戰에 들어갔다. 하지만 叛亂軍은 麗水의 入口인 美評 近處에 埋伏, 鎭壓軍을 襲擊했다. 이로 因해 司令官 송호성 准將이 鐵帽에 銃을 맞고 裝甲車에서 떨어져 鼓膜이 터지고 허리負傷을 입었다. 이 渦中에 叛亂軍의 主力이 白雲山 智異山 으로 逃亡쳤다.
  • 10月 25日 : 鎭壓軍의 麗水 市內에 對한 迫擊砲 射擊을 始作으로 市街戰이 이틀 동안 繼續되었다.
  • 10月 27日 : 鎭壓軍이 麗水를 完全히 掌握하였다.

極右 連累說 流布 [ 編輯 ]

旅順 事件 直後, 李承晩 政府는 極右 勢力 [5] 一部가 이 叛亂에 同調했다는 主張을 流布하고, 內務部는 警察局에 搜査를 指示하였다. 當時 國務總理 國防長官 이었던 이범석 10月 21日 記者會見에서 "이 事件은 政權慾에 눈이 먼 沒落 極右政客이 共産黨 과 結託해 벌인 政治的 陰謀"라며 事實上 金九를 指目했다. [6]

이番 國軍이 일으킨 叛亂의 主要 原因과 暴動 性質은 數式 前에 共産主義者가 極右의 政客들과 結託해서 反國家的 叛亂을 일으키자는 策動이었다. [7]

? 서울新聞 (1948年 10月 22日 記事)

10月 21日 午前 11時, 이범석은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旅順事件을 '共産主義者가 極右 政客들과 結託해 일으킨 反國家的 叛亂'이라고 規定하고, [7] [8] 國軍 內의 '主謀者는 麗水 聯隊長이었던 오동기 (吳東起)'라고 指目했다. [8]

10月 22日 , 이범석은 '叛亂軍에 告한다'는 題目의 布告文에서 '叛亂軍이 一部 그릇된 共産主義者와 陰謀 政治家의 謀略的 以上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면서 '極右政客'을 再次 言及하였다. [7] 같은 날 김태선 首都警察廳長度 장단을 맞추었다. 같은 해 10月 1日 發生했던 '革命 義勇軍 事件'에 對한 搜査發表를 통해 輿論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等이 自己를 旅順事件의 背後에 있는 極右派로 指目하자 金九는 憤慨하였다.

10月 27日 , 金九는 旅順事件 鎭壓 直後 公式 記者會見을 열어 "極右分子가 今番 叛亂에 參與했다는 말을 理解할 수 없다"며 反駁하였고, 그의 反駁文이 朝鮮日報 를 통해 報道되었다. [6]

나는 極右分子가 今番 叛亂에 參與했다는 말을 理解할 수 없다. 그들은 極右라는 用語에 關하여 다른 解釋을 내리는 自身만의 辭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漢城日報 (1948年 10月 28日 記事)

急히 열린 臨時國會에서 國會議員 정광호 는 極右가 參加했다는 國防部 長官의 發表 때문에 民心이 나쁘다며 極右가 參加했다는 發表에는 訂正이 必要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 은 極右가 參加한 것만은 事實이라고 繼續 主張했다. [9]

金九 는 旅順 事件을 叛亂, 테러로 規定했다. 10月 28日 의 公開 談話에서 金九는 '純眞한 靑年들이 容恕할 수 없는 罪를 犯하였으며', '半島(叛徒, 共産主義者)들의 目的은 北韓 政權을 南韓에 延長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規定했다. [10] 10月 30日 談話에서는 麗水, 順天 等地의 叛亂을 '集團 테러 活動'으로 規定하고, "婦女와 幼兒까지 慘殺하였다는 報道를 들을 때에 그 野蠻的 所行에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다"고 發表하였다. [11]

우리는 일찍부터 暴力으로써 살인·방화·약탈 等 테러를 行하는 것을 排擊하자고 主張하였다. 今番 麗水·順天 等地의 叛亂은 大規模的 集團테러 行動인 바, 父女 幼兒까지 慘殺하였다는 報道를 들을 때에 그 野蠻的 所行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現地에서 目擊하는 者는 悲慘 激昂함이 그 極에 達할 것이다. 南과 남의 父母妻子를 殺害하면, 남도 나의 父母妻子를 殺害하기 쉬우니 그 結果는 첫째, 우리 同族이 數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外軍에게 繼續 駐屯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自主獨立을 좀먹는 行動이니 이로써 우리는 亡國奴의 恥辱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叛亂을 일으킨 軍人과 群衆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女童(勵動)된 感情을 抑制하고 再三熟考하여 용감히 悔悟(悔悟)하고 正軌(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賢明한 同胞들도 마땅히 客觀的 立場에서 그 叛亂을 冷靜히 批判하면서 이것의 蔓延을 共同防止할지언정 虛無한 遺言에 誘惑되거나 或은 이에 附和雷同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期待와 濁部(託付)와 愛國의 萬分의 一도 報答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面目으로 여러분께 曰可曰否를 말하랴마는 今番 叛亂이 너무도 重大하므로 인하여 國家 民族에 미치는 損害가 또한 重大한 까닭에 그대로 緘口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同志 同胞는 우리의 苦衷을 깊이 諒解하고 同族相殘에서 同族相愛의 길로 共同邁進하기를 懇切히 바란다.

? 서울新聞 (1948年 10月 30日 記事)

結果 [ 編輯 ]

鎭壓軍과 警察은 麗水 , 順天 全羅南道 東部 地域에서 民間人들을 對象으로 大大的인 叛亂軍 協助자 索出 作業을 벌였고, 이 過程에서 2,500餘 名의 民間人이 抑鬱하게 殺害당했다.

李承晩 政府는 이 事件을 契機로 强力한 反共體制를 構築하였다. 軍 內部的으로는 共産主義者들을 肅淸하는 '肅軍作業'을 벌이는 한便, 1948年 12月 1日 에는 國家保安法 을 制定하여 社會 全般에 걸쳐 左翼勢力에 對한 大大的인 索出·處罰에 나섰다. [12]

旅順事件 以後 瑞獸(序數) '4'는 大韓民國 國軍의 獨立 部隊名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聯隊는 없어졌고, 4聯隊는 20聯隊로 再編되었다.

朴正熙 逮捕 [ 編輯 ]

麗水 順天 事件이 일어났던 비슷한 時期에 남로당 君師父冊이던 이재복(李在福)과 [13] 그의 祕書 兼 軍事連絡責이던 김영식이 逮捕되는 過程에서 남로당 組織名單이 入手되었고, 여기에서 當時 少領이었던 朴正熙 의 이름이 처음 發見된다. [14] [15]

김영식을 데리고 全國의 軍部隊를 돌면서 그에게 남로당 細胞들을 찍으라 했더니 以後의 搜査는 그냥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式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재복의 名單 속에 바로 朴正熙 少領의 이름이 包含돼 있었습니다. [15]
 
김안일 特務課長

朴正熙 남로당 入黨願書에 圖章을 찍거나 麗水 順天 事件에 直接的으로 加擔한 적은 없었으나 家族과 가까웠던 이재복의 裁量으로 名單에 이미 이름이 올려져 있었고(이재복은 朴正熙의 셋째 兄 獨立運動家 박상희 의 親舊이다), 搜査팀長 김창룡 은 朴正熙가 이재복이라는 남로당 巨物과 個人的인 親分이 있었던 것을 確認한 뒤 남로당 高位幹部日 可能性을 疑心하여 1948年 11月 11日 朴正熙를 逮捕한다. [14] [15]

1949年 2月 8日 軍事裁判 1審에서 朴正熙는 無期懲役과 罷免, 給料 沒收刑을 宣告 받았으나, 김점곤 1聯隊 情報主任, 강측모 前 咸鏡北道知事, 白善燁 陸本 情報局長의 努力으로 審査長官의 措置에서 懲役 15年으로 減刑된다. [15] 以後 朴正熙는 搜査側이 이미 가지고 있던 남로당 名單에 組織構圖 輪廓을 그려내며 搜査에 協助하였고, 再審査에서 白善燁 大領, 김안일 防諜課長, 김창룡 大尉 세 사람의 保證을 받고 執行停止 判決로 풀려난 民間人 身分이 된다. [16] [17]

以後 남로당으로 連累된 軍人 朴正熙는 美國 遊學 對象者로 選拔되었음에도 軍情報部代의 身元朝會 過程에서 對象者에서 除外된다. [18] 하지만 1954年 朴正熙 准將은 6個月間의 美國 留學을 마치고 2軍 砲兵團長으로 發令을 받기도 하며, [19] 1958年 朴正熙 所長은 祕密取扱 人家가 取消되며 豫編되어야 하는 思想과 成分에 問題가 있는 將校로 擧論된다. [1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旅順事件 良民 死亡者 大部分 鎭壓軍에 犧牲 한겨레新聞, 1999.10.20.
    原文 : "叛亂軍에 依해서는 90~150名이 犧牲"
  2. 旅順事件 때 順天 民間人 439名 犧牲 뉴시스, 2009.1.8.
    原文 : "犧牲된 民間人은 439名에 達한 것으로 調査됐지만, 全體 犧牲者는 2000餘名으로 推定된다."
  3. 麗水地域 旅順事件 犧牲者 124名 聯合뉴스, 2010.10.11.
    原文 : "眞實和解委는 이番 調査에서 1948年 10月 末부터 이듬해 8月까지 麗水 一帶에서 國軍과 警察에 依해 民間人 124名이 不法的으로 集團 虐殺됐으며, 이 中 91.9%가 10代에서 30代 靑年 男性인 것을 確認했다. … 다만, 1948年 11月 全南道 保健 厚生當局의 被害調査로는 全南 東部地域 6個 市郡에서 2千633名이 死亡하고 825名이 行方不明됐다."
  4. 旅順事件 60年에 慰靈塔 하나 없으니 京鄕新聞, 2008.10.21.
    原文 : "旅順事件은 解放政局에서 左翼과 右翼의 對決이 빚어낸 悲劇이자 大慘事였다. 말이 左·右翼의 對決이지 其實 良民들이 無差別 虐殺당했다. 犧牲者가 1萬名(市民團體 推定)에 이른다."
  5. 當時에는 '極右'가 오늘날처럼 反共主義者 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民族主義者 , 卽 金九 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6. <볼록거울> 國家保安法 制定 60돌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聯合뉴스 2008年 8月 29日子
  7. 金九, 旅順叛亂 '首魁'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年 10月 26日子
  8. 서울新聞 1948年 10月 22日子
  9. 國會速記錄 第1回 90號 (大韓民國 國會, 1948) 678~679
  10. 漢城日報 1948年 10月 28日子
  11. 서울新聞 1948年 10月 30日
  12. “그때 오늘 '在日 朝鮮人' 北送事業이 始作되다” . 中央日報 . 2010年 8月 13日. 2021年 4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2月 18日에 確認함 .  
  13. 勞動者의 冊 - 韓國社會主義運動家 이재복(李在福, 1906~49)
  14. 朴正熙의 生涯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36)
  15. 오마이뉴스 - 兄님 親舊 꾐에 빠져 남로당 加入
  16. 오마이뉴스 - 左翼嫌疑로 無期懲役... 再審서 '九死一生'
  17. 中央日報 - 死刑 危機서 살아난 朴正熙
  18. “배진영의 機務司(機務司) 비록 〈3〉 5·16과 防諜部隊” . 월간조선. July 2016.  
  19. “[朴正熙 生涯] 第7部 가난한 軍人의 길......<195>” . 朝鮮日報. 1998年 5月 2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