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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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宋斗律, 毒文明 Song Du-yul , 1944年 10月 12日 ~ )은 韓國系 獨逸人 社會學 者, 哲學 字로, 獨逸 뮌스터 大學校 社會學 , 哲學 敎授였다. 本貫은 여산 (礪山)이며 獨逸式 이름은 Du-yul Song (두율 송)이다.

生涯 [ 編輯 ]

1944年 10月 12日 日本 도쿄 아라카와區 에서 태어났다. 父母는 모두 濟州道 出身이다. 아버지 송계범 日本 도쿄 物理學校 를 卒業하고 解放 直前 경성제국대학 物理學部에서 勤務하였다. 송계범이 韓國 戰爭 以後 전남대학교 物理學科에서 勤務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50年부터 1960年까지 光州 에 居住하며 光州 중앙초등학교와 書中學校를 卒業했다. 1960年 서울 로 移住해, 경기고등학교 入試에 挑戰했지만 落榜하고 中東高等學校 에 入學했다. 중동고 2學年 때의 擔任 先生님은 後날 高麗大學校 社會學科 敎授가 된 최재석 이었다. 敎師 송찬식(後에 國民大 史學科敎授)의 勸誘로 哲學을 專攻하게 되었다.

1963年 서울大學校 哲學과 에 入學하였으며, 1965年 韓日會談 反對 運動을 하면서 大學 時節 59學番이던 是認 金芝河 와 알게 된다.

1967年 獨逸로 留學해 1972年 위르겐 하버마스 의 指導로 哲學 博士 學位를 取得했다. 1972年 뮌스터 大學校 社會學科 助敎授로 採用되어 政治經濟學, 社會學方法論, 後進國社會學을 講義했으며, 뮌스터 에서 정정희와 結婚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1973年 北韓을 처음으로 訪問했고, 北韓 勞動黨 에 加入하였다. [1] 그는 以後 總 18回 北韓을 訪問하였다. 獨逸에서 大韓民國 學術院을 運營하며 北韓에서 支援金을 받았다. 1974年 '民主社會建設協議會'를 組織하여 議長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維新 獨裁 反對 示威에 積極 參加하였다. 1977年 베를린 子游大學 으로 옮겨 活動하였다.

1981年 共産主義에 對해 內在的 方法으로 批判的인 分析을 한 論文 '蘇聯과 中國'을 發表하였고, 1982年 1月 社會學 敎授資格 論文을 마무리하여 敎授資格을 받았다. 1988年과 1989年에는 美國 롱아일랜드大學 哲學科 招聘敎授로 在職하였다. 1991年에는 北韓 社會科學院 招請으로 김일성 綜合大學 에서 講義하였으며 김일성과 대면하였다. 1994年부터 베를린 훔볼트 大學 敎授로 採用되었다. 1997年에 獨逸 市民權을 取得하였으며, 김일성의 葬禮式에 參與하기 위하여 北韓을 訪問하였다.

2003年 大韓民國에 歸國했으나, 檢察이 拘束令狀을 申請했다. 서울地方法院 최완주 部長判事는 2003年 10月 22日 "犯罪事實이 疏明되나 被疑者가 嫌疑를 否認해 證據湮滅 憂慮가 있고 높은 處斷型이 豫想돼 逃走 憂慮가 있다"는 理由로 拘束令狀을 發付했다. 조선로동당 政治局 候補委員 김철수라는 嫌疑( 國家保安法 違反)를 받아 起訴되었다. 1審 裁判部( 서울中央地法 , 裁判長 이대경 部長判事)는 7年의 懲役刑을 宣告하였다. 그는 審問 過程에서 '김일성 主席은 살아온 過程 等을 볼 때 尊敬받을 만한 價値가 있으며 나도 尊敬한다'고 陳述하였다. [2] 2004年 7月 21日 2審 裁判部( 서울高法 , 裁判長 김용균 部長判事)는 起訴된 事件 內容中 訪北 事實을 除外한 間諜 嫌疑 等 大部分을 無罪로 判定하여 懲役 3年에 執行猶豫 5年을 宣告했다. [3] 그날로 宋 敎授는 拘束 9個月 만에 釋放됐고, 2004年 8月 初에 夫人과 함께 獨逸 로 出國했다.

2004年 7月 抗訴審에서 執行猶豫로 풀려난 송두율은 "2003年 10月 24日 ~ 11月 6日 서울拘置所에 收監돼 있는 동안 捕繩줄과 手匣에 묶인 채 檢察 調査室에서 調査를 받는 等 不當한 戒具 使用으로 精神的 被害를 입는 等의 人權을 침해당했다"며 國家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訴訟을 提起했다. 서울중앙지법 民事12單獨 최지수 判事는 2005年 1月 7日 "當時 情況上 송두율이 逃走하거나 暴行할 憂慮가 없었는데도 戒具를 使用한 것은 人權 侵害의 素地가 있다 國歌는 搜査機關의 不法行爲에 對해 賠償할 責任이 있다 無罪推定의 原則에 따라 被疑者의 防禦權을 充分히 保障하기 위해 戒具 使用은 合理的이고 正當한 理由가 있을 때에 한해 最小範圍에서 許容돼야 한다 無理한 戒具 使用은 被疑者의 心理를 위축시켜 實體的 眞實의 發見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理由로 "國家는 송두율에게 100萬 원을 支給하라"며 原告 一部勝訴 判決했다. [4]

서울중앙지법 民事 88單獨 김래니 判事는 調査過程의 辯護人 立會를 不許한 檢査와 國家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訴訟에서 "拘束狀態에 處한 被疑者에게 辯護人과의 接見·交通權은 人權保障과 防禦準備를 위해 必須不可缺한 權利이다"라고 하면서“국가는 500萬 원, 關聯 檢事 4名은 各各 100萬 원씩 모두 900萬 원을 支給하라”며 原告 一部勝訴 判決을 내렸다 송두율 側 辯護人團은 2003年 10月 송두율이 拘束收監된 以後 檢察이 保安을 理由로 辯護人 立會를 許容하지 않자 "立會不許 決定을 取消하라"는 準抗告를 냈으며 法院은 이를 받아들여 辯護人 立會不許 取消를 決定했다.

2008年 4月 17日 上告審(2004度4899)에서 外國人이 外國에 居住하다가 北韓에 간 것은 國家保安法의 適用 對象이 아니라는 趣旨로 一部 破棄還送 判決을 받았다. 2008年 8月 24日 서울高法은 確定 判決을 내렸다.

2009年 여름 學期를 끝으로 뮌스터 大學校 에서 退任했다. [5]

社會 運動 [ 編輯 ]

1960年代 獨逸 留學 中 朴正熙 政權 이 試圖한 維新 體制 改憲 反對 運動을 主導하여, 反體制 人士로 낙인찍혔다. 以後 獨逸에 머물며, 南韓과 北韓 社會에 對한 硏究를 繼續하며 一連의 著書를 썼다. 그 안에 北韓 社會를 理解하는 方法으로 內在的 接近論 을 내세우며 大韓民國 民主化 運動과 統一運動에 큰 影響을 미쳤다.

1995年 부터 베이징 에서 南北의 學者들이 만나 學術的인 交流를 갖는 南韓/北韓 學術 會議를 主導했다.

著書 및 論文 [ 編輯 ]

論文 [ 編輯 ]

  • 1972年 哲學 博士 學位 論文 〈Aufklarung und Emanzipation : Die Bedeutung der asiatischen Welt bei Hegel, Marx und M. Weber〉, Berlin:X-Press, 1987 : 論文의 指導敎授는 위르겐 하버마스 이다.

著書 [ 編輯 ]

  • 啓蒙과 解放-헤겔과 마르크스와 베버의 東洋世界觀/ 한길사, - 1988 (236쪽)-原文을 飜譯하고 ‘1985年 추고’를 덧붙임
  • 啓蒙과 解放, 當代, 1996 (264쪽) : 位 飜譯本에다 2篇의 論文을 덧붙인 改正增補版으로 韓國語版 ‘正本’
  • 1980, (송두율 便) Wachstum, Diktatur und Ideologie in Korea (大韓民國 內 成長, 獨裁 그리고 이데올로기)
  • 1982, 社會學 ‘敎授 資格(venia legendi)’ 獲得: 敎授 資格 論文(Habilitation-Schrift), 1981年 提出 - Sowjetunion und China : Egalisierung und Differenzierung im Sozialismus (蘇聯과 中國-社會主義內에서 平等化와 差等化), Frankfurt am Main:Campus, 1984
  • 윤도현, 이성백 옮김, 蘇聯과 中國-社會主義 社會에서의 勞動者·農民·知識人/ 한길사, 1990 (302쪽)
  • 1990, Metamorphosen der Moderne : Betrachtungen eines Grenzgangers Asien und Europa (近代의 變形-아시아와 유럽사이에서 한 境界人의 考察), Munster:Wulf-Verlag
  • 1990, 현대와 思想-社會主義·(탈)현대·민족/ 한길사 (324쪽)
  • 1991, 轉換期의 世界와 民族知性/ 한길사 (228쪽)
  • 1995, Korea-Kaleidoskop : Aktuelle Kontexte zur Wiedervereingung (韓國이라는 거울 : 統一에 關한 現實的 脈絡), Osnabruck
  • 1995, 歷史는 끝났는가/ 當代 (378쪽): 현대와 思想”에서 5篇, “轉換期의 世界와 民族知性”에서 3篇을 再收錄
  • 1995, 統一의 論理를 찾아서/ 한겨레新聞社
  • 1998, 21世紀와의 對話/ 한겨레新聞社 (271쪽)
  • 2000, 民族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新聞社 (309쪽): “統一의 論理를 찾아서”의 改訂版 準備하려다가 새 冊 執筆
  • (송두율 便) Sudkorea : Kein Land fur friedliche Spiele (南韓 : 平和로운 놀이가 없는 땅 )
  • 2002, Schattierungen der Moderne : Ost-West-Dialoge in Philosophie, Soziologie und Politik (現代의 明暗 : 哲學, 社會學 그리고 政治學에서 東-西 對話),
  • 2002, 境界人의 思索/ 한겨레新聞社 (295쪽) - 위 獨逸語 著書에서 5篇의 글을 뽑아 이 冊의 ‘4部’에 실었다.
  • 2007, 未完의 歸鄕과 그 以後/ 후마니타스
  • (出刊豫定) Konstitution der Moderne (現代性의 構成)
  • 2012, 境界人の眼から見たカントの世界市民主義 in: カント?究? 編、石川求?寺田俊? 編著, 世界市民の哲?* (現代カント?究12), 晃洋書房(京都), pp. 137-163
  • 2012. Korea - von der Kolonie zum geteilten Land (코리아-植民地에서 分斷國으로), Wien (Rainer Wernig 共著)
  • 2017, 불타는 얼음. 境界인 송두율의 自傳的 에세이/ 후마니타스 (396쪽)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하영 記者 (2004年 5月 20日). “송두율 "國保法으로 維持되는 民主主義는 問題 " . 《프레시안》.  
  2. 전진배 記者 (2003年 11月 19日). “송두율氏 "김일성을 尊敬한다 " . 《中央日報》.  
  3. " 송두율 氏 政治局 候補委員 認定 안돼"<법원>(종합)” . 《聯合뉴스》. 2004年 7月 21日.  
  4. 김지성 記者 (2005年 1月 8日). “송두율氏 人權侵害 損賠訴 勝訴/ "捕繩·手匣으로 精神的 被害 100萬원 國家 賠償 " . 《韓國日報》.  
  5. [1] Archived 2015年 2月 20日 - 웨이백 머신 , Wiener Zeitung, 2012年 7月 8日, Stefan Kraft: Du-Yul Song: ?Koreas Teilung ist der Grund allen Ubels“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