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勞動運動聯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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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勞動運動聯合 (-勞動運動聯合, 1985年 8月 25日 ~ 1986年 )은 九老同盟罷業 以後 서울地域의 勞動運動家를 中心으로 하던 大衆政治組織이다. 서노련 이라는 略語로도 불렸다.

背景 [ 編輯 ]

1985年 6月 韓國戰爭 以後 大韓民國 最初의 同盟罷業으로 記錄되는 九老同盟罷業이 發生하였다. 이 罷業으로 인해 44名의 勞動者가 拘束되고 1千餘 名이 解雇되는 傷處를 내며 事件은 終結되었다. [1] 當時 罷業을 主導하였던 歐露工團 의 勞動者들과 청계被服勞動組合 과 같은 勞動運動家들은 單位事業場의 勞動組合을 뛰어넘는 勞動組合의 連帶와 함께, 보다 根本的인 勞動者 權益의 向上을 위한 民主化運動 이 必要하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생각을 같이 하는 勞動運動家들이 모여 서울勞動運動聯合의 結成을 決意하였다. [2]

經過 [ 編輯 ]

結成 [ 編輯 ]

서울勞動運動聯合의 結成을 主導한 사람은 金文洙 , 沈想奵 , 박노해 等이었으며, 이 밖에도 여러 勞動運動家들과 柳時敏 , 백태웅 等 學生運動 出身들도 合流하였다. [3]

대우어패럴을 中心으로 한 6月 勞動者 連帶 鬪爭은 우리 勞動者들이 覺醒하여 團結될 때 얼마나 큰 힘을 發揮할 수 있는지를 實踐的으로 確認하는 重要한 契機가 되었으며, 어떠한 合法的 民主 勞組도 容納되지 않는 現在의 彈壓 狀況 아래서는 새로운 形態의 大衆 組織을 建設하지 않고서는 勞動運動의 窮極的 目標를 實現할 수 없다는 事實을 徹底히 깨닫게 하였다.
이에 우리는 서울 勞動運動 聯合의 結成을 통하여 모든 民衆 · 民主 運動 勢力과 굳건히 連帶하여, 이 땅의 一千萬 勞動者에게 賦課된 歷史的 責務를 遂行하고자 한다.
우리들이 나아갈 길은 멀고도 險難한 것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을 宣言하는 것이다.
 
— 1985年 8月 25日, 서울勞動運動聯合 創立宣言文 [4]

活動 [ 編輯 ]

서울勞動運動聯合의 主要 活動은 勞動組合의 敎育, 全斗煥 軍事獨裁 政權에 對한 反對, 勞動組合 活動 支援 等이었다. 이들은 前衛的 勞動者 組織이 韓國의 獨裁를 종식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여겼다. [2] 이에 따라 1986年 5月 1日 , 서울勞動運動聯合은 勞動節 을 記念하여 歐露工團을 中心으로 街頭集會를 主導하였다. [5]

結果 [ 編輯 ]

서울勞動運動聯合의 勞動節 街頭集會가 있은 直後인 1986年 5月 4日 , 全斗煥 政權은 서울勞動運動聯合을 國家保安法 에 依한 反國家團體로 規定하고 이들을 連行하였다. 全斗煥 政權은 아무런 搜査管轄權이 없는 保安司令部 [6] 를 動員하여 關聯者를 拘束하고 拷問 과 같은 苛酷行爲로 造作事件을 만들어내었다. [7]

保安司令部는 逮捕된 勞動運動家에게 온갖 拷問을 恣行하였고, 이들이 이른바 '三民主義'에 따라 國家를 顚覆하려는 反國家團體라는 嫌疑를 씌웠다. 그러나 當時 被告人들은 三民主義와 같은 指導理念을 使用한 적이 없다고 證言하였다. [7]

當時 保安司는 逮捕된 勞動運動家들에게 電氣拷問, 물拷問과 같은 酷毒한 拷問을 加하였다. 拷問의 主要 目的은 勞動運動家들이 國家顚覆을 企圖하였다는 것을 거짓自白하도록 하고 逮捕하지 못한 沈想奵 , 박노해 의 位置를 把握하는 것이었다. [3]

保安司에 到着하여 車에서 내리자마자 마당에서 10名이 달려들어 間諜보다 나쁜 놈이니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野球방망이로 때리고 발로 차는 等 온몸을 마구때려 失神하였다. 地下室로 끌려가 沈想奵, 박노해의 位置를 대라며 마구 때렸다.
 
(女性이었음에도)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게 하여 때렸다. …(中略)… 키가 크고 뚱뚱하며 慶尙道 사투리를 쓰는 搜査官이 들어와 파란 罪囚服을 입게 하고는 "물 좀 먹어야겠다"하며 兩팔을 捕繩으로 묶고 그 사이에 무릎이 들어가게 한 다음 木棒을 팔과 무릎 사이에 찔러넣는 俗稱 비녀꽂이 拷問을 하였다. 마치 木棒에 통닥구이가 된 것처럼 매달려 있는데 얼굴에 手巾을 덮고는 물을 부었다.
 
— 尹施主 [3]

結局 서울勞動運動聯合은 主要 構成員이 監獄에 收監됨으로써 事實上 解體되었다.

以後 [ 編輯 ]

서울勞動運動聯合이 瓦解된 뒤 金文洙 는 2年 6個月의 監獄生活을 거쳐 민중당 의 創立에 參與하였으며, 沈想奵 은 繼續되는 手配生活에도 全國勞動組合協議會 의 創立에 參與하였다. 한便 박노해 , 백태웅 等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를 組織하여 急進的인 社會主義 運動을 主張하였다.

評價 [ 編輯 ]

서울勞動運動聯合의 活動에 對해서는 '小그룹 運動을 克服하고 80年代 以後 先進勞動者의 成長으로 인해 高揚된 勞動者 力量을 담아내야 한다는 要求에 副應하려는 努力이었다'는 意味를 附與하는 評價가 있는 反面, '勞動者들과 大衆과는 遊離된 活動家들의 自己中心主義를 들어냈다'는 批判도 있다. [7]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歷史問題硏究所, 歷史批評, 1995年 여름號, 104쪽
  2.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8, 188쪽, ISBN   89-76-96526-4
  3. 朴元淳, 野蠻時代의 記錄 3, 역사비평사, 2006, 186-194쪽, ISBN   89-76-96521-3
  4. 서울勞動運動聯合 創立宣言文
  5. 歷史學硏究所, 메이데이 100年의 歷史, 서해문집, 2006年, 162쪽, ISBN   89-74-83215-1
  6. 오늘날 國軍機務司令部 의 前身
  7. 朴元淳, 國家保安法硏究 2, 역사비평사, 2008, 275-276쪽, ISBN   89-76-96303-2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