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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烈한 黨爭과 不安 親子殺害로 歸結|新東亞

朝鮮의 아버지들 〈마지막回〉

激烈한 黨爭과 不安 親子殺害로 歸結

아버지 英祖의 悲劇

  • 백승종 |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16-11-23 11: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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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思悼世子는 아버지 英祖의 命에 따라 뒤주에 갇혀 죽었다. 一角에선 富者가 黨爭에 깊숙이 얽혀드는 바람에 悲劇이 일어났다고 본다. 다른 쪽에선 不幸한 王室 家族史에서 事態의 本質을 찾는다. 하지만 思悼世子의 아들 正祖의 視角은 또 달랐다.
    1762年 尹 5月 13日, 영조는 思悼世子의 世子 地位를 剝奪했다. 아들은 昌德宮 휘令前 앞에 둔 뒤주에 갇혔다. 여드레 後 28歲 아들은 숨을 거뒀다. 이른바 ‘壬午花邊(壬午禍變)’이다.

    未曾有의 事態였다. 仁祖가 淸나라에 人質로 붙잡혀 있다 歸國한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소현世子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건 風聞에 지나지 않았다. 思悼世子의 境遇는 달랐다. 父王의 指揮 아래 親子殺害 事件이 一瀉千里로 進行됐다.

    휘令前은 英祖의 整備 精誠王后 徐氏의 位牌를 모신 祠堂이다. 정성왕후는 思悼世子에게 親어머니와 다름없었다. 世子의 生母는 迎賓 李氏지만 世子는 精誠王后를 法帽(法母, 法的 母親)로 받들었다. 英祖가 휘令前 앞에서 世子를 죽인 理由는 뭘까. 兩親이 한마음으로 不孝 不忠한 子息을 嚴罰한다는 意味였을 것이다.

    歷史 記錄에 따르면, 아버지 英祖, 生母 迎賓, 法帽 정성왕후, 丈人 洪鳳漢 等 4名이 一致團結해 世子를 極刑에 處했다. 영조는 “꿈에 정성왕후 徐氏가 나타나 世子의 逆謀 事實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生母 迎賓의 告發에 따라 죽이게 됐다”고도 했다. 世子의 丈人 홍봉한度 事件에 깊이 關聯됐다. 휘令前 앞에 뒤주를 待令한 이가 바로 그다. 영조는 오래 前부터 親子殺害를 念頭에 뒀다.



    모두가 犧牲者?

    첫째, 영조는 世子의 生母 迎賓에게 아들의 飛行을 告發하도록 壓迫했다. 迎賓이 自發的으로 世子를 죽이자고 했을 可能性은 稀薄하다. 王이 世子를 除去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迎賓은 어쩔 수 없이 따랐을 것이다. 世子가 죽은 뒤 迎賓은 시름시름 앓다 2年 만에 숨을 거뒀다.

    둘째, 丈人 홍봉한度 사위를 죽이자고 나섰을 理 없다. 世子는 實로 오랫동안 丈人을 믿고 따랐다. 英祖의 强壓이 없었다면 洪鳳漢이 사위를 가둘 뒤주를 기꺼이 闕內로 搬入할 理由가 없었다. 世子가 죽자 洪鳳漢은 自身의 딸 혜경궁과 世孫을 집으로 데려가 保護하기도 했다. 그랬건만 後날 政略에 휘말려 사위를 버렸다는 얼토당토않은 非難을 받게 된다.

    셋째, 영조는 一時的 感情이 暴發해 世子를 죽인 게 아니다. 살려달라고 哀乞伏乞하는 아들을 여드레 동안이나 外面한 것을 봐도 親子殺害를 決心한 父王의 覺悟는 끔찍히도 斷乎했다.

    英祖의 孫子 正祖는 아버지 思悼世子를 위해 ‘顯隆園地(顯隆園誌)’를 썼다. 1789年(正祖 13) 10月, 思悼世子의 墓를 京畿 火星으로 移葬한 뒤다. 正祖는 壬午花邊을 ‘나경언 事件’(1762)의 結果로 認識했다. 나경언은 1762年 5月 22日, 思悼世子의 飛行을 條目條目 列擧했다. 貞操에 따르면, 영조는 나경언의 告發에 眩惑돼 사랑하는 世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正祖는 英祖가 臣下들의 謀略에 속아 넘어가 思悼世子를 죽였다면서, 아버지 思悼世子뿐 아니라 할아버지 英祖와 自己 自身도 黨爭의 犧牲者라고 主張했다. 正祖의 이러한 觀點은 自身의 政治的 利益을 考慮해 設定된 것이다. 正祖는 王室의 一致와 和解를 위해 王室 構成員 모두가 黨爭의 犧牲者라는 有權解釋을 내린 것이다.



    영·正祖의 解釋 差異

    英祖도 壬午花邊을 政治的으로 解釋했다. 영조는 世子를 죽인 지 보름 만에 그의 復權(復權)을 命令했다. 張差 世孫(正祖)을 保護하기 위해 必要한 措置라고 强調했다. 영조는 自身이 죽인 아들의 죽음을 哀悼하며 ‘使徒(思悼)’라는 諡號를 내렸다.

    이태가 지난 1764年엔 ‘金燈支社(金?之詞)’를 지어, 思悼世子의 祠堂인 水銀墓에 保管케 했다. ‘오직 宗廟社稷을 위해 世子를 除去했을 뿐, 王位는 張差 賢明한 世孫(正祖)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이 決定은 黨派 싸움과는 無關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絶對 論難을 벌이지 말라….’ 大略 이러한 內容을 담았을 것으로 推測된다.

    壬午花邊의 原因을 思悼世子 한 사람의 個人的 飛行 탓으로 돌리는 것, 이것이 영조의 뜻이었다. 要컨대 世子의 죽음에 關해선 어느 누구에게도 政治的 責任이 없다. 英祖의 立場은 單純明瞭했다.

    正祖의 解釋은 달랐다. 그는 思悼世子를 죽음으로 내몬 責任이 一部 臣下들에게 있다고 봤다. ‘顯隆園地’를 編纂한 本意는 그러한 主張을 굳히는 데 있었다. 思悼世子를 窮地로 몬 老論 僻派와 英祖의 繼妃 정순왕후 一派를 政治的으로 壓迫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死亡한 老論 僻派의 代身 김상로의 官爵이 追奪됐다. 正祖의 外從祖父 홍인한에게도 賜藥이 내려졌다. 김상로와 洪啓禧 等을 ‘積薪(賊臣)’, 卽 逆賊이라고 罵倒하기도 했다. 영조는 ‘金燈支社’를 통해 將來의 政治的 報復을 遮斷하고자 했으나 無用한 일이 됐다.

    思悼世子는 英祖의 둘째 아들이다. 驍將世子가 죽고 8年을 기다린 끝에 영조는 思悼世子를 얻었다. 아들을 얻으리라는 期待가 얼마나 컸던지, 영조는 出産 場面을 곁에서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 父王의 그런 期待에 副應하듯 思悼世子의 재주는 非常했다. 3歲 때 ‘孝經(孝經)’을 읽을 程度였다. 後날 英祖는 世子가 ‘생지(生知)’, 곧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理解하는 天才의 境地였다고 回顧했다. 10歲가 되자 世子는 父王의 計劃에 따라 老論 집안인 洪鳳漢의 딸과 結婚했다.


    定順王后의 登場

    어떤 歷史家는 思悼世子의 精神이 끝까지 말짱했다고 主張한다. 正祖의 ‘顯隆園地’를 잘못 믿어서일 것이다. 正祖는 아버지의 逸脫行爲를 모른 척했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힘든 宮中禮法을 實踐하느라 暫時 憂鬱症에 걸린 것처럼 描寫했다.

    要컨대 영조가 世子에게 끝까지 속마음을 열지 못한 건 不幸의 源泉이었다. 아들과의 關係에서 父王은 率直하지 못했다. 父王의 權威를 無條件 끝까지 主張하는 것이야말로 되레 허약함의 表徵이요, 僞善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父王 때문에 世子는 精神病에 걸렸다, 이렇게 말해도 過言은 아니었다. 父王은 世子를 뒤주에 가둬 죽일 일이 아니라, 關係 回復을 위해 自身의 마음부터 열었어야 했다.

    英祖의 不安症은 權力鬪爭에서 비롯됐다. 宣祖와 光海君, 仁祖와 소현世子의 問題도 마찬가지다. 思悼世子 亦是 過熱된 黨派 싸움 때문에 애를 먹었다. 16世紀 末부터 黨爭은 한層 激化됐고, 宮中의 暗鬪와 政爭은 서로 複雜하게 얽혔다. 여기에 父王 英祖의 잘못된 處身이 겹쳤고, 思悼世子의 政治力이 不足한 것도 問題라면 問題였다.

    世子를 미워한 영조는 숙의 文氏를 寵愛했다. 宮女이던 그는 1753年(英祖 29)에 地位가 所願(昭媛, 情4品)으로 올라갔고, 1771年(英祖 47) 熟議(淑儀, 種2品)로 昇格됐다. 英祖와의 사이에 花翎(和寧)翁主와 和吉(和吉)翁主라는 두 딸을 뒀다. 文 淑儀는 王子를 낳을 可能性도 높았다. 그래서였겠지만 淑儀는 老論 大臣 김상로(金尙魯)와 親庭 오빠 문성국(文聖國) 等과 함께 思悼世子를 誣告하는 일에 앞장섰다. 正祖는 卽位하기 무섭게 門 熟議를 宮中에서 쫓아냈다(1776). 그해 8月 10日엔 死藥을 내렸다.

    宮中의 事態를 더욱 複雜하게 만든 건 1759年(英祖 35) 英祖의 再婚이다. 繼妃 定順王后는 世子보다 열 살 年下였다. 王后가 大軍을 낳을 境遇 後繼者가 뒤바뀔 게 뻔했다. 定順王后가 입궁하자 大臣들 中엔 世子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定順王后의 親庭이 혜경궁 洪氏의 親庭과 葛藤을 빚는 건 當然했다. 혜경궁의 ‘閑中錄’에도 그런 事實이 나타나 있다. 뿌리 깊은 葛藤 때문에 正祖는 卽位하자마자 定順王后의 오빠 金龜柱를 處斷했다. 1800年 正祖가 죽고 順調가 어린 나이에 卽位하자 實權을 거머쥔 定順王后는 혜경궁의 아우 洪樂임을 處刑했다. 해묵은 怨恨을 갚은 것이다.

    思悼世子를 保護하려 애쓴 大臣들은 조현명, 李鍾成, 朴文秀 等 主로 少論이었다. 나중엔 조현명의 아들과 孫子가 힘을 썼다. 老論 中에도 이천보와 兪拓基 等은 世子를 감쌌다. 하지만 父子關係가 惡化되자 保護의 손길은 절로 弱해졌다.



    ‘非常手段’ 選擇

    1759年(英祖 35) 定順王后가 宮에 들어오자 父子間의 不和는 頂點에 達했다. 1760年(英祖 36) 8月부터 無慮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한 次例도 對面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1762年(英祖 38) 尹 5月, 親子殺害의 慘劇이 벌어졌다. 事態를 거기까지 몰고 간 큰 責任이 英祖에게 있다.

    王이 世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다니, 獵奇的인 事件이었다. 萬一 英祖에게 精神的 餘裕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不可能한 일이었다. 臣下들이 黨派 싸움에 埋沒되지 않았더라도 避할 수 있었다. 이 事件은 激烈한 黨爭과 英祖 및 思悼世子의 人間的 缺陷이 交織된 結果다.

    英祖, 思悼世子, 貞操에 이르는 王室 3代의 父子關係는 異例的이었다. 英祖와 思悼世子의 關係는 王室이란 特殊 事情을 勘案해도 甚했다. 아버지 英祖는 世子를 지나치게 다그쳤다. 평화로운 어린 時節이 사라지자 思悼世子는 줄곧 아버지에 對한 反感과 不安症에 시달렸다. 아들은 結局 性格 破綻者가 되고 말았다. 唐慌한 영조는 병든 아들을 治癒할 方法을 求하기는커녕, 親子殺害라는 非常手段에 呼訴했다.

    宮中의 悲劇이 겹치자 正祖는 견디기 힘든 靑少年 時節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워낙 非凡하고 多才多能한 人物이었다. 그리하여 百姓의 힘든 삶을 眞心으로 念慮하는 賢明한 王으로 成長했다. 그래도 正祖의 가슴 한쪽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남긴 깊은 그늘이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百 勝 種
    ● 1957年 全北 全州 出生
    ● 獨逸 튀빙겐대 哲學博士
    ● 서강대 史學科 敎授, 獨逸 튀빙겐대 韓國 및 中國學과 敎授, 獨逸 막스플랑크 歷史硏究所 招聘敎授, 프랑스 國立高等社會科學院 招聘敎授
    ● 現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 著書 : ‘백승종의 逆說’ ‘마흔 歷史를 알아야 할 時間’ ‘禁書, 時代를 읽다’ ‘正朝와 不良선비 강이천’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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